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니버설발레단의 <심청>이 지난 5월 12일부터 14일까지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 무대에 올려졌다. 2019년 공연 이후 4년 만이다. 1986년 초연되어 올해까지 37년간 국내 무대는 물론 초연 이듬해인 1987년부터 해외 투어를 시작해 15개국 40여 개 도시에서 200회 이상 공연되며 발레단과 역사를 함께해 온 작품이다.
대개 발레단의 역량을 평가할 때의 첫 번째 기준은 프티파의 이름 아래 정렬되는 클래식 작품을 얼마나 번듯하게 해내느냐가 되기 마련이다. 물론 프티파의 그늘에서 벗어나 자신의 세계를 이룩한 안무가들은 적지 않지만 그러한 안무가들의 이름이 꼭 발레단의 역량으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무수히 쏟아지는 신작들 가운데 발레단의 레퍼토리로 살아남는 작품은 매우 한정적이며, 당연하게도 안무가의 높은 명성이 그의 작품을 레퍼토리로 만들어주지도 않는다.
우리가 발레를 종합예술이라 칭할 때 이는 발레 작품을 구성하는 요소들의 총체로서의 예술을 가리키지만 실은 한 편의 작품이 발레단의 레퍼토리가 되는 과정 그 자체가 종합예술에 다름 아니다. 흔히 연극의 3요소를 희곡, 배우, 관객으로 꼽는데, 연극을 완성하는 마지막 요소로써 관객의 존재는 발레에서도 예외가 아니며, 이때 관객은 단순히 작품을 감상하는 수동적인 위치가 아니라 그들의 수용 여부에 따라 작품의 생명력이 결정되는, 이른바 절대자의 위치에 있다.
즉, 어떤 작품이 발레단의 레퍼토리가 되기까지는 작품을 지속적으로 무대에 올리겠다는 발레단 운영진의 의지만이 아니라 그 작품을 앞으로도 계속해서 보고자 하는 관객들의 열망이 필요하다. <심청>이 발레단의 첫 번째 창작 레퍼토리라는 야심찬 출발점에 머무르지 않고 어느덧 발레단을 대표하는 레퍼토리로 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발레단이 내세운 ‘한국적 발레’라는 모토에 대한 매체와 평단의 호응은 물론 애정과 공감으로 화답한 관객들이 있었다.
결혼각본 속 신부가 아니라 공동체를 구원하는 영웅의 이야기
‘결혼각본’이 주요 플롯으로 작동하는 발레 작품에서 줄거리는 대체로 결혼을 둘러싼 젊은 여성과 남성의 멜로드라마로 전개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딸의 지극한 효심이 맹인 아버지의 눈을 뜨게 만드는 기적의 이야기인 <심청>에서 남자 주인공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아버지 심학규다. 맹인이라는 설정 상 춤보다 마임 위주의 연기를 펼치게 되는 심학규 대신 원래라면 남자 주인공에게 부여되었을 춤을 선장과 용왕, 왕이 각각 나누어 추고 있다. 줄거리상의 남자 주인공과 안무상의 남자 주인공이 분리되어 있는 셈이다.
심청은 1막에서 심학규와 애끓는 이별을 하고 2막에서는 가슴 벅찬 재회를 한다. 선장과 용왕, 그리고 왕은 심청 부녀의 이 절절한 이별과 재회의 드라마에서 적당히 비중 있는 조연에 지나지 않는다. 선장은 심청을 바다에 공양하는 의식을 무사히 마친 뒤 퇴장하고, 용왕은 심청에게 구애를 거절당하자 아무 미련을 남기지 않고 그를 육지로 돌려보내준다. 왕비 간택 중이던 왕은 후보들을 모두 물리고 심청을 왕비로 삼지만 이들은 여느 작품들에서처럼 결혼식 그랑 파드되로 작품의 대미를 장식하지도 않는다. 등장하는 장면들에서 모두 주인공급 존재감을 과시하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셋 모두 부녀의 이별과 재회를 위한 도구로만 사용되는 인물들이다.
관객들의 감정을 고조시키고 마침내 눈물샘을 터트리는 순간은 죽음에서 돌아온 심청이 왕비가 되어 신분 상승을 이루는 장면이 아니라 부녀가 비탄과 감격의 눈물로 이별하고 재회하는 장면이다. 심청의 효심은 심학규뿐 아니라 맹인잔치에 참석한 다른 맹인들까지 눈을 뜨게 만드는 기적을 낳는다. <심청>은 ‘결혼각본’ 안에서 전개되는 러브스토리가 보여주는 멜로드라마의 감정선을 고스란히 따라가면서도 그 결말은 한 개인 혹은 한 커플의 행복을 넘어 공동체 전체의 행복으로 마무리된다. 심청의 여정에 동행하는 남성 인물들 때문에 이성 간의 관계성에 대한 착시 효과가 일어나는 면이 있긴 하나 본질적으로는 자기희생에서 출발해 공동체의 구원에 도달하는 영웅서사라 할 수 있다.
세월의 나이테만큼 쌓인 변화들
37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심청>은 꾸준한 개정을 거듭하며 만듦새를 세심하게 다듬어 왔다. 초창기 공연에서 줄거리상의 주요 사건들이 전개되는 장면에서는 한복을, 디베르티스망이나 파드되 중심의 춤을 보여주는 장면에서는 클래식 튀튀를 입는 식으로 동서양의 복식이 섞여 있던 의상은 한복으로 통일되었다. 2막의 용궁과 3막의 궁궐을 이루는 세트는 더욱 화려해지고 중후해졌으며, 인당수에 빠진 심청이 용궁으로 향하는 장면은 수중에서 촬영한 영상을 삽입해 무대라는 공간의 한계를 확장한다. 1막 선상의 꿈속 장면은 심청의 어머니인 곽씨 부인만 등장했다가 심학규도 함께 등장하는 것으로 바뀌었고, 초창기에는 서양풍 드레스를 입었던 곽씨 부인은 이제 한복을 입고 등장한다.
이번 공연에서는 기존의 3막 구성을 2막으로 축약해 원래 2막으로 독립되어 있던 용궁 장면을 1막에 이어 붙였다. 두 번의 인터미션이 있는 3막 공연을 버티지 못할 정도로 현대 관객들의 인내심이 점점 짧아지고 있는 현실에 대한 고심책인 듯하다. 그러나 이 개정으로 인해 심학규의 도화동 집과 인당수로 향하는 선상, 바닷속 용궁의 3장으로 배경이 변화무쌍하게 바뀌는 1막의 호흡은 다소 거칠고 급해졌다.
뿐만 아니라 발레단의 다른 레퍼토리 작품들인 <춘향>이 춘향과 몽룡의 이별로, <지젤>이 지젤의 죽음으로, <백조의 호수>가 지그프리트의 사랑의 맹세로 1막이 마무리되며 관객들이 극대화된 긴장감 속에서 2막을 기다리게끔 하고 있는 것과 비교하면 이번 <심청>의 관객들은 비바람이 몰아치는 바다에 몸을 던진 심청을 바라보며 한껏 고조된 긴장감을 용궁 장면에서 내려놓고 다소 느긋해진 마음으로 2막을 감상하게 된다. 드라마의 완급 조절이라는 면에서 이 같은 관객들 감정의 템포를 어떻게 운영할 것인지도 고민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번 공연에는 올해 로잔콩쿠르에서 3위로 입상한 주니어컴퍼니의 박상원이 새로운 심청으로 합류했다. 강미선, 한상이, 홍향기 등 이미 심청으로 풍부한 무대 경험을 보유한 노련한 기존 주역들 사이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야 했던 박상원은 아무래도 원삼을 입은 2막의 왕비보다는 1막의 소녀 심청이 더 어울렸는데, 깔끔한 테크닉과 풋풋한 연기로 앞으로의 무대에 대한 기대감을 높였다.
발레단에서는 박상원 외에도 역시 주니어컴퍼니 소속으로 올해 유스아메리카그랑프리에서 우승한 김수민을 <호두까기인형> 등의 주역으로 기용한 바 있다. 코로나 팬데믹을 거치며 해외 발레단의 스타 무용수를 초청하는 대신 아직 스타가 되기 전의 유망주 무용수를 미리 선보이는 방향으로 선회한 듯하다. 발레단이 주말 공연에 치중하며 공연 횟수가 줄어들고 있다 보니 발레단 내부에서는 앞으로 더욱 치열한 주역 경쟁이 예고된 것이나 다름없는데, 이 같은 신인 무용수의 기용이 어떤 신선한 바람을 불러일으키게 될지도 지켜봐야 할 일이다.
효도 이데올로기에 대해 질문하다
1986년은 우리나라가 처음 유치한 메가 스포츠 이벤트인 아시안게임이 열린 해로, <심청>의 초연은 바로 그 아시안게임의 문화예술축전 특별초청공연으로 치러졌다. 우리나라에서 처음 열리는 국제스포츠경기대회라는 의미도 있지만 그 2년 뒤에 열릴 하계올림픽의 최종 리허설 성격이 더 강한 대회였기 때문에 당시 아시안게임의 무게감은 올림픽과 동급이었다. 발레단이 모토로 내세운 ‘한국적 발레’는 창단된 지 얼마 되지 않은 민간예술단체 차원이나 서구예술의 아성을 신속히 따라잡고자 하는 변방국 예술계의 비전을 넘어 시대와 국가의 요구로 수렴되었다.
당시 <심청>과 나란히 공연된 작품이 국립발레단의 <춘향의 사랑>이었다는 점도 의미심장하다. 고전소설 『심청전』과 『춘향전』은 한국적 소재에 천착하는 후대의 창작자들에게 영감의 보고라 할 정도로 지금까지 끊임없이 리메이크되며 사랑받고 있는 작품이지만 당시의 시대 분위기를 떠올린다면 군사쿠데타로 집권한 권위주의 정권하에서 생산된 국가 프로파간다 예술의 측면을 무시할 수 없다. 앞서 <심청>을 ‘영웅서사’라고 쓴 것과 배치되는 서술이지만 ‘아버지에게 효도하는 딸’과 ‘남편에게 정절을 지키는 아내’가 가부장제 안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생각한다면 이 작품들을 통해 추어올려지는 여성의 주체성이 결국 어디로 수렴되는지도 토론이 필요한 주제다.
최인훈은 희곡 <달아 달아 밝은 달아>에서, 황석영은 소설 『심청, 연꽃의 길』에서 심청이 매춘업소에 팔려가 남성들에게 착취당하는 것으로 각색하며 『심청전』에서 읽어내야 할 것은 효도 이데올로기가 아닌 가부장제하에서 이루어지는 남성에 의한 여성 착취임을 설파한 바 있다. 그러나 지난 2020년 서울연극제에서 공연된 극단 공연제작센터의 <달아 달아 밝은 달아>는 심청에게 가해지는 폭력을 포르노적으로 묘사했다고 비판받으며 이 같은 폭력을 고발하고자 하는 예술의 ‘방식’에 대한 또 다른 질문을 남겼다.
그동안 발레 <심청>의 개정은 주로 세트나 의상 등 작품을 구성하는 외적 요소에 집중되어 왔다. 원작의 뺑덕어멈이나 승상부인이 생략되고 용왕이 새롭게 창조된 것 외에 스토리 면에서는 별다른 각색이 이루어지지 않은 채 원작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그렇다면 발레 <심청>처럼 원작의 줄거리를 그대로 따라가는 각색에서 새롭게 질문해봐야 할 것은 우리가 한국의 전통으로 여겨온 ‘효’ 사상과 현대사회가 중시하는 ‘아동 보호’의 가치관이다. 나는 그동안 <심청> 속 여성 학대에 대해 주로 지적해 왔으나 본고에서는 이 ‘아동 보호’라는 관점에서 질문을 던지고자 한다. <심청>은 심청 스스로 인신공양의 제물이 되기로 결정했으며, 이 같은 결정에 대해 아버지는 모르고 있었다고 심학규에게 면죄부를 주고 있다. 결정적으로 그는 딸을 잃고도 눈을 뜨지 못하다가 딸을 되찾은 다음에야 눈을 뜰 수 있게 된다. 이 이야기에서 심청은 고결한 영웅이며, 남은 것은 그의 지극한 효심이다.
서양에도 학대당하는 아동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작품은 많다. 『올리버 트위스트』의 올리버, 『소공녀』의 세라, 『제인 에어』의 어린 제인, 『레미제라블』의 어린 코제트 모두 성인 보호자가 없거나 보호해주어야 할 성인에게 도리어 학대를 당하는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러나 이 이야기들의 주인공들은 성인 보호자를 만나 구원을 받거나 학대당하던 어린 시절에서 벗어나 성장을 이룬다.
『심청전』의 현대적인 각색에서 심청은 ‘남성사회의 피해자 여성’으로 주로 해석되어 왔는데, 원작에서 심청이 인당수 제물로 바쳐지는 나이는 열다섯 살로, 심청의 당시 나이를 두고 현대의 기준대로 보호받아야 할 미성년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발레 작품의 주인공들이 대개 열다섯에서 열여섯 살 정도의 십대 여성들임을 생각하면 특별히 어린 나이도 아닌 데다, 위에 언급한 작품들과 비교한다면 심청을 학대당하는 아동으로 보기에도 무리가 있다(1막 초반에서는 태어나자마자 어머니를 잃은 어린 심청을 마을 아낙네들이 극진히 귀애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청나라 선원들이 마을에 찾아와 인신공양 제물로 바칠 처녀를 찾을 때 보호자가 있고 없고의 차이는 극명하게 드러난다. 어떤 아버지가 금전에 눈이 어두워져 딸을 내어놓으려 하자 어머니가 펄쩍 뛰며 이를 말리고, 심청은 스스로 제물이 되겠다고 나선다. 이때 마을 어른들 중 아무도 심청을 말리지 않는다. 지켜줄 보호자가 없는 심청의 현실이다.
앞서도 말했듯 <심청>의 멜로드라마 구조에서 남자 주인공은 장차 심청의 남편 될 이가 아니라 아버지 심학규다. ‘결혼각본’의 신부인 발레의 주인공들은 결혼의 한 주체로서 남편을 찾는 여정에 오르지만 아버지를 구원함으로써 공동체의 구원에 다다르는 심청은 작품의 처음부터 끝까지 ‘딸’로서만 존재한다. 시각장애가 있는 아버지를 대신해 가장 역할을 한다고 해서 혼인도 하지 않은 심청이 성인으로 대접받았을 리는 만무하다. 보호가 필요한 어린 딸과 역시 보호가 필요한 장애인 아버지, 이처럼 약자와 약자 간 보호가 충돌할 때 이들 중 보호자가 되어야 하는 것은 누구인가. 성인 보호자에게서 보호를 받아보지 못한 어린 주인공이 성인을 보호함으로써 영웅이 되는 이야기를 ‘효’에 대한 찬미로 마무리지어도 될 것인가. 어린이와 함께 온 가족이 보는 공연에서라면 더더욱 질문을 던져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글_ 윤단우(공연칼럼니스트)
사진제공_ 유니버설발레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