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용계의 가을은 축제로 시작해 축제로 끝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올해는 봄에 열리던 모다페 일정이 가을로 옮겨지는 바람에 축제 무대의 관객 유치 경쟁은 더욱 뜨거워지고 있다.
올해로 16회째를 맞이하는 서울국제발레축제는 짧지 않은 역사를 이어오는 동안 잦은 명칭의 변화를 겪었다. 2006년 ‘아시아퍼시픽발레페스티벌’이라는 명칭으로 출범해 아시아의 전통과 각 나라의 정서가 담긴 창작발레의 교류를 통해 아시아 간 문화예술교류를 신장시키고자 하는 의도를 천명한 이 축제는 2008년 ‘발레엑스포서울’로, 2013년에는 ‘케이발레월드’로 다시금 명칭을 변경했다. ‘발레엑스포서울’ 시절 ‘서울국제발레페스티벌’이라는 명칭을 병행하다가 ‘케이발레월드’로 개칭하고 나서는 ‘국제발레축제’를 함께 사용했는데, 2021년부터는 ‘서울국제발레축제’를 공식 명칭으로 사용하며 ‘케이발레월드’를 병행 표기하고 있다.
공연이 갈수록 늘어나고 있는 데다 공연의 양적 성장이 단독 공연의 리스크를 피해 축제 성격의 모음 공연 증가로 이어지고 있는 만큼 축제의 브랜드 가치를 높이기 위해서는 축제의 내실을 다지는 것 못지않게 축제명의 안정화가 필요해 보인다.
축제 프로그램은 한국발레협회 주관의 창작신인안무가전에서 입상했거나 공모를 통해 선정된 안무가 7인의 우수 레퍼토리를 엄선한 ‘K-발레레퍼토리 시리즈’, “시민을 위한 수준 높고 개방적인 발레축제”를 표방하며 지난해 신설되어 청소년부터 대학생, 전문인 혹은 단체, 비전공 발레인까지 다양한 범주의 참가자들을 아우르는 ‘D-플레이그라운드’, 해외 및 국내 발레단의 스타 무용수들을 망라하는 ‘월드발레스타갈라’로 구성되어 있다.
이 가운데 김세연과 이루다는 공모작 네 편으로 구성된 ‘K-발레레퍼토리 II’에서 더블빌로 각각 <빛을 걷는 사람들(Light Walkers)>과 <블랙 볼레로(Black Bolero)>를 무대에 올렸다. 마치 컨템포러리발레의 현재와 미래를 보는듯한 절묘한 매칭이 매우 인상적인 무대였다.
빛이 움직임을 존재하게 한다
김세연은 잘 알려지다시피 유니버설발레단, 네덜란드국립발레단, 취리히발레단, 스페인국립발레단 등에서 무용수로 활동하며 다양한 레퍼토리를 섭렵했고, 발레단 퇴단 후에는 취리히발레학교와 마드리드왕립무용원에서 초청안무가를 지냈다. 2017년 대한민국발레축제에서 <죽음과 여인>을 첫 안무작으로 선보인 뒤 2018년 <트리플 바흐>, 2019년 <헨젤과 그레텔>, 2020년 <레퀴엠>, 2022년 <치카치카> 등을 발표하며 안무가로도 순조로운 커리어를 이어나가고 있다.
이번 축제 무대에 올려진 <빛을 걷는 사람들>은 김세연이 안무를, 국립발레단 전 수석무용수 김지영이 예술감독을 맡아 눈길을 끈다. 네덜란드국립발레단에서 무용수로 동고동락했던 두 사람은 2011년 LIG문화재단 기획공연 <플라잉 레슨>으로 함께 무대에 올랐고, 지난해 마포문화재단이 ‘M 프리마돈나 시리즈’의 첫 무대로 기획한 ‘김지영의 ONE DAY’에서 선보인 신작 <치카치카>에서도 안무가와 무용수로 호흡을 맞춘 바 있다.
<빛을 걷는 사람들>은 김세연이 안무와 출연을 겸하고 전 국립발레단 수석무용수 강준하와 김지영을 비롯해 김성민, 리앙 시후아이, 김경원, 손대민, 김석현, 김민서, 남윤승, 김은서 등이 출연한다. 연령대는 물론 무대에서 쌓아 온 경험도 저마다 다른 이 무용수들이 무대 위에서 연기하는 것은 무용수들 자신이다. 천천히 걷거나 서로 접촉하며 움직임을 쌓아 나가는 무용수들의 모습은 어딘가 조심스러운데, 공연은 빛의 존재에 따라 무대 위의 모습이 달라지는 무용수들을 은유하고 있다.
무용수들이 보여주는 움직임의 형태는 변화하지만 움직임의 속도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다. 느리고 섬세하게 움직이는 무용수들의 모습을 음악으로 비유한다면 이들의 춤은 단조에 가깝다. 춤은 아름답고 서정적이지만 춤을 추는 이들과의 거리는 멀고 무대의 온도는 서늘하다. 관객들은 무용수들의 움직임에 몰입하는 것이 아니라 관조하며 공연을 감상한다.
속도에 변화를 주지 않은 채 운영되는 움직임은 곧 지루해지기 마련이지만 공연은 또 다른 주인공인 조명 덕분에 조금도 지루하지 않다. 조명은 움직이는 무용수들을 밝게 비추기도 하고 어둠 속에 방치하기도 하며 빠르게 깜박거림으로써 불안감을 조성하기도 한다. 그러나 빛 속에서도 어둠 속에서도 무용수들의 움직임에는 큰 변화가 없다. 무용수들은 빛이 있건 없건 간에 묵묵히 움직인다. 이는 관객들이 있는 무대에서도 관객들이 없는 연습실에서도 똑같이 땀을 흘리는 무용수들의 모습과도 겹쳐진다. 무대 전반에 드리워진 서정은 무용수들의 움직임 변화가 아니라 그 한결 같은 움직임 속도에서 나오는 것이다.
프로그램북에서는 공연에 대해 “빛이 비춰질 때 비로소 존재하는 운명을 가진 무대 위 예술가들의 모습”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이 빛의 은유는 무대 위에서 무엇을 보여줄 것인지 움직임에 빛을 비춰 최종 안무를 확정하는 작업의 과정과도 닮아 있다. 무용수들은 빛이 없는 곳에서 빛이 있는 곳으로, 다시 빛이 없는 곳으로 나아간다. 이 멈추지 않는 움직임은 언제까지 계속되며, 또 어디를 향해 나아갈 것인가. 김세연의 다음 무대가 그 답을 알려줄 수 있을지 지켜볼 일이다.
검은 슈즈가 그를 데려가는 곳은
이루다는 ‘Black’의 안무가다. 2013년 엠넷의 경연 프로그램 <댄싱9>에 출연해 첫 무대에서 검은색 튀튀를 입고 <백조의 호수> 음악에 맞춰 춤을 춘 것은 향후 이루다의 10년을 미리 보여주는 강렬한 예고편이었다. 같은 해 직접 안무와 연출을 맡은 뮤직비디오 ‘Black Toe’를 발표하고 동명의 단체를 창단한 이루다의 안무 활동에서 ‘Black’은 매우 중요한 정체성으로 자리매김한다. <백조의 호수>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흑조의 호수(Black Swan Lake)>를 비롯해 〈Back to Black〉, 〈Black Circle〉, <블랙 볼레로> 등 작품 제목에 ‘Black’이 자주 들어가는 것은 물론 〈W〉나 <디스토피아>, 댄스페인팅 <몸으로 그리다> 등에서도 ‘Black’은 작품을 이끌어가는 동력으로 작용한다.
검은 토슈즈를 의미하는 ‘Black Toe’는 이루다의 안무 발원점이 발레에 있음을 시사하되, 발레의 전형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그의 지향점을 동시에 드러내는 명명이다. 컨템포러리 창작자들이 보여주는 탈전형의 방향성은 매우 다양하지만 이루다의 탈전형은 검정이라는 주제색을 정체성으로 삼고 이 정체성 위에서 움직임과 비주얼아트를 결합하는, 안무보다는 연출에 좀 더 힘을 싣는 방식이다. 이렇듯 움직임과 비주얼아트의 결합은 이제 공연의 한 양식이 될 정도로 흔해졌지만 양자의 조화를 이루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매우 많은 무대에서 양자가 물과 기름처럼 따로 놀거나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에 장악되어 존재감을 잃기 십상이다.
이루다는 이 문제를 움직임은 물론 영상과 조명, 사운드에 이르기까지 공연을 구성하는 모든 요소를 빈틈없이 채우는 것으로 해결한다. 이루다는 어떤 면으로는 안무가나 연출가보다 스타일리스트라고 지칭하는 편이 어울리는 창작자인데, 이명세의 전성기 영화를 떠올리게 하는 그의 작업들은 한순간의 공백도 어떤 요소의 누락도 없이 모든 요소들이 매분 매초, 공간과 공간마다 꽉꽉 들어차 있지만 단 한 가지 요소, 색채를 절제하는 연출 덕분에 주제색인 검정이 그 다양한 요소들을 묵직하게 눌러줌으로써 과잉으로 치닫지 않는다.
그래서 이루다의 작업은 프로시니엄 무대는 물론 미술관 전시실 같은 화이트큐브에서도 위화감 없이 잘 어울리며, 일반적으로 공연이 실황 중계 등으로 영상으로 옮겨질 때 현장감이 떨어지는 것과 달리 영상 매체 속에서도 긴장감을 잃지 않는다. 일반적인 공연에서 (프로시니엄 극장이든 아니든 간에) 공간과 움직임의 상호작용이 중요한 정체성인 데 비해 이루다의 작업에서는 매체와 매체 간 상호작용이 보다 중요해지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루다의 연출력은 서사가 두드러지지 않는 작품에서 더욱 빛을 발한다. 이번 축제 무대의 <블랙 볼레로>는 <디스토피아>의 일부 장면인 ‘볼레로’ 파트를 재구성한 것으로, 이루다가 안무와 연출을 맡는 것은 물론 출연자로도 무대에 올랐고, 김소혜, 김영민, 김윤아, 나지원, 서동리, 이루마, 이소희, 이지희, 정민찬 등이 함께했다. 볼레로의 반복되고 점증되는 리듬과 멜로디에 맞춰 움직임과 영상, 조명, 사운드 등의 무대요소들을 재배치하되, 역시 검정을 주제색으로 삼아 붉은색을 추가하는 정도로 색채를 절제해 시각적 과잉을 막았다.
대신 매체의 혼합과 변형은 더욱 현란해졌는데, 반복을 통해 점증되고 증폭되는 볼레로의 음악 위에서 무용수들은 피부색에 가까운 언더 차림이었다가 검정색 의상을 덧입으며 쉴 새 없이 움직이고, 조명은 그 움직임을 뒤따르는 동안 별도의 생명력을 얻은 듯 살아 움직인다. 영상은 무용수의 신체를 해체해 재구성하고, 바다와 하늘, 우주를 가로지르며 새로운 그래픽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이 같은 매체들의 복잡한 결합은 파편으로 흩어지지 않고 구심력을 얻은 채 단단한 흐름으로 공연 내내 유지된다. 어느 한 요소도 빠져나갈 수 없도록 틈 없이 조이는 속도감 덕분이다. 함께 무대에 올려진 <빛을 걷는 사람들>이 제목처럼 ‘걷는’ 공연이라면 <블랙 볼레로>는 ‘달리는’ 공연이다. 컨템포러리 창작자들의 매체 실험이 점점 확장되고 있는 가운데 매체 간 상호작용에 천착하는 이루다의 실험은 어디까지 나아갈 수 있을까. 실험을 지켜보는 우리가 그 속도감에 눈을 감지 않는다면 아찔하고도 즐거운 목격담을 나눌 수 있을 것이다.
글_ 윤단우(공연칼럼니스트)
사진제공_ 한국발레협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