댄스포스트코리아
지난자료보기

로고

무용리뷰

공연비평

“I am not what you think I am”: 볼쇼이발레단 <올란도>

2021년 3월 24일 볼쇼이발레단에서 초연을 한 발레 <올란도(Орландо; Orlando)>는 20세기 영국의 모더니즘 작가이자 페미니즘 소설가인 버지니아 울프(Virginia Wolf)의 소설 『올란도(Orlando)』(1928)를 원작으로 한 작품이다. 일반 대중들에게는 샐리 포터(Sally Potter)가 감독한 1994년 영화로 더 친숙할 것이다. 중성적 매력을 가진 틸다 스윈튼(Tilda Swinton)이 350년의 세월을 거쳐 가며 16세 소년 올란도부터 여자가 된 후 30대 올란도까지 연기를 한 인상적인 영화였다. 발레 작품은 영화에서 상당 부분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였다.



ⓒ Bolshoi Theatre. 


안무가 크리스티안 슈푹(Christian Spuck)은 독일 출생으로 취리히발레단의 예술감독이다. 함께 작업한 클라우스 슈판(Claus Spahn-대본), 루푸스 디드비스츄스(Rufus Didwiszus-무대 디자인), 엠마 라이엇(Emma Ryott-의상), 마르틴 겝하르트(Martin Gebhardt-조명)는 모두 슈푹과 오랫동안 팀을 이루어 작업해왔다. <올란도>는 기존의 작품을 볼쇼이로 옮겨온 것이 아니라 새로운 작품을 위해 유럽의 제작팀이 러시아에 와서 작업한 결과물이다. 고전 발레의 언어에 익숙한 볼쇼이발레단에서 컨템포러리 발레를 작업하는 것은 양쪽 모두에게 새로운 시도이자 도전이었다. 초연 이후 이 작품은 발레단의 레퍼토리가 되어 매년 무대에 오른다. 최근 공연은 2023년 2월 11-12일에 있었다. 내가 본 공연에는 엘레노라 세베나르드(Элеонора Севенард)가 올란도를 맡았다. 초연 당시의 마리아 비노그라도바(Мария Виноградова)나 올가 스미르노바(Ольга Смирнова)가 다소 중성적인 매력을 지녔다면, 세베나르드는 귀엽고 사랑스러운 외모로 미소년 올란도와 여성미 가득한 올란도를 색다르게 소화해냈다.


발레 <올란도>는 2막 7장(프롤로그 포함 8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남자로서의 올란도로 1막을 시작하지만 1막의 마지막은 여자가 된 올란도로 끝을 맺는다. 2막은 여자로서 새로운 삶을 사는 올란도의 이야기가 펼쳐졌다. 16세기부터 20세기까지, 올란도는 주요한 사건들을 겪으며 350년이라는 시간을 관통하는데, 시간을 건너 뛸 때마다 7일 동안 계속해서 잠을 자는 기묘한 경험을 한다. 장면이 전환될 때마다 『올란도』 소설의 몇 구절이 러시아어로 낭송되었고, 무대 위와 양옆의 스크린에 영어 원문이 자막으로 비추어졌다. 매우 압축적인 스토리의 흐름을 부드럽게 이어나가기 위해서 이와 같은 설명적 장치가 필요했을 것이라 생각되지만, 오히려 구체적인 서사의 끈에서 자유로워졌으면 어땠을까 싶은 아쉬움이 조금 있다. 물론 문학 베이스의 작품이기에 버지니아 울프의 상징적이고 아름다운 언어의 깊이를 그대로 담아내고자 했을 연출 의도도 담겨있다고 생각한다.

  

ⓒ Bolshoi Theatre.

 

작품은 추상과 구체의 경계를 끊임없이 넘나들며 현실적 역사물과 판타지적 시간여행을 동시에 경험하는 묘한 감흥을 주었다. 관객으로서 나는 마치 한 발은 땅에 딛고 한 발은 공중에 붕 떠있는 것 같았는데, 현대적인 요소가 구체적인 역사적 장치에 아무렇지도 않게 끼어들어갔을 때의 부조화의 조화에서 오는 자연스러운 이질감을 느꼈다. 그러한 장치는 무대의 구성과 의상에 의해 세련되게 시각화되었다.


사방이 어둡고 검은 블랙박스의 미니멀한 무대는 아무 것도 없기에 무엇이든, 어디든 될 수 있는 공간으로 연출됐다. 추상적 공간에 구체적 오브제를 자리시킴으로써 직관적이고 세련된 방식으로 구상성이 부여됐다. 올란도가 시를 쓰는 언덕은 곧 촛대의 진열과 함께 엘리자베스 1세를 맞이하는 궁이 되었고, 하늘에서 내리는 반짝이는 눈과 함께 사샤 공주와의 첫사랑을 꿈꾸는 장소가 되었다. 성소피아 성당의 모형으로 콘스탄티노플이 되는가 하면 몇 개의 화려한 로코코 양식의 의자로 18세기 로코코 저택이 되었다. 간간히 천장에서 내려오는 사각 액자(스크린)에는 형체를 알아보기 힘든 이미지들(달려가는 말, 나무 형체, 저택 내부의 한 귀퉁이 등)이 반영되었다. 구상과 추상 사이 어딘가에 자리한 이 이미지들은 쏜살같이 지나가는 시간 혹은 공간적 분위기를 나타내는 장치로 작용했다. 뚫려있는지 막혀있는지조차 보이지 않는 암흑의 뒤 배경을 통해 인물들이 나타나고 사라졌다. 이 블랙홀과 같은 장치는 시간과 장소의 순간이동을 가능케 하는 마법의 도구로써 작동했으며, 이를 통해 현실과 판타지가 매끄럽게 넘나들었다.


현실과 판타지의 충돌은 의상에도 반영되었다. 올란도를 비롯한 주요 등장인물들은 시대의 흐름에 따라 당대의 역사를 보여주는 의상을 입었다. 엘리자베스 1세를 상징하는 화려하고 과장된 러프와 파팅게일, 붉은색 곱슬 가발은 누가 봐도 르네상스의 복식이다. 콘스탄티노플에 영국대사로 파견되었을 때의 올란도와 귀족들은 바로크식 복식을 했다. 여성이 되어 영국으로 돌아온 올란도는 로코코양식의 파니에를, 쉘머딘을 만나는 19세기에는 영국 빅토리아 양식의 의상을 입었다. 1막의 남자 올란도와 달리 여자 올란도는 포인트 슈즈를 신고서 성별의 변화와 움직임의 다름을 표현했다. 마지막 장면인 20세기의 여성이자 엄마로서의 올란도는 바지 수트를 입음으로써 <올란도>의 큰 주제인 젠더를 다시금 환기시켰다. 반면, 시간을 비껴가는 것은 보이지 않는 시간의 소용돌이를 시각화한 군무진의 검은 의상, 그리고 쉘머딘을 만나는 순간의 올란도였다. 올란도는 쉘머딘을 통해 진정한 사랑과 더불어 독립적인 한 인간으로서의 자유를 깨닫는다. 그 진리에 다다랐을 때, 특정 시간과 공간에 얽매이지 않을 수 있었던 올란도의 상태가 시대를 반영하지 않는 의상의 자유로움에도 나타났다.

  

ⓒ Bolshoi Theatre.

 

크리스티안 슈푹의 안무는 크게 눈에 띠지 않았다. 특별한 움직임 언어가 없었다는 뜻이기도 하고, 무대, 의상, 조명, 음악 등이 상대적으로 춤을 압도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올란도의 감정과 독백을 표현하기 위해 엘가의 첼로협주곡의 첼로 선율을(첼로는 인간의 목소리를 닮은 악기로 꼽힌다), 시간의 반복적인 전환을 나타내기 위해 필립 글래스의 바이올린 콘체르토 1번을 사용했는데, 춤 움직임보다 음악이 더 기억에 남는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슈푹은 한 인터뷰에서 “<올란도>에서는 움직임을 드러내기보다 스토리를 전달하는 역할로 춤을 사용했다”고 말한 바가 있다. 그래서일까. 스토리 속으로 춤이 묻혀 들어가 버린 듯했다. 


<올란도> 서사에서 시간여행의 촉발제가 되는 엘리자베스 1세와의 대면은 중요한 장면이다. 그렇기에 무대를 압도하는 여왕의 이미지에 걸맞은 움직임을 기대했지만 신비한 분위기를 자아냈을 뿐 특별한 임팩트를 주지 못했다. 쉘머딘과의 이인무 또한 아름다웠지만 아쉬움이 남는 부분이었다. 이 장면은 여자가 된 올란도가 성숙한 사랑을 하며 자유로운 개체로서의 자아를 찾고 한 단계 성장하는 대목이다. 슈푹은 엘리자베스 1세와 쉘머딘을 같은 발레리노에게 맡겼다. 그만큼 그 두 장면은 비중이 크다는 의미였을 테다. 다른 여러 작품에서 폭발력 있는 카리스마를 보여주었던 아르테미 벨랴코프(Артемий Беляков)가 쉘머딘을 춤췄으나 <올란도>에서는 끓는점에 미처 도달하지 못한 채 춤이 끝나버려 충분한 매력을 발산하지 못했다.

  

ⓒ Bolshoi Theatre.

 

쉘머딘과의 이인무 이후 작품은 급속도로 휘몰아친다. 시간의 소용돌이 속에 빨려 들어간 올란도가 헤매기도 하고, 350년의 세월 동안 올란도에게 의미를 주었던 인물들인 사샤, 니콜라스 그린, 쉘머딘이 함께 튀어나왔다가 들어가기도 했다. 타임머신을 타고 그 오랜 시간과 관계를 다시금 상기하듯 휘리릭 스쳐 지나가는 인간군상들, 그 모든 것을 충실히 살아내고 난 후에야 올란도는 한 명의 진정한 개인이라는 정체성을 획득했다. 350년에 걸친 길고도 넓은 서사에도 불구하고 <올란도>는 결국 ‘한 인간의 자아 찾기’ 과정으로 점철된다. 올란도는 다양한 시대에서 다양한 인물들을 만나 죽음, 사랑, 시(자기실현), 성(sex), 자유를 깨달으며 성장했다. 남자 올란도가 여자가 되었을 때 그는 놀라지 않고 말한다. “내가 여자이건 남자이건 중요치 않아. 나는 그냥 나야.” 그러나 여러 가지 시대 사회적 제약으로 인해 올란도의 온전한 자기 정체성은 아이를 낳고 엄마 올란도가 되어서야 몸소 깨닫게 된 것이다. “나는 그저 나”라는 것을, “당신이 생각하는 나는 진정한 내가 아니라는 것(I am not what you think I am)”을.


장난감을 갖고 노는 아이를 옆에 두고, 무대 한 가운데에서 자유롭게 춤추는 올란도의 움직임이 그토록  가볍고 행복할 수 있었던 것은 기나긴 시간과 인간관계의 굴레를 벗어나 비로소 삶을 제대로 마주하고 깨달음을 얻었기 때문이다. 이 마지막 십 여 분간의 마법과 같은 시간여행과 올란도의 솔로에 와서야 안무가 슈푹의 춤이 마침내 빛을 발했다. 마치 일부러 모습을 숨기고 있었던 것처럼, 스토리텔링 속에 묻혀 있던 움직임이 스스로 모습을 드러내는 아름다운 순간이었다. 

  


글_ 이희나(춤평론가)

사진제공_ Bolshoi Theat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