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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비평

전통과 창작, 관객의 열망과 예술가의 욕구 사이: 볼쇼이발레단의 창작 무대에 붙여

 

〈The Ninth Wave〉Photo by Natalia Voronova/ Bolshoi Theatre.

 

하나의 플롯을 찾아가는 네 개의 캐릭터


2020년 불어 닥친 예상치 못한 코로나 팬데믹은 이 세상 모든 사람에게 시련의 시기였다. 관객들과 같은 공간에서 마주하며 만나는 현장성을 기본으로 하는 공연예술은 직격탄을 맞았다. 세계적인 공연장인 볼쇼이극장도 예외는 아니어서, 팬데믹 선언 이후 6개월간은 모든 공연을 취소하고 극장 문을 걸어 잠가야 했다. 볼쇼이발레단의 예술감독인 마하르 바지예프(Махар Вазиев)는 이 위기의 시간을 의미 있게 이용할 방법을 생각해냈다. 해외의 무용단에서 네 명의 안무가를 초빙하여 창작 작품을 묶어 무대에 올리는 프로젝트였다. ‘하나의 플롯을 찾아가는 네 개의 캐릭터(Four Characters in Search of a Plot; Четыре Персонажа в Поисках Сюжета)’라는 제목의 공연으로, 푸에르토 출신의 미국 안무가 브라이언 아리아스(Bryan Arias)의 <아홉 번째 파도(The Ninth Wave; Девятый Вал)>, 이탈리아 안무가 시모네 발라스트로(Simone Valastro)의 <저스트(Just; Всего Лишь)>, 불가리아 안무가 디모 밀레브(Dimo Milev)의 <페이딩(Fading; Угасание)>, 프랑스 안무가 마르탱 쉑스(Martin Chaix)의 <실렌티움(Silentium; Тишина)>을 옴니버스식으로 올린 무대였다. 이 프로젝트는 팬데믹 시기의 절망적 우울감에서 예술가들을 독려하기 위해 2020년 6월 기획되어 같은 해 9월 10일 초연되었다. 이후 이 공연은 볼쇼이의 창작 레퍼토리가 되었고, 필자는 2023년 2월 25일 공연을 관람하였다.


네 개의 작품을 묶었다고 하지만 러닝타임이 한 시간에 달하는 <아홉 번째 파도>가 작품의 규모나 길이에서 다른 작품을 압도하였다. 그림 인생의 반 이상을 바다를 주제로 작업했던 러시아의 화가 이반 아이바좁스키(Иван Айвазовский)의 그림들을 멀티미디어화하여 무대 배경에 가득 채우고서 무용수들이 바다 그 자체가 되어 움직였다. 서정적인 이인무는 잔잔한 바다와 그 위에 고요히 떠 있는 돛단배를 연상시켰고, 밀물과 썰물, 파도를 표현하기 위해 군무진은 대열을 이루어 앞뒤로 시간차를 두며 움직였다. 바닷물 사이에서 쉼 없이 점프하고 회전하는 춤의 연속은 폭풍우 속에서 바위를 때리는 거센 물결이 되었다. 초록과 푸른빛의 각기 다른 색상의 의상으로 깊이가 다른 바다의 여러 색채를 보여주는 듯했다. 추상적이면서 다이내믹한 무용수들의 춤이 매우 인상적이었으나, 이 작품의 임팩트는 여기까지였다. 한없이 펼쳐진 바다와 반복적인 파도 속에서 작품은 점점 방향을 잃었다. 쉴 새 없이 움직이는 무용수들의 거친 숨소리에 미안할 만큼 관객의 감흥은 사그라들었고, 끝날 듯 끝나지 않는 작품에 집중력이 점점 떨어져 갔다.

 

〈Just〉Photo by Pavel Rychkov/ Bolshoi Theatre.

 

네 개의 작품 중 가장 강렬한 인상을 남긴 것은 <저스트>였다. 작곡가 데이비드 랭(David Lang)이 구약성경에서 가장 아름다운 노래라고 불리는 ‘아가(雅歌; Song of Songs)’로부터 영감을 받아 만든 음악 에 안무한 15분가량의 작품이다. ‘아가’는 성경에서 유일하게 남녀 간의 사랑 이야기를 담은 시가인데, 환풍기가 돌아가고 연기가 피어나는 어두침침한 무대에서 남녀 두 커플과 한 명의 여자 솔로가 음악에 맞춰 몽환적인 춤을 추었다. 최면을 거는 듯 반복적인 음악이 작품의 분위기를 이끄는데 큰 몫을 했고, 살색의 슬립과 러닝을 입은 남녀 무용수들이 이에 맞춰 구르고 점프하며 에너지를 주고받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관객의 주의를 집중시킬 수 있다면 그야말로 대단한 일일 것이다. 게다가 스토리도 없이 순수한 춤 움직임만으로 작품을 끌어가기 위해서는 강약의 세기와 빠르기를 적절히 조절하여 긴장감을 놓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안타깝게도 그런 점에서 <아홉 번째 파도>는 성공하지 못했고 <페이딩>과 <실렌티움> 역시 그러했다. 특히나 <실렌티움>은 볼쇼이의 간판스타 스베틀라나 자하로바(Светлана Захарова)를 무대에 세웠음에도 큰 인상을 남기지 못하였다. 이러한 점에 대하여 볼쇼이의 오랜 팬들은 충분히 검증되지 않은 안무가들을 데려다 무대에 세운 기획력의 실패라고 혹평을 하며 볼쇼이가 해 오던 대로 아름다운 전통 고전발레에 집중하기를 원한다는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똑같은 작품들만을 출 수는 없다. 고전발레나 러닝타임이 긴 대작 위주의 작품을 주로 공연하는 볼쇼이가 이런 소규모의 작품들을 무대에 올린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 특별한 시도이다. 또한 전통 발레언어에 익숙한 무용수들이 컨템포러리 작품에서 색다르게 변신하는 모습을 볼 때 발레 팬으로서 반갑기도 했다.


러시아 안무가들의 창작 무대 트리플 빌

  

〈Made in Bolshoi〉Photo by Elena Fetisova/ Bolshoi Theatre.

 

볼쇼이의 레퍼토리가 된 또 하나의 창작발레 공연이 있다. 안톤 피모노프(Антон Пимонов) 안무의 <메이드 인 볼쇼이(Made in Bolshoi)>, 아르테미 벨랴코프(Артемий Беляков)의 <사계(Les Saisons; Времена Года)>, 뱌체슬라프 사모두로프 안무의 <댄스마니아(Dancemania; Танцемания)>, 이렇게 세 편을 한 무대에 올린 트리플 빌 공연이다. 2022년 7월 7일에 초연했는데, 이 공연 역시 코로나의 직격탄을 맞아 2년이나 초연이 늦어진 사연이 있다. 2020년 3월 22일 드레스리허설을 한 바로 다음 날, 모스크바에 락다운이 시행되었기 때문이다. 최근의 공연은 2023년 4월 22-23일에 있었다. 


마린스키발레단 출신이자 그곳에서 안무 데뷔를 했던 안톤 피모노프는 현재 페름발레단의 예술감독이다. <메이드 인 볼쇼이>는 말 그대로 볼쇼이발레단의 특징을 집약하여 트레이드마크인 듯한 춤을 보여주었는데, 가령 대열을 지은 군무진의 칼 같은 움직임이나 역동적인 동작들, 휘몰아치는 시원시원한 점프 등이다. 깔끔한 레오타드를 맞춰 입은 무용수들 뒤로 세워져 있는 금발에 파란 눈동자를 가진 한 여자의 얼굴은 1940-50년대 할리우드 스타의 핀업 사진을 연상시켰다. 그 복고풍의 느낌 때문일까. 무용수들의 레오타드 의상은 스포츠 유니폼 같은 느낌을 주었고, 그들의 움직임은 마치 소비에트 시대의 매스게임처럼 보여 흥미로웠다.

 

〈Les Saisons〉Photo by Elena Fetisova/ Bolshoi Theatre.

 

<사계>를 안무한 벨랴코프는 볼쇼이발레단의 수석무용수이기도 해서 더욱 관심이 갔으나, 안무작은 그의 춤만큼의 특별함을 보여주지 못해 아쉬웠다. 애초에 마리우스 프티파의 의뢰로 1899년 글라주노프가 작곡하여 1900년에 올렸던 발레 작품 <사계>를 음악만 남겨두고 완전히 새롭게 안무한 작품으로, 러시아 작품답게 겨울에서 시작하여 봄-여름-가을로 끝을 맺는다. 태양을 상징하는 거대한 공을 무대 한편에 설치하고 태양의 색깔과 위치로 계절을 나타냈다. 눈이 쌓이고 스산한 겨울로부터 새가 지저귀며 자연이 깨어나는 봄, 푸릇푸릇한 풀과 나무가 우거지고 사람들의 옷이 가벼워지는 여름, 생명이 태동하는 가을의 센슈얼함을 연작 그림처럼 보여주었다. 겨울과 여름은 남성이, 봄과 가을은 여성이 주된 캐릭터로 춤을 추었는데, 특히 여름의 아르쫌 오브차렌코(Артём Овчаренко)와 가을의 마리아 비노그라도바(Мария Виноградова)가 생명력 있는 남녀의 모습을 인상적으로 보여주었다. 아름다운 음악과 무용수들의 기량에도 불구하고 일차원적 상징과 갈 곳 잃은 안무의 방향이 작품을 무향, 무취로 만들어버린 안타까운 작품이었다. 


<댄스마니아>는 이번 공연에서 가장 주목할 만했다. 원, 부채꼴, 타원형 등의 기하학적 문양으로 가득한 배경은 장면이 전환될 때마다 빨강, 파랑, 주황, 초록빛을 발했다. 도형의 가운데 찍힌 검은 점은 누군가 바라보는 강렬한 눈빛과 같고 간혹 그 점이 레이저를 쏘는 것처럼 붉은빛을 밝혔다. 무용수들은 솔로, 듀엣, 혹은 엄청난 군무진으로 마지막을 불태우듯 열정적인 춤을 추었다. 빠른 회전, 쉴 새 없는 점프, 클래식한 동작 사이사이로 팔을 휘젓거나 골반을 뒤틀고 상체를 과하게 젖히고 몸을 뒤트는 등의 현대적 움직임이 섞여 들어가 있다. 에로틱하면서도 긴장감을 자아내는 이인무에서도 신체의 사용에 빈틈이 없어 한눈을 팔 새가 없게 만들었다. 러시아의 작곡가 유리 크라사빈(Юрий Красавин)의 바로크와 고전, 현대를 아우르는 음악 역시 고전적이면서도 현대적인 춤에 딱 맞아떨어졌다. 무대의 장면을 찢는 듯한 타악기 리듬과 오케스트라의 현악 멜로디의 조화가 극장을 휘감았고 관객들의 눈과 귀를 사로잡았다. 화려한 음악과 안무, 조명과 무대장치 그 모든 것이 관객들을 원초적인 ‘댄스매니아’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이미 백 년이 넘도록 검증된 클래식발레와 달리 창작 작품들은 호불호의 차이가 크다. 신선한 작품에서 자극을 받는 관객들이 있는 반면 여전히 <백조의 호수>를 좋아하고 스토리발레를 사랑하는 발레 팬들이 많다. 그러나 예술가들은 자신들의 창작 욕구를 실현시키며 매 작업마다 예술적 완성을 향해 작업을 거듭하고 싶어 한다. 볼쇼이극장이 예술가들의 창작 실험실로 기꺼이 공간을 내어주고 있다는 점은 클래식발레 일변도인 러시아 내에서 무척 반가운 일이다. 지금 전 세계인들의 사랑을 받는 클래식 작품들 역시 당시에는 하나의 창작 작품이었지 않는가. 20세기 초 모던발레의 탄생지가 바로 이곳 러시아였다는 사실을 생각하면서, 차기 창작 작업의 결과물을 기대해 본다.

  

〈Dancemania〉Photo by Elena Fetisova/ Bolshoi Theatre.

 

 

글_ 이희나(춤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