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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란신이 세공한 보석, 세 개의 빛으로 반짝이는 춤의 향연: 볼쇼이발레단 <주얼스>

<주얼스(Jewels)>는 러시아 출신의 미국 안무가 조지 발란신(George Balanchine)이 1967년 발표한 3막 짜리 작품으로 이야기가 없는 신고전주의 발레이다. 소련 시절이었던 1972년, 뉴욕시티발레단의 러시아 투어 당시 〈Драгоценные камни; Precious Stones〉라는 제목으로 러시아에 처음 소개되었고, 이후 마린스키발레단에서는 1999년 초연되었다. 볼쇼이발레단은 2012년 5월 5일 <주얼스>를 처음 무대에 올린 후 레퍼토리화 하여 매 년 공연하고 있다(최근 공연은 2023.2.3.-5.).


<주얼스>는 세 가지의 보석을 모티프로, 세 개의 음악에 맞춘 세 개의 춤이다. 발란신이 그의 오랜 친구이자 바이올리니스트인 나탄 밀스타인(Nathan Milstein)의 소개로 클로드 아펠(Claude Apels)과 친분을 쌓았고, 반 클리프 앤 아펠(Van Cleef & Apels)의 보석에서 영감을 받아 이 작품을 창작했다는 것은 유명한 일화이다. 에메랄드, 루비, 다이아몬드 세 가지의 보석에서 영감을 받아 각각 가브리엘 포레, 스트라빈스키, 차이코프스키의 음악에 맞추었는데, 세 개의 춤은 ‘발레’라는 공통요소로 연결되어 있지만 그 자체만으로도 개성이 뚜렷한 보석만큼이나 확연히 다른 색채를 띤다. (발란신은 푸른빛의 사파이어에 쇤베르크 음악으로 네 번째 주제를 구상하였으나 실현하지는 못했다.)

 

Photo by Damir Yusupov/ Bolshoi Theatre

 

영롱하고 신비한 초록빛의 에메랄드는 차분함과 고요함을 선사하는 보석이다. 청초하며 신성한 느낌을 주기도 하는 이 보석에 발란신은 포레의 두 곡 <펠리아스와 멜리장드>, <샤일록>을 선택하였다. 꿈꾸는 듯한 이 낭만주의 작곡가의 음악에 맞춰 무용수들은 초록빛 벨벳 의상과 로맨틱 튀튀를 입고 부드럽게 움직였다. 기다란 스커트 아래로 보이는 파 드 부레(pas de bourée)와 아름다운 팔 동작은 몽환적인 낭만발레의 분위기를 끌어올려주었으며, 천천히 발을 들어 올릴 때 퍼지는 스커트의 아름다움이 의상의 특징을 제대로 살려냈다. 삼인무나 군무에서 서로 손을 잡고 대형을 만드는 동작은 물 흐르는 듯했다. 아름다운 상체의 움직임과 조화로운 발동작, <빠 드 캬트르(Pas de Quatre)>나 <레 실피드(Les Sylphides)>의 아기자기한 대형구성으로 낭만발레만의 고유한 색채를 뿜어냈다. 첫사랑의 순수함과 깊은 사색을 동시에 느낄 수 있는 에메랄드는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여운을 남겼다.


스트라빈스키는 강렬했다. <피아노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카프리치오> 서두 부분의 피아노 연주로 시작하는 발레리나의 솔로는 시작부터 관객을 사로잡기에 충분한 팜므 파탈의 카리스마였다. 의상부터 무대까지 온통 붉은 색으로 반짝이는 무대는 <물랑 루즈>나 브로드웨이 쇼를 연상케 하는 치명적인 퇴폐미를 내뿜었다. 그러나 너무 끈적이거나 무겁지 않았다. 이어서 등장한 남녀 커플 무용수는 통통 튀며 익살스러웠다. 볼쇼이발레단 초연 때부터 루비의 주역으로 특화된 비아체슬라프 로파틴(Вячеслав Лопатин)이 특유의 장난스러움으로 여유를 부렸다. 잔잔했던 에메랄드와는 달리 루비의 무용수들은 짧고 언밸런스한 재즈드레스를 입고 밝고 활기차며 역동적으로 무대 위를 뛰어다녔다. 피아노 선율과 게임을 하듯 재지(jazzy)한 느낌으로 골반을 사용한 동작, 시차를 두고 움직이는 엇 박의 싱코페이션, 턴 인(turn in)으로 달리고 발뒤꿈치로 내딛는 등의 움직임은 스윙댄스와 같은 미국의 사교댄스처럼 자유분방했다.

 

발란신이 처음부터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주얼스>의 세 파트는 발란신이 경험했던 나라들의 이미지가 투영되어있다. 에메랄드는 프랑스, 낭만발레의 탄생지이자 우아함과 패션으로 상징되는 곳이다. 발란신이 젊은 시절 러시아를 떠나 디아길레프와 함께 발레 뤼스(Ballets Russes) 활동을 했던 프랑스의 느낌일 것이다. 루비는 미국이다. 자유와 역동적 변화의 상징과 같은 곳, 1930년대부터 발란신이 일생을 보냈던 활기찬 미국의 모습이었다. 스트라빈스키 역시 러시아 출신이지만 발란신과 마찬가지로 미국으로 귀화하여 활동했던 모던 작곡가다. <주얼스>의 피날레를 장식하는 다이아몬드는 발란신이 어린 시절을 보냈던 곳, 그가 발레의 기본을 익히고 성장했던 곳, 바로 러시아 제국을 상징한다. 발레 역사상 가장 위대한 안무가로 꼽을 만한 마리우스 프티파(Marius Petipa)와 그가 확립한 고전발레를 빼놓을 수는 없다.


Photo by Elena Fetisova/ Bolshoi Theatre


그래서 다이아몬드는 프티파와 고전발레에 대한 경의의 표시이다. 남녀 주역무용수와 네 커플의 솔리스트, 그리고 화려한 코르 드 발레(corps de ballet; 군무진)가 무대를 장악했다. 백색의 클래식 튀튀를 입은 발레리나들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이고 남녀 주역무용수가 화려한 파 드 되(pas de deux; 이인무)를 춤춘다. 이들의 정교하고 깔끔한 동작과 테크닉은 발레단의 명성에 걸맞았다. 발란신은 차이코프스키의 <교향곡 제3번 D장조>에 다이아몬드를 안무하였는데, 5악장의 구성 중 발레에 적합하지 않은 1악장을 제외하고 사용했다. 악풍이나 무대 구성의 균형, 대칭, 형식미는 <잠자는 숲속의 미녀>나 <호두까기 인형>을 떠올리게 했다. 다이아몬드는 영원불변의 사랑, 승리의 정점 등을 상징하는 보석으로 고전발레의 주제와도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다. 다이아몬드 파트의 클라이맥스는 피날레인 폴로네이즈이다. 마치 한 명의 무용수가 거울을 통해 여럿을 복제해 놓은 것처럼 모든 무용수들이 한 몸처럼 움직이는 장면은 장관이었다. 하나의 동작을 모든 무용수가 동시 발생적으로 수행할 때 그것에서 오는 전율이 있다. 이것이 바로 러시아 발레의 전통이자 단연코 고전발레의 정수라고 할 수 있다.

 

볼쇼이는 2012년 초연 당시 발란신 재단의 승인 하에 볼쇼이만의 의상과 무대를 새로이 제작하였다. 의상 디자이너 엘레나 자이쩨바(Елена Зайцева)는 원작보다 심플하고 가벼운 디자인으로 <주얼스>를 재탄생시켰다. 벨벳과 새틴이 조화로운 에메랄드 의상은 원작의 의상보다 소박하지만 깔끔했으며, 언밸런스하고 심플한 루비의 짧은 스커트는 러시아 발레리나의 길고 아름다운 체형을 제대로 살렸다. 순백색의 다이아몬드 의상은 고전발레의 눈부신 우아함을 고스란히 보여주었다. 의상에 수놓인 보석들은 스와로브스키 크리스털이다.


무대 디자인은 알로나 피칼로바(Альона Пикалова)가 맡았다. 에메랄드와 루비의 무대는 검은 배경에 수직 패널을 설치하여 반짝이는 초록빛과 붉은빛의 보석으로 장식했다. 특별한 문양이나 장식 없이 수직 패널에 보석을 촘촘히 박아 배치하였는데, 조명에 따라 반짝이는 무대는 모던한 감성이 돋보였다. 다이아몬드는 애초의 발란신의 구상대로 밤하늘에 반짝이는 은하수를 연출했다. 아무런 장치가 없는 깔끔한 검은 배경에 별들만이 반짝거리는 심플함이 세련미를 자아냈다. 무대의 양 옆으로 드리워진 커튼을 묶은 보석의 색도 각 파트에 따라 달라졌다.


Photo by Elena Fetisova/ Bolshoi Theatre


발란신이 창조해 낸 이 발레의 역사는 그 자체로 보석과 같다. 낭만, 고전, 모던 발레의 특징을 살려내면서도 발란신 고유의 색채가 여기저기 묻어있다. 어린 시절의 순수함(에메랄드), 젊음의 열정(루비), 성숙한 성장(다이아몬드)이라는 한 인간의 삶을 담아냈다는 열린 해석도 있다. 무엇보다, 추상발레는 난해할 것이라는 선입관과는 달리, 몸으로써 음악을 시각화하는 발란신의 안무는 그 자체로 흥미롭다. 이야기를 따라가지 않기 때문에 춤과 음악 자체에 더 집중하여 보고 들리는 그대로를 느낄 수 있다. 벌써 60년이 다 되어가는 작품이지만 전혀 시대에 뒤처짐 없이 현대적이고 세련될 수 있다는 점이 참으로 놀랍다. 시대를 초월하는 컨템포러리한 감각은 곧 발란신의 가치이다. 전 세계의 발레단이 여전히 발란신의 작품을 무대에 올리고 싶어 하고, 발레팬들이 주저 없이 그의 작품을 가장 사랑하는 발레라고 말하는 이유일 것이다. 프티파와 함께 발레사에 길이 남을 위대한 안무가로 발란신을 꼽는 것은 어찌 보면 너무나 당연하다.

 


글_ 이희나(춤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