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실을 넘어 연대와 환대의 길에 다시 서다: 허경미무용단 무무 <길을 잃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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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1월 5일(일) 오후 5시 부산문화회관 중극장에서 <길을 잃다>(안무 허경미)가 무대에 올랐다. 이 공연은 (재)부산문화회관이 주최한 2023년 부산공연 콘텐츠 페스타에서 선정한 세 작품 중 하나이다. 팸플릿에는 <길을 잃다>가 2019년 12월 4일 영도 문화공간 끄티에서 공연한 이력만 나와 있다. 이 작품의 시작은 시간을 더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2014년 부산민주공원 소극장에서 허경미는 20여 분짜리 독무로 <길을 잃다>를 올리는데, 그때가 시작이다. 당시 허경미는 홀로 소극장 무대 전체를 덮은 흰 천 위를 방황하듯 헤집고 다녔다. 공기를 품은 거대한 천의 물결은 가는 길마다 앞을 가로막는다. “우리는 항상 어떤 곳을 향하고 있다. 그 방향을 잡기 위해서는 좌표가 필요하다. 그러기에 우리는 자기만의 흔적을 만들고 영역을 만든다. 그러나 끊임없이 변화하고 순환하는 삶 위에서 이런 좌표와 방위들은 무기력하고 허망하게 지워지기 마련이다. 이런 새김과 지워짐의 반복은 갈등이 아니다. 삶의 순응은 삶의 긍정이다. 그러기에 길을 잃은 것은 결코 길을 잃은 것이 아니다. 계속되는 길 위에 서 있을 뿐이다.” (공연 팸플릿 작품해설, 허경미 작성) 당시 허경미는 연이은 창작에 지친 상태였다. 춤의 길에 있지만, 끊임없이 변화하고 순환하는 삶 위에서 자신의 좌표와 방위들이 허망하게 지워지는 것 같은 걱정과 무력감이 찾아왔다고 한다. 그렇지만 새김과 지워짐의 반복이 길을 완전히 잃은 것은 아니며, 삶을 긍정하는 것이고 그래서 결코 길을 잃은 것이 아니라고 자위하였다. 

애초 <길을 잃다>는 좌절과 탈진의 순간에서 끝내 무너지지 않고, 춤을 끌어내려는 예술가의 깊은 자기애에서 나왔다. 완결된 작품이기보다 아이디어를 스케치한 상태에 가까웠던 2014년의 <길을 잃다>는 춤보다 소품이 무대를 장악한 불균형 상태였다. 소극장 무대를 채운 천의 힘은 강렬했고, 천이 흔들리며 만들어 내는 파도와 그 사이를 헤매는 빈약한 춤꾼의 대조가 길을 잃었다는 상황을 직관적으로 보여주었다. 이것이 이후에 이어지는 <길을 잃다>의 중심축이 되었는데, 당시에는 극적인 결말을 뚜렷하게 제시하지 못했다. 이후 2019년 <길을 잃다>는 더 넓은 공간에서 초연보다 긴 시간을 공연했다. 창고를 개조한 공간이라서 일반적인 극장 무대 메커니즘의 도움은 받지 못했지만, 날 것의 분위기가 강한 공간은 작품의 절실한 느낌을 한층 더하게 했다. 다시 4년이 지나 이루어진 이번 공연에서 허경미는 이전 공연의 기조를 유지한 채 “매 순간 선택의 기로에 서 있는 인간 실존에 관해 고민”한다고 밝힌다. 자기의 상황과 감정을 ‘우리’로 타자화하면서 확장했는데, 이는 자기의 내밀한 상태를 직접 드러내지 않으려는 방식이다. 허경미 작품의 공통적인 특징은 주관의 객관화 혹은 주관적 감정을 보편적 감성으로 확산하는 것인데, <길을 잃다>도 그렇다. 이번 공연에서는 ‘인간 실존’을 뚜렷하게 명시한다. 소극장에 올린 20여 분짜리 소품이 70분 분량의 문화회관 중극장용으로 바뀌었고, 무대, 시간 등 공연 조건이 달라지면서 작품이 지향하는 바를 확장하고 결말을 뚜렷하게 제시한 것으로 보인다.

조명과 음악은 허경미의 장점이 되었다. 허경미의 음악 선택 기준은 동작과 주제에 얼마나 적절한지이다. 멜로디가 없는 리듬 위주의 음악은 멜로디로 인해 의도하지 않은 감성이 끼어드는 것을 차단하고, 리듬으로 춤의 고조와 이완을 강조하는 데 집중한다. 사이드 조명을 적극 활용해 공간을 이분화해 ‘인간 실존’이라는 현실적이지만, 형이상학적인 주제를 효과적으로 표현하였다. 천은 인간 실존을 확인하는 장이다. 내가 현존하는 세계는 수많은 타인과 공존한다. 그래서 안심이 되지만, 타인과 나의 실존적 거리는 좁힐 수 없다. 각자의 삶은 교환할 수 없기에 실존은 단호하다. 무용수들이 춤추면서 반복해서 뱉는 “내가 가는 길이 길이다. 나란히 갈 수 없어도 함께 가는 길이 있지.” 라는 대사는 타인과 공존하는 세계의 다양성을 뜻한다. 개인의 실존이 열려있지 않고 동일성으로 수렴되는 것이지만, 세계의 다양성은 개인의 연대로 가능하다. 연대는 개인의 폐쇄성을 극복하고 타자라는 무한대로 나아가는 길이다. 허경미는 침체의 늪에서 서서히 벗어나 타자를 향한 연대의 길을 이야기한다. 좌표를 잃기도 했었지만, 길 위에 서 있는 동안 인간 실존이 무한대로 나아갈 방법을 깨달은 것이다.  

한동안 이 정도 규모의 무대 작품을 만들지 못했던 아쉬움을 쏟아 붓기라도 하는 듯 <길을 잃다>는 <진화>, <신곡>, <외치다>의 상징적 구성과 동작을 곳곳에 품고 있었다. 동작은 크게 확장하기보다 내향적이며 말단의 진동을 섬세하게 보여준다. 점프도 발을 뻗지 않고 무릎을 굽힌 채로 뛰어오른다. 에너지를 발산하기는 쉽지만, 적당히 제어하는 일은 까다롭다. <길을 잃다>의 동작은 까다롭고 내밀하다. 춤은 신체적 충동을 자기 밖으로 분출하는 행위가 아니라 충동을 억제하는 긍정적 인력 안에 사로잡는 능력이다. 사유란 주어진 곳 이외의 다른 곳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효력을 발생하는 것이며 춤 이미지는 내재적인 강화로서의 사유의 이념을 시각적으로 전달한다. <길을 잃다>의 춤이 무대에 깔린 천위를 좀처럼 벗어나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천은 현실이며 대지이기도 하다.

무용수들의 기량도 작품에 걸맞았다. 특히 정기정과 신상현은 안무자의 의도를 잘 소화한 춤으로 후반부에 허경미가 등장해 춤출 때 감성이 단절되거나 이질적으로 보이지 않게 하였다. 신상현이 길 조명을 따라 뒤에서 앞으로 나오는 장면은 객석에 등을 보이고 나아가는 <진화> 동작의 의미를 품으면서 방향만 바꾼 것처럼 보였다. <진화>의 진행은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되돌아가는 회고적 의미인데, 신상현은 움직임의 중심을 적당히 뒤로 보낸 채 앞으로 나아가면서 과거와 미래를 함께 담아내었다. 정기정, 신상현, 허경미의 독무가 개인의 실존적 고민을 상징한다면 군무는 인간 보편 혹은 공동체 속 관계를 상징한다. 군무에서는 개인과 무리의 대조가 주를 이룬다. 인간의 실존이 보편적 문제이면서 동시에 개인의 문제라는 점을 무리와 개인을 대비하면서 표현한다. 군무는 강경희, 이연정, 조은미를 중심으로 조화롭게 펼쳐졌다.

이전의 <길을 잃다>에서 서사를 압도하는 감성적 이미지를 보았던 관객이라면 이번 공연에서 다소 아쉬움을 가질 수 있다. 큰 부침이 없어 보이는 구성을 지루하다고 느낄 수도 있는데, 주제로 내세운 인간 실존의 문제를 구체적 사건을 모티브로 삼지 않고 줄거리로 만들기가 쉽지 않았을 것 같다. 그렇다 보니 관객이 보기에 흐름이 한눈에 들어오지 않았을 것이다. <길을 잃다>는 두 부분에 모든 메시지가 담겨있다. 시작에서 무용수들이 대사를 내뱉기까지와 후반부 허경미가 등장한 이후이다. 작품의 중간 부분은 후반부 메시지를 강화하기 위해 에너지를 쌓아가는 과정이다. 줄거리를 갖지 않고 사유의 순수한 이미지로써의 춤에 충실한 작품이기에 모든 장면의 의미를 파악할 필요는 없다. 그래서 ‘읽기’에 익숙하고 ‘느끼기’와 ‘건너뛰기’에 훈련되지 않은 관객 입장에서 보면 불친절한 작품일 수 있다. 무용 작품의 서사는 완전하지 않아도 된다. 춤은 태생적으로 추상성을 갖고 있으며, 선형적 연결과 진행을 그리 선호하지 않는다. <길을 잃다>는 이런 무용의 정체성을 고스란히 지녔다. 좀 더 뚜렷한 메시지 전달을 위한 장치 도구가 있었다면 좀 더 친절한 작품이 되었을 것이지만, 그런 것을 마다하고 뚝심 있게 허경미만의 터치로 작품을 끌고 나갔다. 여전히 허경미는 춤의 길 위에서 나아가고 있었다. 좌표는 내가 찍는 것이 아니라 관계의 씨줄 날줄을 이용해 설정하는 것이다. “내가 가는 길이 길이다. 나란히 갈 수 없어도 함께 가는 길이 있다.”라는 읊조림은 길에서 좌표를 찾는 방법을 깨달았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래서 <길을 잃다>는 무엇인가를 잃어버린 상실을 말하지 않고, 나란히 나아가는 연대와 환대의 길을 제시한다. 

글_ 이상헌(춤 비평가)

사진제공_ 박병민(사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