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현대무용단의 신작 <카베에>가 지난 4월 7일부터 9일까지 국립극장 해오름 무대에 올려졌다. 이번 공연은 우선 공연 외적으로는 국립현대무용단이 국립극장 레퍼토리시즌에 정식으로 참여했다는 데에서 의의를 찾을 수 있다(국립현대무용단은 홍승엽, 안애순 전 예술감독 시절 예술감독 안무작을 국립극장 무대에서 공연한 바 있지만 극장과의 지속적인 협업으로 이어지진 못했다).
국립극장 레퍼토리시즌은 매 시즌 참여단체와 프로그램의 폭을 넓히며 시즌 운영에 대한 기대와 신뢰를 높여가고 있지만 전통예술에 기반한 전속단체의 색채가 워낙 강해 현대무용과는 거리가 있다는 인상을 주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기에 이번 공연 이후 단체와 극장의 협업이 어디까지 진행될 수 있을지, 이것은 또 어떤 시너지를 이끌어낼지에 대한 기대감이 피어나고 있다. 여태까지 국립무용단이 전통춤의 호흡으로 추어 온 동시대의 춤은 동시대의 춤을 보여주기 위해 창단된 국립현대무용단의 춤과 어떻게 조우할지도 중요한 관심사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카베에>는 국립현대무용단의 신작이 국립예술단체가 내놓은 결과물로써 마주하게 되는 뻔한 질문들이 아닌, 국립극장에 올려진 신작으로 국립예술공간이 제공한 예술경험에 대한 매우 흥미로운 질문들로 가득 차 있다.
동굴에서 깨어나는 감각
작품을 안무한 황수현은 퍼포밍과 관람 행위 사이에서 작동하는 ‘감각-감정-신체’의 관계에 천착하는 작업을 해 온 안무가로, <카베에>는 황수현의 안무작 리스트에서 <우는 감각>(2019), <검정감각 360>(2020)에 이어지는 ‘감각 3부작’의 세 번째 작품이다. 프로그램북에 수록된 안무가의 글에서 황수현은 ‘감각의 미래’라는 표현을 사용하는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작품은 ‘감각의 미래’에 대한 사유에서 출발하지만 ‘도래한 미래’, 즉 ‘현재’가 된 지금 이 순간의 감각에 도달한다. ‘감각의 미래’는 결국 ‘현재의 감각’으로 귀결되는 것이다.
작품 제목인 ‘caveae’는 빈 공간, 구멍, 움푹 들어간 모양과 동굴(cave) 등의 어둡고 파인 다수의 공동(空洞, cavity)을 뜻하는 단어로, 황수현은 이 공동에서 깨어나는 감각에 집중한다. 이렇게 깨어난 감각은 뜻밖에도, 혹은 안무가가 의도한 바 그대로의 결과로서 국립극장이라는 공간에 대한 실험이자 도전이 된다.
공연은 해오름극장의 1,200여 개 좌석을 말끔히 비우고 무대 중앙을 둥글게 에워싸는 형태로 무대 위에 따로 객석을 마련했다. 관객들은 무용수들의 숨소리까지 들을 수 있을 정도의 가까운 거리에서 무용수들이 펼치는 퍼포먼스를 관람하게 되었다. 이처럼 프로시니엄 극장에서 굳게 지켜 온 제4의 벽을 부수고 출연자와 관객이 무대 위에서 퍼포머와 관람자로 같은 공간을 공유하는 방식은 프로시니엄 극장이 요구하는 공연 형식에 변화를 가하고자 하는 창작자들이 채택하는 일반적인 방법론이 되었고, 관객들은 객석이 된 무대를 더 이상 낯설지 않게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러나 이 낯설지 않은 방식을 압도하는 것은 공연의 규모다. <카베에>는 무대에 오른 출연자만 39명으로, 이는 그동안 무용단이 제작해 온 공연들 가운데 가장 많은 인원이 출연하는 작품이며, 현대무용 공연 전체로 봐도 이 정도 인원이 출연하는 작품은 흔치 않다. 2021년 처음 공연 기획에 들어간 뒤 1년여의 리서치를 거쳐 무용수 오디션을 통해 출연진을 확정하고 실제 공연을 올리기까지 소요된 3년이라는 제작기간도 일반적이지 않다(다들 알고 있는 것처럼 무용계의 ‘일반적인 방식’이란 지원 시스템의 스케줄에 맞춰 몇 달 만에 신작을 국수 가락 뽑듯 생산해야 하는 것이지 않은가).
감각의 미래에서 공연의 미래로
이 엄청난 규모의 공연은 해오름이라는 대극장 공간을 만나 감각의 폭풍을 일으킨다. 객석에 입장하면 평상시에는 볼 기회가 없는 해오름극장의 수십 미터 높이의 천장이 그 까마득한 거리감으로 관객들을 압도해 온다. 무용수들은 서로 등을 맞대고 앉거나 동료의 무릎을 베고 무대 바닥에 누워 있다. 나른해 보이기도 하고 무기력해 보이기도 하는 그 모습은 관객들이 공간을 지각하기도 전에 이미 공간에 압도된 듯하다. 어쩌면 이들은 아포칼립스 이후의 생존자들일지도 모른다.
동굴 속처럼 어두운 공간에서 시각보다 예민해지는 것은 청각이다. 무용수들은 소리를 내어 공간을 감지하고, 탐색하고, 장악하려 한다. 수십 명에 달하는 인원이 저마다 토해내는 구음은 공간을 진동시키며 파동을 만들어내고, 이 파동은 무용수들을 둘러싸듯 원을 이루며 앉아 있는 관객들에게 가닿는다. 관객들은 분명 눈으로 무용수들의 움직임을 보고 있지만 그 움직이는 무용수들을 감각하게 하는 것은 청각과 촉각이다.
무용수들은 끊임없이 움직이지만 걷거나 엎드려 기거나 바닥에 드러누운 채 등을 밀며 이동하는 것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춤의 움직임은 아니다. 이 움직임은 춤이라기보다 소리에 밀려 진동하는 공기의 파동을 다시 움직임으로 옮겨놓은 듯하다. 그들이 입술을 둥글게 모아 깊은 울림으로 만들어내는 소리 역시 우리가 즐겨 듣거나 부르는 노래는 아니다. 그러나 무용수들의 몸에서 각자의 음역대로 흘러나오는 소리가 한데 모이는 것을 듣다 보면 폴리포니가 연주되는 고딕 시대의 교회에 와 있는 듯한 착각이 든다. 각자의 성부가 모여 음악이 되는 순간이다. 연주자들이 오랜 합주 연습을 통해 만들어낸 이 음악을 들을 수 있는 것은 지금 이 순간뿐이다. 무용수의 몸도, 목소리도 여기 그대로 있지만 음악은 지금 이 순간이 지나면 사라진다.
코로나 팬데믹을 거치며 우리 사회의 ‘초연결’은 가없이 빨라지고 촘촘해졌다. 네트워크로 연결된 사람들에게 대면은 필수가 아닌 옵션이 되었다. 혹자들은 대면 커뮤니케이션을 부담스러워하며 비대면을 더욱 편안하게 받아들인다. 초연결 시대를 맞이한 몸이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다는 불안에 찬 전망이 나오기도 한다.
역설적이게도 <카베에>는 몸이 무용(無用)해진 시대에 무용(舞踊)이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보여주며 춤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을 뿐 아니라 이 ‘무용이 할 수 있는 것’을 가장 역사가 오래되고(공연이 올려진 해오름 무대는 신축된 공간이지만) 국립예술공간의 대표성과 품위에 대한 높은 기대는 물론 프로시니엄 극장의 질서를 가장 엄격하게 요구받는 국립극장 무대에서 실현함으로써 극장에 대한 질문을 덧붙이고 있다. 무용수들의 몸으로 만들어낸 음악이 사라진 뒤, 남아 있는 몸으로 우리는 춤과 극장을 어떻게 연결할 것인가? 이 질문은 황수현이 고민했던 ‘감각의 미래’를 ‘공연의 미래’로 데려다놓는다. 그리고 우리가 필연적으로 맞이하게 될 다음 질문은 “과연 우리는 공연의 미래를 맞이할 준비가 되었는가?”라는 것이다.
글_ 윤단우(공연칼럼니스트)
사진제공_ 국립현대무용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