겉멋은 없었다. 모두가 그랬다. ‘권번춤나들이’가 그랬다. 서울남산국악당과 서울교방이 공동기획한 프로그램으로 이틀간 펼쳐졌다. 2월 17일은 <춤의 정원>이라는 제목과 함께 ‘장인숙 희원무용단 4대를 잇다’가 부제였다. 2월 18일은 <여섯 개의 봄>이란 제목으로 ‘서울교방 6인전’이 펼쳐졌다. 이틀 동안 진심과 열정의 무대를 지켜봤다. 참 행복하다. 이 무대를 본 지 보름이 지났는데, 아직도 여러 춤이 가슴 속에 살아있다. 두 번에 나눠서 글을 쓰겠다. 여기선 우선 두 사람의 춤만을 대상으로 삼겠다. 김경란과 서정숙이다.
김경란은 ‘동편제’와 같은 춤이라면, 서정숙은 ‘중고제’와 같은 춤이다
두 사람의 춤을 먼저 특별히 꼽는 이유가 그러하다. 춤과 음악은 매우 밀접하다는 상투적인 얘긴 하고 싶지 않다. 그러함에도, 이 두 사람의 춤의 가치를 정확히 짚어내기 위해선, 국악과 연관된 개념을 가져오지 않을 수 없다.
소리도 춤도, ‘동편’이 귀하다
김경란의 춤은 동편제의 특징이 아주 잘 살아있는 춤이다. 동편제와 서편제를 아주 칼로 베듯 가를 순 없다. 여기서 동편제와 서편제의 구분은 전승 계보에 의한 구분이 아니라, 무대에서의 ‘느낌’에 의한 구분이다. 21세기의 국악계에서도 서편제를 잘하는 명창은 많다. 반면 동편제를 잘하는 소리꾼은 상대적으로 드물다. 21세기에 새삼 남녀를 구분해서 말하는 게 어떨까 싶기도 하지만, 아쉽게도 동편제(동편소리)를 잘하는 여성은 더 드물다. 역으로 남성 소리꾼 중에선 서편소리의 느낌이 더 많이 나는 명창도 많다. 어느 게 좋다는 게 아니다. 지금의 국악계가 대체로 그렇다는 말이다.
동편과 서편의 차이를 춤에도 적용해보자. 역시 마찬가지다. 서편 느낌의 춤꾼은 참 많다. 참 잘 춘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동편 느낌을 알고 추는 춤꾼은 매우 드물다. 지금 이 시대에 동편이 많으면 서편에 주목해야 하고, 서편이 많으면 동편에 주목해야 한다. 판소리가 그렇듯, 전통춤에서도 그렇다. 아니, 그래야만 한다. 그러나 아쉽게도 나는 동편제와 같은 춤을 본 적이 많지 않다.
김경란, 갈필과 같은 춤
춤을 말할 때 선(線)이 등장한다. 선은 글씨와도 연관된다. 글씨로 친다면 동편은 갈필(渴筆)과 같은 것이고, 서편은 세필(細筆)과 같은 것이다. 세필처럼 정교한 느낌으로 춤을 추는 것도 참 좋다. 이번 이틀간의 공연에서도 그런 춤을 보았다. 역시 춤에서도 비교컨대 서편제와 같은 춤, 세필의 춤은 많았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동편제와 같은 춤, 갈필의 춤은 적었다. 춤판이 이러할진대, 김경란의 춤은 얼마나 독특하게 보일까? 김경란의 춤을 보면서, 동편제의 소리를 듣는 기분이 들었다. 춤판에서도 이런 춤사위가 더 많아지길 바라는 마음이다.
동편제는 서울을 중심으로 해서 전라도의 왼편에 해당하는 산간의 소리다. 서편제는 전라도의 오른편에 해당하는 평야의 소리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산간의 문화는 투박하고 강인하며, 평야의 문화는 소박하고 아름답다. 이건 차이를 말하는 것일 뿐 우열은 아니다.
김경란의 춤은 전형적인 ‘동편제 춤’이다. 김경란의 춤은 소박하기보다 투박하며, 아름답기보다 강인하다. 서정숙의 춤은 서편제의 춤은 아니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말한다면, 일단 서정숙의 춤은 ‘서편제 춤’으로 볼 수도 있다. 서정숙은 투박하기보다는 소박하며, 강인하기보다는 아름답다. 강인함은 둘 다의 특징이긴 하지만, 김경란과 서정숙은 다르다. 그러나 서정숙의 춤을 ‘서편제 춤’이라고 할 수 없는 ‘또 다른 중요한 가치’가 있다. 바로 ‘중고제 춤’이라 명명할 수 있는데 이에 대해선 조금 있다가 얘기하겠다.
각고면려(刻苦勉勵) vs. 은인자중(隱忍自重)
김경란은 각고면려(刻苦勉勵), 서정숙은 은인자중(隱忍自重), 두 사람의 춤을 깊이 새겨보면서, 연결되는 사자성어가 그러다. 김경란에게선 각고면려(刻苦勉勵)가 느껴진다. 고생을 무릅쓰고 힘쓰고 또 힘쓰는 느낌이다. 서정숙은 은인자중(隱忍自重)이다. 마음으로 참고 또 참으면서 인내하는 모습이다.
참는다는 점에서 둘 다 일치하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미묘한 차이가 있다. 김경란은 새길 각(刻)자로 시작하는 것처럼, 이렇게 새겨지는 것은 나뿐만 아니라 남도 알게 된다. 반면 서정숙은 숨을 은(隱)자로 시작한다. 이건 웬만해선 다른 사람이 눈치채기 어려운 경우다. 각고면려는 외부적으로 드러나지만, 은인자중은 상대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苦에서 古 vs. 忍에서 心
김경란의 살풀이춤과 서정숙의 살풀이춤을 모두 인정한다. 그들이 추는 살풀이춤의 뿌리가 같더라도, 나와 같은 평자가 느끼게 되는 건 참 다르다. 똑같이 살풀이에 기반을 둔 춤을 추고 있지만, 김경란은 각고면려라면, 서정숙은 은인자중이다. 나는 이게 살풀이춤의 상반된 두 축이라고 생각한다.
조금 말을 달리해보자. 김경란의 살풀이춤을 보면, 춤꾼으로서의 ‘괴로움’이 보인다. 서정숙의 살풀이춤에는 춤꾼으로서 ‘참을성’이 느껴진다. 김경란의 춤은 고(苦, 괴로움)의 춤이요, 서정숙의 춤은 인(忍, 참아냄)의 춤이다. 만약 여기서 한 발 더 나가 두 사람의 춤을 더 얘기할 수 있을까? 이건 앞으로 내가 평자(評者)로서의 숙제인데, 김경란의 춤이 더 ‘옛날’(古)가 느껴진다면, 서정숙의 춤은 더 ‘마음’(心)이 느껴진다. 고(苦)안에 고(古)가 있고, 인(忍)안에 심(心)이 있기에 그렇다.
서정숙, 양비론적인 춤
서정숙의 춤은 어떠한가? 동편제도 아니고, 서편제도 아니다. 어쩌면 동편과 서편을 서로 넘나드는 춤인가? 그렇게 말하긴 어렵다. 그의 춤은 중고제라고 해야 한다. 소리로 치면 딱 그렇다. 그런 소리의 느낌이 그의 춤에서도 그대로 살아있다.
중고제는 우조(羽調)와 계면조(界面調)를 두루 포용하지만, 이걸 또한 크게 티 내지 않는다. 강인한 우조와 서글픈 계면조를 엄밀하게 구분하지 않는다. 서정숙의 춤이 딱 그래 보인다. 서정숙의 춤을 보면, 여기선 슬픈 느낌이고, 저기선 기쁜 느낌이라고 말하는 건 어리석다. 그녀의 춤은 감정을 숨기고 있다. 인내로서 감추고 있다. 그러나 언제나 그럴 수 있는 것일까? 어쩔 수 없이 드러나는 것, 서정숙의 춤에 빠지게 되면 그런 마음이 점차 읽혀진다. 서정숙의 춤은 ‘동편제의 춤’도 ‘서편제의 춤’도 다 거부한다. 양비론(兩非論)적인 입장에서의 서정숙 춤! 그건 한마디로 말하는 게 좀 무리다.
그러함에도 서정숙의 춤이 ‘중고제 춤’인 분명한 이유가 있다. 중고제의 특징이 ‘노래라기보다 마치 글을 읽어 가는 듯한’ 느낌이 있는 것처럼, 서정숙의 ‘중고제의 춤’에서는 ‘춤이라기보다는 마치 일상적 움직임인 듯한’ 느낌이 살아있다. 춤이 ‘춤처럼’ 안 보이는데, ‘춤같은’ 특징이 살아있다고 할까? 이게 서정숙의 매력이다.
들추어내는 김경란 vs. 드러내지 않는 서정숙
동편제와 서편제는 그 스타일이 다르다손 치더라도, 모두 ‘소리’처럼 들린다는 공통점이 있다.
소리를 소리답게 한다. 반면 중고제는 때론 소리처럼 들리지 않는다. ‘풍월’처럼 들린다. 책을 읽는 것과 같은 느낌이다. 판소리와 같은 노래를 부르는 게 아니라, 정가(正歌)처럼 읊는 느낌을 받는다.
앞의 내용에서의 ‘소리’를 춤으로 바꿔보자. 동편제는 소리를 소리답게 하는 것처럼, 김경란의 춤은 춤을 춤답게 하는 매력이 있다. 반면 중고제라는 것이 소리여도 소리답지 않게 들리는 것이 특징인 것처럼, 서정숙의 춤판에서는 때론 춤적인 움직임이 아닐 때가 있다. 가만히 있거나 일상적인 움직임처럼 보일 때가 있다. 이렇게 서정숙의 춤은 오히려 흡입력이 강하다.
동편제와 중고제의 차이를 그대로 김경란의 춤과 서정숙의 춤에 적용할 수 있다. 김경란은 개인적인 고뇌 또는 대사회적인 이슈를 ‘들추어내서’ 고발을 하는 느낌도 받게 되는데, 서정숙은 개인적인 고뇌 또는 대사회적인 이슈를 ‘감춰두고서’ 궁금증을 유발한다.
정답 알려주는 김경란 vs. 해답 찾아가는 서정숙
김경란의 춤은 명쾌하다. 그가 지금 뭔가를 주장(主張)하고 있는 게 보인다. 정답(正答) 같은 희열이 있다. 김경란은 아주 분명한 메시지를 정답처럼 알려준다. 반면 서정숙의 춤은 주목(注目)하게 하는 힘이 있다. 서정숙은 주장하지 않는다. 내가 지금 왜 이렇게 춤을 추고 있는지를, 관객에게 퀴즈처럼 문제를 내는 느낌이랄까? 서정숙은 자신을 중심으로 해서 관객에게 함께 해답(解答)을 찾아가자고 제시를 하는 느낌이다. 서정숙의 춤은 때론 모호하지만, 그게 서정숙만의 매력처럼 다가온다. 그녀의 춤에 빠지게 되면, 뭔가 함께 갈 길이 보인다고나 할까?
김경란의 춤은 ‘완성’이라면, 서정숙의 춤은 ‘과정’이다. 목표를 지향하는 김경란과 과정을 즐기는 서정숙의 차이라고 일단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는 좀 다르다. 김경란은 이제 한 명의 춤꾼으로서 이미 자기 세계를 완성했다고 볼 수 있지만, 서정숙은 한명의 춤꾼으로서 아직 자기 세계에 도달한 것 같지는 않다.
왜 이렇게 단정할 수 있을까? 다시 동편제로 돌아오자. 동편제는 매우 강건하고 웅장한 소리다. 따라서 ‘힘’을 매우 중시한다. 자신의 내부로부터의 에너지를 밖으로 드러내야 한다. 그래야만 동편제 특유의 ‘통성’이 전해지며, 여기서 청중은 감동한다. 그럼 이게 다인가? 동편제의 최고의 지향점일까? 동편제의 최고 지향점은 ‘힘의 발산’일까? 아니다. 힘을 준다고 해서 동편제인가? 아니다. 궁극적으로 힘을 뺄 줄 알아야 한다. 김경란의 춤에서 감동하게 되는 건, 김경란의 춤에서 대단한 공력이 느껴지는 건, 그의 춤이 적절하게 ‘힘을 빼고 추는 춤’이기에 그렇다. 김경란의 이러한 경지를 꽤 높이 평가한다.
그런데 의문이 생긴다. 과연 그가 예전부터 그랬을까? 아니다. 내 생각엔 그렇다. 아주 오래전 이라 기억이 확실치는 않지만 그랬던 것 같진 않다. 오히려 일반적인 춤꾼의 그것보다도 힘이 더 들어가 있었다. 이념의 힘, 투쟁의 힘에 열정과 분노가 뒤섞여 있었다. 이런 김경란이 아직도 내 뇌리에 박혀있다. 그랬던 김경란은 언제부터 지금과 같은 김경란으로 바뀌게 되었을까? 체념과는 아주 다른 ‘달관의 경지’로 도달했을까? 힘을 준 ‘웅변’이 아니라, 힘을 뺀 ‘침묵’과도 같은 메시지가 담긴 춤의 세계로 가게 된 것일까?
교방춤의 수련을 통해 터득했을 것 같은 ‘힘을 뺀’ 김경란
김경란은, 나 또는 나와 같은 세대에겐 학생운동 그리고 문화운동과 연관되는 중요한 인물이다. 연우무대(연극), 한두레(춤), 꽃다지(노래)의 공연에서 김경란을 만났다. 황석영 <장산곶매>는 문학이지만, 이걸 공연 또는 춤과 연관해서 가장 먼저 기억하는 인물이 김경란이다. 이 때의 김경란은 전형적인 ‘힘’의 춤꾼이었다. 힘 있게 주먹을 쥐는 춤꾼이었다. 마당패, 굿패, 풍물패의 리더로서의 김경란이었다. 분노를 유발해서 각성을 촉구하는 역할이었다고 해도 좋을까?
이건 나뿐 아니라, 나와 동시대가 생각하는 김경란이란 인물이 아닐까 싶다. 여기에 나는 또 한 모습의 김경란에게 끌렸던 건 사실이다. 영화 <바보선언>(1983년, 이장호 감독)과 영화 <그 섬에 가고 싶다>(1993년, 박광수 감독)를 볼 때, 김경란이 겹쳐졌다. 영화 속에 춤꾼 김경란이 등장하는 건 아니라도, 김경란이란 인물의 ‘삶의 지향점’과 ‘춤의 움직임’을 거기서 만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또한 탈춤과 마당극을 기반으로 ‘민중지향 문화운동’의 연장선이다. 거기엔 일단 ‘힘을 뺄 줄 아는’ 김경란은 존재하지 않았다. 김경란의 춤이 힘을 빼면서 더 깊은 세계를 지향했다고 생각된다. 언제 어디서 무엇을 통해서, 김경란은 이런 득도(得道)와 같은 춤을 터득했을까? 이에 대해서는 나 또한 더 내공을 쌓고 나서 언젠가 제대로 써야 할 테마 중 하나다.
나 또한 어떤 계기가 있어서 ‘힘을 빼고’ 세상을 바라보게 될 때, 김경란의 진면목을 더 깊게 알게 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비슷한 의문으로 다시 한 번 질문해보자. 김경란은 어떻게 이렇게 힘을 뺀 경지에서도 ‘동편제의 춤’을 만들어낼 수 있었을까? 동편제 또한 힘을 주는 것을 넘어서 궁극적으로 힘을 뺄 줄 알아야 하겠는데, 김경란은 어떻게 동편제 또는 동편제 춤의 궁극적인 지점을 항해갈 수 있었을까? 이에 대해서는 앞으로 여러 각도에서 생각해 봐야 하나, 일단 추측해 보건대 교방춤을 배우고 익히길 반복하면서 터득된 게 아닐까 싶다.
“김경란에게선 김금화가 보이고, 서정숙에게선 한영숙이 보인다.”
이 말은 매우 조심스럽지만, 여기서 꼭 하고 싶은 얘기다. 서울교방 동인들이 그렇듯이, 그들의 춤은 ‘틀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움’이 특징이다. 그들 춤의 원류는 교방춤이요, 더 정확히 좁혀서 말하면 김수악(진주), 조갑녀(남원), 장금도(군산)이다.
그런데 김경란과 서정숙을 볼 때마다 늘 느껴지는 또 다른 인물이 있다. 오히려 이 세 분보다도 더 근원적인 예술적 DNA를 만들어 준 인물이 존재하는 것처럼 겹쳐 보인다. 김경란은 황해도 큰무당 김금화(1931-2019), 서정숙은 명무 한영숙(1920-1989)이다. 지금 이 땅에 김금화만신과 한영숙명무의 계보를 이어가는 출중한 분들이 많다. 그들에게서 물론 두 분의 모습을 확연히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김경란에게서 보이는 김금화만신’과 ‘서정숙에게서 보이는 한영숙명무’는 좀 다른 입장이자 다른 느낌이다. 무대 위의 김경란과 서정숙을 보면, 두 사람이 겹쳐지는 지점이 있다. 김경란 자신과 서정숙 자신도 그리 생각할까?
‘서울교방’은 ‘권번예맥’을 잇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두 사람의 무대에서의 애티튜드부터 시작해서 움직임에서 다른 맥락이 느껴진다. 김금화만신과 한영숙명무를 객석에서 오래도록 지켜본 내게는 참 그렇다. ‘왜 그렇게 보일까?’에 대해선, 평자와 나뿐 아니라 본인들도 깊게 생각해봤으면 좋겠다.
비움의 미학 & 그늘의 미학
두 사람에게서 공히 느껴지는 정서가 또한 ‘비움의 미학’과 ‘그늘의 미학’이다. 이건 거슬러 올라가서 김금화와 한영숙과도 연관된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하고 있다. 서울교방의 동인을 형성하게 만든 권번 출신의 세 분의 예인도 해당할지 모른다.
‘비움의 미학’은 김경란과 서정숙에게 모두 해당한다. 그러나 여기서 그 정도를 얘기한다면, 서정숙의 춤에서 더 그렇다. 나는, 동편제와 중고제의 정서적 차이 또한 그렇다고 생각한다. 중고제가 동편제보다 더 ‘내려놓는 것’이 많다! 조금 다른 각도에서 생각한다면, 이건 김경란과 서정숙의 차이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내게 김경란은 지자(知者)의 춤으로 보이고, 서정숙은 인자(仁者)의 춤으로 보인다. 서울교방의 동인들도 그렇게 생각할까? 두 사람의 춤을 좋아하는 분도 이 말에 동의할까?
‘그늘의 미학’ 또한 두 사람에게 다 해당한다. 그런데 이건 김경란에게서 더 깊이가 느껴진다.
한 시대를 누구보다 치열하게 살았던 춤꾼 김경란의 춤을 논할 때 ‘그늘’은 중요한 키워드가 된다. 어떤 한 시대를 온몸으로 받아들이면서 의연히 마주하며 살아온 사람에게서 느껴지는 고귀한 아픔이라고나 할까? 그걸 말로 들어내거나 글로 풀어내지 않고, 온몸으로 감내한 사람에게선 ‘그늘의 미학’이 더 숭고하게 전달된다.
그런 것에 일찍이 지치고, 또 지쳐서일까? 나의 헛짚은 속단일지 모르나, 이제 김경란에게 있어서 ‘삶’은 ‘춤’의 하위개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른다. 이미 김경란은 개인적 삶을 뒤로 하면서 ‘굿을 통해서 춤으로’ 다가갔다면, 서정숙은 지금도 ‘춤을 통해서 삶으로’ 가는 과정이거나, ‘춤을 통해서 삶을’ 깨달아가는 인상을 받게 된다. 과연 이런 내 생각이 맞을까 아닐까? 앞으로 두 사람의 춤을 더 파고들면서 답을 얻게 되길 바라며, 이 글의 마지막 문장을 이렇게 매듭지으려 한다.
“김경란에게 춤은 목표이고, 서정숙에게 춤은 과정이다.”
글_ 윤중강(공연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