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양한 실험이 가능한 젊은 무용가를 지원하여 우리 춤의 새로운 리더를 찾는다.” 무용전문지 댄스포럼 창간 15주년을 기념하여 개최된 ‘크리틱스 초이스(critics choice) 2014'의 기획취지다. 아르코대극장(7.6~13)에서 펼쳐진 올해 행사에 선정된 9개 공연이 3회로 나뉘어 각 이틀씩 무대에 올랐다. 전년도 행사에서 우수 및 최우수안무가로 선정된 이영일과 전혁진에게 첫 공연과 마지막 공연시간이 할애되었고 박종현, 이루다가 첫날, 형남희, 김보라, 이동원이 둘째 날, 곽영은, 송영선이 셋째 날 각각 30분 내외의 작품을 보여주었다. 둘째 날 끝 작품으로 보여준 형남희의 ’부서진 이름들‘에 나는 주목했다. 근래 사회적 이슈로 대두되고 있는 근로조건, 그 중에서도 얼굴 없는 고객들을 응대하고 언어폭력에 시달려야 하는 감정노동자들의 일상을 구체적인 춤 언어로 표현하고자 한 시도가 좋았다. 허다한 무용작품들이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주제에 함몰하여 효과적인 전달방법을 찾지 못해 허둥대고 있는 요즘 풍조와 달리 ’4인용 식탁‘(2013)에서 보여준 것처럼 가정, 직장, 사람 등으로 대상을 구체화하고 이를 춤으로 풀어가려는 노력이 귀하게 느껴진 작품이었다.
행사에 선정된 많은 작품들이 유사한 패턴을 보이고 있는 것은 우려스럽다. 대부분 작품들이 선택한 주제가 공허하고 관념적이었다는 것이 그 한가지다. 주제 자체가 공허하면 동작에 감정이 실리기 어렵고 관객에 전달되는 메시지가 약해지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테크닉에 의존할 수밖에 없고 공연 구성요소들을 기계적으로 결합시켜 30분을 끌어가는 영혼 없는 춤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둘째로 예술공연과 오락프로, 춤과 동작을 구별하지 못하는 작품들이 의외로 많다(김보라, 이루다, 이동원 등). 방송오락프로에서의 댄싱이나 음악무대에서 백댄서들의 동작은 춤 공연과는 구별되어야할 것이다. 일부 안무가들은 이를 혼동하거나 심지어 동일시하는 인식을 갖고 있는 것 같다. 셋째로 드라마전개를 내레이션이나 대사에 지나치게 의존하고 있고 괴성, 음향, 거친 동작과 튀는 영상, 급격한 장면전환 등을 유니크한 작품의 요소라고 오해하고 있는 것 같다.(김보라, 이동원, 박종현, 곽영은 등) 춤의 전달력을 높이기 위해 음향과 영상효과를 사용할 수는 있지만 지나치면 춤 자체가 가진 언어능력이 위축될 수밖에 없고 심지어 무대에서 춤이 사라지는 위험을 초래할 것이다. 연극 등 타 장르와 다른 무용예술의 특성을 어떻게 지킬 것인가를 고민해보아야 할 것이다.
‘크리틱스 초이스’란 매력적인 이름을 내걸고 올해로 17회째를 맞는 기획이 그 연륜에 합당치 않게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여준 원인을 안이한 기획태도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수많은 신진무용가들이 이 무대에서 숨겨진 역량을 들어내고 무용가로서 성장해간 것은 사실이다. 그 공적을 인정하면서도 평론가가 선정한 작품들이 젊은 무용가들에게 춤의 본질에 대한 잘못된 시그널을 보내고 있는 것은 아닌가하는 염려가 앞선다. 관객은 작품을 보기 전에 어떤 기준에 의해서 작품이 선정되었는지, 선정책임을 맡은 크리틱스(비평가)가 검증된 사람들인지에 대해서 알 권리가 있다. ‘공인된 공연 장소에서 2~3회 이상의 작품발표경험이 있는 대학교수가 아닌 젊은 무용가’라고만 선정기준을 내걸고 있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 크리틱스란 이름을 내걸고 선정된 작품들은 기획취지대로 무용계의 내일을 예단하고 이끌어갈 수 있는 잠재력을 보여주어야 한다. 수박겉핥기로 해외무용을 섭렵하고 돌아온 무용가들의 복제된 작품과 이를 모방하는 후배들이 잘못된 트렌드를 형성해가고 있는 것이 현실이라면 이에 대해 경종을 울려줄 수 있는 것이 평론가의 역할이다. 누가 어떤 이유로 작가를 선정했는지를 소상히 밝히는 것은 거창한 타이틀을 내건 주최자의 책임일 것이다.
“평론가의 진정한 힘은 면죄부처럼 그 이름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치열하게 작업에만 몰두하는 진지하고 수줍은 무용가들을 찾아내고 옥석을 가리는 공정한 평가로서 그들을 격려해주는 데서 발휘되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평론의 본원적 기능은 예술가와 관객을 연결해주는 것이며 좋은 작품을 발굴하여 정직하게 해석하고 관객에게 소개할 때 평론은 생명을 얻는다. 평론가가 더 이상은 무용가로부터는 물론이고 관객으로부터도 외면당하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누가 이들을 춤추게 하는가, 237쪽) 10년 전에 필자가 써놓은 글이다. 강산이 한 번 변하는 동안 무용계의 거버넌스는 오히려 퇴보하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
글_ 이근수 무용평론가, 경희대 명예교수
사진_ 형남희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