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본Ⅰ>과 <춤본Ⅱ>는 20세기 한국의 창작춤과 연관해서 크게 주목하게 되는 작품이다. 참으로 아이러니한 건, 이것들이 20세기의 대한민국 춤을 대표하는 ‘작품’으로 존재한다는 점이다. 김매자가 <춤본>을 만들 때는 어떠했을까? <춤본>이 가능한 ‘작품처럼 보이지 않게 하는’ 의도가 있었다. 1970년대와 1980년대의 여타의 무용작품과 차별화된 접근이었다.
‘작품을 지향하는 작품이 갖는 무용미학’과는 다른, ‘작품을 지향하는 않는 작품으로서의 무용철학’을 표방하였다. 세월이 지난 지금, <춤본>은 ‘당시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한국예술종합학교 부설 한국예술연구소에서 조사한 20세기 한국을 대표하는 고전 작품 중 무용분야 1위로 선정된 작품이 <춤본>이다. 세월을 좀 거슬러 올라가서 197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의 한국 춤계를 돌이켜보자.
국립무용단 vs. 한국무용연구회
1980년대 한국무용계는 두 축이 있었다. 40년 세월을 넘긴 시점에서, 두 개의 흐름이 더욱 고귀하게 다가온다. 하나는 국립무용단 계열의 춤이고, 또 하나는 한국무용연구회(창무회) 계열의 춤이다. 1980년대 송범 중심의 국립무용단의 춤이 보름달이라면, 김매자 중심의 한국무용연구회의 춤은 초승달이었다.
1970년대 송범에 의해서 추구한 ‘무용극’은 1980년대에 완성을 향해 갔다. 그 흐름은 국수호로 이어지면서 심화, 발전되었다. 1980년대 김매자는 한국춤의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내려 했고, 그런 움직임은 ‘창무회’를 통해서 점차 깊어졌다. 전자가 스토리에 충실한 무용극이라면, 후자는 이야기를 절제한 이미지를 중시하는 춤이다.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이 있을 수 있다. 김매자의 경우도 <꽃신>이란 소설에 기반을 둔 작품을 공연하지 않았냐고. 좋은 질문이다. 국립무용단이 추구하는 무용극과 김매자가 당시 추구한 무용극은 다르다. 국립무용단의 무용극이 이야기의 전달력을 중시한 극성(劇性)을 지향했다고 한다면, 김매자에 의한 무용극은 이미지를 보다 중시하면서 감성(感性)을 통한 공감을 지향했다는 점에서 다르다.
호암아트홀, 아르코예술극장, 창무춤터, 워커힐미술관
1980년대의 김매자와 창무회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네 개의 공간이 있다. 그 공간에선 당시 참 여러 작품이 공연되었는데, 유독 김매자의 무용작품이 기억에 남는 이유는 뭘까? 대한민국 문화예술계 사람이라면, 당시 창무회의 여러 모습을 기억하리라.
첫 번째, 김매자의 춤본(1987)을 봤던 호암아트홀
이 작품은 문예진흥원(현, 문화예술위원회)의 창작지원금을 받아서 만든 작품에서 출발하고 있다. 김철호가 중심이 되어 국립국악원의 악사가 만든 음악의 연구도 필요하다. 박범훈이 중심이 된 국립무용단의 음악이 민속적인 장단과 피리를 중심으로 한 전개라면, 김철호가 중심이 된 창무회의 음악은 제례악적인 분위기와 대금을 통해서 전개하고 있고, 반복적인 리듬의 전재를 최대한 배제했다는 측면에서 연구해 봐야 한다.
두 번째, 김매자의 <꽃신>(1985)을 봤던 아르코예술극장
당시의 명칭은 문예회관이었다. 재미 소설가 김용익의 단편소설을 바탕에 두고 있는데, 해외에서 귀국한 김석만의 첫 번째 연출작이기도 했다. 아르코예술극장에서 수많은 무용작품을 봤지만, 도입부에서 무대의 벽면에 붙어서 뒷모습으로 보이는 춤꾼(김매자)을 본 신선한 충격은 아직도 잊을 수 없다. 매우 신비하고 정감 있는 작품으로 기억하고 있다.
세 번째, 창무회의 젊은 춤꾼을 만났던 워커힐미술관
1980년대 중반, 워커힐미술관은 다른 공연장이나 미술관과 차별화된 새로운 콘텐츠를 만날 수 있는 장소였다. 떠들썩하게 관심을 끌면서 모객(募客)을 하는 것이 아닌, 클래식과 정통예술을 접한 문화적 지성들이 컨템포러리와 하이브리드한 예술을 경험할 수 있는 훌륭한 공간이었다. 이런 장소에서도 창무회는 빛났다.
당시 한국춤의 신세대가 여기서 공연했다. 김영희, 마복일, 강미리 등 이화여대 출신으로 창무회를 통해서 춤을 살찌운 많은 무용가를 만날 수 있었다. 호암아트홀이나 아르코예술극장과는 다르게, 젊은 춤꾼들을 가까운 거리에서 볼 수 있었다. 김매자의 <숨>이란 작품도 여기서 의미 있게 전달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네 번째, 지금도 열기가 느껴지는 창무춤터
지금 이 땅에 창무춤터를 기억하는 사람은 얼마쯤일까? 이화여대 앞 시장통에 있었다. 무용공간이 있을 만한 주변도 아니었다. 연극을 하는 사람의 소극장에는 좀 익숙했지만, 그런 것을 무용에 적용한 공간을 경험한다는 생각은 이전에는 상상하기 어려웠다. 그 시절에는 지금과 다르게, 공연장에서 꼭 좌석에 앉아서 본 건 아니었다. 소극장은 가능한 온 관객을 최대한 돌려보내지 않으려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연극공연도 서서 보기도 했는데, 내가 본 날은 벽면에 기대서 무용공연을 본 관객도 있었다. “무용공연을 이렇게 진지하게 보다니?” 그게 당시 내가 들었던 생각 중 하나였다.
이 외에도 또 있을 거다. 김매자와 창무회의 공연이 펼쳐졌던 공간이. 이런 공연을 통해서 한국춤은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냈다. 요즘 복합장르 또는 융복합이란 말이 일상화되었는데, 일찍이 창무회는 ‘시와 무용의 만남’ 등을 통해서 타장르의 예술가와 협엽을 하거나, 타장르의 주목할 만한 작품을 가져와서 그것을 춤언어(무용)로 풀어내는 선구적 역할을 했다.
황무봉, 한영숙, 박송암, 김석출, 박병천
김매자의 춤은 어떤 영향을 받았을까? 김매자춤의 부모는 누굴까? 아버지는 황무봉이요, 어머니는 한영숙이라 할 수 있다. 황무봉과 한영숙이 춤의 부모 역할을 해 준 무용가는 찾아보면 많다. 그렇다면 김매자는 무엇이 다를까? 김매자의 춤에는, 마치 호적에는 오르지 않았지만, 김매자에게 큰 영향을 준 부모가 꽤 많아 보인다. 이는 나와 같이 ‘무용을 무용만으로 보지 않으려는 시각’의 사람들에게는 꽤 흥미로운 지점이다.
김매자에게 영향을 끼친 사람은 누구일까? 범패의 박송암 스님, 동해안 별신굿의 김석출 화랭이가 있다. 김석출의 아내 김유선을 포함해서, 동해안별신굿 일가가 포함된다. 1970년대와 1980년대에 생존하시면서 탈춤을 구현한 양주별산대의 여러 어르신이 그런 분이다. 김매자는 일반인들은 쉽게 춤이라는 장르와 연결고리를 생각하지 않는 전통장르를 찾아내서 거기서 그런 것들을 ‘총체적으로’ 습득하면서, 그 안에서 ‘무용적 요소’를 찾아내서 이를 김매자 스타일로 발전시켰다.
음악분야로 말한다면, 황병기도 빼놓을 수 없겠는데, 황병기의 대표곡 <침향무>와 <비단길>을 춤으로 승화시킨 것도 김매자이다. 웬만한 ‘열린 사고’와 ‘창작 역량’이 있지 않고는, 이런 것들을 춤을 중심으로 한 무대예술로 만들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김매자 춤의 기본을 형성한 춤스타일은 지역성과 연관해서도 따져볼 필요가 있다. 앞서 말했듯 황무봉계열의 부산춤과 한영숙계열의 경기남부 및 충청춤이 김매자춤의 텃밭이 되었다. 이렇게 덧배기춤과 살풀이춤(굿거리춤)을 기본으로 해서 깨기춤, 무속춤을 수용하면서, 김매자의 춤의 언어는 확산되었다. 특히 농악의 연풍대 등의 춤을 바탕으로 해서 이런 것을 ‘해체’ 또는
‘재결합’을 하면서, 그가 나름대로 춤언어(동작소)를 만들어냈고, 이것이 창무회 춤의 기본적 춤언어로 점차 정착되었다.
첫 번째 만들어진 춤본은 한국춤계에 큰 영향을 끼쳤다. <춤본Ⅰ>은 <춤본Ⅱ>를 낳게 되는데, 박병천 일행의 진도씻김굿이 <춤본Ⅱ>의 기본이 되었다. 춤과 음악의 상호관련성을 생각할 때, 김매자의 춤에 내재한 박병천과 진도씻김굿도 앞으로 더 연구해볼 필요가 있어 보인다.
<춤본> 그리고 신명
이렇듯 김매자가 김석출 일행, 박병천 일행과 함께 하면서 굿 문화를 배우고 익히면서 터득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신명이다. 신명이란 말은 예전부터 많이 쓰였던 말이며, 자신의 춤과 공연에 신명을 연관시킨 공연예술인은 꽤 많다. 대한민국의 극장무용과 연관해서 신명을 제대로 구현한 건 김매자와 창무회가 처음이라고 말하고 싶다. ‘신명’과 연관된 대표작은 역시 <춤, 그 신명>(1987)이다. 창무회 10주년을 기념한 큰 춤판이었다.
<소리사위>를 기억하는가? 이 춤판과 연관해서 기록해야 할 건, 국악계의 젊은 연주가들이 이 공연을 계기로 무용음악의 새로운 세력으로 등장했다는 사실이다. 원일, 권성택, 유경화, 김용우라는 <소리사위> 팀이다. 당시 타악하면 김덕수를 중심으로 한 사물놀이를 떠올리던 시절이었는데, <소리사위>는 ‘사물놀이’의 음악을 또다른 방향으로 이끈 것이다. 이들은 사물놀이 원년 멤버인 김용배에게서 사물놀이를 배우고 익힌 신세대였다. <소리사위>는 그 이름 자체가 음악(소리)과 무용(사위)의 합일을 지향하고 있다. <춤, 그 신명>은 이후 여러 번 공연했다. 그러면서 무용반주도 달리했고, 또한 춤꾼들도 점차 달라졌는데, 이것 자체가 지난 30여 년 간의 창무회의 역사이자, 무용음악의 변천사가 아닐까 싶다.
<춤본>에 내재한 무(舞), 도(蹈), 용(踊), 비(飛)
그 많은 춤 중에서, 왜 20세기를 대표할 춤으로 <춤본>이 선정된 것일까? 이에 대해선, 다양한 사람이 다양한 방식으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나는 우선, 무도(舞蹈) 또는 무용(舞踊)이란 단어를 가져와서, 한국전통춤에 기반한 김매자춤 곧 <춤본>의 가치 및 차별성을 말하려 한다.
한국전통춤은 철저하게 무(舞)에 충실했다고 볼 수 있다. 이에 반해서 김매자의 춤은 도(蹈)를 바탕으로 해서 용(踊)을 지향한 것이다. 무(舞)에선 손을 통해서 표현되는 것이 많지만, 도(蹈)와 용(踊)은 발이 중심이 된다. 발을 통해서 밟는 행위(蹈)와 이렇게 걷는 과정을 통해서 수반되는 뛰는 동작(踊)을 지향한다. 이런 것을 통해서 천지합일(天地合一)이 이뤄진다는 믿음이다. 도(蹈)와 용(踊)이란 한자에는 모두 발을 뜻하는 족(足)이 왼쪽에 존재한다는 걸 보면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참으로 격세지감(隔世之感)할 일이다. ‘한국춤=버선’이란 등식이 팽배하던 시절이었다. 김매자와 창무회가 버선발을 벗었을 때, 일각에선 매우 부정적이었다. 한국전통춤의 소재 고갈로 인해서 이제는 현대춤을 따라 한다는 부정적인 의견도 있었다. ‘한국춤=버선’이라는 등식은 철저하게 궁중춤 또는 교방춤의 시각이다.
김매자가 맨발로 무대에 오른 것은, 철저하게 대지의 기운을 습득하겠다는 의지로 봐야 한다. 인간의 밟는 행위의 숭고함을 전제로 해서, 하늘을 향해 뛰면서 날고 싶은 인간의 욕구를 반영한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 <춤본>을 무대에 잘 구현하려는 춤꾼 또는 <춤본>을 연구하는 무용학자라면, 무(舞) - 도(蹈) - 용踊) - 비(飛)라는 4개의 관점에서 실재(實在)하는 동작과 내재(內在)하는 미학의 상호관련성을 연구해도 좋겠다.
<춤본>: 관념의 존중, 개념의 정착
앞에서 말했듯이, <춤본>은 ‘작품 아닌 작품’이다. 곧 하나의, 즉 일개(一介)의 또는 일련(一連)의 스토리 내지 이미지를 일관되게 표현하면서,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작품을 ‘지양’라고 있다. 1980년대 대개의 무용작품들은 ‘표현주의’ 또는 ‘표현예술’의 범주에 존재했다. <춤본>은 달랐다.
그렇다면 <춤본>은 무엇을 ‘지향’한 것일까? 긍정적인 의미에서의 ‘관념주의’적 사고를 <춤본>의 탄생과 연관해 봄이 좋겠다. 내 생각에는, <춤본>은 동작(動作)에서 출발했다기보다는, 동요(動搖)에서 출발했다고 보는 게 맞다. 나의 몸이 어떻게 움직이고 싶은가에 대해서 관심을 갖기 보다는, 물체가 왜 흔들리고 움직여지는지에 대한 본질적인 궁금증에서 출발했다고나 할까?
말을 바꾸면, 가시적인 실체를 만들게 하는 비(非)가시적인 본성(本性)의 탐구라고 할까? 어쩌면 이후의 ‘개념예술’적인 접근과 ‘춤본’을 연결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가장 중요한 것은 당시 춤 자체 또는 춤계 외적으로 존재하는 인습(因襲)적인 관성 또는 관념에서 벗어나려는 사고를 높이 평가할 수 있다.
이러한 과정은 매우 신기하게도, 무용계가 일상적으로 생각했던 춤과 연관했던 ‘전통’, 그런 철옹성과 같은 성벽을 허물게 해주었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 벗어난 세상은 어떠했을까? ‘현대’도 아니고, ‘외국’도 아니었다. 그동안 우리가 몰랐거나 때론 간과했던 ‘또 다른 전통’이었다. <춤본>의 탄생을 나의 언어로 만들어보자면, ‘그간 우리가 간과(看過)했던 전통’이 ‘다시 춤으로 환원(還元)할 전통’으로 잉태되는 순간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춤본>: 진(眞)의 김지영과 최지연, 준(準)의 복미경과 임수정
네 명이 모두 대단했다. 하지만 <춤본>과 관련해서, 오래된 수련 과정은 무시할 수 없었다. 진(眞, genuine)과 준(準, quasi-)이란 단어를 여기서 사용할 수밖에 없다. 김지영과 최지연의 춤에서는 창무회의 전통은 물론이요, <춤본>이란 춤이 갖는 본질적인 속성이 객석에 전달되었다. 이에 비해서 복미경과 임수정은 상대적으로 약했다.
그러나 이것을 바탕으로 또 다른 생각에 미쳤다. 복미경과 임수정은 <춤본>을 또 따른 방식으로 활용하거나 교육하는데 공헌할 것이라는 희망이었다. 진(眞, genuine)은 그것 자체로 완결성을 갖지만, 준(準, quasi-)이라는 단어는 접두어의 역할을 한다. 비록 진에 미치지 못하지만, 그 ‘진’을 또한 어떤 것으로 연결할 수 있는 새로운 가능성을 확인했다. 서로 방식은 다르겠지만 복미경과 임수정은 앞으로 <춤본>을 창무회 외적으로 학교 또는 기성무용단에 확산시키는 아주 큰 역할을 할 것 같아서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통합적인 복미경, 분석적인 임수정
<춤본Ⅰ>의 복미경과 임수정은 달랐다. 복미경을 ‘음악적’이라고 하고, 임수정을 ‘미술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복미경의 춤본은 흐름이 참 좋았다. 확실히 복미경은 음악을 알고 느끼면서 추는 춤꾼임을 또 확인한다. 임수정은 그런 스타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마치 춤의 공연을 여러 장의 사진으로 인화했을 때, 거기서 보이는 임수정의 정지 모습은 진정성과 카리스마가 느껴지는 것은 분명했다.
임수정은 본질적으로 머리로 춤을 추고, 분석적인 춤꾼인 것 같다. 춤을 추는 순간에도 ‘생각’하고 있는 게 보인다. 이건 장점일 수도 있고, 또한 아닐 수도 있을 것 같다. 복미경은 마음으로 춤을 추고 있다는 생각을 해 본다. 이 춤의 가지고 있는 본질적인 특징을 잘 간파하고 있다.
복미경이 통합적이라면, 임수정은 해체적이라고 할까? 만약 <춤본>에 관한 분석적인 논문을 쓰게 된다면, 그건 임수정이 가장 잘 쓸 것 같다. 역시 객관적인 거리를 두고서, <춤본>의 본질적인 미학을 실제 동작과 연관해서 탐구하고 있는 인상을 받는다. 그런데 이런 태도는 임수정의 본질적인 장점이기도 하겠지만, 이런 상태에서 추는 춤은 감동으로 연결되는 것과 다소 거리가 있어 보인다.
<춤본>을 풀어내는 방식이 두 사람은 달랐다. 임수정은 ‘타자적’이요 ‘객관적’이다. 복미경은 ‘자아적’이요 ‘주관적’이다. 임수정은 춤을 전개함에 있어서 숲을 보기보다는 나무만을 보려하는 느낌이었고, 복미경은 나무를 보기보다는 숲을 보는 느낌이었다. 복미경의 ‘그럴듯함’이 앞으로 ‘그러함’으로 가야 한다.
복미경의 춤은 늘 어떤 춤을 막론하고 다 어울리는 장점이 있다. 복미경은 이입력(移入力)이 좋다. 임수정이 <춤본>에 관해서 분석을 하고 있을 때, 복미경은 이미 해석을 하고 있다고나 할까? 그런데 이건 꼭 누가 더 좋다고 할 수 없다.
임수정은 계속 ‘되어 지려’ 노력하는 모습이었는데, 이건 때론 관객에게 부담감일 수 있다. 어쩌면 그런 생각이 많아지면 많을수록 결국 ‘됨’이 아니고, ‘되려함’만 더 보이지 않을까 싶은 안타까움이 있다. 실제로 동작적인 측면에서도 임수정은 도약하기 위해서는 일단 눌러야 하는데, 그렇게 누르는 것을 간과하고 도약하려 한다. 이건 성공한 사람들에게 보이는 특징이기도 하다. 늘 어떤 목표를 향해 너무 돌진하는 느낌이다.
두 사람이 더 큰 완벽한 춤꾼이 되기 위해선 어떤 조언이 필요할까? 두 사람의 춤이 더욱더 완성을 지향하면서 임수정은 having에서 being으로 가야하고, 복미경은 being에서 having으로 갈 필요가 있다. 임수정에게선 버릴 것이 보이고, 복미경에게선 채울 것이 보인다.
최지연의 강단, 김지영의 배포
최지연과 김지영은 자신이 직접 안무한 작품에서도 꽤 괜찮지만, 이번의 춤을 보면서 이제는 김매자의 춤을 ‘김매자 이상으로’ 추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네 인생사에 있어서도, 내가 나를 잘 알지 못하고, 남이 나를 더 잘 아는 경우가 있는데, 최지연과 김지영이 바로 그러했다. 창무회 출신으로서 오랜 기간 거친 트레이닝과 좋은 춤을 오래도록 익힌 사람으로서의 자부심과 여유가 곳곳에서 느껴졌다. <춤본>이란 작품의 내용과 형식을 둘 다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김지영의 춤에선 배포가 좋고, 최지연의 춤에선 강단이 좋다.
강단(剛斷)은 ‘굳세고 꿋꿋하게 견디어 내는 힘’이다. 최지연의 춤이 딱 그러했다. 내가 그의 일상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게 전혀 없음에도, 그의 춤이 그렇듯이 그의 일상에서 ‘어떤 일을 야무지게 결정하고 처리하는 능력’이 탁월할 듯싶다.
김지영은 배포 내지 배짱의 춤꾼이었다. 성악가 중에서 노래를 잘 부르기도 하지만, 일단 첫소리만 들어도 울림이 매우 좋게 느껴지는 경우가 있는데, 김지영의 춤이 그러했다. 춤을 시작할 때부터 ‘이 사람은 춤을 잘 추는구나!’ 생각이 들면서, 사람을 끌게 하는 선천적 에너지가 장점이다.
협상하는 김지영, 대결하는 최지연
배짱의 춤꾼 김지영은 장단을 가지고 놀 줄 알았는데, 강단의 춤꾼 최지연은 장단을 제압하려는(이기려는) 느낌으로 춤을 추었다. 이것은 차이를 말할 뿐, 어느 것이 좋다 그렇지 않다고 말할 순 없다. 두 사람은 자신의 스타일을 참 잘 알고 있었고, 그것을 <춤본Ⅱ>를 통해서 잘 풀어내고 있었다.
최지연은 공격형 무용수라고나 할까? 그의 춤에는 단호함이 있었다. 카리스마가 느껴졌고, 그런 강점 때문에 계속 적절한 긴장감을 느끼면서 그녀의 춤에 빠져들게 되었다. 김지영은 수비형 무용수였다. 상대에 따라 달라지는 유연성 같은 것이 그의 춤 속에 존재했다. 자신의 말을 내세우기보다는 남의 말을 듣기를 기다리는 넉넉함이라고나 할까? 그녀가 춤을 즐기면서 추니, 관객도 덩달아서 즐기게 되는 기쁨이 있다.
두 사람은 둘 다 각자의 방향으로 춤을 잘 춘다. 그렇다면 어느 쪽이 김매자가 더 느껴질까? 내겐 최지연이다. 최지연은 선량한 첫째 딸과 같고, 김지영은 현명한 둘째딸 같다. 최지연은 이미 엄마의 생각을 잘 알고 있고, 엄마가 시키는 대로 하는 스타일이다. 김지영은 엄마의 생각보다는 내 생각을 더 중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만약 엄마가 아플 때는 최지연을 찾고, 엄마가 고민스러웠을 땐 김지영을 찾을 것 같다. 이건 오직 이번에 본 춤의 스타일에 관련한, 한 평론가의 매우 주관적인 생각임을 확실하게 밝힌다.
김매자의 춤이 마치 좌청룡과 우백호처럼, 최지연과 김지영에게 잘 전승되며 발전되고 있다는 건, 여간 뿌듯한 일이 아닐 수 없다. 21세기에도 <춤본>은 우리 춤의 새로운 교과서로서, 앞의 4인과 또 많은 춤꾼에 의해서 잘 이어질 것이다. 김매자에게 시작된 ‘춤의 연대기’는 오늘 어디서 또 어떻게 이어지고 있을까?
글_ 윤중강(공연평론가)
사진제공_ 창무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