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공연예술창작산실 올해의 신작이 지난 1월 시작프로덕션의 신작 뮤지컬 <청춘소음>을 시작으로 4월까지의 대장정에 돌입했다. 올해로 15년을 맞이한 공연예술창작산실은 연극, 창작뮤지컬, 무용, 음악, 창작오페라, 전통예술의 6개 장르를 아우르는 기초 공연예술 분야에서 장르별 우수 창작물을 발굴하고 지원하는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공연 지원사업이다.
올해 무용 부문에서는 댑댄스프로젝트의 〈>"hello world";〉, 모든컴퍼니의 〈On the Rock〉, 시나브로 가슴에의 <태양>, 서울발레시어터의 <클라라 슈만>, 노네임소수의 〈WHITE〉, 미나유의 〈The Road〉까지 총 7개 작품이 선정되었다.
지난 2월 17일과 18일 양일간 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에서 올려진 서울발레시어터의 <클라라 슈만>은 발레단의 상임안무가이자 예술감독을 역임한 안무가 제임스 전이 안무를 맡고, 한양대 음대 교수로 재직 중인 소프라노 박정원이 음악감독으로 참여했다.
주인공 클라라 슈만은 현대무용수 이윤희가, 로베르토 슈만은 서울발레시어터 전 주역무용수 정운식이, 요하네스 브람스는 서울발레시어터 수석무용수 황경호가 맡았다. 제목은 <클라라 슈만>이지만 작품은 클라라와 슈만, 브람스, 세 사람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클라라와 슈만과 브람스, 예술과 사랑의 3중주
결혼 전엔 클라라 비크, 결혼 후에는 클라라 슈만, 그리고 로베르토 슈만과 요하네스 브람스, 서양음악사에서 저마다 중요한 위치를 점유하고 있는 이들 세 사람의 이름 뒤에는 음악적 성취와는 별개의 수식어가 곧잘 따라붙는다.
클라라와 슈만은 부부애의 대명사로, 브람스는 플라토닉한 짝사랑의 대명사로 오랫동안 회자되며 세 사람의 엇갈린 애정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는 동안 후대의 창작자들은 이들의 관계를 모티브 삼아 새로운 예술작품을 만들어냈다. 책과 영화는 물론 오페라와 뮤지컬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변주된 작품들을 만날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의 관계를 이성 간 애정 관계의 틀로만 설명할 수는 없다. 열여덟 살의 슈만을 처음 만난 아홉 살의 클라라는 이미 피아노 신동으로 음악계의 주목을 받고 있었다. 클라라의 아버지 비크의 완강한 반대에 부딪힌 둘은 3년여의 법정 다툼 끝에 결혼에 성공하지만 슈만은 자신보다 유명한 아내를 질투했고 클라라는 남편이 작곡하는 동안 피아노 연습을 할 수 없어 괴로워했다.
부부는 촉망받는 젊은 작곡가 브람스에게 든든한 후원자였다. 슈만이 브람스의 재능에 감동을 받아 <음악신보>에 기고한 평문 ‘새로운 길’은 전 유럽에 브람스의 이름을 알리는 초석이 되었고, 클라라는 브람스에게 음악적 조언을 해주는 것은 물론 자신의 연주회에서 브람스의 곡을 연주하며 그의 명성을 높이는 데 일조했다.
클라라에 대한 브람스의 애정도 마냥 순애보는 아니었다. 브람스는 슈만 대신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게 된 클라라 곁에서 집안 전반의 일들을 관리하고 아이들을 돌보았으며 클라라에게 연서를 보내 마음을 고백하기도 했다. 하지만 2년 뒤 괴팅겐 의대 교수의 딸인 성악가 아가테 폰 지볼테와 약혼하고 그를 위해 여러 편의 가곡을 작곡해 선물하는 등 새로운 사랑에 몰두하는 듯했으나 결혼을 앞두고 속박당하는 것이 싫다며 일방적인 파혼을 선언했다. 그후 클라라의 셋째 딸 율리와 사랑에 빠졌으나 율리는 이탈리아 귀족과 결혼했고, 브람스는 실연의 아픔을 담아 <알토랩소디>를 작곡한다.
음악과 삶 사이에 놓인 예술가의 고뇌
브람스가 슈만 부부가 있는 뒤셀도르프에 온 것은 1853년, 이때 슈만은 가정에 경제적 안정을 가져다준 뒤셀도르프 관현악단의 지휘자 자리를 이미 내려놓고 나날이 심각해지고 있는 망상과 환청에 시달리고 있었다. 라인강에서 자살 시도를 하다가 구조된 슈만은 병원에 입원하게 되고, 그 2년 뒤인 1856년 세상을 떠나고 만다. 공연 전 해설을 하러 무대로 나온 최진수 단장은 세 사람의 생애에서 가장 큰 변화가 일어나는 3년이라는 시간에 주목해달라고 하는데, 이 3년은 브람스가 슈만 부부 앞에 나타난 1853년부터 슈만이 사망하고 클라라가 홀로서기를 하는 1856년까지를 가리킨다.
앞 절에서 상술한 바와 같이 세 사람을 이어주고 있는 것은 이성 간 애정만은 아니다. 서울발레시어터의 <클라라 슈만> 역시 삼각관계의 러브스토리로 빠지지 않고 음악과 삶 사이에서 균형을 잡아야 하는 예술가의 인간적 고뇌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총 10장으로 구성된 <클라라 슈만>은 클라라와 슈만의 신혼의 행복했던 한때로 시작해 브람스와의 만남, 양극성 장애로 고통 받다 자살을 시도하는 슈만, 슈만이 정신병원에 입원한 뒤 연주활동에 매진하는 클라라, 슈만의 죽음과 브람스의 구애, 홀로 서는 클라라의 모습을 보여주며 속도감 있게 전개된다.
그러나 70여 분 남짓한 길이의 단막극에서 이를 보여주려다 보니 사건이 병렬적으로 나열되며 플롯은 단조로워지고 장면 전환은 분주해진다. 병이 악화되어 더 이상 작곡을 할 수 없는 슈만과 그를 돌보면서도 연주를 계속해야 하는 클라라의 고통이 교차되는 동안 브람스는 클라라의 곁을 맴돌기만 할 뿐이다. 브람스의 연정은 클라라가 마음을 받아주지 않는데도 그의 곁을 떠나지 않고 질척거리는 스토커처럼 묘사된다. 극 안에서 자신의 서사를 부여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단막극인 데다 제목이 ‘클라라 슈만’이기에 브람스에게 서사가 더 주어질 필요는 없다. 이는 브람스에게 서사가 충분치 못해서 발생한 문제라기보다 서사가 부족한 브람스에게 과잉된 감정을 부여해 벌어진 문제다.
슈만과 브람스가 각자의 감정을 분출해내느라 자칫 어수선해질 수 있었던 무대에서 중심을 잡고 극을 이끌어가는 것은 클라라다. 클라라 역의 이윤희는 깔끔한 움직임 안에 진폭이 큰 감정을 잘 갈무리해 넣으며 테크닉과 연기력 어느 한쪽도 과잉이 되지 않는 균형의 미를 보여주었다.
클라라는 슈만이 라인강에서 자살 기도를 했을 때 막내인 여덟 번째 아이를 임신하고 있었고, 갓난아이가 딸린 몸으로 슈만을 병원에 입원시키자마자 무대에 복귀해 연주활동을 이어가야 했다. 클라라는 일흔이 넘어서까지 피아니스트로 무대에 올랐고, 평생에 걸쳐 1,300회 이상 연주회를 열었는데, 보면대 앞에 앉아 악보와 고통스러운 싸움을 이어가는 클라라와 그런 클라라를 뒤에서 받쳐주는 브람스의 듀엣은 클라라에게 예술활동인 동시에 생계활동이었던 음악의 의미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명장면이다. 이 장면은 뒤이어 슈만이 세상을 떠나고 혼자가 된 클라라가 브람스의 구애를 끝내 거절하고 검은 숄을 고쳐 두르고 고개를 꼿꼿이 드는 장면과 연결되며 클라라를 슈만의 아내가 아닌 단독자인 ‘음악가 클라라 슈만’으로 재명명한다.
음악에도 성별 구분이
공연 반주를 하는 연주자들이 무대 아래 혹은 무대 뒤쪽에 자리를 잡고 공연이 끝날 때까지 위치 변동 없이 연주를 하는 것과 달리 이 무대에서는 장면 전환과 함께 연주자들의 위치도 함께 조정되는 것이 특징이었다. 무대에 역동성을 더하려는 목적이었겠으나 결과적으로는 무대의 주인공들인 클라라와 슈만 부부, 브람스, 연주회의 관객들과 음표를 상징하는 무용수들, 실제 연주자들이 뒤섞이며 무대의 혼란을 가중시키는 역할을 했다.
음표는 여성 음표와 남성 음표로 성별을 나누기까지 해 복잡한 무대를 더욱 복잡하게 만들었다. 음표들의 의상은 양쪽 다 피아노 건반에서 모티브를 따온 듯했는데, 심플한 레오타드 차림의 남성 무용수들이 움직임으로만 음악을 표현할 때 여성 무용수들은 검은 건반과 흰 건반을 모두 보여주려는 듯 검은색과 흰색이 겹쳐진 튀튀 스커트에 음표를 상징하는 머리핀까지 꽂아 장식성을 더했다. 혹시 남성 음표는 주 멜로디를, 여성 음표는 꾸밈음을 표현한 것일까. 아니면 클래식 연주회에서 여성 연주자의 성장은 드레스로, 남성 연주자의 성장은 턱시도로 달리 표현되는 방식을 그대로 가져왔을 뿐일까. 안무가의 의도가 어느 쪽이었건 간에 음표의 추상성에서마저 성별을 구분해서 표현할 필요가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다시 돌아봐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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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창단된 서울발레시어터가 〈Being〉 등과 같은 작품을 내놓으며 창작발레를 새롭게 정의함과 동시에 혁신의 아이콘으로 군림하던 것도 벌써 한 세대 전의 일이 됐다. 이제는 창작발레에서도 서사가 있는 작품보다 추상적인 움직임 중심의 컨템포러리 작품이 대세가 됐고, 또 다른 한편에서는 서사나 움직임에 앞서 새로운 콘셉트를 발굴하는 데 더 큰 관심을 보이기도 한다.
서울발레시어터의 이번 신작 <클라라 슈만>은 실존했던 예술가들의 생애를 모티브로 하면서도 극적인 러브스토리에 기대거나 이야기에 새로운 해석을 불어넣기보다는 움직임의 조형미에 현장에서 라이브로 연주되는 음악의 선율미를 얹는 방향으로 공연을 완성했다. 역시 조형미가 강조된 안무가 인상적이었던 2021년 작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음악 쪽으로 한 발짝 이동한 모양새다. 새로움을 외치며 창작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각자의 대답을 내놓기 바쁜 시대에 서울발레시어터는 오히려 기본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대답하고 있는 듯하다. 어쩌면 이 대답은 서울발레시어터가 김인희-제임스 전 이후 시대를 준비하는 중요한 키워드일지도 모르겠다.
글_ 윤단우(공연칼럼니스트)
사진제공_ 서울발레시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