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요무형문화재 제43호 수영야류(水營野遊)의 이수자 이상열(李相烈)은 남성역인 말뚝이와 여성역인 할미 배역을 넘나들며 능숙한 연기와 춤을 펼치는 몇 안 되는 연희자이다. 그는 대학시절에 우연히 탈춤에 입문한 이후로 40여 년 간 부산지역에 전해 내려오는 이 민속 연희의 전승현장을 지켜왔다.
수영야류는 질펀한 희극적 묘미가 가득한 전통 연희이다. 말뚝이가 전반부의 웃음판을 주도한다면 후반부의 주인공은 단연 할미이다. 가슴과 배를 다 드러낸 우스꽝스러운 옷차림새에다 엉덩이를 실룩거리는 등 과장된 몸짓으로 할미는 웃음판을 주도한다. 이상열은 이런 우스꽝스럽고 과장된 할미역을 능청스럽게 해낸다.
“버드나무가 축 늘어져 있는데, 바람이 한번 휙 불면 가지들 중에는 먼저 내려오는 놈, 나중에 내려오는 놈이 있는 거라고. 이렇게 가지가지로 추는 것이 덧배기춤이다.”
수영야류가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 받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으며 후일 국가지정 예능보유자가 된 태명준(太明俊, 1904-1979)이 대학생 이상열에게 말뚝이역이 추는 덧배기춤을 가르치며 했던 말이다.
수영야류를 끌고 가는 중심 캐릭터는 힘이 장사인 노비 말뚝이다. 이상열이 추는 말뚝이춤은 영남지역의 남성들이 추는 ‘덧배기춤’을 근간으로 한다. 덧배기춤은 한 박자에 ‘두 번 꽂는’ 춤을 말한다. 대개 한 박에 한 동작을 하는데 박의 중간에 호흡을 더 끌어올리거나 몸을 움찔하며 두 개의 동작을 구사하는 것이다. 들이마시고, 머금고, 끌어올리고 훅 내뱉는 호흡으로 묘미를 살려야 한다. 그런데 이 동작에는 형식이 따로 없다. 무용수가 전통춤의 기본가락인 굿거리장단에 맞추어 즉흥적으로 움직이면서 보여주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양팔을 머리 위로 나란히 들어 올린 다음 호흡과 함께 팔도 쭉 끌어 올렸다가 숨을 한꺼번에 내뱉으며 어깨를 털썩거린다. 이때 양팔을 자연히 슬쩍 내리게 되는데 이런 움직임을 극대화하는 것이 덧배기춤의 특별한 기교이다. 이상열은 춤을 배울 당시를 회고하며 “초등학교만 나온 분이 그런 멋진 표현을 했다는 것이 참 대단하죠”라고 말했다. 그리고 덧배기춤을 잘 추려면 “마음대로 놓아 버리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견고한 지역성
부산시 수영동에서 전승되는 민속탈춤인 수영야류는 수영지역에서 행해지는 들놀음(野遊)이라는 뜻이다. 아시아의 전통 탈춤들이 대부분 마을의 번영을 축원하거나 주민의 우환을 해소하기 위한 의례에서 시작되었다. 수영야류도 농한기인 음력 정월 3~4일 무렵에 수영지역에 살던 마을사람들이 부락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하는 동제 전후에 농악과 탈춤으로 노는 연희로부터 출발했다. 자연히 연희자들 대부분은 수영 지역의 토박이들이다. 이상열은 부산의 토박이기는 하지만 수영지역에서는 ‘외지인’이다. 40여 년을 수영야류의 연희자로 살아왔지만 무형문화재 제도의 최고봉이라 할 수 있는 예능보유자가 될 가능성은 희박하다. 예능보유자의 자격은 선배 예능보유자의 지명에 의해 이루어지는데, 이상열은 아직 그 후보나 그 아랫단계인 전수조교의 반열에조차 오르지 못했다. 다른 지역의 탈춤에 비해 수영야류가 그만큼 순수성 또는 지역성을 중시하는 반증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아시아 지역에 전해내려 오는 많은 탈춤들과 마찬가지로 수영야류는 이야기, 음악, 춤, 연극 등이 융합된 종합예술이다. 연희자가 노래와 춤, 연기를 모두 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에 한 사람이 하나의 캐릭터를 정해 맡는다. 그러나 수영야류가 복원될 당시에 마을 원로들로부터 전체적으로 이 연희를 배웠던 이상열은 어느 배역이든지 소화할 수 있다.
수영야류는 300여 년 전부터 전해져 내려오지만 20세기 전반 일제강점기를 지나면서 전승의 맥이 단절되었다. 그러다가 1960년대 말에 지역 유지들에 의해 복원되었는데, 그 저변에는 국가의 중요무형문화재 제도가 있다. 1962년부터 정부는 문화재보호법을 시행하여, 국가적으로 보호하고 전승할 가치가 있는 무형문화유산을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하는 사업을 전개했다. 이에 따라 여러 지역의 탈춤과 농악들이 복원되어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 받았다. 1960년대 말부터 수영의 지역민들도 그들의 전통탈춤을 지정 받기 위해 복원작업에 나섰다. 지역의 유지들과 원로들이 주축이 되어 음악, 춤, 연기를 복원하였다. 또한 부산의 민속학자들과 협력하여 대본을 정리하였다. 이렇게 해서 수영야류는 1971년에 43번째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가 되었다.
대학 동아리에서 배운 민속예능
이상열이 수영야류를 접하게 된 것은 ‘우연’이자 ‘운명’이었다. 수영야류 복원작업이 한창이었던 1969년, 고교시절에 “부진했던 학교성적 때문에 간신히” 부산대학교 철학과에 입학했던 그에게 대학생활은 전혀 즐겁지 않았고 전공과목들은 지루하기만 했다. 그런데 대학을 재밌게 다닐 수 있는 돌파구가 나타났다. 바로 동아리 활동이었다. 그 당시 부산대학은 학생들의 취미활동을 크게 장려하고 있었다. 그는 같은 학교 교수로 재직 중이던 막내 삼촌의 권유로 민속예술을 연구하는 전통예술연구회에 들어갔다. 공부에 도통 관심이 없는 조카의 장래가 걱정이 되었던 삼촌이 전통예술연구회라는 동아리를 조직한 영문학과 교수 서국영 박사에게 이상열을 소개해준 것이다. 서국영 교수는 셰익스피어 희곡을 전공한 영문학자이지만 부산에서 가장 유명한 연극연출가로도 활동하고 있었다. 서교수는 1968년에 문화공보부(문화체육관광부의 전신)로부터 지원금을 받아 <수영야류 무대화 시론>을 연구했다. 이 연구를 계기로 그는 민속예술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고, 중요무형문화재를 지정하는 과정에 필요한 연구조사를 담당하는 문화재전문위원으로 활동하게 되었다.
서국영 박사가 1969년에 조직한 전통예술연구회는 민속에 대해 조예가 깊었던 부산대학의 신기석 총장의 적극적인 후원을 받았다. 신기석 총장은 박정희 대통령의 대구사범학교 동창으로 당시 부산에서 큰 권력자로 알려져 있었다. 정치적 성격이 강한 총장이 직접 챙기는 동아리이다 보니 전통예술연구회는 관변단체라는 오해를 받기도 했다. 사실 대학 당국이 동아리 활동을 독려한 목적은 대학생들의 격렬한 반정부, 반독재 시위를 막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학생들의 관심을 정치로부터 돌리기 위해 독려한 동아리 활동은 대학 당국이나 정부에 반대 결과를 가져다주었다. 학생들이 농악, 탈춤과 같은 문화활동으로 민주화 투쟁에 나설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준 것이다. 대학생들은 해학과 풍자성이 강한 탈춤으로 정부를 은유적으로 비판했으며, 가두행진에는 떠들썩한 농악대를 대동했다. 그러나 막상 대학가 문화운동의 출발점이었던 전통예술연구회는 민주화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다. 총장의 관리 하에 있었기 때문에 정치적으로 자유롭지 못했고 서국영 교수도 정치적 활동에는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창립 후 얼마 안 되어 전통예술연구회의 60명 회원이 개교기념일 행사에서 농악을 연주하였다. 대학교 캠퍼스에서 처음으로 농악이 연주된 획기적 ‘사건’이었다. 이에 대해 이상열은 “전국적으로뒤집어졌죠, 뭐”라고 무덤덤하게 표현했다. 부산대학을 널리 알려주었다며 전통예술연구회에 대한 총장의 관심과 지원은 배로 늘어났다. 연구회 회원들은 총장의 배려로 온갖 민속예능을 배울 수 있었다. 당시 학교 근처에 있는 온천장에는 유명한 기생집이 있었다. ‘국악원(國樂院)’이라는 간판을 내걸고 있었지만 사실은 기생들의 예능교육기관인 권번(券番)이 그 안에 있었고 거기에는 거문고의 명인 신쾌동, 가야금의 명인 원옥화, 대금의 명인 강백천, 판소리의 명인 송순섭 등 장안의 뛰어난 전통 예인들이 집결해 있었다. 민속예술을 좋아했던 신기석 총장은 이들을 대학으로 초청하여 전통예술연구회의 강사로 모셨고, 때로는 이들을 모아 공연을 주선하기도 했다. 신성한 학교 안에 기생들을 불러들인다고 학생들의 반발도 심했지만 총장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전통예술연구회의 초대 회장이었던 이상열의 임무 중의 하나는 명인들을 학교로 모시고 오거나 사례비를 지급하는 등 강사들을 관리하는 것이었다. 이 대가로 이상열은 명인들과 친분을 쌓을 수 있었고, 이들의 작업실을 자유롭게 넘나들며 온갖 기예를 배울 수 있었다. 그렇게 해서 이창배, 송순섭에게 소리를 배웠고, 이매방, 황무봉, 손세란에게는 춤을 배웠다.
1970년 9월에 서울에서 전국대학민족예술축전이 열렸다. 합창, 무용, 음악, 연극, 미술, 민족예술 등 모든 예술부문을 다루는 경연대회였으며, 큰 상금도 걸려 있었다. 전통예술연구회는 서국영 교수의 권유로 민족예술부문에 수영야류로 출전하기로 결정했고, 이상열은 당시 수영야류를 복원하고 있었던 조재준, 윤수만, 태명준을 강사로 모셔왔다. 이들은 열의를 다해 학생들을 가르쳤다. 이때 이상열은 말뚝이 역할을 맡았다. 배역을 나누기 위해 탈을 모두 늘어놓았는데 아무도 말뚝이를 택하지 않아 하는 수 없이 회장인 자신이 맡을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말뚝이 탈은 무게가 자그마치 2.2 kg이나 나갔다. 막상 탈을 써보니 무거운 것은 둘째 치고 숨쉬기도 힘들었다. 무선 마이크도 없던 시절이라 막상 공연할 때는 탈에 입이 가려서 대사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그러자 태명준 선생과 서국영 교수가 이상열에게 묘책을 주었다. 그들의 묘책은 다름 아닌 술이었다. 이상열은 술을 한 잔 걸치고 거나하게 취해서 무대에 올라 큰 소리로 대사를 치고 거칠 것 없이 춤을 추었다. 그리고 전통예술연구회는 대상을 받았다.
전통예술연구회는 회원이 많을 때는 70, 80명이나 되었다. 이중 고정 회원은 대강 20 명쯤 되었다. 이상열은 그 중에서도 자신을 포함해 후배 몇 명은 이 동아리 활동 때문에 평생 민속예술에 빠져 “인생을 베려 부렸다”고 말하며 호탕하게 웃었다. 이상열의 아버지는 대학생이 된 아들이 길거리에서 엿장수나 치는 꽹과리를, 굿판에서나 볼 수 있는 장구나 북을 두드리고 있으니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아버지는 그런 아들과 마주칠 때마다 “미친놈이 대학에 보내 놓았더니 딴 짓을 한다”거나 “사당패 나왔다”며 꾸짖기 일쑤였다. 그는 아버지에게 미안하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배우고 싶은 것이 너무 많아 집에 들어가지 못하는 날이 많았다. 그러다 보니 서국영 교수의 집에서 먹고 자는 일이 빈번해졌다.
이상열은 문화재전문위원이었던 서교수의 보조연구원으로 조사 현장을 따라다니며 영남지역의 전통 민속춤을 두루 보고 배울 수 있었다. 1971년에는 서 교수와 함께 수영야류의 대본을 채록했고, 1973년부터 1976년까지 이루어진 동래학춤과 양산사찰학춤에 대한 문화재조사 과정에서는 무보(舞譜)를 제작하기도 했다. 이런 기반이 있었기 때문에 그가 추는 덧배기춤에는 영남의 민속춤 맛이 제대로 살아나는 것이다.
영남 덧배기춤의 정수
이상열이 주로 담당하는 말뚝이 역할은 수영야류의 핵심적인 캐릭터이다. 시종일관 말채를 휘두르고 다니는 말뚝이는 하층민이며, 소외되고 핍박받는 서민층을 상징한다. 그러나 그는 하인답지 않게 수시로 양반을 골탕 먹이며, 심지어 양반의 부인과 정분이 나서 양반을 비탄에 빠지게도 만들고, 양반을 힐난하는 대사와 거침없는 행동으로 호쾌한 해학적 분위기를 이끌어간다.
말뚝이가 추는 춤은 호방(豪放)함을 특징으로 한다. 움직임이 큼직큼직하고, 뛰는 동작도 많다. 과거에는 이런 춤을 “건강한 춤”이라는 의미에서 ‘건무(健舞)’라고 불렀다. 한편으로 이상열의 춤에서는 단정하고 간결한 멋이 묻어나기도 한다. 그는 “잡티 없이 단정하고 간결하게 추는 것이 한국춤의 본질”이라고 말한다.
희극미가 넘쳐나는 할미춤
아시아의 전통 탈춤 혹은 무용극들에서 두드러지는 공통 요소는 대부분 남성 연희자들의 전유물이라는 것이다. 제의성이 강한 연희일수록 이 현상은 더욱 두드러진다. 마을의 제례에서 비롯된 수영야류도 그러하다. 따라서 남자 연희자가 할미역과 그녀의 남편이 데리고 오는 첩인 작은 각시 역할도 해야 한다. 수영야류는 질펀한 희극적 묘미가 가득한 전통 연희이다. 말뚝이가 전반부의 웃음판을 주도한다면 후반부의 주인공은 단연 할미이다. 가슴과 배를 다 드러낸 우스꽝스러운 옷차림새에다 엉덩이를 실룩거리는 등 과장된 몸짓으로 할미는 웃음판을 주도한다. 할미역이 하는 화장하기, 이잡기, 오줌누기 등의 몸짓은 다른 지역의 탈춤에서는 볼 수 없는 희극적인 장면들이다. 이상열은 이런 우스꽝스럽고 과장된 할미역을 능청스럽게 해낸다. 그만큼 특출하게 할미역을 해낼 연희자가 없어서 이상열이 연희를 그만두면 할미역할의 전승이 끊길 지경이다. 현재 연희되는 할미역할의 몸짓과 대사방식은 그가 원로들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창출한 것이나 다름없다.
연희자 수가 점차 줄어들자 수영야류보존회는 여성 연희자들에게 문호를 열었다. 그러나 할미역을 맡겠다고 선뜻 나서는 여성 연희자는 없다. 상체가 노출되는 부분은 타이츠를 입어서 가릴 수가 있지만 문제는 다른 곳에 있다. 할미가 급사하는 장면에서 영감이 누워있는 할미의 몸 위에 올라타서 숨을 쉬는지 확인하고 신체를 더듬는 부분이 있는데, 이 부분을 감내할 여성 연희자가 없는 것이다.
홀로 추는 춤
탈로 얼굴을 가리고 이름 없이 ‘노는’ 것이 탈춤 연희자들의 숙명이다. 그래서 이상열도 ‘잘 추는 말뚝이’ 혹은 ‘넉살 좋은 할미’로만 기억되었다. 그러던 그가 2011년에 난생 처음으로 단독공연을 가졌다. 평생 예술적 동지로 지내왔던 무용평론가 채희완이 기획한 <숨은 예인 한마당> 무대였다. 초청을 여러 차례 사양하던 이상열은 마침내 12번째의 ‘숨은 예인’으로 무대에 올랐다. 채희완이 그의 공연에 붙인 부제는 ‘이상열의 덧배기 인생’이다. 이 무대에서 이상열은 자신의 기량을 원없이 펼쳐 보였다.
그는 지난 5월에 다시 <춤추는 남자들>이라는 공연에 초청을 받아 말뚝이춤을 또 한 번 신명을 다해 추었다. 그러다 올해 65세라는 나이를 잊고 열정적으로 추다가 허리를 삐끗했다. 그때의 후유증이 허리디스크로 발전했다. 그래서 요즘은 뛰는 동작이 많은 말뚝이춤을 추는 것이 상당히 괴롭다. 특히 허리를 접었다 굽혔다 하며 온 몸으로 원을 그리며 추는 연풍대(燕風臺) 동작은 엄두를 내지 못한다. 연풍대는 말 그대로 “제비가 바람을 가르듯” 날렵하고 재빠르게 추는 춤이다. 허리가 하루 빨리 회복되어 아무도 흉내내지 못하는 그 만의 말뚝이춤을 다시 추는 이상열의 모습을 보고 싶다.
글_ 최해리(편집주간, 한국춤문화자료원 공동대표)
사진_ 안홍범 제공
* 위 글은 한국국제교류재단 계간지
http://www.koreana.or.kr/months/news_view.asp?b_idx=3182&lang=en&page_type=l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