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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무필이 대작필간 (大舞必易 大作必簡): 국수호의 춤극 <아라가야 안티고네>

대악필이 대례필간 (大樂必易 大禮必簡). ‘예기’에 나온다. 훌륭한 음악은 간결한 것이며, 훌륭한 예절은 간소한 것이다! 동양의 예악(禮樂)에서 아주 중요한 경구다. 예악이란 동전의 양면처럼 상호보완적이다. 예(禮)는 의례, 형식, 질서를 말한다면, 악(樂)은 예술, 내용, 조화로도 바꿀 수 있다. 대악필이는 흔히 훌륭한 음악으로 풀이되지만, 실제 여기서 악(樂)은 시가악무(詩歌樂舞)를 두루 포함한다. 

 

국수호의 춤극 <아라가야 안티고네>를 보면서, 대악필이(大樂必易)가 생각난다. 멀고 오래된 그리스비극을 가야라는 이 땅으로 옮겨서 풀어낸다. 전통에 기반한 춤극에서도 이렇게 미니멀리즘(minimalism)적인 정제가 될 수 있음을 느끼게 해준 작품이다. 

 

대본과 안무의 국수호는 복잡다단(複雜多端)한 얘기를 단순함과 간결함으로 풀어내지만, 오히려 그 안에서 느껴지는 고전의 깊이가 전달된다. 서양의 고전을 동양으로 옮겨와서 근거 있는 상상력 속에 펼쳐 보인 점이 특히 매력적이다. 

 

안티고네는 소포클레스 원작이지만, 서구에서도 여러 방식으로 재창작되었다. 브레히트의 안티고네, 장 콕도의 안티고네, 장 아누이의 안티고네가 있다. 안티고네는 오페라의 형태로도 만들어졌다. 칼 오르프Carl Orff, 1895~1982)의 안티고네(1949)와 같은 작품이다. ‘그리스인 조르바’로 유명한 미키스 테오도라키스(Mikis Theodorakis(1925~2021)는 발레작품인 안티고네(1956, 안무 존 크랭코)를 시작으로 오페라 안티고네를 완성해갔다. 

 

지난 20세기, 이 땅에서의 안티고네는 어떠했는가? 일제강점기의 식민지 지식인도 안티고네를 ‘숭고(崇高)한 비창성(悲愴性)’의 문학으로 높이 평가했다. 20세기 후반 대한민국에서도 ‘안티고네’가 연극무대에 오른 건 셀 수 없이 많다. 그 중 1997년에 서울시립극단에서 공연한 김아라 연출의 안티고네는, 여성이 주인공인 작품을 여성연출가가 연출했다는 점에서 더 주목했었다. 

 

  

 

정치적 야만과 여성적 차별에 대한 노장(老將)의 참회록

 

대한민국에서 한국 전통춤을 기반으로 해서 춤극 형태로 안티고네를 다룬 작품은 내가 알기론 이 작품이 처음이다. 안티고네를 아주 단순하게 말하면 ‘남성의 명령을 거부한 여성의 비극’이다. 대한민국의 춤극에서도 여성서사를 찾을 수 있는데, 이 작품을 통해 <아라가야 안티고네>는 그걸 확실하게 드러낸 춤극이다. 

 

지난 20세기 공연문화의 중심이었던 국수호라는 노장(老將)의 남성이, 21세기에 풀어낸 여성서사라는 점이 내겐 끌렸다. 한국의 고대사의 맥락 속에서 풀어낸 아라가야(안티가야)는 그 옛날 이 땅의 어딘가에서 일어났을 법한 일로 받아들여졌다. 이 땅에서 절대권력에 의해서, 많은 여성들이 고통을 감내해야 했을 것이다. 

 

지난 20세기 한국이라는 가부장적 사회에서 기득권의 위치에 있었던 남성(국수호)이, 당시 우리 사회에서 도처에 팽배해 있던 20세기적인 ‘정치적 야만’과 ‘여성적 차별’에 대한 ‘노장(老將)의 참회록’과 같이 받아들여졌다. 이것은 안무가 국수호가 의도한 바인 줄은 모르나, 나에게는 매우 중요한 키워드로 해독되었다. 

 

국수호의 춤극 <아라가야 안티고네>는 절대권력을 가진 남성 통치자에 의해서, 한 여성의 매우 양심적인 행동이 인간적인 가치로서 인정을 받지 못할지언정, 오히려 고통을 겪게 되었다는 ‘수난의 여성사’적인 입장을 잘 그려낸다. 그것이 아라공주(안티고네)뿐만 아니라, 가온왕비(에우리디케)에도 비중을 두면서 전개했다는 점을 나는 특히 주목하려 한다. 에우리디케와 하이몬이 함께 추는 듀오에서 그 ‘절망적 비극’을 모성(母性)과 연결해서 그려낸 장면을 우리는 잘 기억해야 한다. 

 

안티고네는 고대의 비극이지만, 거기엔 묘하게 ‘민족’이 합쳐지기도 하다. 국수호의 ‘아라가야 안티고네’처럼 말이다. 세계의 여러 공연 중에서, ‘안티고네’를 민속적으로 풀어낸 건 어는 작품일까? 1959년 프랑스 파리 센강변에서 열린 ‘제 3회 국제연극제’에서 ‘안티고네’가 크레올 언어로 공연되었다. 크레올 (Créole)은 서인도 제도나 중남미에 이주한 에스파냐인이나 프랑스인과 흑인들의 혼혈된 자손을 말한다. 크레올은 여기에 자신의 언어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춤을 삽입해서 전재했다

 

영화 <안티고네>(2020년)는 소피 드라스프(Sophie Deraspe)라는 여성감독 작품이다. 안티고네라는 여성서사를 이민자(난민)의 입장에서 만든 수작이다. “저는 언제든 다시 법을 어길 겁니다. 오빠를 도우라고 제 심장이 시켜요.”라는 대사가 강하게 남는다. 

 

국수호의 춤극 <아라가야 안티고네>는 작품을 보는 사람의 시각 또는 수준에 따라서 천차만별로 받아들일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앞서 소개한 것과 같이 지금까지 동서고금의 다양한 안티고네적 스토리와 대한민국에서 안티고네와 관련된 작품을 유심히 본 사람이었다면, 이 작품을 보면서 다양한 해석과 흥미로운 변주를 놓칠 순 없다. 만약 다양한 안티고네를 경험한 사람이라면, 춤극으로 옮겨진 안티고네가 무척 흥미로울 것이다. ‘정제된 무대’와 ‘절제된 표현’ 속에서, 인문학적인 지식을 기반으로 한 아라가야(안티고네)의 이야기가 마치 ‘새로운 과거’ 또는 ‘오래된 미래’처럼 넘나든다. 

 

  

 

문헌과 도상에 근거한 춤과 오브제 

 

지난 20세기 국수호가 우리에게 큰 선물 중의 하나는 고대춤의 복원이었다. 1998년 신라춤 <천마총의 비밀>을 시작으로, 이듬해인 1999년엔 백제춤 <그 새벽의 땅>을 발표했다. 이건 단순히 춤의 재현이 아니었다. 문헌자료와 도상자료에 근거를 두고, 인문학적인 깊이에서 나온 결과물이 바로 춤이었다. 고대춤에 대한 연구와 재현은 고구려춤과 가야춤으로 이어졌다. 

 

국수호의 춤극 <아라가야 안티고네>의 큰 가치는, 이러한 글자와 그림으로 존재하는 고대춤과 관련한 자료를 모두 바탕으로 해서 만들었다는 데 큰 의미가 있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은 그러하기에 국수호의 춤에 딱 적용된다. 머리부터 발끝까지의 무용수의 복식과 장신구 등에서 허투루 대충한 흔적이 전혀 없다. 모두 역사와 전통, 가치와 미학을 느낄 수 있었다. 

 

‘휘어이’, 그 의성어의 허망함에 대하여 

 

앞에서 쓴 내 글을 통해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국수호의 춤극 <아라가야 안티고네>를 이 작품 자체로만 본 입장은 아니었다. 특히 지난 20세기 한국의 공연문화와 연관해서 더욱더 의미와 가치를 찾을 수 있었는데, 나의 이런 감상법의 시작은 춤 시작을 알리는 소리 “훠어이”의 3번 반복이었다. 

 

이 소리를 듣는 순간 최인훈의 희곡 “옛날 옛적에 훠어이 훠이”가 겹쳐졌다. 대본을 쓴 국수호가 의식했는지 의식하지 못했는지는 모르나, 이 ‘훠어이’라는 세 음절은 나로 하여금 20세기의 무대와 21세기의 무대를 연결하게 해주었다. 21세기 한국공연무대의 휘황(輝煌)도 주목하지만, 나는 지난 20세기 한국공연무대의 고졸(古樸)함이 때론 몹시 그립다. 그런데 그런 정서를 이 작품을 통해서 경험하게 된 것이다. 

 

국수호의 작품을 그릇에 비유해서 논해볼까? 지난 20세기 국수호의 작품은 화려한 고려청자였다면, 이번 작품은 질그릇의 고박함이 존재한다. 고려청자와 조선백자가 가지지 못한 질그릇의 미학이 있는데, 바로 이 작품이 그러했다. 내가 이 작품을 ‘대악필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이유가 바로 이것과 연관된다. 또한 그것은 묘한 아이러니이기도 하다. 

 

지금 우리 시대의 공연예술계의 가장 큰 한계를 내 시각으로 좀 거칠게 말한다면, ‘절제의 실종’ ‘정제의 혼돈’이라 하겠다. 이런 것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 복잡한 것을 간단하게 해야 한다. 이게 바로 이간어번(以簡御繁)으로, 간편한 방법을 통해서, 복잡한 것을 다스릴 수 있다는 얘기다. 국수호가 이 작품을 이끌어 가는 방식은 누구에겐 조금 지루할진 몰라도, 나는 바로 이 작품에서 매우 심플하게 밀고 가는 힘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 밑에서 간과할 수 없는 것이, ‘고졸함의 미학’이자 ‘고졸함의 정신’이다. 

 

해설(이광복)이 등장을 하면서 외치는 ‘훠어이 훠어이 훠어이‘는 단순함과 고졸함의 상징적 표현이며, 의미 전달을 확실히 해야하는 말로서는 도저히 표현해 낼 수 없는 의성어로서의 가치이다. 이런 면에서 볼 때, 나는 20세기의 최인훈과 21세기의 국수호를 동일선상에 놓치 않을 수 없다. 신화와 설화를 가져와서 비극적 서사를 전개한다는 점에서 두 사람과 두 작품은 똑같다.

 

 

구상(構想)과 구현(具現) 사이 

 

이 작품을 보면서, 내 머리엔 이 두 단어가 겹쳐졌다. 이 작품은 구상(構想)적인 면에서는 정말 매우 위대하고 훌륭한 가치가 고스란히 전달되었다. 문제는 구현(具現)이었다. 구상이 설계도라면, 구현은 실제 건축물을 말하는 것일텐데, 구현의 아쉬움이 컸다. 여기서의 구현은 곧 출연자일 수밖에 없다. 

 

내 입장에서 안타까운 것은 ’춤극‘의 형태인 작품에서, 출연자들이 지난 20세기의 춤극을 잘 모른다는 점이다. 국수호는 지난 20세기의 매우 ‘수려하고 변화무쌍(變化無雙)’한 춤극을 뒤로 하고, 이제 21세기는 매우 진솔하고 정연(整然)함에 가치를 두고 있음을 잘 인지하고 있지 못하는 아쉬움이 느껴졌다. 

 

그러하기에, 20세기 국수호 춤극의 화려한 스타일도, 21세기 국수호 춤극이 주는 진정성이 있는 메시지도, 객석에 확실하게 전달하지 못한 아쉬움이 남는다. 앞으로 이 작품이 계속 공연이 된다면, 지난 20세기의 국수호 춤극의 성과와 이제 21세기의 국수호가 춤작가로서 지향하려는 가치에 대해서, 모든 참여자들이 좀 더 깊게 탐구하면서 참여했으면 한다. 

 

이게 마치 20세기의 춤극 <도미부인>처럼 춤추는 것으로 오해를 살까봐 두렵다. 그것을 면밀히 분석해 보면, 21세기에 ‘취할 것’이 무엇인가를 정확히 알았게 될 것이다. 나는 이 작품의 주인공을 보면서, 지난 20세기의 <명성황후>에서처럼 ‘최현 – 김현자 – 국수호’를 겹쳐서 생각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들이 이 작품에 출연을 했다면, 관객들은 이 작품이 지향하는 가치는 물론, 춤극으로서의 역동성과 매력을 훨씬 더 많이 느꼈을 것이다.

 

 

춤 속에 녹여내야 할 서사, 춤 속에 살아있어야 할 연기 

 

이 작품을 보면서, 무용수들이 확실히 연극적인 기반이 약하다는 걸 확인했다. 춤 속에 연기를 녹아여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점이 아쉬었다. 

 

아라공주(안티고내)의 김진아는 한 작품의 주인공으로서 장점을 갖춘 무용수였다. 불필요하게 첨가하는 동작이 없이, 아라공주의 마음을 진실된 마음, 곧 ‘양심이 시키는 대로’ 하는 것이 춤을 통해서 전달되었다. 실제 예술가적 순수성이 느껴지는 춤꾼이었다. 몇 차례 본 공연에서도 모두 페이스를 잃지 않고 좋은 기량을 보여준 것이 큰 장점이다. 한국무용의 남녀듀오에서 여자무용수가 춤을 잘 추는 경우는 허다하다. 그러나 남자 무용수와 교감이 된다는 느낌을 받지 못한 경우가 많다. 그러나, 결정적인 한계도 보인다. 그녀만의 매력을 아직은 찾아내기 힘들다. 아직 내가 찾아내지 못한 것일까?

 

해모왕자(하이몬)의 이동하는 다소 가라앉기 쉬운 작품에서, 작품의 역동성을 부여하는 데 일등공신이다. 그는 몸을 사리지 않고 무대에 에너지를 다 쏟아낼 줄 안다. 또한 한국무용을 전공한 무용수와는 다르게, 무대에서 매우 시크할 줄 아는 게 장점이었다. 그러나 아쉬움도 크다. 한국무용에 대한 기본, 더 나아가 국수호춤의 기본적 메소드에 대한 역량이 많이 부족해 보인다. 그러나 그에게 또한 희망을 걸 수 밖에 없다. 현재 한국무용계에서 춤극을 할 때, 남자주인공의 인상, 신체, 동작, 연기술 등이 꽤 한정적인 현실에서, 이동하는 한국춤과 현대춤을 넘나들면서 극성이 강한 작품에서 주역으로 맹활약할 가능성이 보인다. 

 

가온왕(크레온왕)의 유재성에게 가장 아쉬움 점은 극성(劇性)이다 잘 추는 춤에 비해서, 춤연기가 매우 부족하다. 그에게선 ‘풍기는 멋’은 존재하나, ‘터지는 맛’이 느껴지지 않는다. 무대 위에서 계속 에너지를 모았다가, 또한 그런 모습을 관객에게 계속 느끼게 해주다가, 어느 순간에 그걸 확 터뜨리는 방법을 터득해야 한다. 주어진 대로 장면에만 충실해서 연기하고 춤을 추었다. 그러다 보니 가온왕의 캐릭터가 작품이 지날수록 쌓이면서 겹쳐지는 에너지를 발견하기 힘들었다. 

 

가온왕비(에우리디케)의 홍정윤도 비슷한 범주였다. 무대에서 페이스를 조절하거나, 감정을 달리하면서 관객과 함께 감정의 깊이를 더해가는데, 이미 무대에 등장할 때부터 어떤 감정이 준비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함에도, 이번 작품에서 아들과 함께 추는 이인무에서 ‘모성’ 또는 ‘모성애’를 잘 표현하고자 하는 노력은 전달되었다고 생각된다. 

 

이 작품이 드라마성의 작품이 아니었다면, 유재성과 홍정윤은 누구에게나 칭찬을 받을 만한 춤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 극적 기반을 만들어가는 춤적인 연기술을 배워야 할 것 같다. 또한 ‘대하드라마’ 같은 작품의 캐릭터를 소화하기 위해서는 각고의 노력을 필요로 한다. 내가 지금 지나치게 20세기적 시각이라고 힐난(詰難)할 수 있겠으나, 이 역할을 최현과 김현자, 혹은 안무가인 국수호가 연기했을 때, 객석에서의 반응은 매우 달랐을 것이다. 

 

이 작품의 주역 무용수로서의 원픽은 이윤경이다. 일단 춤의 안정감이 좋았다. 나이가 들면서 단지 ‘정제된 발산’이 깊이를 더해가는 느낌이다. 여러 회 출연하면서 동작 하나에 흐트러짐 없이 배역(예언자)에 충실한 이윤경에게 큰 박수를 보낸다.  

 

이번 작품에서 가장 칭찬해주고 싶은 무용수는 ‘군무’이다. 대한민국의 뮤지컬시상식에서 ‘앙상블’팀에게 시상을 한다. 만약 무용계에서 비슷한 상이 있다면, 누구나 이번 작품의 군무팀에게 그 상이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할 것 같다. 이민주, 이민선, 황근영, 백아림, 송영림, 다섯 명의 무용수는 작품의 중간에 캐릭터가 자주 바뀌면서. 흐트러짐이 없었다.

 


대무필이 대작필간 (大舞必易 大作必簡) 

 

지난 20세기 한국의 춤극의 특성과 매력을 잘 모르는 사람들이, 21세기의 새로운 형식의 춤극에 도전한다는 것은, 애초부터 큰 성과를 얻기에는 한계가 분명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대악필이의 정신과 이간어번의 방식으로 풀어낸 국수호의 춤극 <아라가야 안티고네>는 21세기 한국의 춤극이 새롭게 나갈 방향으로서 충분히 공감하게 되는 수작이다. 

 

작품을 통해서 국수호는 대무필이(大舞必易), 큰 춤은 매우 간결하다는 메시지를 우리에게 던져주었는지 모른다. 한국의 무용계가 이 작품을 계기로 ‘소박하지만 강렬한’, ‘애틋하면서도 담담한’, ‘예사로운 듯하면서도 당당한’ 춤과 춤극을 많이 만들어냈으면 좋겠다. 국수호의 춤극 <아라가야 안티고네>는 내 시각에서 보면, 바로 이런 것들을 지향했다고 생각한다. 이 작품을 지금의 배역들이 성장해서 다시 공연하게 될 날을 기대한다. 아울러 전혀 다른 새로운 배역과 함께, 이 작품이 담고 있는 해석과 가치의 다양성을 많은 춤애호가가 공감하게 되길 바란다. 

 


 

 

 

 

 

_ 윤중강(공연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