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조의 호수(Лебединое озеро)>는 고전발레의 상징과 같은 작품이다. 발레에 관심이 없거나 발레를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도 발레의 이미지는 순백의 튀튀를 입고 백조 깃털을 머리에 두른 발레리나로 집약되어 있을 것이다. 그만큼 강렬하고 지배적인 고전발레의 명작 <백조의 호수>는 1877년 모스크바 볼쇼이극장에서 초연된 이래 다양한 버전이 만들어져 왔다. 벤젤 라이징거(Wenzel Reisinger)가 안무를 맡았던 초연작은 안무나 음악 배치, 의상 등 여러 가지 면에서 부족했던 실패작이었다. 오늘날까지 우리에게 널리 알려져 있는 고전발레 <백조의 호수>는 마리우스 프티파(Marius Petipa; Мариус Петипа)와 레프 이바노프(Лев Иванов)가 안무한 1895년 작으로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마린스키극장에서 초연되었다. 이 버전은 <백조의 호수> 발레의 하나의 전형(canon)이자 고전발레의 상징이 되었으며, 이후 만들어진 전 세계 발레단의 <백조의 호수>는 대부분 프티파-이바노프 버전에 기초하여 각색, 변형하고 있다.
지난 6월 4-5일에 스타니슬랍스키&네미로비치-단첸코 기념음악극장(Московский академический Музыкальный театр имени народных артистов К.С. Станиславского и Вл.И. Немировича-Данченко; The Moscow State Stanislavsky and Nemirovich-Danchenko Music Theatre)에서 공연된 <백조의 호수>는 소비에트 시대의 러시아 안무가 블라디미르 부르마이스터(Владимир Бурмейстер)의 안무작이다. 이 작품 역시도 프티파-이바노프 버전에서 기본적 구성을 가져왔지만 몇 가지 부분에서 부르마이스터만의 독창성이 뚜렷하여 또 하나의 고유한 버전이 되었다. 부르마이스터는 기치스(ГИТИС)라고 불리는 러시아국립예술대학교의 전신인 루나차르스키 모스크바 연극대학 출신의 소비에트 발레예술가 중 한 명이다. 1941년부터 약 30년 간 스타니슬랍스키&네미로비치-단첸코 기념음악극장과 인연을 맺고 많은 발레작품을 안무하였으며 그 중 하나가 아직까지 이 극장의 레퍼토리로 공연되고 있는 <백조의 호수>이다. 1953년 4월 25일 초연을 하였으며 누레예프 버전이 나오기 이전의 파리오페라발레단에서도 부르마이스터의 안무작을 공연했었다.
<백조의 호수>는 크게 네 부분으로, 4막 혹은 4장으로 구성된다(프티파-이바노프나 부르마이스터 버전은 4막으로 구성된 반면, 볼쇼이의 그리가로비치는 각색을 통해 2막 4장으로 축약했다). 1막과 3막은 궁정의 풍경, 2막과 4막은 백조들의 씬(scene)으로 확연히 다른 분위기로 나뉜다. 1-3막은 프티파가, 2-4막은 그의 제자인 이바노프가 안무를 했는데, 오늘날까지 가장 상징적인 백조의 장면이 고전발레의 마스터 프티파에게서 탄생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 아이러니하다. 그 상징성을 인정하는 듯, 부르마이스터 버전에서도 2막은 이바노프의 안무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그만큼 <백조의 호수> 2막은 내용과 형식적 측면 모두에서 미적 완성도를 보여준다. 이번 공연에서도 그 점을 재확인할 수 있었다. 달빛으로만 채워진 푸른빛 무대에서 화려한 색채나 어떠한 마임도 없이 오로지 춤으로만 하나의 장면을 끌고나가는 구성과 움직임이 그 자체로 온전한 작품이 되었다. 낭만발레의 환상적 분위기와 고전발레의 형식미, 포킨이 만든 <레 실피드>를 떠올리게 하는 모던함을 갖춘 장면으로 평가하고 싶다. 백조들의 물 아래 발길질을 나타낸 듯한 섬세한 발동작과 두려움에 떠는 백조의 날갯짓, 세 마리-네 마리-군무로 이어지는 백조들의 아름다움이 무대를 장악했다. 긴장감 넘치는 지그프리드와 오데트의 아다지오는 그 어느 발레작품의 파 드 되보다도 형식적으로나 내용적으로 충만한 이인무였다.
부르마이스터의 손길은 2막을 제외한 작품 전반에 걸쳐 닿아있다. 작업 당시 그는 차이콥스키의 악보 전체를 검토하고 처음부터 완전히 새롭게 선정하였으며 악보 배치를 달리 하는 등 좀 더 개연성과 사실성이 드러나도록 구성을 하였다. <백조의 호수>의 결말은 여러 가지가 있다. 오데트와 지그프리드가 함께 죽거나, 오데트는 죽고 왕자만 남아 비탄에 빠지거나, 지그프리드가 로트바르트와 죽고 오데트는 계속 백조로 남아있게 되는 등 버전에 따라 다양하게 존재한다. 프티파-이바노프 버전의 결말은 지그프리드와 오데트가 죽음으로써 로트바르트의 저주가 풀린다는 것이었는데, 이러한 비극적 엔딩은 낙관적 이상향을 보여주어야 했던 소비에트 사회주의의 리얼리즘 이념에 어긋나는 것이었기에 소련 시대에는 당국의 명령에 따라 결말을 해피엔딩으로 바꾸어야만 했다. 부르마이스터 버전 역시 지그프리드와 로트바르트의 결투 끝에 선이 악을 물리치고 저주가 풀려 오데트와 사랑이 이루어진다는 행복한 결말을 맺는다. 또한 부르마이스터는 작품의 처음과 끝에 프롤로그와 에필로그의 형식으로, 소녀 오데트가 로트바르트의 저주를 받아 백조로 변하는 장면과 다시 저주가 풀려 사람으로 변신하는 장면을 삽입하여 작품에 구체성을 더했다. 사회주의 이념이 사라진 오늘날에도 부르마이스터의 각색이 여전히 관객들의 사랑을 받는 이유는 고전발레의 특성상 심오한 작품의 구성보다는 무엇이든 가능할 것 같은 환상의 공간에 차려진 화려한 테크닉과 볼거리를 즐기는 데 더 큰 비중을 두기 때문인 것일 테다.
일반적으로 3막 무도회에서 오딜과 지그프리드가 춤추는 왈츠와 그에 이어지는 아다지오 파 드 되 음악을 1막으로 배치한 것도 부르마이스터 버전의 독특한 부분이다. 1막의 남자주인공은 차라리 광대라 해도 될 만큼 지그프리드의 춤은 등장하지 않는데, 이 대목이 거의 유일하게 춤을 추는 부분이다. 오딜의 매혹적 몸짓을 실어 나르던 바이올린 솔로 선율이 지그프리드의 춤으로 이동하자 궁정의 무료함에 지쳐 낭만적 사랑을 꿈꾸는 왕자의 절절한 감정으로 변모했다. 3막의 오딜과 지그프리드의 이인무에는 이 인상적인 아다지오 대신 또 다른 악보를 배치하였다. 이 아다지오에서 지그프리드는 2막에서 오데트가 떨어뜨리고 간 백조 깃털을 오딜에게 주며 사랑을 맹세한다.
부르마이스터는 여러 캐릭터댄스가 등장하며 프티파식의 전형적인 고전발레 형식을 보여주는 3막 무도회장면도 나름의 방식으로 재구성을 하였다. 그리가로비치 버전이 각국의 신부 후보들의 춤으로 이 캐릭터댄스를 대체한 것처럼, 부르마이스터 버전에서는 로트바르트와 오딜의 일행들이 각 캐릭터댄스를 맡았다. 오딜과 지그프리드의 파 드 되 전에 등장하는 디베르티스망이 프티파식의 구성이라면, 부르마이스터는 이 각각의 춤들을 하나의 플롯으로 끼워 넣음으로써 작품의 유기성을 꾀한 것이다. 스페인춤에서 스페니쉬 댄서와 오딜이 붉은 천 사이로 번갈아 나타나며 춤을 추면서 지그프리드를 현혹시키는 장면은 특히 인상적이었다. 3막의 절정에서 오딜이 정체를 밝히기 전 푸에테 장면의 음악도 주로 연주하는 곡이 아닌 다른 악보라는 점도 특이할 만하다. 오딜과 지그프리드의 그랑 파드되를 통해 점증하는 오딜의 매력이 극에 달해 터져버리는 여느 버전들과 달리 부르마이스터 버전에서는 로트바르트 일행의 휘몰아치는 춤의 향연들 사이에 오딜의 푸에테가 등장하였다. 전자의 춤과 음악이 위엄마저 느껴지는 오딜의 마력을 표현했다면 후자의 음악과 구성은 정신없는 코다의 절정 속으로 지그프리드를 홀려버리는 데에 초점을 맞추었다. 이 부분은 개인적으로 다소 아쉬웠는데, 도도한 오딜이 홀로 등장하여 모든 시공간을 장악할 것만 같은 마력이 부르마이스터 버전에서는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작품의 전체를 통틀어 그 누구보다도 두드러진 무용수는 단연코 오데트-오딜을 춤 춘 나탈리아 소모바(Наталья Сомова)였다. 발레단의 간판스타인 그녀는 섬세한 표현력과 절제미를 겸비한 안정적인 움직임을 보여주었다. 너무나 많이 춤추어져서 상투적이 되기 십상인 역할에 개성을 입혀 자신만의 색채를 만들어내는 것이 무용수의 역량이다. 소모바는 차분하고 성숙한 오데트와 흐트러짐 없이 테크닉을 구사하며 매력을 뽐내는 오딜을 안정적으로 춤추었다.
발레를 공연하는 러시아의 모든 극장이 전속발레단을 갖춘 것은 아니다. 스타니슬랍스키&네미로비치-단첸코 기념음악극장 발레단은 극장 전속 발레단으로서 볼쇼이발레단과 함께 모스크바에서 손꼽히는 실력과 레퍼토리를 갖고 있다. 키로프발레단(현 마린스키) 출신의 이고르 젤렌스키(Игорь Зеленский), 파리오페라발레단의 로랑 일레르(Laurent Hilaire) 등이 예술감독을 역임하며 고전발레뿐 아니라 지리 킬리안, 앙즐랭 프렐조카주, 아크람 칸 등의 모던-컨템포러리 작품을 레퍼토리화하여 무대에 올려 왔으며, 다큐멘터리 영화 <댄서(Dancer)>의 주인공 세르게이 폴루닌(Сергей Полунин)이 주역무용수로 활동하기도 했다. 현재는 20대의 젊은 러시아안무가 막심 세바긴(Максим Севагин)이 예술감독을 맡아 실험적 작품을 병행하는 등 꾸준히 새로운 시도를 하고 있다.
글_ 이희나(춤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