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무용단의 창단 60주년 기념작 <2022 무용극 호동>이 10월 27일부터 29일까지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 올려졌다. 호동 왕자와 낙랑 공주의 설화를 바탕으로 한 국립무용단의 세 번째 작품으로, 국립무용단 초대 단장 송범은 1974년 작 <왕자 호동>과 90년 작 <그 하늘 그 북소리>로 이 이야기를 두 차례 무대로 옮긴 바 있다. 세 번째 작품이 된 <무용극 호동>은 단원들인 정소연, 송지영, 송설이 공동으로 안무를 맡아 국립무용단의 무용극 전통을 확립한 송범의 유산을 단원들이 재창작을 통해 계승하는 무대가 됐다.
지난 3월에는 같은 공연장에서 국립오페라단이 1962년 창단 기념작 <왕자 호동>을 60년 만에 다시 무대에 올렸다. 올해로 나란히 창단 60주년을 맞이한 두 단체가 그 뜻 깊은 기념무대를 만들기 위해 같은 이야기를 선택한 것이다. 호동 왕자와 낙랑 공주의 비극적인 러브스토리는 오페라와 무용은 물론 연극으로, 또 영화와 드라마로도 수없이 리메이크되어 왔다. 대관절 후대의 예술가들은 이 이야기의 어디에 그토록 매료되어 이처럼 창작의 열정을 불태우고야 마는가?
‘이지나 스타일’과 만난 국립무용단 무용극
국립무용단의 새로운 <무용극 호동>을 만들기 위해 뮤지컬 연출가 이지나가 대본과 연출을 맡았고, 그와 2005년 연극 <클로저>로 처음 만난 뒤 20편 이상의 공연에 함께한 작곡가 이셋(김성수)이 음악을 책임졌다.
뮤지컬과 연극 무대를 오가며 숱한 흥행작을 만들어 온 이지나의 작품 목록에는 서울예술단과 함께한 <바람의 나라>, <잃어버린 얼굴 1895>, <나빌레라>나 <인 더 하이츠>, <도리안 그레이의 초상> 등과 같이 극을 이끌어가는 데 있어 무용이 중요한 요소가 되는 작품들이 많다. 2015년에는 현대무용수 최수진과 이용우, 발레리노 이동탁 등이 출연하는 무용극 <클럽 살로메> 연출을 맡기도 했다.
무용극이라는 전통을 단체의 정체성으로 지켜 온 역사가 긴 국립무용단이 이지나의 연출을 통해 어떤 새로운 무용극을 보여줄지에 관심이 모아진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무용극을 표방하고 있지만 이 작품은 그동안 국립무용단 무대에서 보아 온 무용극들과는 다르며, 국립무용단 무용극 외에도 숱하게 리메이크된 호동과 낙랑의 러브스토리와도 다르다. 이지나는 프로그램북에 실린 연출의 글에서 “두 인물의 사랑보다는 ‘나’로 존재하고자 하는 개인의 고뇌에 초점을 맞춰 인간의 갈등과 보편성에 초점을 두고 현대적으로 재해석”했다고 작품을 설명하고 있다.
개인은 국가를 어떻게 감각하는가
작품의 중심축은 대무신왕으로 상징되는 국가와 호동이 상징하고 있는 개인 간의 대립이다. 태자로 책봉되기 전 왕자 시절부터 부여와의 전쟁을 수행했던 대무신왕은 ‘大武神’이라는 시호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재위기간 내내 주변국들과 전쟁을 치른 정복군주였다. 22년 동부여의 대소왕을 죽이고 그 땅을 병합하였으며, 26년 개마국을 정복하고 구다국의 항복을 받아냈다. 32년에는 낙랑국을 공격하여 정복하였는데, 이 정복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승리 동인이 된 호동 왕자와 낙랑 공주의 혼인 또한 대무신왕이 세운 전략의 일부였다고 보는 사가(史家)들도 있다.
러브스토리를 표방한 대부분의 극이 두 주인공의 만남으로 시작해 인물의 감정선을 따라가며 비극적인 결말로 치달아가는, 채 일 년이 되지 않는 32년의 낙랑 정복전쟁을 시간적 배경으로 삼고 있는 것과 달리 국가와 개인이 대립하는 이 새로운 극은 대무신왕이 대소왕으로부터 몸뚱이가 둘인 붉은 까마귀를 받고 전쟁을 결심하는 20년부터 낙랑을 정복하는 32년까지의 긴 시간선을 압축적으로 다루고 있다. (대소왕은 까마귀를 보내며 “까마귀는 검은 법인데 이제 빛이 변하여 붉게 되었고, 또한 머리는 하나인데 몸이 둘이니, 이는 두 나라가 병합될 징조이다”라고 선전포고를 하였고, 이에 대무신왕은 “검은색은 북방의 색인데, 이제 변하여 남방의 색이 되었다. 또한 붉은 까마귀는 상서로운 것으로 그대가 이것을 얻었으나 가지지 못하고 내게 보냈으니 양국의 존망은 알 길이 없도다”라는 도발로 맞받았다.)
그렇다 보니 호동의 이름을 작품 제목으로 삼고 있지만 호동은 강력한 국가에 집착하는 대무신왕의 전쟁 야욕에 희생되는 개인들을 대표하는 존재일 뿐 극의 실질적인 주인공은 대무신왕이다. 대무신왕은 이지나와 <클럽 살로메>,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 <아마데우스> 등에서 호흡을 맞춘 배우 지현준이, 호동은 국립무용단 단원 최호종이, 서희라는 이름을 새롭게 얻은 낙랑 공주는 박혜지가 맡았다.
그러나 객원출연자인 지현준의 이름이 대무신왕 역으로 소개되는 반면 티켓사이트의 웹배너나 프로그램북 등 공연 홍보물 어디에서도 호동과 서희 역을 맡은 무용수의 이름은 찾아볼 수 없다. 제목의 ‘호동’이 왕자 ‘호동’이 아니라 개인들의 집합체로서의 ‘호동들’을 의미하기 때문이며, 낙랑 공주가 서희라는 새로운 이름을 얻었음에도 무용수의 이름이 지워진 것 또한 같은 이유일 것이다(물론 이런 이유를 납득하더라도 굳이 무용수들의 이름을 지워야 했는가라는 의문이 다 지워지는 것은 아니다). 낙랑 공주 역시 낙랑국 왕 최리의 딸이 아니라 ‘나는 호동’이고 ‘나도 호동’인, ‘나는 서희’이고 ‘나도 서희’인 개인들의 집합이며, 낙랑에 닥친 위험을 경고해준다는 전설의 비기인 자명고는 실체가 있는 사물이 아니라 개인들의 내면에서 외부의 위험을 감지하는 감각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개인들이 감지해내는 위험은 국토를 침략하는 외세의 위협이 아닌, 개인을 억압하는 국가주의 그 자체다.
호동‘들’의 외침 - 나는 호동이다, 나도 호동이다
호동이 아니라 호동‘들’로, 호동과 서희가 아니라 ‘호동이자 서희’인 ‘네 안의 나’와 ‘내 안의 너’라는 호동의 존재적 확장은 무대 위에서 단원 40여 명의 군무로 스펙터클하게 형상화되었다. 무대디자이너 박은혜는 역동적인 군무와 대조를 이루는 직선적이고 수직적인 금속 구조물이나 차가운 인상의 LED 벽체 등으로 개인을 억압하고 통제하는 냉혹한 국가주의를 상징적으로 표현해내고 있다. 이셋은 국악기와 전자악기를 적절히 섞은 낯설고 이질적인 음악을 통해 개인들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불안과 저항을 구현했다.
<2022 무용극 호동>은 대중적으로 널리 잘 알려진 줄거리를 평면적으로 펼쳐내지 않고 창작자의 해석을 통해 새로운 이야기로 재탄생시켰다는 점, 그리고 서사를 무용적으로 전개해가는 무용극의 익숙한 문법을 따르지 않고 무용을 서사적으로 풀어냈다는 점에서 국립무용단의 또 다른 진보로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무용작품을 만드는 창작자들의 고질병이 되어버린 안무 방식, ‘사랑하는 여자의 죽음을 비통해하는 남자’를 표현하기 위해 남성 무용수가 여성 무용수의 ‘죽은 육신’을 끌어안고 춤추는 장면이 관성적인 움직임으로 삽입된 것은 애써 만들어낸 작품의 신선도를 떨어뜨리는 옥의 티로 작용했다. <로미오와 줄리엣>, <마농>(맥밀런), <스노우 화이트>(프렐조카주) 등 드라마발레에서 유독 자주 발견되는 이러한 장면이 성별 역할 분담이 뚜렷하게 구분된 발레 무대가 아닌, ‘나도 호동’이고 ‘나도 서희’로 ‘호동이자 서희’가 된 군무진이 모두가 호동이 되어 성별 구분 없이 어우러져 춤을 추었던 국립무용단 무대에까지 삽입되어야 했는지는 다시금 질문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글_ 윤단우(공연칼럼니스트)
사진제공_ 국립무용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