律의 실행자, 복미경 - <무율 Ⅲ>(2022.12.14. 한국문화의집 코우스)
복미경은 율(律)을 안다. 복미경은 율(律)의 실행자이다. 대한민국 무용가 중에서 율(律)의 의미를 찾고자 하는 춤꾼이 있다는 건 행복이다. 조선에 있어 예악(禮樂)도 중요하지만, 그 안에 존재하고 있는 핵심인 율(律)을 찾아내서 실천한다는 건 매우 중요하다. 지금 대한민국에서 율(律)이란 단어를 쓰는 대표적인 예는 법률(法律)이다. 이런 말이 존재하는 것처럼, 과거에는 음률(音律)이란 말이 존재했다. 100년엔 음률(音律)이란 말이 보편적이면서도 특별하게 쓰였다.
음악과 음률의 차이
음악(音樂)과 음률(音律)은 전혀 다르다. 음악이 소리를 통해서 즐거움을 추구하는 것이라면, 음률은 소리를 통해서 조화와 질서를 찾고 회복하는 일이다. 음률의 대표적인 곡이 영산회상이다. 이런 명곡을 직접 연주하고 감상했던 사람들은, 귀를 즐겁게 하는 것을 즐기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평화롭게 하는 것에 더 큰 가치를 두었다. 평화로움의 밑바탕은 조화와 질서. 곧 율(律)이었다.
과거 음률이란 용어는 보편적으로 널리 퍼졌지만, 무율이란 말은 그렇지 않았다. 그러함에도 음률(音律)이란 말이 존재하는 것처럼, 비록 보편적이진 않았을지라도 무율(舞律)이란 관념 또는 용어가 존재했음이 짐작된다. 악무(樂舞)는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이 아닌가! 음률은 소리를 통해서 조화와 질서를 찾는 것이고, 무율이란 춤을 통해서 조화와 질서를 찾는 것이다.
100년 전 조선사회에서 보편적으로 사용한 음률(音律)이란 관념 또는 용어가 다시 이 땅에서 사용되길 바라는 내 입장에서, 무율(舞律)이란 용어를 처음 본 순간의 희열(喜悅)을 어찌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이런 타이틀의 공연을 제목에 부친 춤꾼의 안목에 일단 너무도 감사하는 마음이 들었다.
呈才와 舞律, 같고 또 다르다
무율이라는 제목으로, 복미경과 복미경무용단이 추는 춤은 궁중무용이다. 이를 정재(呈才)라고 한다. 이 용어 또한 무척 숭고한 가치를 내포하고 있지만, 정재라는 용어 자체는 ‘왕조의 유산’이다. 내가 비록 미천한 신분이기는 하나, 내가 배우고 익힌 재주[才]를 높은 분(임금)께 받친다는 [呈] 뜻이 아닌가! ‘정재’라는 용어 자체는 지금 궁중무용의 용어로 쓰고 있기에 존속할 수밖에 없으나, 이 단어가 갖는 (민주주의와 상반되는) 절대왕권적 신분사회와 그 안에서 파생되는 상하관계가 필연적으로 드러나는 용어임은 숨길 수 없다.
무율(舞律)은 정재(呈才)와 같으면서 매우 다른 뜻이다. 정재(呈才)라는 의미에는 임금과 궁중 무희라는 상하 관념이 명백히 존재한다. 무율(舞律)은 그렇지 않다. 춤을 통해서 율(律), 조화와 질서를 깨우치는 것이기에, 그 중심은 춤이요, 나아가 춤추는 사람이다.
음률과 무율이란 용어가 보편적으로 사용되긴 어려울지라도, 무율의 본원적 의미는 앞으로 무용계가 깊이 새겨야 한다. 관념적 측면에서도 그렇고, 미학적 측면에서도 그렇다. 이런 용어를 통해 궁중무용을 바라본다면, 앞으로 궁중무용의 가치와 그에 따른 예술적 해석이 달라질 수 있다.
舞律에 내포된 인문학
홀기(笏記)는 조선시대에 ‘의식의 순서를 적은 글’을 말한다. 홀기는 ‘의례 진행의 혼란을 방지하고, 집사자나 헌관 등 참례자의 행동과 행위를 질서 있게 할 수 있도록 정해 놓은 식순의 하나’다. 조선시대의 춤을 연구함에 있어서 ‘홀기’는 매우 중요하다. 홀기에 대한 존재와 관심은 오래 전부터 있었고, 조선왕조의 궁중문화의 맥을 이은 이왕직아악부와 구황궁아악부, 그리고 국립국악원이 그 홀기의 가치를 소홀히 한 적은 한 번도 없다. 그러나 시대가 시대인지라, 분명 국립국악원에서 행해진 모든 춤이 홀기에 정확하게 근거하고 있다고 말하긴 어렵다.
매우 유감스럽게도, 우리는 국립국악원 무용단의 궁중무용을 제대로 본 역사는 오래지 않다. 해방 이후에도 궁중무용의 홀춤의 대표인 춘앵전(春鶯囀)을 볼 수 있었지만, 궁중무용의 레퍼토리가 매우 제한적이다. 실제 자료에 의해서도 그러하고, 당시를 경험한 국악 관련 인물들의 증언 또한 그러하다. 춘앵전, 무고(舞鼓), 가인전목단(佳人剪牧丹) 정도가 1960년대에 추어진 궁중무용이다. 실제 무용계 사람들은 그렇지 않을지라도, 대한민국의 보편적 국민들은 이 시대에 궁중무용하면 화관무(花冠舞)라고 생각하던 시절이 그 때였다.
홀기에 의한 궁중무용의 재현을 위해서 노력한 분이 그간 참 많다. 그 분 모두를 존경한다. 그 중에서 특히 이흥구(학연화대합설무 예능보유자)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궁중무용하면 ‘조선의 마지막 무동’으로 통했던 심소 김천흥 선생을 빼놓을 수 없다. 심소의 인성(人性)과 예기(藝氣)를 나 또한 물론 매우 존경하는 인물 중의 한 분이다. 해방 이후 한국무용 전반에 걸친 심소의 역할과 기여는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함이 없다. 그러나 분명히 해 둘 것은, 궁중무용이란 거대한 영역을 김천흥이라는 일인과 연결한다는 것은 ‘숲을 보지 못하고 나무만 보는’ 한계가 될 수 있음을 자각해야 한다.
김천흥, 민속무용의 제일인자
김천흥은 이왕직아악부 출신이 분명하다. 그가 최승희에게 직접 무용을 배웠는지, 최승희와 관련된 여러 자료를 통해서 무용을 독학으로 스스로 익혔는지는 정확하지 않으나, 무용의 창작적 능력이 탁월한 분이었다. 해방 이후 김천흥은 1950년대와 1960년대 ‘민속무용의 제일인자’로 자리매김 되었다. 궁중무용과는 거리감이 있다.
김천흥은 당시 신흥무용(新興舞踊)에도 관심을 두었다. 해방 후에 만들어진 새로운 ‘민속무용’이 정착할 때 큰 역할을 했다. 여기서의 민속무용이란 무대화된 민속무용을 말한다. 김천흥은 당시 김백봉과 함께, 민속무용계의 스타로서 자리매김 되어갔다. 양주별산대놀이와 봉산탈춤의 ‘무대화 공연’을 성사시켜서, 탈춤의 ‘일인(一人) 무대화 공연’에 앞장서서 실천한 분이 김천흥이다.
김천흥이 궁중악(宮中樂) 계통과 인연을 맺은 것은 무형문화재 제도와 연관된다. 당시 중요무형문화재 ‘종묘제례악’ 1호와 연결되면서 궁중음악과 무용 쪽으로 돌아왔다. 아울러 그가 이전에 관여했던 양주별산대를 무형문화재로 지정 받는 것에 직·간접적으로 큰 영향을 주었다. 1960년대. 동아일보사가 주최해서 ‘명창명인대회’ 등을 열었다. 거기서 ‘김천흥’의 역할은 ‘탈춤’이었다. 초창기 김천흥은 ‘미얄할미’로 인기를 끌었고, 연세가 들면서 심소는 점차 ‘노장춤’으로 탈춤의 종목을 달리해 갔다.
김천흥 선생께서 이렇게 대외적으로 많은 활동을 하면서 이름을 날릴 때, 국립국악원을 중심으로 전통음악과 전통무용에 알리는데 크게 기여한 분들을 기억해야 한다. 거문고의 구당(九堂) 김상기(金相麒, 1899-1965), 무용과 양금의 신곡(新谷) 김보남(金寶男, 1912-1964), 대금의 녹성(綠星) 김성진(金星振, 1916-1996), 피리의 가농(茄濃) 김준현(金俊鉉, 1918-1961), 가야금의 성재(誠齋) 김영윤(金永胤, 1911-1972) 등이 바로 그런 분이다.
심소(心韶) 김천흥(金千興) vs. 신곡(新谷) 김보남(金寶男)
김천흥은 이왕직아악부 아악부원 양성소의 2기이고, 김보남은 이왕직아악부 아악부원 양성소 3기이다. 그런데 일제강점기는 물론이요, 해방 이후 구황궁아악부를 포함해서 ‘궁중음악’과 ‘궁중무용’에 지속적으로 관여하면서, 국립국악원 설립(1951년)에 주도적인 역할을 한 분들은 이왕직아악부 3기 출신이다. 이주환(일제강점기의 본명, 이복길), 성경린, 김보남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운니동 국악원 시절, 국립국악원에서 궁중무용과 민속무용을 가르친 분은 신곡(新谷) 김보남(金寶男)이다. 김천흥은 KBS국악연구회를 통해서 여성 국악사들에게 궁중무용을 가르쳤다. 이 시절 김보남이 궁중무용의 체계적인 전승을 위해서 주목한 인물이 바로 이흥구이다. 김보남의 타계로 해서 김보남과 이흥구의 사제의 연은 길지 않았으나, 이흥구는 평생 ‘궁중무용의 적자(嫡子)’로서 홀기 등의 문헌에 의해서 궁중무용을 바르게 전승, 보급하는데 힘을 기울였다.
김보남은 해방 이후부터 무용계에서 존경받는 인물로 자리매김했고, 1950년대 전반에 걸쳐서 무용계에서 매우 큰 역할을 했다. 한국춤의 미학을 ‘멋과 맛’으로 구분을 하는데, 이런 것과 연관해서 김보남의 얘기는 주목할 필요가 있다. “임춘앵(林春鶯)의 춤이 ‘멋’이 있다면, 김소희(金素姬)의 춤은 ‘맛’이 있다.” 여담이지만, 한국의 전통춤의 맥락과 특징을 깊이 알고자 한다면, 김소희(1917-1995, 전북 고창 출신)와 임춘앵(1924-1975, 전남 함평 출신)의 춤에도 관심을 둘 필요가 있다. 두 분은 무용계 사람은 아니나, 이 두 분의 춤의 특징과 매력은 남다른 면이 있다.
舞律 공연이 갖는 무용사적 의미
복미경은 <무율>이라는 이름으로 세 차례 공연을 했다. 2020년에는 국립무형유산원 얼쑤마루 공연을 시작으로, 2021년과 2022년에는 한국문화의집 코우스에서 공연을 했다. 이 공연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일까? 복미경과 복미경의 <무율>은 한국무용 공연사에서 다음과 같은 의미를 짚을 수 있다.
첫째, 우리가 알지 못하는 궁중무용의 세계를 선보였다! 과거 국립국악원 원장을 지낸 성경린 선생의 기록이 바탕이 된 춤을 추었다. 이건 평생 성경린 선생이 이흥구 선생께 바라던 소원이었다. 스승 이흥구의 평생소원을 제자 복미경이 무대에서 재현했다는 것에 큰 의미를 두어야 한다.
둘째, 복미경은 음악과 무용의 양면을 알고 있다! 궁중의 의식은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음악과 춤이 불가분의 관계인데, 복미경은 원래 음악에 관심을 두었다. 과거 국립국악고등학교를 음악전공으로 입학한 사실을 보더라도, 그가 음악적인 기본 체계를 갖추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홀기 등을 통해서 궁중무용을 재현하는 작업은 무용만으로는 어렵다. 음악과 무용을 동시에 알아야 가능한데, 복미경은 이 둘을 섭렵(涉獵)하면서 홀기의 춤을 재현했다.
셋째, 복미경의 춤은 인문학적 기반이 든든하다. 전통음악과 전통무용의 양자를 잘 알고 있고, 이를 바탕으로 홀기를 중심으로 해서 연구자의 자세로의 접근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어 보인다. 그가 이런 자세로 펼쳐 보인 궁중무용은 ‘화려한’ 궁중무용이 아닌 ‘엄격한’ 궁중무용이었다. ‘례(禮)라는 의식에 수반되는 궁중무용’이라는 고정관념을 넘어서, ‘율(律)이라는 조화의 미학이 담겨있는 궁중무용’으로 바라볼 수 있는 시각의 기틀을 마련해주었다.
이번 공연을 계기로, 국악계와 무용계가 김보남에 대한 관심이 더 높아지길 바란다. 아울러 김보남과 이흥구로 이어지는 춤의 계보에 대해서 객관적이고 구체적인 정리가 이뤄지길 바란다. 궁중무용의 역사에 있어서 김보남과 이흥구로 이어지는 춤맥에 대해서, 복미경이 공연을 통해서 풀어냈다는데 의미가 있다. 성경린 선생이 평생 마음에 간직했던 소원이, 이흥구의 제자 복미경에 의해서 실현되고 있다는 점이 참으로 감격스럽다.
앞으로 복미경의 역할은 중요하다. 음악과 무용의 두 분야를 통섭하면서, 진정한 무율(舞律)이 무엇인가를 밝혀내 주길 바란다. 그러하기 위해서는 인문학적 기반을 바탕으로 한 각고(刻苦)의 노력(努力)을 해야 하는데, 내가 여기서 중견무용가에게 너무 큰 부담을 안겨주는 것일까?
복미경은 율(律)의 실행자가 될 것이다. 특정인의 계보를 넘어서서, 앞으로 궁중무용은 ’들여다보면 들여다볼수록‘ 그 안에서 세상 그 어디에도 없는 보석을 발견할 수 있을 것 같다. 복미경이 세 번의 <무율>을 통해서, 한국무용계에 이런 시각을 던져주었다. 궁중무용의 원형적 복원의 기틀! 이건 개인 차원이 아니라, 앞으로 국가 차원의 접근이 필요한 영역이다.
글_ 윤중강(공연평론가)
사진제공_ 복미경무용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