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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틱과 클래식을 넘나드는 발레의 환상을 경험하다: 볼쇼이발레단 <쇼피니아나> <파키타 그랑 파 클래식>

지난 3월, 볼쇼이발레단이 단막 발레 두 편을 더블빌로 구성하여 무대에 올렸다. 하나는 〈쇼피니아나(Шопениана; Chopiniana)〉이고 다른 하나는 〈파키타 그랑 파 클래식(Большое Классическое Па из Балета Пахита; Grand Pas from the Ballet Paquita)〉이었다. 두 작품 모두 스토리가 없는 작품이지만 무대와 의상, 발레의 스타일까지 판이하게 다르기에 공연을 보는 동안 시간여행을 하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했다. 오래된 작품의 경우 시대의 감성에 맞게 무대나 의상을 쇄신하여 다시 제작하는 경우가 있는데 볼쇼이가 레퍼토리를 이어나가는 방식도 그러하다. 이번에 공연된 <쇼피니아나>는 무대와 의상이 리뉴얼되었으며 <파키타 그랑 파 클래식>은 안무가 유리 부를라카(Юрий Бурлака)가 재구성하고 역시 의상과 무대를 리뉴얼한 2022년 버전이었다.

 

Photo by Damir Yusupov/ Bolshoi Theatre.

 

<쇼피니아나>는 러시아 황실 발레학교 출신이자 발레 뤼스(Ballets Russes)에서 활동했던 미하일 포킨(Михаил Фокин)이 20세기 초 안무한 작품으로, 러시아를 제외한 곳에서는 <레 실피드(Les Sylphides)>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이 작품은 모던 댄스를 태동시킨 이사도라 던컨(Isadora Duncan)의 공연(1904년, 페테르부르크 마린스키 극장)에 충격을 받은 포킨이 시도했던 새로운 발레의 하나였다. 러시아의 음악가 알렉산드르 글라주노프(Александр Глазунов)가 쇼팽의 음악 중 폴로네이즈, 녹턴, 마주르카, 타란텔라를 관현악곡으로 편곡하여 <쇼피니아나>라는 제목을 붙였는데, 이 음악에 안무를 하였기에 발레 역시 <쇼피니아나>라고 불렀다. 포킨이 1907년 안무했던 첫 번째 버전은 지금 공연되고 있는 발레 블랑(ballet blanc; 모두 흰 의상을 입고 춤춘다는 의미로 백색 발레라고 부름)의 모습은 아니었고, 네 개의 서로 다른 플롯을 가진 댄스였다. 이어 1908년 3월 8일, 포킨은 완전히 새로운 버전으로 이 작품을 다시 만들었다. 로맨틱 발레(낭만 발레)에 대한 향수를 가득 담은 이 작품은 마리 탈리오니, 루실 그란, 파니 체리토, 카를로타 그리시 등 낭만 발레의 유명 발레리나의 이미지에서 착안하였다. 이 작품은 이후 1909년 파리의 발레 뤼스 공연에서 <레 실피드>라는 제목을 달고 안나 파블로바, 타마라 카르사비나, 바슬라프 니진스키 등 위대한 스타 발레 무용수들의 춤으로 소개되어 지금까지 공연되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로맨틱 발레라 하면 <지젤(Giselle)>을 꼽을 수 있다. <지젤> 2막의 어둡고 쓸쓸하며 어딘가 우울한 분위기, 그것이 <쇼피니아나>를 지배하는 이미지이다. 꿈과 현실의 어딘가에서 마치 백일몽을 꾸듯 몽롱하게 부유하는 듯한 느낌, 그 멜랑콜리가 작품에서 고스란히 느껴진다. 작품을 판타지로 만드는 요소는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어둡고 컴컴한 무대와 은은한 조명, 그 뒤로 아득하게 고대 그리스식 신전 느낌의 배경이었다. 스토리는 없지만, 무대의 배경과 분위기로 보아 젊은 시인으로 추정되는 젊은이가 숲속에서 정령들을 만나 환상을 경험하는 백일몽 같은 짧은 한때를 보여주고 있다. 작품은 젊은 시인을 춤추는 한 명의 발레리노와 다섯 명의 솔리스트 발레리나, 그리고 군무진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들은 쇼팽의 음악에 충실히 맞추어 솔로나 이인무, 삼인무, 군무를 추었다. 여성 무용수들은 모두 <지젤> 2막의 윌리나 <라 실피드(La Sylphide)>의 실피드처럼 종 모양의 흰색 로맨틱 튀튀를 입고 날개를 단 정령들이다. ‘실피드’란 공기의 요정을 뜻한다. 안개 속 어두운 무대에서 흰 의상을 입고 날아다니는 듯 움직이는 발레리나들은 표정의 변화마저 미미하여 더욱 생명체가 아닌 천상의 피조물을 보는듯한 착각을 가져다주었다. 발끝으로 움직이고 점프를 하며 깃털처럼 움직이는 발레리나들의 몸 움직임은 한없이 가벼웠다. 작품은 19세기 낭만주의 시대의 그림 한 폭과 같은 장면으로 시작하여 같은 장면으로 끝을 맺음으로써 극중의 젊은 시인뿐 아니라 발레를 감상하던 관객들마저 “내가 꿈을 꾼 것은 아닌가” 생각하게 만드는 환상을 불러일으켰다.

 

Photo by Damir Yusupov/ Bolshoi Theatre.

 

19세기 말-20세기 초, 풍부한 이야기와 마임, 찍어내는 듯한 형식미에 고도의 기교가 더해진 클래식 발레의 융성기에, 그 틀을 깨고 나온 <쇼피니아나>라는 낭만발레가 포킨이 추구했던 새로운 발레와 맞닿아있었다는 것은 흥미롭다. 이어서 공연된 <파키타 그랑 파 클래식>은 클래식 발레의 전형을 보여주며 <쇼피니아나>와 극명한 대조를 보여주었다. 안개 낀 듯 음습했던 무대는 눈이 부시도록 밝게 빛나는 궁정으로 탈바꿈했다(무대 플로어도 검은 바닥에서 흰 바닥으로 바뀌었다). 검정과 흰색으로 흡사 흑백영화를 보는 듯했던 의상 역시 총천연색의 다채로움이 가득했다. 꿈속에서 부유하듯 움직이던 무용수들은 절제된 움직임으로 현란한 테크닉을 구사했다. 솔리스트들의 춤 자체도 볼거리였지만 군무진들이 일사불란하게 만들어내는 기학학적 대형의 변화 역시 클래식 발레의 특징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파키타>는 프랑스의 안무가 조셉 마질리에(Joseph Mazilier) 안무, 에두아르 델드베즈(Edouard Deldevez)의 음악으로 1846년 4월 1일 프랑스의 파리 오페라 극장에서 초연되었다. 나폴레옹 점령 기간 동안의 스페인을 배경으로 하여 파키타라는 집시 소녀와 루시앙이라는 군인과의 사랑이야기를 다룬 2막 3장의 발레 작품으로, 초연 당시 최초의 발레리나 중 하나였던 카를로타 그리시(Carlotta Grisi)가 주역을 맡았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작품은 군무진의 배치나 안무가 훌륭하지 못했고 판토마임에 과도하게 의지하는 등 작품성을 인정받지 못했다. 1847년 이 작품을 처음 러시아에 소개했던 마리우스 프티파는 1881년 12월 27일, 작곡가 밍쿠스(L. Minkus)의 음악을 더하여 파키타의 결혼식인 3막을 추가하였고 이 3막만을 따로 떼어 더 자주 공연되면서 이를 <파키타 그랑 파 클래식>이라고 불렀다. 사라질 뻔한 <파키타> 원 발레는 프랑스의 발레사학자이자 안무가인 피에르 라코트(Pierre Lacotte)에 의해 복원되었지만 오늘날에도 <그랑 파 클래식>만을 더 자주 무대에 올린다. 어린 학생들의 군무가 있고(이번 공연에도 볼쇼이 학교의 학생들이 등장했다) 솔리스트의 짧은 독무가 나열되기 때문에 발레 학교의 졸업식 등에서도 이 작품을 자주 올린다고 한다.

 

Photo by Damir Yusupov/ Bolshoi Theatre.

 

<파키타 그랑 파 클래식>을 보면 <잠자는 숲속의 미녀> 3막이 떠오른다. 오로라와 데지레 왕자의 결혼식이 열리고 여기 참석한 귀족들의 군무, 결혼식을 축하하는 요정들과 하객 솔리스트들의 베리에이션이 펼쳐지며 주인공 커플의 아다지오-솔로-코다로 이어지는 그랑 파 드 되의 정석으로 대단원의 막을 내리는 방식이다. 여기서 공간적 무대를 스페인으로, 주인공을 파키타와 루시앙으로 치환시키면 큰 뼈대와 구성은 크게 다르지 않다. 코르 드 발레는 한 사람이 움직이는 것 같은 일사불란함과 플로어에 그려내는 아름다운 대형으로 감탄을 주고, 솔리스트들의 베리에이션은 각종 테크닉의 향연이 된다. 발끝으로 구사하는 기교, 정교하고 아름다운 팔 다리의 움직임, 아름답게 웃으면서도 균형을 유지하는 초인적 테크닉, 시원시원한 점프와 32번의 푸에테, 눈 돌아갈 만큼 빠른 회전 등 발레에서 구사할 수 있는 모든 기교를 다 조합해 놓은 것이 이 솔리스트들의 춤이다. 이 베리에이션은 굳이 작품의 스토리와 상관이 없어도 된다. 그랑 파 클래식을 감상하는 재미는 서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압도적인 스케일과 화려함, 그리고 무용수들이 구사하는 테크닉을 즐기는 데에 있다.


이러한 클래식 발레의 매력은 너무도 강렬한 것이어서 보통 발레를 처음 접하는 관객들이 빠져드는 포인트가 된다. 가령, 폴란드, 헝가리, 러시아, 스페인 등의 민속 캐릭터댄스를 비교하거나, 같은 춤을 무용수나 발레단 별로 비교해본다거나, <백조의 호수> <해적> <파라오의 딸> <잠자는 숲속의 미녀> <파키타> 등의 파 드 되를 보면서 32번 푸에테를 도는 포인트를 찾아보는 식이다. 그런데 클래식 발레의 단점 역시 이 부분이라는 것이 아이러니하다. 음악과 의상, 세부 동작은 다르지만 너무나 유사한 구성과 춤이 반복되어 움직임 자체에 집중력이 떨어져버리면 흥미를 잃을 수 있다. 게다가 무용수들이 마치 어려운 묘기를 부리는 서커스 배우들인가 싶을 정도로 관객들이 그러한 고난도의 장면에만 환호할 때, 이것이 클래식 발레의 한계인가 싶은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그렇기 때문에 이번 <파키타 그랑 파 클래식>을 볼 때에도 솔리스트들의 미묘한 움직임 차이와 특징에 집중하려고 최대한 노력했다. 얼마나 깔끔하고 정교하며 절도 있게 떨어지는지, 각 춤의 특징을 살려내고 있는지, 무용수의 강점이 잘 드러나는지 즐기며 감상했다. 이번 공연에는 파키타와 루시앙을 제외하고 〈Le Roi Candaule〉 〈Ondine〉 〈Le Pavillon d'Armide〉 〈Trilby〉에서 가져온 다섯 개의 베리에이션이 포함되었다. 프로그램에 따르면 베리에이션은 대부분 프티파가 안무했던 다른 작품들에서 뽑은 리스트 중에서 최소 5개에서 13개까지 선택해서 추어진다고 한다. 관객들은 그 날 출연진의 인원수와 특징에 따라 서로 다른 춤을 감상할 수도 있는 것이다.

 

Photo by Damir Yusupov/ Bolshoi Theatre.

 

세계적 명성을 가진 전통 있는 발레단의 진수는 고전 발레에서 드러난다. 주역무용수뿐 아니라 군무진까지 고른 기량을 갖는 만큼 공연의 완성도가 올라가기 때문이다. 웅장한 스케일의 무대와 세련된 의상디자인 등의 노하우는 250년이 넘는 세월의 전통이 축적된 결과물이다. 볼쇼이의 공연에는 항상 그만큼 더 큰 기대를 갖게 되고 대부분 기대에 부응하는 결과물을 마주해 왔다. 이번 공연 역시 오랜만에 볼쇼이발레단의 전통과 러시아 발레의 유산을 재확인했던 소중한 무대였다.  

 


글_ 이희나(춤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