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동이었다. 감동의 연속이었다. 국립국악원 일이관지(一以貫之) 조선춤방이 그랬다. 2주에 걸쳐서 6차례 펼쳐진 공연이 각각 개성이 있었다. 왜 ‘조선춤방’일까? 우선 해방 이전 일제강점기의 춤과 연결고리가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더 올라가서 조선의 고전무용의 맥과 연관성이 있어서 그렇다. 조선왕조가 와해(瓦解)되고 궁중의 무희(舞姬)가 민간에서 활동하게 되면서, 변화 발전된 이 땅의 전통춤의 맥(脈)을 알 수 있는 기획이었다. 1960년대에 존재했던 각 지역의 춤방(무용학원)을 통해서 그 이전의 계보를 연결하면서, 그것이 어떻게 지금까지 이어왔는지 확인할 수 있다.
이 공연의 미덕은 참 많다. 그 하나가 ‘한국춤의 지형도’를 그릴 수 있는 초석을 마련한 것이다. 무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종목이라거나, 알려진 특정 유파에 한정한 공연 기획이 아니었음은 물론이다. 서울 중심에서 벗어난 춤맥을 보여주었다. 한국의 전통춤이 특정 지역을 중심으로 어떻게 변화, 발전했는지 알 수 있었다. ‘조선춤방’에 대해서 몇 차례 리뷰를 할 필요가 있다.
로컬 vs. 디아스포라
여기선 맨 마지막 날 공연에 한정해볼까 한다. 2023년 10월 26일, 국립국악원 풍류사랑방에서 펼쳐진 민천식춤방과 양소운춤방이다. 국립국악원에서 인천이라는 지역을 중심으로 공연을 한 적이 있었을까? 아마 처음일 거다. 인천의 춤맥을 확인할 수 있었는데, 정확히 말하면 인천에 정착한 디아스포라의 춤맥이다.
인천에는 인천토박이에 의해서 전승된 ‘로컬 춤맥’이 있다. 이랬던 춤 맥이 두 개의 큰 줄기를 형성하게 된 것은 한국전쟁과 연관이 깊다. 한국전쟁기, 인천에는 북쪽에서 남하한 이주민이 정착을 했다. 황해도민이 가장 많았는데, 그들에 의해서 춤맥이 형성되었다. 그 맥을 짚어준 공연이었다. 민천식과 양소운에 의해서 시작된 춤맥은 지금까지도 ‘면면히’ 이어져 오고 있다. 역사와 전통이 끊어지지 않고, 계속 이어져 오고 있음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인천의 민천식, 서울의 김천흥 그리고 김진환
지금 춤계에서 김천흥과 민천식을 같이 보는 시각은 거의 없다. 그러나 이 두 사람에게 공통점이 많다. 민천식은 이왕직아악부 2기생으로 입소해서 2년 수학을 했다. 민천식은 생전 김천흥과 가까웠다. 두 사람의 공통분모는 바로 ‘이왕직아악부’라는 점이다. 궁중춤을 접했다는 점이다.
민천식은 본명이 민관식이다. 일제강점기에는 민형식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했다. 해주권번을 중심으로 춤 사범을 했고, 경성방송국에서는 소리꾼으로서의 인기가 대단했다. 콜럼비아레코드에서 녹음한 변강수타령(변강쇠타령)도 있다.
서도소리(서도가요) 분야에서 민천식과 훗날 북한에서 공훈배우가 되고 인민배우가 되어 크게 이름을 떨친 김진명(1913-1997)은 함께 유명한 소리꾼으로 이름을 날렸다. 1930년대에는 용호상박했던 두 사람이 한국전쟁 이후 서로 다른 운명을 겪은 것은 한국 근현대사의 아이러니다.
민천식춤방에서 기거하면서 민천식에게 노래와 춤을 익힌 인물로 김진환(1937-2022)이 있다. 김뻑국으로 통하는 재담꾼이었다. 한국전쟁기에 어려움을 겪은 김진환은 훗날 송파산대놀이의 예능보유자 이충선(1901-1989)의 도움을 받아서 국악계와 인연을 맺는다. 그랬던 그가 인천에 정착을 하는데 도움을 준 이가 민천식이며, 아무래도 김진환은 서울서 활동하는 게 좋겠다고 해서 김천흥에게 소개해 준 분이 민천식이다. 생전 김진환은 민천식과 김천흥을 늘 은인으로 생각했다.
화관무 = 궁중춤 X 민간춤
민천식은 어떻게 ‘화관무’를 만들어낼 수 있을까? ‘이왕직아악부’라는 연결고리가 있었다. 1950년대와 1960년대 두 사람의 공통점이 있다. 궁중춤 자체가 아닌, 궁중춤을 바탕으로 한 ‘고전무용’을 만들어냈다는 점이다. 김천흥고전무용연구소(1955년)가 개설되기 전, 인천에선 이미 민천식이 춤을 가르쳤던 것 같다. 한국전쟁과 함께 월남한 그에게 있어서 특별한 능력은 바로 가무(歌舞)이기에, 이것은 당시 생계 수단과 아주 밀접했음은 짐작하고 남음이 있다.
민천식이 인천에서 가르친 ‘화관무’는 궁중춤(정재)과 민간춤(기방춤)이 적절한 비율로 섞인 춤이다. 이 춤은 서울의 이왕직아악부(경기도)와 해주권번(황해도)이라는 공간을 동시에 느끼게 해주었다. 일제강점기의 서울은 경기도에 소속되어 있었다. 민천식의 삶과 연관 짓는다면, 이 춤은 ‘경성부’와 ‘해주부’를 거치면서 형성되었던 춤을 인천시(일제강점기 ‘인천부’)에 와서 정리하면서 꽃을 피운 춤이라고 할 수 있다.
인천시 동구 송현동 100번지
민천식춤방은 송현동 100번지. 인천 시장통에 있었다. 이 주변, 송림동‧송현동‧화평동 등 이주민이 특히 많이 정착했던 곳이다. 시장통에서 사람이 아주 많이 북적거리는 곳에 그의 춤방이 있었다. 그의 춤방 근처는 한국전쟁 이후, 미군부대에서 나온 군수품이 거래되는 장소이기도 했다. 인천사람은 거기를 특별히 ‘양키시장’이라고 불렀다.
그의 춤 제자 중에는 바로 이런 시장상인이 있었고, 양키물건을 파는 직종을 했던 분이 나중에 민천식 춤을 이어받았다는 것은, 인천이라는 지역성과 한국전쟁이라는 역사성과 관련해서 또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시장의 상인들과 인근 송림초등학교, 송현초등학교에 다니는 시장 상인의 아이들은 여기서 ‘고전무용’을 배우고 익혔다. 이랬던 민천식춤방은 훗날 민천식 타계 후 ‘인천국악원’이라는 이름으로 불렀다. 인천에서 이 곳이 얼마만큼 중요한 것을 반증하는 명칭이다.
화관무: 서울을 거쳐, 해주로 가고, 다시 인천에서 꽃을 피우다
195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한국춤에서는 ‘고전무용’과 ‘고전무용학원’이란 용어가 널리 쓰였다. 전통춤을 바탕으로 해서, 당시의 일반인들이 받아들이기 좋은 스타일로 만든 춤이었다. 민천식도 그러했고, 김천흥도 그러했다. 당시 대개의 ‘고전무용’의 범주에 드는 춤들이 그러했다. 그 많던 고전무용은 다 어디로 간 것인가? 이렇게 지역을 기반으로 해서 고전무용학원을 중심으로 유행했던 춤은, 1970년대부터 대학 출신 무용가의 창작무용과 1960대 후반부터 시작해서 점차 힘을 발휘하기 시작한 무형문화재 계통의 춤에 의해서 지금은 거의 자취를 감췄다. 그러함에도 인천지역에서는 그 시대의 춤이 지금까지도 잘 전승되고 있다.
민천식춤방에서 수학한 사람은 누구일까? 알려진 세 사람이 있다. 강령탈춤의 인간문화재가 된 김정순과 김실자, 그리고 김나연이 현재 알려진 민천식의 제자다. 1982년 김정순(金正順, 1923년생)과 김실자(金實子, 1928년생)는 강령탈춤의 보유자(인간문화재)로 지정받았다. 민천식의 춤방은, 타계 후 김정순의 춤방으로 이뤄졌다. 김실자는 부평으로 춤방을 만들어냈다. 현재 민천식춤보존회 대표를 맡고 있는 김나연(구명, 김영순)은 현재 황해도 무형문화재 ‘화관무’ 명예보유자이다.
김나연의 ‘격있는 편안함’ vs. 차지언의 ‘살가운 정겨움’
민천식 춤의 기본은 타령춤과 굿거리춤으로 나뉜다. 이번 조선춤방에서는 김나연과 차지언 모녀(母女)의 춤으로 민천식의 해주수건춤을 접할 수 있었다. 김나연의 춤이 ‘격있는 편안함’이라고 한다면, 차지언의 춤은 ‘살가운 정겨움’이라고나 할까? 모녀의 춤에서 같은 점과 다른 점을 발견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양소운의 다섯 기예
양소운이 세상에 널리 알려진 건 언제인가? 1962년에 열린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였다. 당시 ‘공보부’가 주최를 했다. 최고상은 황해도의 ‘봉산탈춤’이었다. 당시 봉산탈춤이 큰 상을 받는데 큰 역할을 한 인물이 양소운이었다는 걸 인정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
양소운(1924.7.12.-2008.12.7.)은 황해도 재령 태생이다. 양소운의 기예를 다섯으로 요약할 수 있다. 해서탈춤(봉산탈춤, 은율탈춤), 해주검무, 성인인상무(해주승무), 서도소리, 배뱅이굿이다. 이 다섯에 모두 출중한 인물이 양소운이다. 인천에선 인천시 중구 내동 5번지에 거주했다. 1967년, 봉산탈춤의 인간문화재로 지정받을 때의 주소이기도 하다.
1990년 송년통일전통음악회 이튿날, 국립극장에서 공연이 펼쳐질 때, 무대에서는 북쪽의 스승 김진명이 있었고, 객석에는 남쪽의 제자 양소운이 있었다. 이들은 공연 후에 만났는데, 이것이 큰 화제가 되었다. 2024년인 내년은 양소운 탄생 100주년의 해다. 자손과 제자들에 의해서 탄생 100주년 관련 기념 공연이 성대하게 펼쳐지길 기대한다. 양소운은 인천이라는 지역성을 떠나서, 한국전쟁 이후 월남한 전통예술인 가운데서 첫 손가락을 꼽을 예인이기에 그렇다.
가무(歌舞)를 섭렵한 박일흥
이번 무대를 통해 박일흥에 대한 존경심이 더해졌다. 박일흥은 본인이 보유한 ‘은율탈춤’ 예능보유자 외에, 두 가지 면에서 아주 확실한 기량을 보유하고 있음에 존경심이 더해졌다.
가무(歌舞)를 두루 섭렵한 인간문화재가 많지 않은데, 박일흥이 바로 그런 인물이다. 그의 소리와 그의 춤의 뿌리는 양소운인데, 양소운의 ‘배뱅이굿’과 양소운의 ‘성인인상무’ 두 종목을 모두 넘나들면서 명무와 명창이라 불릴 만큼의 공력을 쌓았다.
양소운의 배뱅이굿 공연의 주요한 공연사를 살펴보자. 1972년 4월 16일, ‘배뱅이굿’ 공연이 황해도민속예술보존협회(대표 양소운) 주최로 국립극장(명동)에서 열렸다. 이후 배뱅이굿 공연을 많이 하진 않았다. 이유는 무엇일가? 조심스러운 추측은 두 가지다. 하나는 이은관의 배뱅이굿이다. 과거 이은관과 양소운은 함께 배뱅이굿을 공연하기도 했다. 이은관은 인간문화재로 지정을 받지 못했고, 주종목이 배뱅이굿 하나인 것에 반해서, 양소운은 탈춤의 문화재로 지정을 받고 있었기에, 배뱅이굿 공연을 자제한 듯 보인다. 또 하나의 이유는 양소운의 황해도 무형문화유산에 대한 사명감이라고 생각이 된다.
양소운에서 박일흥으로 이어진 배뱅이굿
양소운은 어떤 사람이었나? 자신이 보유한 종목의 문화재가 되어서 그것을 가르치면서 자신의 입지를 굳히기 보다는, 황해도의 과거 전통 민속 중에서 맥이 끊어질 위기에 있는 것을, 남쪽에서 다시 명맥을 살리고자 하는 사명감이 컸다. 그래서 황해도의 여러 탈춤을 알리고, 무엇보다도 해주검무를 알리는 것에 목적을 두었기에, 배뱅이굿은 우선순위에서 밀려간 것이 아닌가 추측한다.
그러함에도, 1980년 3월 31일, 서울 공간사랑(원서동)에서 열린 공연에서 배뱅이굿의 일부 공연에 관객들의 환호를 생각하면서, 배뱅이굿 완창을 하려고 하는 의지가 있었던 것 같다. 1991년 5월 31일, ‘배뱅이굿’ 완창 발표가 라이브하우스 ‘난장’(신촌)에서 열렸다. 이런 양소운 배뱅이굿의 맥을 이은 분이 박일흥이다. 박일흥은 여러 차례 배뱅이굿을 공연을 했는데, 2019년 1월 9일, 황해도 배뱅이굿 ‘양소운류 완창발표’는 배뱅이굿 공연사에서 크게 기록해야 할 공연으로 남는다.
이렇게 양소운 선생의 배뱅이굿을 잇고 있는 박일흥이, 양소운 선생의 춤맥인 성인인상무 보존회(이사장 박일흥)를 이끌고 있으니 얼마나 반가운가. 이번 무대에서도 박일흥은 성인인상무를 재현했다.
‘성인인상무’는 해주승무다
2010년 4월 24일, 양소운전통예술보존회가 설립되었고 같은 해 10월 23일 ‘고 양소운 추모공연’이 열렸다. 여기서 성인인상무가 널리 알려졌다. 성인인상무는 해주지역의 승무다. 장삼춤(승무), 북춤(법고춤), 바라춤, 허튼춤, 회심곡 등 다섯 부분으로 이어진다. 승무의 종합선물세트라고 불러도 좋은 ‘독특한 매력의 춤’이다.
이 춤은 193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해주권번 사범 장양선으로부터 양소운이 배웠다. 양소운 사후, 성인인상무 보존회(이사장 박일흥)가 만들어졌고, 박일흥, 차부회를 거쳐서 이종호, 박준규에 이어진 춤이다.
박일흥과 이종호 外, 성인인상무를 추게 될 사람은 누구일까?
이번 양소운춤방에서는 박일흥과 이종호 2인이 성인인상무를 췄다. 대한민국에서 이 춤을 소화해 낼 사람이 몇몇일까? 박일흥과 이종호 외에 몇 명이나 가능할까? 성인인상무는 춤이자 노래다. 회심곡 등을 부를 줄 알아야 하고, 해서탈춤의 사위를 익혀야 가능한 춤이다. 지금 대한민국에서 여러 유파의 승무가 가능한 춤꾼이라 해도, 성인인상무를 무대에서 공연하기 위해선 배워야 할 것이 많다. 법고와 바라를 능숙하게 다루어야 하고, 해서지방 특유의 탈춤 사위와 함께 회심곡을 부를 줄 알아야 공연이 가능하다. 이 춤을 능숙하게 재현한 두 분이 존경스럽다. 특히 인간문화재 박일흥에게 자신의 주 종목이 아님에도, 이렇게 열과 성을 다해서 무대를 채워가는 모습이 감동적이었다.
국가무형유산이 되어야 할 해주검무
'해주검무'는 양소운 선생에 의해 1983년 인천에서 재현됐던 황해도 해주 지방의 전통춤이다. 이런 해주검무는 왜 무형문화재로 지정받지 못했을까? 나는 지금도 의문이다. 진주검무, 통영검무는 지정을 받았다. 해주검무는 진주검무와 통영검무와는 다르다. 같은 탈춤이라도 해서탈춤과 경상도의 야류(野遊)가 다르듯이 그렇다. 만약 같은 탈춤이라는 이유로 봉산탈춤은 지정받고, 수영야류는 지정 못 받았다면, 어떠하겠는가?
전통사회에서 검무는 매우 보편적인 춤이었다. 지방의 권번마다 검무는 특색 있게 발전했다. 진주검무와 통영검무는 지역의 특성상 스토리텔링이 존재하는데, 해주검무는 그렇지 않아서 지정받지 못하는가? 해주검무는 다른 지역의 칼춤과 다르게 음악적 면에서나 춤적인 면에서나 모두 독특함이 있다. 음악은 서도풍류 특유의 농음(弄音)이 매력적이다.
차재숙의 ‘부드러운 카리스마’ 그리고 ‘내면화된 위엄’
차재숙을 중심으로 한 해주검무에서는 장단감이 느껴졌다. 그저 칼춤 동작을 멋지게 하고자 하는데 머물지 않았다. 장단을 타고 착 착 움직이는 칼끝에서 ‘부드러운 카리스마’가 전달되었다. 양소운의 사위를 대물림한 차재숙의 검무에서도 ‘내면화된 위엄’이 풍겨 나왔다.
해주검무가 발굴되고 재현된 것이 1983년이다. 해방 이전에는 해주권번을 중심으로 보편적으로 알려진 춤이었으나, 한국전쟁기에 자취를 감추게 된 것이다. 이런 춤이 양소운 선생에 의해서 40년만에 발굴된 것이다.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 여러 번 출전해서 입상을 받았다는 것이, 해주검무의 존재가치를 인정받은 것이다. 해주검무가 발굴된 지 또한 40년이 지났으나, 아직 해주검무는 무형문화재가 아니다. 나로선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내년이 양소운 선생 탄생 100주년이다. 생전 해주검무를 발굴, 복원하면서, 해서특유의 탈춤을 알리고자 애를 썼던 고인의 열정과 노력을 생각한다면, 이제 해주검무는 국가무형문화유산으로 정당한 위치를 찾아줘야 한다.
2023년 10월 26일, 국립국악원 풍류사랑방에서 공연한 ‘일이관지 조선춤방’의 마지막 공연은 이렇듯 인천에 정착한 디아스포라의 춤과 연관된 공연이었다. 출연한 김나연, 차지언, 박일흥, 차재숙, 4인은 인천에 정착한 황해도민의 춤을 현대 인천에서 알리는데 큰 역할을 하고 있었다.
글_ 윤중강(공연평론가)
사진제공_ 국립국악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