‘한, 흥, 멋, 태’. 한국춤의 4요소라 한다. 춤을 통해서 위의 네 가지 요소를 각각 잘 드러낸다는 건 의미가 있겠다. 그런데 명심해야 한다. ‘한흥멋태’라는 말은 오래전부터 사용한 건 아니다.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어떤 춤을 ‘한흥멋태를 두루 갖춘 춤’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정작 그 춤이 무형문화재로 전승될 때의 조사보고서에는 한흥멋태라는 용어가 전혀 등장하지 않았다.
한흥멋태의 진실
한흥멋태는 과연 언제부터 우리 춤의 특징을 설명하는 용어로 사용되었을까? 지난 20세기에 한과 흥, 맛과 멋 등의 용어를 사용한 건 분명하다. 이 또한 20세기 전반기는 아니다. 일제강점기의 우리 민족이 겪었던 수난을 ‘한’이란 말로 집약적으로 설명한다. 하지만 정작 그 당시엔 ‘한’과 ‘춤’을 확실히 연결한 단서 또는 확실한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일제강점기의 조선무용과 연관해서 떠오르는 사람은 누구인가? 한성준, 최승희, 조택원, 배구자 등 그들은 당시 자신의 춤을 한과 연결하지 않았다. 한은 일반적인 용어로 슬픔 또는 비애라는 용어로 대치될 수 있다. 최승희에겐 <인도인의 비애>, 조택원에겐 <비애>라는 춤이 있긴 하다. 그러나 이 춤은 조선적인 혹은 식민지적인 슬픔과는 무관하다.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한과는 꽤 거리가 있다.
그렇다면 당시 그들의 춤은 어떤 용어로 평했을까? 최승희와 조택원의 춤을 보고 난 후, 유럽의 신문에 실린 기사가 전해진다.
최승희와 조택원의 춤을 바라본 외국의 일간지 기자도 한흥멋태로 설명하지 않았다. 멋이란 말은 매우 고유한 우리말이기에 그럴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이 본 조선춤에 관한 기사에서 한(恨)과 같은 개념은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물론 애조(哀調)로 연결하긴 한다. 서구인의 동양을 바라보는 오리엔탈리즘적인 시각에서 그렇다. 최승희는 동양적인 신비와 연결되는 서정이 있는 춤으로 적혀있다. 조택원은 동양적인 사유가 느껴지는 품위가 있는 춤으로 평가했다. 거기엔 한(恨)으로 번역될 만한 단어는 보이지 않는다.
대한민국에선 언제부터 한국무용과 연관해서 한이란 표현을 자주 쓰게 된 것일까? 놀랍게도 1960대 이후이다. ‘한국의 근대화’와 연결되는 시점이다. 당시 한국춤의 주요 레퍼토리로 살풀이춤이 더욱 부상되면서 한(恨)의 정서는 부각이 되었다. 이런 시기를 거치면서 한(恨)과 흥(興)은 대조적인 개념으로 정착을 했다. 이 두 단어를 반대적 의미 또는 상보(相補)적 의미로 사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조선악(朝鮮樂)과 흥취(興趣)
한국춤(조선무용)과 연관해서, 일제강점기에 많이 사용된 용어는 흥취(興趣)이다. 예술적인 삶과 연관해서 흥취란 단어가 쓰였고, 조선의 가무(歌舞)에 관련해서도 흥취로 설명했다. 당시 전통음악과 전통무용을 설명하는 적절한 단어가 흥취였고, 그런 흐름은 이후에도 계속 이어졌다. 국립국악원 원장을 지낸 성경린(1911~2008)은 특히 흥취라는 단어를 통해서 한국춤과 한국음악을 종종 설명했다.
‘한흥멋태’라는 사자성어에서 한을 제일 먼저 내세운 것과는 다르게, 시간을 거슬러 올라갈수록 한국전통예술을 한으로 연결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흥취(興趣)와 흥(興)은 한자가 같듯, 상통하는 개념이다. 그러나 일제강점기를 살았던 사람들에게 한(恨)과 흥(興)은 대조적인 개념은 아니었다. 흥이 흥취와 연결된다면, 한(恨)은 원한(怨恨)과 연결된다. 이어령(1934~2022)은 원(怨)과 한(恨)의 분명히 다름을 강조한다. ‘춘향이가 변학도에게 갖는 감정은 원(怨)이고, 춘향이가 이몽룡에게 갖는 감정은 한(恨)’이라고 구분했다.
조선춤에서 한(恨)이란 개념은 찾기 어려우나, 대신 동음이의(同音異義)인 한(閑)과 연결되기도 했다. 조선악(朝鮮樂)의 주된 정서를 ‘장한(長閑)하다’고 했다. 길게 이어지면서 한가로운 정서로 이어진다는 뜻이다.
멋과 맛
‘멋’이란 단어와 개념은 일제강점기에도 존재했다. 조선의 적잖은 지식인이 저마다 방식으로 ‘멋’을 논했다. 가장 주목할 인물은 고유섭 (1905~1944)이다. 고유섭은 멋을 얘기했지만, 상대적으로 맛을 등장시켰다. 그러니까 일제강점기의 시각으로 ‘한흥(恨興)’은 딱히 대조적 개념은 아니지만, ‘맛멋’은 일찍부터 대조적인 개념이었다.
전통을 기반으로 한 예술을 평자(評者)인 나로선, 흥과 한보다는 맛과 멋이 한국춤의 미학적 용어로 훨씬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한다. 흥(興)과 한(恨)이 한자(漢字)적 개념이기도 하지만, 시대에 따라서 사람에 따라서 이 양자를 받아들이거나 표출하는 방식이 매우 다르다.
반면 맛과 멋은 모두 우리의 고유임은 물론이려니와, 시대와 사람을 초월해서 보편적으로 매우 분명하게 형성된 개념을 바탕으로 하기에 그렇다. 이런 ‘맛’과 ‘멋’을 기반으로 해서, 거기에 무수히 많은 형용사와 수식언이 존재한다는 것도 장점이다. 그럼 고유섭이란 개인에게 있어서, 그가 선호하는 멋과 맛은 어떠한 모습이었을까? 그에게 있어서의 멋은 질박함과 연결되고, 맛은 구수함과 연결된다.
‘맛’과 ‘멋’을 확연하게 구분한 사람으로 수필가 피천득(1910~2007)을 들 수 있다. 그는 ‘맛은 감각적이요, 멋은 정서적’이며, ‘맛은 정확성에 있고 멋은 파격에 있다’라고 했다. 그가 여기서 덧붙인 말은 특히 무용가들이 주목할 만하다.
피천득은 ‘맛있는 것의 반대는 맛없는 것이고, 멋있는 것의 반대는 멋없는 것’이라고 하면서 멋과 맛이 상반되는 것이 아님을 강조했다. 맛과 멋이 이렇게 반대되는 것이 아니듯이, 한과 흥도 상반되는 것이 아니지 않을까? 나와 같은 글쟁이들이 범하는 어리석음의 하나인데, 한과 흥을 마치 동전의 양면처럼 보는 시각은 지양해야 한다.
한의 반대가 흥? 흥의 반대가 한?
‘한흥멋태’를 사용하는 무용인들에게 꼭 말하고 싶다. 흥겨운 것의 반대는 흥겹지 않은 것이다. 흥겨운 것의 반대가 한스러운 것이 아니고, 한스러운 것의 반대가 흥겨운 것이 아니다. 한 무용가가 살풀이춤을 추면서, 앞의 굿거리장단에선 슬픔을 표현하고, 바로 잇는 자진모리장단에선 갑자기 기쁨을 표현하는 춤을 본다. 정도(程度)의 변화를 차츰 느끼게 해야 할 부분에서, 정서(情緖)의 변화로 갑자기 전환하는 게 때론 당황스럽고, 아무래도 예술적으로 고급진(?) 것으로 보기 어렵다.
맛과 멋의 차이를, 전통예술을 기반으로 한 평론을 하는 나는 이렇게 구분한다. ‘ㅏ’라는 양성모음과 ‘ㅓ’라는 음성모음의 차이로 설명한다. 가야금과 거문고란 두 악기의 비교는 악기의 명칭에서 음색에 이르기까지 매우 좋은 대조를 보인다. 악기 이름부터 가야금은 양성적, 거문고는 음성적이다. 악기의 음색도 딱 그렇다. 가야금은 맛있는 악기요, 거문고는 멋있는 악기다.
‘한흥멋’이란 관념. 태라는 실체
‘한흥멋태’ 가운데서, 이 글에 등장하지 않은 태(態)는 어떠한가? 한국무용 전공자라면 화전태(花前態)와 화류태(花柳態)를 안다. 궁중무용적 시각에서 보면 화전태를 친다. 하지만 화전태와 화류태는, 각각 멋을 지향하고, 맛을 지향하는 춤으로 얘기할 수 있겠는데, 여기서는 이것에 관해서 길게 얘기하진 않겠다.
‘한흥멋태’의 사자성어의 조어(造語)가 얼마만큼 논리인가에 대한 의문을 짚고 가야 한다. 네 글자를 연결한 사람은 누구일까? 무용에 관한 것이기에 한흥멋을 지향하기 위해서는 태(態)가 중요하다는 건 충분히 이해가 된다. 그 어떤 예술보다 몸을 중시하는 춤에선 너무도 당연하다.
한흥멋이 ‘관념’이라면, 태(態)는 ‘실체’이다. 한흥멋이 ‘보이는 것에 대한 관념적 접근’이라면, 태는 ‘보이는 것에 대한 실체적 접근’이다. 무용가들의 이상향 속에 ‘한흥멋태’가 공존할 수도 있고, 공존하기도 바라겠지만, 실제 한흥멋태는 마치 ‘동서남북’처럼 동일한 기준과 가치를 두고 의미부여를 할 순 없다.
김소희의 춤맛, 임춘앵의 춤멋
한국춤을 ‘맛과 멋’으로 구분한 개념은 오래전부터 존재해왔다고 했다. 김보남(1912~1964)은 일제강점기 이왕직아악부 출신으로 국립국악원 아악가였다. 생전 그는 김소희의 춤은 맛이 있고, 임춘앵의 춤은 멋이 있다고 했다. 이들은 무용전공은 아니다. 김소희는 판소리, 임춘앵은 여성국극에서 각각 큰 역할을 했다. 임춘앵은 특히 여성국극에서 남성역할로 유명했다. 두 사람은 무용가는 아니나 춤에 상당한 경지에 올랐다.
김소희는 전북 고창출신으로, 덧뵈기춤으로 유명했다. 임춘앵은 전남 함평출신으로, 여성국극의 안무를 맡았다. 김소희의 소리는 미려(美麗)하고, 임춘앵의 소리는 장쾌(壯快)하다. 20세기의 일반적인 성별부분에 따른다면, 김소희는 여성적이고 양성(陽性), 임춘앵은 남성적이고 음성(陰性)적이다. 가야금과 함께 듣는 김소희가 좋고, 거문고와 함께 듣는 임춘앵이 좋다.
입춤의 맛, 장한가의 멋
대전시립무용단의 <천년지무>(9. 17, 대전시립연정국악원 큰마당)의 공연적 가치는 무엇일까? ‘맛’과 ‘멋’의 춤미학적 개념으로 비교할 수 있는 흥미로운 프로그램이 존재했다. 대전시립무용단의 <입춤>은 ‘맛’있는 춤이었고, <장한가>는 ‘멋’있는 춤이었다.
강선영(1925~2016)의 안무에서 출발한 명가(明嘉) <입춤>은, 강선영 명무의 호처럼 밝고 아름다운 ‘낮’의 춤이다. 2017년 명작무로 지정된 <장한가>는 국수호명무의 작품으로, 미래의 문화유산으로 지정할 보전가치가 충분한 춤이다. 이 춤은 달 아래서 추는 ‘밤’의 춤이다. 대전시립무용단의 여성단원만이 출연한 입춤과, 남성단원만이 출연한 장한가는 비교하기 딱 좋은 춤이었다. 두 춤의 본질적 가치는 결코 우열을 가릴 수 없고, 단지 보는 시각에 따라 선호도가 다를 뿐이다.
80년대 춤에 대한 회고
대전시립무용단의 훈련장을 지낸 이강용과 최은정의 2인무 <사랑가>는 한과 흥이 교체하는 춤이었다. 1960년부터 1980년대까지의 한국춤의 정서적 특징이 이 작품 안에 고스란히 존재했다. 대전시립무용단의 초대 예술감독 김란의 작품이다. 사랑 – 이별 – 재회의 공식 속에서 흥과 한이 분명하게 교체하는 1980년대식 무용문법을 그대로 따르고 있었다. 이런 작품은 분명 한 시대의 무용적 특징을 보여주는 작품으로서의 가치를 충분히 지니고 있었다.
김평호의 흥, 채향순의 신명
김평호의 <남도소고춤>은 전형적인 ‘흥’춤이다. 김평호는 대한민국의 국공립무용단의 예술감독 중에서 마당과 연희를 아는 몇 안 되는 인물이다. 21세기 한국무용의 레퍼토리를 넓히기 위해선, 마당과 연희는 강조하고 수용할수록 좋다는 입장이다. 이런 측면에서 ‘무대만을 아는 예술감독’보다는 ‘마당을 아는 예술감독’에게 더 시선이 간다. 그들은 흥을 알기에 그렇다.
무대의 큰 감동은 채향순 명무의 ‘장고춤’과 이어지는 대전시립무용단의 <장고춤>(김평호 안무)의 만남이었다. 이 순간의 감동을 어떻게 잘 말할 수 있을까? 이 순간 나는 고유섭의 글을 떠올렸다. 1940년 7월 26일, 조선일보 석간에 실린 고유섭의 ‘전통’에 관한 언급이다.
“전통이란 결코 손에서 손으로 손쉽게 넘어 다니는 것이 아니다.
피로써 피를 쏟는 악전고투(惡戰苦鬪)를 치러서 ‘피로서’ 얻게 되는 것이다.”
‘손으로 손쉽게’ 얻는 것이 아니라, ‘피로써 비로소’ 얻게 되는 것이 전통의 ‘멋’이라는 얘기다. 고유섭은 이런 과정을 거치지 않을 때의 멋은 ‘허랑한 멋’이라고 말해준다.
한흥멋태, 21세기에 새롭게 등장한 도그마?
한국춤은 매우 다양하다. 앞으로 더 다양해야 한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우리의 춤을 ‘한흥멋태’로만 설명한다는 건, 한국춤을 어떤 도그마(dogma)에 빠트릴 수 있다. 춤이라는 것이, 또한 예술이란 것이, 매우 다양하고 또한 설명할 수 없는 정서를 내포하는 것인데, 어찌 이렇게 ‘한흥멋태’로 모든 것을 다 설명하려 들까? 때론 무용계의 외부자의 시선으로 보면, 답답하고 안타까운 심정이 들기도 한다.
한흥멋태를 두루 갖춘다는 건 가능할까? 그렇게 지향할 수는 있어도, 실제 춤에서 이 넷을 다 포용하긴 어렵다고 본다. 이것이 서로 연관 관계에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분명 춤을 통해서 어떤 하나가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지극히 정상이다.
나는 더 이상 한국의 무용가들이 ‘한흥멋태’라는 개념 하에서 ‘한’을 강조하지 말길 강조한다. 한이란 외부의 어떤 힘이나 방해로 이루지 못한 욕망을 말한다. 한은 강자에 대항하지 못하는 약자의 논리다. 동서고금 시대마다 어떤 형태로든 약자가 존재한다. 이들은 메이저에 대항하는 마이너리티로서 예술적으로 성과를 내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함에도 예술적 의미에서의 ‘한의 논리’ 또는 ‘한의 정서’를 상대적으로 특별히 강조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극단적으로 말한다면, ‘한의 예술’에 다다르기 위해선, 어떤 방식으로든 ‘약자의 욕망’이 생성되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한과 흥을 대체적인 이분법으로 보는 시각은 21세기에는 어울리지 않는다. 그런 것을 강조할수록, 한국춤은 이성의 영역보다는 감성의 영역에 더욱더 많이 머물고, 때론 감정과잉의 블랙홀에도 빠질 수 있다.
춤의 미학적 용어로서 ‘맛’과 ‘멋’을 보다 깊게 실체의 춤에서 느끼게 해주어야 한다. 이런 맛과 멋도 ‘질박한 멋’과 ‘구수한 맛’이길 바란다. 내가 마당춤과 연희판을 아는 안무가를 찾고자함도 여기에 있다. 마당판의 맛과 멋이 어우러질 때, 흥과 신명의 춤판이 가능하기에 그렇다. ‘질박’과 ‘구수’, 한국춤에서 수용해야 할 전통적인 아름다움이다.
글_ 윤중강(공연평론가)
사진제공_ 대전시립무용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