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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색에 갇힌 몸짓, 피어나지 못한 선의: 정구호, 김성훈 〈GRIMENTO〉


많은 고전 작품들이 현대에도 유효한 것은 여전히 울림을 주는 무언가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 못한 고전이라면 그저 지난 시절의 유물로 소비되며 서서히 잊히고 말 것이다. 스타일리시한 형식 실험이나 예술가의 치기 어린 내면의 발화 역시 관객에게 순간 어필할 수는 있지만, ‘현재’라는 접점을 배제한다면 결국 그 가치는 쉽게 휘발되기 마련이다. 결국 예술이란 시대정신과 어떤 교감을 이루느냐에 따라 다양한 결로 해석되고 더 풍성한 의미를 갖게 된다.


지난 7일부터 10일까지 세종문화회관 무대에 오른 정구호 연출·김성훈 안무가의 <그리멘토(Grimento)>는 학교 폭력이라는 동시대의 현안을 과감하게 현대춤으로 옮겼다. ‘과감하게’는 상투적인 수사가 아니라 소재의 제한성을 고려한 표현이다. 추상적인 몸짓 언어로 그려지는 현대춤 장르에서 이런 시사적 소재의 활용은 대개 양날의 검이기 때문이다. 가해자도 피해자도 명확하지만 쉽게 해결될 수 없는 구조적 문제에 대한 재현은 으레 뻔한 동어반복이나 현실과 괴리된 이상적 대안으로 마무리되기 일쑤다. 문제의 피해자들이나 그 상처를 공유하는 관객에게는 어느 쪽도 유쾌한 경험이 아니기 때문에 창작에 신중할 필요가 있다. 이런 점에서 소재의 까다로움에도 불구하고 심각한 사회 문제에 공감하며 그 해결에 기여하고자 했던 창작진의 취지는 높이 살 만하다.



작품의 중심 콘셉트는 ‘회색’에서 비롯한다. 작품 제목인 그리멘토(Grimento) 역시 회색을 뜻하는 프랑스어 ‘Gri’와 기억, 순간을 의미하는 라틴어 ‘Memento’의 합성어다. 작품을 지배하는 회색의 콘셉트는 그 색이 지닌 이미지처럼 중간 지대를 가리킨다. 즉 창작진은 가해자와 피해자의 이항구조를 탈피하고 그 사이에 끼어 있는 방관자들의 존재를 부각해 이를 문제의 해결 동력으로 내세운 것이다. 학교라는 공간으로 제한된 무대에서 16명의 춤꾼들이 8명의 가해 학생과 1명의 피해 학생이 돼 폭력의 현장을 재현하고, 이를 외면하는 7명의 학생들이 작품의 큰 틀을 이룬다. 한때 ‘청춘(靑春)’으로 대표되던 학창 시절의 맑고 푸른 색감 대신 무대는 책걸상과 교복 등 모든 것이 온통 잿빛으로 그려진다. 인생의 중요한 것이 퇴색한 세계, 잊고 싶지만 잊을 수 없는 기억을 상징하는 연출이다. 또 가해와 피해의 익숙한 대칭 구조 뒤로 언뜻 보이는 방관자들은 회색의 콘셉트와 겹쳐지며 존재감을 드러낸다. 이야기의 끝에서 문제 해결의 주체로 나서 작품을 완성하는 것도 이들의 몫이다. 부정적인 뉘앙스에서 출발한 회색의 이미지를 희망의 뉘앙스로 전환하는 낭만적인 아이디어가 돋보이는 설정이다.


16개의 책상과 의자 대형은 이러한 연출의 방향성을 세련되게 표현한다. 대열을 맞춰 비슷한 듯 다른 학생들의 몸짓을 묘사하는 군무는 김성훈과 정구호가 호흡을 맞췄던 <일무>를 연상시킨다. 하루의 대부분을 한 평 남짓한 책걸상에서 벗어나지 않는 학생들의 일상을 반영하는 동작들은 초반부의 장관을 장식한다. 이후 본격적인 폭력의 서사가 진행되면서 배움의 도구였던 책걸상은 방관 학생들의 바리케이트도 되고, 피해 학생의 감옥으로 변하기도 한다. 이윽고 쌓아올린 책걸상의 탑 위에서 위태롭게 서 있는 피해 학생의 모습은 객석의 관객에게도 방관자의 불편한 감정을 전이시킨다. 이는 모두가 방관하는 자리에서 일어나 이 문제에 적극 개입할 것을 독려하는 연출적 설정이다.



문제는 이러한 소재를 대하는 춤 예술만의 창의적인 방식이다. 사회적 현안에 대한 예술의 역할이란 결국 뉴스나 시사 프로그램, 혹은 다큐멘터리가 말하지 않는(못하는) 차원의 미학적 인식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것이 인간이든, 사회이든, 문명이든, 재현된 세계를 통해 문제의 이면을 해체하고 재구성하는 번역의 과정이 필요하다. 이런 점에서 <그리멘토(Grimento)>의 접근 방식은 다소 순진하고 정직하다. 초반부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안무는 재구성된 춤의 형태보다 청소년 드라마의 학교 폭력 장면을 그대로 무대에 옮긴 듯 사실적이다. 은유보다 사실 전달의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다. 공연 마지막의 배경 영상에 등장하는 “그들은 우리의 자식이고 형제이고 친구입니다”라는 공익성 짙은 메시지는 이 작품의 목표와 역할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그런데 그런 역할은 뉴스나 공익 광고 혹은 시사 프로그램이 더 효과적으로 잘 해낼 수 있는 것이다. 사실 관계와 원인, 가해자의 심리, 피해자의 사연과 억울함, 이를 극복하지 못하는 구조적 문제 등을 가장 적확하게 보여주고 들려주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춤은, 예술은 어떤 세계를 관객에게 제시해야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이 이 작품에 주어진 과제였다. 아쉽게도 <그리멘토(Grimento)>는 철저하게 학교 폭력에 대한 주의 환기에 집중하는 데 그치고 있다. 회색이 주는 미적 감각, 방관자라는 존재의 부각, 전 사회 구성원의 관심 독려라는 테마가 하나의 키워드로 모이긴 하지만, 소재가 말하는 것 이상의 참신한 인식 변화를 이끌어내기에는 다소 부족했다. 결국 ‘회색 기억’이라는 문학적 표현과 화려하고 직설적인 타이포그래피 영상만 공허한 감상으로 남게 되는 것이다. 


분명 <그리멘토(Grimento)>는 선한 작품이다. 그러나 선한 의도가 그대로 출중한 예술성으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이제 와서 폭력의 유해성을 무대에서 그대로 재연(再演)하는 것은 새삼스럽다. 법의 현실과 영상 매체가 수없이 되풀이한 정의와 윤리의 당위 외에 무대는 다른 것을 보여줘야 한다. 결코 쉽지 않은 문제이고, 이 작품에서도 끝내 가지 못한 길이다. 분명한 것은 가해자들과 방관자들이 피해자를 감싸 안으며 봉합한 작품의 마무리처럼 간단한 길은 아니라는 것이다. ‘회색 기억’이라는 멋진 문학적 표현보다는 ‘붉은 현실’로 실재하는 오늘의 일상에서 발견해야 할 길이기 때문이다.




글_ 송준호(춤평론가)

사진제공_ 세종문화회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