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템퍼러리 아트’의 기조 아래 장르의 경계 해체는 보편화한 지 오래다. 장르 논쟁은 이미 해묵은 것이 됐고, ‘신체 표현 예술’이라는 기존 정의를 따르지 않는 춤 작품들도 빈번하게 등장하고 있다. 적극적인 대사 활용과 기술의 적극적인 동원 혹은 범람 속에서 춤꾼의 신체는 더 이상 춤 예술의 정체성을 독점하는 고유한 매체가 아니다. 전통적 춤에서 다른 차원의 공연예술로 확장하는 지금, 몸의 활용은 춤의 형식과 내용 양면에서 새로운 도전에 직면해 있다.
동시에 몸의 가능성을 환기하면서 춤의 정의를 다시 생각하게 하는 작품들도 꾸준히 출현하고 있다. 지난 5월 26일과 27일 LG아트센터 무대에 오른 예테보리 오페라 댄스컴퍼니의 더블 빌 〈Kites〉와 〈SAABA〉가 그랬다. 다미안 잘레(Damien Jalet) 안무의 〈Kites〉는 하늘 위의 연을 의인화한 몸짓을 통해 진정한 자유에 대해 질문하는 작품이다. 샤론 에얄(Sharon Eyal) 안무의 〈SAABA〉는 특별한 바디 슈트를 입은 춤꾼들이 독특한 리듬과 움직임으로 ‘신체 예술’의 백미를 보여준다. 두 작품 모두 거창한 내러티브나 특별한 무대미술 대신 신체의 움직임을 중심으로 존재감을 과시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했다.
벨기에 출신의 다미안 잘레는 영화, 광고, 대중음악 등 다양한 분야에서 인상적인 비주얼과 움직임으로 개성을 발휘해온 안무가다. 예테보리 오페라 댄스컴퍼니와 함께한 전작 〈SKID〉에서도 34도 기울어진 무대 위에서 중력에 저항하는 움직임으로 눈길을 끈 바 있다. 이번 〈Kites〉에서도 경사면의 구조물이 등장하지만, 이번 작품에서 중요한 것은 세트의 비주얼보다 연이 상징하는 의미다. 가느다란 실로 연결된 연은 불안정한 하늘의 기류에서 항상 위험에 처해 있는데, 이는 제한적이면서도 위태로운 삶을 영위하는 인간을 은유한다.
연이라는 상징과 이를 표현한 춤꾼들의 의상, 그리고 무대 위에 설치된 구조물은 이러한 주제를 담아내기에 효과적이다. 구조물을 오르내리는 동작의 반복, 무형의 흐름을 따라 질서 있게 움직이는 동선은 기류에 이리저리 나부끼는 연이나 기류 자체를 묘사한다. 몇 분에 걸쳐 반복되는 이 단선적인 구성은 어느 정도 동양적인 세계관을 연상시킨다. 그것은 실과 단절됨으로써 무한한 자유를 얻은 연처럼, 죽음의 순간에서야 비로소 진정한 삶을 깨닫는 인간 존재에 대한 성찰 같은 것이다.
그런 점에서 〈Kites〉를 관통하는 두 개의 키워드는 ‘자연의 섭리’와 ‘삶의 숙명’이라고 할 수 있다. 다미안 잘레는 작품 전체에서 인위적인 동작 표현보다는 거대한 흐름에 순응하는 군무와 바람에 흩날리는 상하체의 움직임을 통해 두 키워드를 시종일관 강조한다. 소박하지만 묵직한 아이디어에서 비롯된 작품은 절제된 구성과 신체 표현으로 연약하고 불안정한 인간의 삶을 흥미롭게 재현한다.〈Kites〉가 관념의 구현에 신체를 활용하는 콘셉트라면, 〈SAABA〉는 강렬한 신체의 매력을 보여주면서 그 안에 담긴 유약함을 드러내려는 작품이다. 전자가 자연스러운 움직임에 치중한다면, 후자는 고도로 응축한 에너지를 섬세하게 조절하며 전개하는 차이가 있다.
이스라엘의 바체바 댄스컴퍼니의 무용수와 부예술감독을 거쳐 L-E-V를 창단한 샤론 에얄은 이후 일렉트로닉 뮤직과 패션, 현대미술 등의 요소를 결합한 독특한 세계를 선보였다. 〈SAABA〉 역시 이런 이질적인 요소들이 한데 섞여 기묘한 매력을 과시하는 작품인데, 특히 샤론 에얄 특유의 안무 스타일이 돋보인다. 주로 강렬한 타악기 연주에 맞춰 드미 푸앵트로 걸으며 무릎을 구부렸다 펴는 기괴한 동작은 그의 시그니처 안무라고 할 만하다. 이를 더욱 부각하는 것은 패션 브랜드 디올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마리아 그라치아 치우리가 특별히 제작한 바디 슈트다. 2019년 디올 패션쇼를 연출하며 뜨거운 반응을 얻었던 에얄은 이번 작품에서도 하이패션을 도입해 신체의 가능성을 파고든다. 그럼으로써 육감적인 동작과 뇌쇄적인 표정을 십분 활용하는 기존 안무 스타일은 이번 작품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된다.
특히 이 동작이 군무로 발현될 때 에얄 스타일의 독특한 에너지는 금세 배가된다. 저마다 척추를 과도하게 접었다 펴고, 몸통을 리드미컬하게 수축하며 확장하는 일체성은 한몸처럼 느껴진다. 그러면서도 각자의 독립성을 유지하는 춤꾼들의 움직임은 에얄의 안무를 훌륭하게 수행해낸다. 이처럼 〈SAABA〉는 관절과 근육 중심의 미시적인 동작으로 일정한 규칙을 만들고 그것들을 반복하고 또 변형하며 또 다른 흐름을 만든다.
그런데 이 때 발생하는 불협화음이 묘한 쾌감을 준다. 이 불협화음은 실제로 두 가지 다른 성격의 음악을 혼용하면서 충돌하는 리듬의 이질성에서도 느껴진다. 낯선 리듬이 중첩되는 동안에도 규칙적인 움직임을 고수하는 군무의 개성은 점차 또 하나의 거대한 질서로 확장된다. 일사불란한 일체감이 아닌, 저마다의 호흡으로 꿈틀대던 춤꾼들이 전열을 가다듬으면서 이뤄가는 군무의 끝에선 카타르시스마저 느껴진다.
이런 섬세한 연출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역동적이고 속도감 있는 안무가 아니라 섬세하고 작은 동작 중심의 구성이라는 점이 흥미롭다. 비교적 심플한 조명의 운용을 통해 드러나는 특별한 바디 슈트는 이 모든 콘셉트의 중심에 서 있다. 피부 같으면서도 피부가 아닌, 석고상의 불균질한 표면처럼 보이는 이 특별한 슈트는 온몸으로 익숙함을 거부하는 듯한 작품의 콘셉트를 시각적으로나 정서적으로 절묘하게 구현하는 기능을 보여준다. 춤과 음악, 의상의 이 미니멀하고 기묘한 동행은 신체 예술의 가능성이 여전함을 훌륭히 입증해낸다.
글_ 송준호(춤평론가)
사진제공_ LG아트센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