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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 강박을 넘어선 컨템포러리 한국춤의 묘미: 국립무용단 ‘넥스트 스텝 III: 안무가 프로젝트’

국립무용단은 지난 20여 년간 현대춤 안무가나 유럽 안무가들과의 협업을 통해 기존의 한국춤 창작과 다른 체험을 도모해왔다. 이러한 ‘낯설게 하기’의 작업은 기존의 작품 구성 방식이나 춤의 문법을 해체하고 아직 개척되지 않은 현대적인 한국춤의 영토를 발견하기 위한 시도였다. 결과적으로 이는 내적으로는 무용수들이 안무가로서의 역량을 발굴하는 기회가 됐고, 외적으로는 전통 문법에 고착돼 있던 한국춤에서 벗어나 새로운 창작 스타일을 제시할 수 있는 토대가 됐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성과를 거둔 사업이 국립무용단의 신진 안무가 발굴 프로젝트인 넥스트 스텝이다. 이 사업은 앞서 두 차례의 프로젝트를 통해 고답적인 한국춤 창작 양상에 신선한 공기를 불어넣는 성과를 거둔 바 있다. 특히 이번에는 원래의 취지를 극장 밖까지 확장해 주목할 만하다. 이전 시리즈와 달리 단원에 국한하지 않고 외부 안무가에게도 연출과 안무의 기회를 제공한 것이다.


지난 4월 20-22일 달오름극장에서 진행된 넥스트 스텝 III에서는 무용단원인 최호종과 박소영이 각각 <야수들>과 <라스트 댄스>를, 정보경댄스프로덕션의 정보경 대표는 <메아리>를 준비해 함께 무대에 섰다. 세 작품은 각자 다른 소재와 형식을 갖고 있지만, 동시대를 살아가는 한국인이라면 한 번쯤 접해봤을 법한 시사적인 키워드를 내세운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었다. 또한 현대적인 소재와 방법론을 통해 동시대적 한국성을 적극 탐색한다는 점에서 ‘넥스트 스텝’이라는 사업의 취지에 부합하는 성과를 보여주었다.

   

공동체의 다른 본성을 고발하는 창(窓)


최호종 안무의 <야수들>은 한국 사회의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공동체인 ‘가족’을 모티프로 하고 있지만, 실은 ‘가족처럼 가까운’ 사회적 관계에서의 어떤 태도를 고발하는 작품이다. 최호종이 주목하는 것은 무례하고 이기적인 본성이다. 특히 공동체의 테두리 안에서 자주 드러나는 야만성에 관한 것이다. 공연 전부터, 공연 중에도 빈번하게 등장하는 사족 보행은 이러한 공동체 속 야만성을 상징하는 몸짓이다.


무대 위에 설치된 윈도우 프레임은 공동체의 그런 속성을 집약해서 보여주는 공간이다. 무대 공간 내부에 굳이 별도의 재현 공간을 설치한 것은 프레임 속 세계가 프레임 바깥 세계를 재현하기 위함이다. 즉 프로시니엄 무대가 현실을 재현하는 프레임이라고 할 때, 윈도우 속 공간은 이를 다시 은유하는 이중 프레임인 것이다. 서사가 있는 장르에서 흔히 쓰이는 이 같은 액자식 무대 구성은 <야수들>의 구조가 단지 비판이나 성찰에 그치지 않고 어떤 방향성을 보여줄 것이라는 전망을 가능케 한다.


윈도우 프레임 내에서 진행되는 역할극은 말 그대로 극처럼 과장돼 있다. 평온했던 가족놀이는 구성원들이 가위로 서로의 옷에 구멍을 내며 서서히 폭력적인 몸짓에 잠식된다. 그러나 그러한 순간에도 무심한 표정과 움직임으로 상호 가해의 움직임을 반복하는 연출은 비판과 계몽의 뉘앙스를 담고 있지 않다. 오히려 보편적인 가족이나 공동체에 만연한 폭력성을 담담하게 성찰하려는 블랙 코미디의 절제가 보인다. 그렇게 혼란과 위기감이 고조되면서 서서히 가족은 사라지고 프레임 안에는 야만의 본능만이 가득하다. 연극과 춤 문법을 고루 활용하며 의미와 스타일을 함께 잡아내는 최호종의 수완이 돋보이는 장면이다.



이러한 형식 실험은 그들을 가둔 윈도우 프레임이 위로 올라가면서 정점에 이른다. 역할극이 끝나고 무대 위 현실세계로 나온 ‘야수들’에게 주어진 것은 라운드 테이블이다. 최호종은 결국 야만의 폭력을 제어할 수 있는 것은 소통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어떤 위계 없이 평등한 위치에서 마주 볼 수 있는 라운드 테이블은 이런 시각을 담아내기에 효과적이다. 다만 공동체의 속성과 야수의 본성에 대한 날선 감각과 달리 이런 대안은 소박하고 안이하게 다가온다. 무리들이 부둥켜안는 장면 역시 결국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관객에게 되묻는 엔딩이라는 점에서 다소 평이한 봉합의 아쉬움을 남긴다. 


‘공동체’라는 키워드와 ‘인간성의 성찰’이라는 테마는 모두 춤 무대에서 익숙한 것들이다. 하지만 최호종은 연극과 춤 문법의 혼용과 무대 형식의 실험을 통해 이를 참신하고 재치 있게 풀어내는 데 성공하고 있다. 특히 안무 외에도 무대 디자인과 조명, 연출의 힘이 시너지를 이뤄 새로운 감각의 한국춤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실존의 무게를 넘어 활로(活路)를 찾는 몸짓


소재의 성격이 강렬한 작품들은 오히려 그 때문에 전형화 하는 경우가 많다. 가령 사회적인 비극이나 현대사회의 병폐를 다룬 작품들은 상징과 은유를 동원해도 결국 예상된 구성과 결말로 향하는 것이다. 우울증이나 공황장애도 그러한 소재 중 하나여서 해석이나 상상의 매력보다 단순한 공익적 메시지로 수렴할 수 있는 우려를 품고 있다.


박소영의 <라스트 댄스> 역시 안무가가 무대 위에서 경험한 공황장애의 순간을 토대로 만든 자전적 작품이다. 그중에서도 안무가 본인을 비롯해 많은 한국 여성들이 직면해 있는 우울증에 관한 이야기를 여성 춤꾼들과 함께 꾸린다. 이로부터 작품은 이미 거대한 도전에 맞닥뜨린 셈이다. 우울증과 여성 삶의 실존이 지닌 문제를 어떤 방식으로 재현할 것인가. 그로부터 어떤 활로를 제안할 것인가. 무엇보다 무대 밖에서 이미 공론화된 이 사회적 문제를 무대 안에서 어떻게 춤 예술로 풀어낼 것인가. 상투적인 구성과 결말이 반복되는 소재의 관성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전복적 시도가 요구되는 작품이었다.


그런데 박소영이 선택한 방식은 의외로 정공법이다. 어떤 은유적 표현을 시도하기보다 일종의 ‘춤 치료극’처럼 포인트가 되는 요소들을 배치해 정면으로 돌파하는 구성이다. 다만 이러한 우직함은 지나치게 직관적이어서 상상력을 자극하지는 못한다. 무대 위에 덩그러니 서 있는 여성과 핀 조명을 받은 의자 하나, 그리고 꽃무늬 드레스와 생의 의지를 되살리는 ‘라스트 댄스’까지 모든 것이 이 키워드로부터 예측 가능한 설정이다. 특히 예의 군무 장면은 그 화려한 의상의 비주얼과 역동적인 동작에도 불구하고 작품 전반에 흐르는 우울감을 상쇄하지 못한다. 마지막 순간에서야 삶의 빛나는 순간을 반추하는 회광반조(回光返照) 같달까.



오히려 이 작품에서 주목할 것은 ‘춤’이 아닌 ‘문’이다. 열린 문은 자유와 가능성을 시사하지만, 닫힌 문은 단절과 고립을 의미한다. 박소영은 문의 양면성에서 우울증의 원인을 발견하고, 동시에 우울증의 해법을 제시하려 한다. 이런 생각이 담긴 안무가 테이블 장면이다. 테이블 아래 누워 두드리는 여성과 그 위에서 계속 문지르는 여성, 그걸 지켜보는 여성의 단순한 포맷은 탈출구 없이 죽음을 향해 가는 당사자들의 답답한 현실을 효과적으로 압축한다. 하지만 이후 테이블을 세워서 넓은 면을 문처럼 열고나올 때 작품에 드리운 암울한 정서는 일순간 해소된다. 이 점에서 <라스트 댄스>는 ‘삶’과 ‘죽음’ 같은 거대 담론이나 ‘마지막 춤’에 관한 비장한 이야기가 아니다. 위태로운 삶은 계속될 테지만, 자신만의 문을 열고 해방구를 찾자는 감각적인 제안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부유하는 존재의 정착을 염원하는 소리


최근 <경합>과 <각시>, <안녕, 나의 그르메> 등으로 실력을 과시하고 있는 정보경의 안무에는 ‘한국적 컨템포러리’라는 표현이 잘 어울린다. 즉 전통적 미학을 근간으로 삼으면서도 이를 동시대로 데려와 ‘지금, 여기’의 문제로 풀어내는 수완이 매 작품 발견되는 것이다.


<메아리>에서도 그런 창작 경향은 여전히 드러난다. 이번 작품에서 정보경의 관심은 순환(循環) 혹은 회귀(回歸)다. 살아있거나 죽은 것들은 제자리에 머물지 않고 떠난 것도 돌아온다는 자연의 이치를 말함이다. 실체 없는 공명이자, 발화한 곳으로 돌아올 운명을 지닌 소리인 ‘메아리’ 역시 이런 이치를 은유하는 제목이다. 결국 이 작품은 모든 것은 영원하지 않으니 삶의 태도 또한 이에 따라 정해진다는 동양 철학에 관한 것이다. 이로부터 삶과 죽음이라는 관념을 표현하는 데 집중하는 전통적 한국춤의 익숙한 방법론이 금세 연상된다.


실제로 <메아리>의 무대는 정중동(靜中動)과 비움, 채움이라는 전통적 한국 미학이 지배하는 공간이다. 무대에는 세트나 소품 하나 없이 오직 조명만이 춤꾼을 비춘다. 어둠 속에서 밝게 빛나는 조명과 무대 바닥에 깔린 스모그는 이미 산 자와 죽은 자가 엇갈리는 세계를 암시하는 듯하다. 미니멀한 무대 운용에서 관념의 서사를 이끄는 것은 마치 상여를 연상시키듯 죽은 자를 들고 등장하는 산 자들이다. 처량한 구음에 맞춰 어두운 무대에서 느릿하게 진행되는 퍼포먼스는 오롯이 춤꾼 각자의 섬세한 움직임과 무거운 호흡으로 그려진다. 이런 흐름을 지긋이 따라가는 동안 인간사의 희로애락을 담은 사연에 대한 기대는 시나브로 사라진다. 무대를 채우는 거대한 관념의 기운 아래 부유하는 존재들의 개별적 몸짓은 덧없게 느껴진다.



이러한 초월적 세계관이 성립하는 공간에선 죽음도 이별도 무의미하다. 그래서 정보경은 죽은 자가 허공에 매달려 서서히 사라지는 엔딩 신에도 슬픔의 정서를 담지 않는다. 오히려 부유하는 삶을 끝내고 마침내 영원으로 정착하는 존재를 동경하는 태도마저 남겨진 자들의 군무에서 드러나기도 한다. 비슷한 안무로 유명한 뮤지컬 <노트르담 드 파리>의 장면이 죽음을 슬프고도 아름다운 이별로 감상적으로 표현한다면, <메아리>는 삶과 죽음이라는 자연의 이치를 수용하자는 철학적 제언을 담담하게 건넬 뿐이다.


정보경은 전통적 관념을 가져와 오늘의 세계에 대입하는 자신의 장기를 이번에도 노련하게 수행해냈다. 온갖 자극이 횡행하고 호흡이 짧아진 시대에 철학적 메시지를 통한 삶의 환기는 여전히 유효하게 느껴진다. 다만 총론에 압축된 메시지가 더 매력적인 각론으로 분화하지 않은 채 단조롭게 진행된 점은 다소 아쉬움을 남긴다.



글_ 송준호(춤평론가)

사진제공_ 국립무용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