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니버설발레단의 <오네긴>이 지난 10월 29일부터 11월 6일까지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서 올려졌다. 2009년 한국 초연 후 벌써 여섯 번째 시즌을 맞이한 이 공연은 클래식에 치우친 국내 발레 무대에서 드라마발레로는 드물게 장수하며 발레단의 대표 레퍼토리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순진한 시골 아가씨에게 찾아온 무모한 첫사랑
발레 <오네긴>은 러시아 시인 푸슈킨의 운문소설 『예브게니 오네긴』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 운문 형식을 취하는 원작의 성격상 원래도 압축적이던(혹시 원작 속 화자의 이야기가 장광설로 들린다면 톨스토이나 도스토옙스키의 소설 전개가 어떤지를 떠올려보면 될 것이다) 줄거리는 발레로 옮겨지며 더욱 간결해졌다.
중심인물은 시골 지주의 딸 타티아나와 올가, 그리고 올가의 약혼자인 시인 렌스키와 그의 친구인 귀족 청년 오네긴이다. 이 네 인물이 인사를 나누고 각자의 성격을 드러내는 1막 초반부는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을 연상시킨다. 타티아나와 올가는 자매 사이이고 오네긴은 오만한 도시 귀족이며, 렌스키는 올가에 대한 사랑으로 충만해져 있는 상태다. 렌스키와 오네긴이 등장하기 전까지만 해도 타티아나의 생일 무도회에서 입을 드레스를 손질하며 여자들끼리 대화를 나누던 한가롭고 목가적인 분위기는 이들의 등장으로 일신된다. (올가와 렌스키는 이미 약혼한 사이이긴 하지만) 이 매력적인 두 미혼남성은 심지어 마을의 젊은 여성들이 거울 점을 보며 미래의 신랑감을 점쳐보는 순간 등장해 앞으로 전개될 연애에 대한 기대감으로 분위기를 들뜨게 만든다.
물론 이렇게 바뀐 분위기에 가장 큰 영향을 받는 인물은 주인공 타티아나다. 원작의 묘사에 따르면 타티아나는 “예쁘지도 않고 싱그러운 장밋빛 뺨도 없어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촌스럽고 우울하고 과묵하고 숲속의 사슴처럼 소심한” 소녀다. 활달하고 외향적인 올가와 달리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않고 독서에만 빠져 있는 타티아나의 세계는 『오만과 편견』보다는 『마담 보바리』에 가깝다. 타티아나에게 진정한 세계는 어머니와 유모, 여동생이 있는 현실이 아니라 책 속에서 펼쳐지는 연애담이다. 그는 엠마 보바리처럼 ‘이곳이 아닌 다른 곳’을 꿈꾸며 책 속으로 도피한다.
함께 산책을 하던 길에 타티아나가 읽던 책 표지를 본 오네긴은 시시한 연애소설이나 읽는다며 비웃음을 세련되게 감추지만, (사실 타티아나가 읽는 책은 리처드슨과 루소, 괴테, 바이런의 낭만적인 소설들로, 오네긴이 비웃은 것처럼 ‘시시한 연애소설’은 아니다) 타티아나는 오네긴이 자신의 책에 관심을 보이는 것조차 사랑의 신호로 감지할 준비가 되어 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동안 타티아나 주변에서 책에 대한 관심은 올가처럼 ‘책 그만 보고 나랑 놀아달라’는 식으로 책의 세계를 부정하는 방향으로 표현되었기 때문이다.
도시 귀족의 생리나 사교계의 까다로운 문법에 무지한 순진한 시골 아가씨에게 불시에 찾아온 첫사랑은 앞으로 달려가는 것밖에 모르는 무모한 것이다. 타티아나는 오네긴도 자신에게 마음이 있는지 확인한다거나 자신의 마음을 전할 우회로를 찾을 생각은 전혀 하지 못한 채 편지로 마음을 고백한다. 원작에서 타티아나가 쓴 편지를 살펴보면 “이 세상에 제 마음을 바칠 사람은 그대밖에 없어요!”, “높으신 분의 섭리, 하늘의 뜻으로 결정된 일, 저는 그대의 것입니다.” “제 운명을 그대께 맡깁니다.” “단 한번의 시선으로 제 가슴의 희망을 소생시켜주세요, 아니면 차라리 마땅한 꾸짖음으로 이 괴로운 꿈에서 깨어나게 해주세요!” 같은 꾸미지 않은 직설적인 고백들로 가득 차 있다.
1막 거울 파드되. 타티아나 역에 강미선, 오네긴 역에 이현준 ⓒUniversal Ballet Photo by Hyunsoo Kim
발레 1막의 하이라이트는 타티아나가 꿈에서 만난 오네긴과 환희에 찬 춤을 추는 거울 파드되로, 크랑코는 이 장면에 까다롭기 그지없는 고난도 리프트를 집중적으로 배치해놓고 있다. 오네긴이 처음 등장했을 때는 깜짝 놀라 피하고 그와 함께 산책할 때는 몇 걸음 떨어져 뒤를 따라가는 등 내내 소극적인 모습이던 타티아나는 거울 파드되 장면에서는 첫사랑의 설렘으로 한껏 부풀어 있는 감정을 터트리듯 분출한다. 이 장면에서 타티아나와 오네긴은 서로 마주 보며 무대 한쪽 끝에서 다른 끝까지 달리거나 몸을 겹쳐 회전하는 등 잠시의 휴지부도 없이 변화무쌍한 동작을 수행하는데, 오네긴이 몸을 곧게 세운 타티아나를 한 팔로 들어올린 채, 타티아나가 오직 오네긴의 한 팔에만 의지하고 선 채 무대를 질주하듯 스페이싱하는 장면은 단연 압권이다.
<오네긴>은 발레단이 공연권을 취득하기 어려운 작품으로도 악명이 높은데, 군무의 난이도는 물론이거니와 1막 거울 파드되와 3막 회한의 파드되는 까다로운 리프트가 장르의 한 특성으로 여겨지는 드라마발레에서도 특히 어려운 장면들이다. 무용수들의 개별 역량도 뛰어나야 하지만 파트너를 이루는 두 무용수 간의 호흡이 더욱 중요하며, 연기력이 떨어져서도 안 된다. 크랑코재단 측의 엄격한 오디션 정책에 고개가 끄덕여지는 대목이다.
죽음을 예감한 시인의 마지막 춤
타티아나의 고백은 그가 기대한 바처럼 희망을 소생시켜주는 방향이 아닌 괴로운 꿈에서 깨어나는 파국으로 치닿는다. 타티아나의 생일 무도회에 참석한 오네긴이 편지를 돌려주며 그의 마음을 거절한 것이다. 원작의 오네긴은 타티아나의 편지에 “생생한 감동”을 받았지만 그럼에도 “순진한 처녀의 신뢰를 기만하고 싶지 않”았기에 다정한 어조로 진심을 다해 거절한다. 행복을 모르는 자신의 영혼은 결혼을 고통스럽게 만들 거라면서, 타티아나에게 주어진 결혼이라는 운명이 그렇게 가혹할 리가 없다면서. 이는 타티아나가 편지에서 청한 ‘마땅한 꾸짖음’에 매우 걸맞은 것이었을 테지만 발레에서 오네긴의 거절은 타티아나의 눈앞에서 편지를 찢는 잔인한 방식으로 표현된다.
이 ‘편지를 찢는’ 거절은 1막의 거울 점 장면과 마찬가지로 3막에서 변주를 통해 반복되며 음악에서의 유도동기(誘導動機, leitmotif)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러나 한 세기 전 작품인 <지젤>에서 비슷한 역할을 하는 꽃점 장면의 음악과 안무가 매드씬에서 변주되는 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거울에 비친 인물은 오네긴이 아니라 훗날 남편이 된 그레민 공작으로, 편지 찢는 주체는 오네긴에서 타티아나로 변주되며 작품의 대구(對句)를 완성한다. 이 대구는 운문소설인 원작의 리듬감이 사라진 자리에 안무와 연출로 빚어낸 움직임의 리듬감을 새롭게 심는 ‘발레적 번안’이라고도 부를 수 있으며, 서사를 마임으로 듬성듬성 전개시키는 것이 아니라 안무에 플롯이 결합될 때 작품의 완성도가 어떻게 드라마틱하게 달라질 수 있는지 보여주는 훌륭한 작법이기도 하다.
용기 내어 전한 마음을 거절당하고 기분이 저조해진 것은 타티아나지만 오네긴은 자신의 저조한 기분을 풀기 위해 한껏 무도회를 즐기고 있는 올가와 렌스키 커플을 훼방 놓는 치기를 부린다. 춤곡이 몇 번이고 바뀌는 동안 오네긴이 자신의 파트너인 올가를 반복적으로 가로채는 데 격분한 렌스키는 오네긴에게 결투를 신청하고, 이 결투는 렌스키의 죽음이라는 비극으로 끝나고 만다.
화자의 목소리로 사건을 알려줄 뿐인 원작의 다소 건조한 전개에 비해 발레는 매우 역동적이고 격정적이다. 오페라가 렌스키가 죽음 직전 부르는 아리아 ‘어디로 가버렸나, 내 젊음의 찬란한 날들은’으로 서정성과 비극성을 한껏 고조시키고 있다면 크랑코는 렌스키의 독무로 같은 효과를 꾀하고 있다. 이때 배경으로 깔리는 음악은 ‘12개의 특징적인 장면’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 차이콥스키의 피아노곡 ‘The Seasons’ 중 열 번째 곡인 ‘Autumn Song’으로, 렌스키는 자신의 죽음을 예감한 듯 처연하고도 아름다운 춤을 춘다. 발레에서는 ‘리릭 발레리노’와 같은 명칭을 따로 붙여 구분하진 않지만 움직임에서 시적 정취를 물씬 느끼게 해주는 이 장면은 극중에서 렌스키가 왜 시인으로 설정되었는지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명장면이다. 렌스키를 연기한 세 명의 무용수 중 초연 때부터 줄곧 렌스키로 무대에 오른 콘스탄틴 노보셀로프의 춤과 연기는 이 장면에서 특히 빛을 발한다.
2막 오네긴과 렌스키의 결투. 타티아나 역에 강미선, 오네긴 역에 이동탁 ⓒUniversal Ballet Photo by Hyunsoo Kim
하늘의 춤에서 지상의 춤으로
렌스키가 죽고 나서 오네긴은 자신이 저지른 짓을 후회하며 긴 여행길에 오르고, 타티아나는 오네긴의 먼 친척인 그레민 공작과 결혼한다. 두 주인공의 재회가 이루어지는 3막의 무대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그레민 공작의 저택이다. 이제 작품은 막바지에 다다라 3막에 남아 있는 것은 오네긴의 구애와 타티아나의 거절뿐이다. 이 내용으로 막 하나를 다 채우기에는 턱없이 빈약하게 느껴지지만 크랑코식 대구의 진가가 폭발적으로 발휘되는 것은 3막이다. 3막은 타티아나와 그레민 공작의 파드되와 오네긴의 회고, 타티아나와 오네긴의 구애와 거절이 이루어지는 회한의 파드되로 구성되어 3막 안에서도 대구 형식을 보여준다.
1막에서 타티아나와 오네긴의 파드되가 이제 막 시작된 사랑으로 설레는 감정을 함뿍 담아 날아오르는 ‘하늘의 춤’이라면, 3막의 춤은 타티아나와 그레민 공작의 파드되나 타티아나와 오네긴의 파드되 모두 바닥에서 발이 거의 떨어지지 않도록 스텝 하나하나를 안정감 있게 내딛는 ‘지상의 춤’이다. 두 파드되 사이에는 1막부터 2막까지의 주요 장면들이 오네긴의 회고를 통해 영화의 플래시백처럼 빠르게 지나가는데, 원작에서 오네긴이 타티아나에게 보낸 편지에는 “제겐 하루 한시가 소중합니다”라거나 “내 생명이 다해간다는 건 나도 압니다” 같은, 죽음이 머지않았음을 암시하는 문장들이 들어 있어 오네긴의 귀향과 이 회한에 찬 회고의 의미를 다르게 읽을 수 있다.
『예브게니 오네긴』이 발표된 19세기는 귀족들의 불륜이나 배우자 외에 정부를 두는 것이 흔하던 시대였고, 푸슈킨은 자신의 아내가 불륜을 저지르고 있다는 소문을 퍼트린 귀족 남성과의 결투로 젊은 나이에 목숨을 잃었다. 오네긴이 타티아나에게 원한 것은 사랑이지 결혼의 파탄을 요구한 것은 아니었지만 타티아나는 자신이 여전히 오네긴을 사랑하고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남편과 결혼의 신의를 지키겠다고 답한다. 오네긴의 구애와 타티아나의 거절을 압축해놓은 듯한 회한의 파드되는 오네긴이 타티아나에게 쓴 편지를 그대로 안무로 옮긴 듯 편지 속 절절함이 움직임마다 배어 있다(오네긴의 편지에는 “당신의 무릎을 얼싸안고 당신 발아래 엎드려 통곡하며” 등과 같은 표현이 나오는가 하면 타티아나와의 마지막 만남을 묘사하며 화자는 “오네긴은 그녀의 발아래 몸을 던졌다” 같은 문장을 사용하고 있다). 특히 정지 장면이 많은 이 파드되에서 타티아나가 매달리는 오네긴을 뿌리치고 안간힘을 쓰며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는 안무는 무대를 꾸미고 있는 육중한 기둥처럼 현실에 단단히 매인 타티아나의 현재를 상징하고 있는 듯하다.
3막 회한의 파드되. 타티아나 역에 홍향기, 오네긴 역에 강민우 ⓒUniversal Ballet Photo by Hyunsoo Kim
유니버설발레단의 2022 오네긴 리부트
송년 레퍼토리인 <호두까기인형>을 제외하고 전막 발레의 공연 일정과 횟수를 살펴보면 통상 4일 동안 5회 차의 공연을 평균으로 잡을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유니버설발레단과 국립발레단, 광주시립발레단처럼 전막 작품을 정기공연 무대에 올릴 수 있는 단체에 한해서고 유니버설발레단의 경우 최근 몇 년간 주말 공연에 집중하며 공연 일정을 축소 운영하는 행보를 보여 왔다. 그렇기에 6일간 9회 차의 공연을 올리는 것은 작품의 인기와 단체의 자신감을 확인하는 바로미터로도 볼 수 있다(3일간 5회의 공연을 올린 2017년 시즌이 다소 예외적이고 초연 시즌이었던 2009년에는 무려 10일간 12회의 공연을 올렸는데 이는 <호두까기인형>과 맞먹는 규모다).
올해 공연에서 가장 눈에 띄는 점은 새로운 주역들의 등장이다. 강미선과 함께 초연부터 주역으로 무대를 지켜온 황혜민이 2017년 시즌을 마지막으로 엄재용과 동반 은퇴한 뒤 2020년 손유희가 새롭게 주역진에 합류했으나 그는 이미 2016년 털사발레단에서 주역을 맡은 바 있어 엄밀히 말하자면 새로운 주역은 아니었다(2020년 공연은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해 신규 캐스트에 대한 오디션 진행이 여의치 않아 기존 주역들인 강미선과 이동탁, 손유희와 이현준의 페어로만 무대를 채웠다).
새로운 주역들의 등장은 다른 배역에도 연쇄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올해는 강미선, 손유희, 이현준, 이동탁 등 기존 주역 외에도 지난 공연에서 올가 역을 맡았던 홍향기와 한상이가 타티아나로 새롭게 데뷔했고, 그레민 공작으로 무대에 올랐던 강민우가 새로운 오네긴으로 주역진에 합류했다. 올가였던 두 무용수가 타티아나로 배역을 옮겨가며 서혜원과 엘리자베타 체프라소바, 그리고 손유희가 새로운 올가로 데뷔했고, 렌스키 역의 이고르 콘타레프, 그레민 공작 역의 드미트리 디아츠코프와 이승민도 해당 배역으로 첫 무대를 선보였다.
강미선, 이현준, 이동탁은 두 명의 파트너와 함께하는 이번 공연에서도 안정된 연기와 호흡으로 ‘믿고 보는’ 무대를 증명했고, 타티아나와 올가를 오가야 했던 손유희도 배역 고유의 매력을 잃지 않는 좋은 무대를 보여주었다. 홍향기, 한상이, 강민우는 첫 무대임에도 배역에 잘 녹아드는 모습으로 다음 무대에 대한 기대감을 안겼다.
강효정, 서희, 로베르토 볼레, 에반 맥키, 이반 질 오르테가…. 그동안 유니버설발레단의 <오네긴> 공연을 함께 빛내준 객원주역진의 면면이다. 유니버설발레단은 기존 주역들 외에 국내 무대에서 만나기 어려웠던 해외발레단의 스타무용수를 초청해 더욱 풍성한 무대를 만들어왔다. 황혜민과 엄재용의 은퇴무대로 꾸며졌던 2017년(3일 5회)과 코로나 팬데믹으로 공연 현장이 극도로 위축되었던 2020년(6일 6회) 시즌이 이전 시즌보다 축소 운영되었던 이유 중 하나도 객원주역진의 초청이 없었던 점을 꼽을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시즌 새로운 주역진의 등장은 <오네긴>의 안정적인 레퍼토리화에서 중요한 분기점이라 하겠다. 서사와 춤이 정교하게 결합해 드라마발레의 탁월한 성취를 이룩한 <오네긴>이 새로운 주역들과 만나 앞으로 어떤 무대를 펼쳐가게 될지 관심을 갖고 지켜볼 일이다.
글_ 윤단우(공연칼럼니스트)
사진제공_ 유니버설발레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