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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용가는 무엇으로 춤을 추는가? - 강미리 안무의 <파(波) II>



 한국 안무가들의 창작무대를 바라보는 것이 요즘같이 괴로운 때가 없다. 2000년이 넘어선 어느 순간에 촉발된, 아니 컨셉과 형식만 요란하게 이식된 컨템포러리 댄스는 이 땅의 무대에서 ‘춤’을 서서히 지워나갔다. 창작에서 개념만 중요할 뿐이지 ‘춤’은 필요치 않다며 공연을 극단적으로 몰고 가는 프랑스의 농 당스(non danse, 춤이 없는 춤)를 흉내 낸 무대가 있는가 하면, 이틈을 타고 간혹 타고난 몸치들이 예술가를 욕망하며 무용(舞容, 춤의 형상을 한) 퍼포먼스를 벌리기도 한다. 이들이 내세우는 컨셉은 현란하고, 팸플릿에 빼곡히 써내려간 리서치의 과정은 장엄하기 이를 때 없다. 실제 무대에서 이들의 지적인 고고함이, 수사의 현란함이, 의지의 장엄함이 구현된다면 얼마나 멋지겠는가. 그런데 춤으로 단련하지 않은 몸을, 안무로 훈련하지 않은 상상을 어찌 볼만하다고 하겠는가. 관념덩어리 오브제들로 무대를 잔뜩 채워 놓았을 뿐, 볼 것이 없다. 텅 빈 몸들은 둔탁한 소리를 내고, 고장 난 생각들은 파편처럼 무대를 떠돈다. 이런 뻔한 광경들이 계속되니 객석에서 눈을 뜨는 것도 지겨워진다. 이렇게 생겨먹은 무대를 ‘컨템포러리 댄스’라는 명목아래 얼마나 너그럽게 보아 왔으며, ‘다원예술’이라는 명목아래 또 얼마나 지켜봐야하는 것일까.

 

 이런 무대를 옹호하는 혹자들은 컨템포러리 댄스에 대한 필자의 날선 지적에 대해 의구심을 품을지도 모르겠다. 필자는 지난 20여 년간 춤공연을 지켜보았고 무용사를 여러 차례 섭렵하였으니 나의 지성을 탓하면 오히려 제기한 쪽으로 의구심을 되돌릴 수밖에 없다. 컨템포러리 댄스에 대해 편견 같은 것은 갖고 있지 않다. 우리 안무가들이 주저 없이 모방하는 컨템포러리 댄스의 종주국에서 날아든 공연을 보며 감동으로 가슴이 벅차오르기도 한다. 지성적, 지각적, 정서적, 영적으로 버무린, 이런 예술적 감동을 주는 우리 밖의 컨템포러리 댄스 작품에는 우리 안에서는 맛볼 수 없는 그 무엇이 존재했다. 그런데 그것이 무엇인지를 어렴풋하게나마 일깨워준 우리 안의 작품이 있었다. 지난 3월 11일 국립국악원 예악당에서 공연된 강미리 안무의 <파(波) II>이다.

 

 강미리의 <파 II>는 손경순예전무용단이 2013 공연예술창작 사후지원을 받아 재공연한 ‘우리춤 아름다운 향기 그리고 신명’의 객원 무대로 올려졌다. 강미리는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 현대 한국춤의 흐름을 주도했던 한국창작춤의 스타 안무가였다. 1990년대 후반에 부산대 무용과 교수로 부임한 그녀는 창작춤의 불모지였던 부산에서 안무의 터를 다지는 데만 근10여년을 보냈던 것 같다. 제자들을 무술로 유명한 골굴사로 들여보내면서까지 혹독하게 몸을 훈련시킨다는 소문이 들려오고, 신작을 발표한다는 소식이 여러 차례 올라왔지만 서울 무대에 서는 일은 드물었다. 재작년 무렵부터 스승인 김매자가 주최하는 창무국제예술제와 내일을 여는 춤의 무대에 오르더니 올해 초에는 2013 한국무용 우수작품전에 <관: 상생과 소통의 합설>을 출품하여 관심을 모았다. 강미리의 파격적인 안무를 기억하는 무용인들과 평론가들은 <관>에 대해 섣부르게 훈수를 두거나 이렇다 할 평을 내놓지 않았다. <관> 하나를 두고 강미리의 변화된 안무를 파악할 길도 없었고, 과거의 작품에서 보여주었던 시공간의 원대함, 무대 격식을 해체하는 파격미, 원초적 생명성은 찾기 어려워 적잖게 실망마저 준 것 같다. 오랜만에 중심 무대에 서는 강미리의 안무는 지극히 조심스러웠다고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강미리는 <파 II>에서 분명히 자신의 변화한 안무 본색을 드러냈다. 무용인들의 이목을 비켜간 무대였기에 마음껏 자신의 본색을 드러냈는지도 모르겠다. 강미리가 선호하는 주제인 상생, 치유, 소통은 붉은 색의 굿으로 해체되고 여성무용수들의 강렬한 신체에너지로 구현되었다. 그렇게 강미리는 제의적인 몸을 통해 우리 삶의 심연(深淵)을 투사하고 현대적 제의로 우리 사회의 해원(解寃)을 은유한 것이다.

 

 아마도 내가 요즘 공연에서 찾고 싶었던 것은 <파 II>가 내뿜었던 춤의 근원성 내지는 본질에 대한 그리움이 아닐까 싶다. <파 II>를 보며 무용가들이 무엇으로 춤을 추어야 하는지에 대해 어느 정도의 답을 구했기에 뒤늦게나마 이렇게 소회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작품이 나를 영적이며 지각적이고 지성적인 감동의 지경으로 이끈 것은 아니다. 그런 감동을 받기에는 공연 길이가 15분 남짓으로 매우 짧았으며, 15분 내내 긴장을 풀지 않고 온 에너지를 쏟아내며 투신하는 무용수들의 기에 질렸다고 표현하고 싶다. 무대 위의 밀도감이 높으니 무대를 향한 관객들의 집중감이 초기에는 높았지만 안무에 완급이 없이 긴장으로만 몰아치니 후반기로 가면서 피로감을 느끼고 진이 빠졌던 것 같다.

 


글_ 최해리(편집주간, 한국춤문화자료원 공동대표)

사진_ 강미리 할무용단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