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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발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게 해주세요!: 유니버설발레단 <돈키호테> & 국립발레단 <고집쟁이 딸>

 유니버설발레단 <돈키호테> 


사랑에 빠진 젊은 연인과 이들의 결혼을 반대하는 아버지 혹은 어머니가 있다. 아버지 혹은 어머니는 딸을 마을의 부자와 결혼시키려 하지만 마음을 돌려 두 연인의 결혼을 허락한다. 마침내 결혼할 수 있게 된 연인들을 축하하며 잔치가 벌어진다…. 줄거리만 읽고 작품의 제목을 맞출 수 있겠는가? 아마 어려울 것이다. 발레 <돈키호테>와 <고집쟁이 딸>은 인물들의 이름을 지우고 보면 동일한 작품이라 해도 믿을 정도로 유사한 줄거리를 지니고 있다. 


<돈키호테>는 스페인의 열정 가득한 바로셀로나 광장을 배경으로, <고집쟁이 딸>은 프랑스의 활기 넘치는 농가를 배경으로 젊은 연인들의 결혼을 둘러싼 고민을 유쾌한 소동극으로 그려냈다. 유니버설발레단은 10월 6일부터 8일까지 <돈키호테>를, 국립발레단은 11월 8일부터 12일까지 <고집쟁이 딸>을 선보였다. 비극이 우세한 발레 무대에서는 오랜만의 희극 열전이 펼쳐진 셈이다.

  

국립발레단 <고집쟁이 딸>

 

고전발레 무대 위 스페인 민속춤의 향연


<돈키호테>의 초연이 1869년, <고집쟁이 딸>은 1789년으로, 두 작품 사이에 80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발레는 낭만발레에서 고전발레로 진화해갔다. 비슷한 줄거리를 공유하지만 고전발레의 엄격한 형식을 따르고 있는 <돈키호테>와 낭만발레 이전 작품으로 형식에서 자유로운 <고집쟁이 딸>은 다른 전개를 보인다.


세르반테스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발레 <돈키호테>는 원작의 2부에서 ‘부자 카마초의 결혼식과 불쌍한 바실리오에게 일어난 일에 대하여’와 ‘카마초의 결혼식이 계속되며 다른 재미있는 일들이 다루어지다’의 결혼 에피소드를 발췌해 무대로 옮겼다. 주인공 키트리는 이발사 바질과 사랑하는 사이지만 키트리의 아버지 로렌조는 이들의 연애를 반대하며 딸을 부자 가마슈와 결혼시키려 한다. 바질은 키트리와 결혼하기 위해 거짓으로 자살 소동을 벌이고, 마침 이들이 사는 마을을 지나던 돈키호테가 두 연인의 안타까운 사연을 듣고 결혼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스페인에서 무용수로 활동한 바 있는 프티파는 스페인의 춤과 음악을 발레에 녹여냈다. 1막에서는 투우사들인 토레아도르의 절도 있는 군무를 비롯해 캐스터네츠의 경쾌한 리듬과 함께 펼치는 세기디야를 볼 수 있고 2막에서는 집시들의 춤을, 3막에서는 토레아도르의 춤과 판당고를 함께 감상할 수 있다.


이뿐 아니라 풍차에 돌진하다 정신을 잃은 돈키호테의 꿈속 장면으로 처리되는 2막의 ‘Dream Scene’은 디베르티스망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스페인 민속춤의 이국적 정취를 벗어나 정통 클래식 발레로 돌아가는 중요한 장면이다. 주역을 맡은 발레리나는 키트리와 둘시네아의 1인 2역을 소화해야 하는데, <백조의 호수>에서 오데트와 오딜을 동시에 연기하는 것만큼 변화의 폭이 크진 않지만 키트리의 발랄함과 둘시네아의 고아함을 동시에 보여주어야 하는 어려운 역할이다.

  

유니버설발레단 <돈키호테>

 

3일간 5회차의 공연을 올린 <돈키호테>는 강미선과 콘스탄틴 노보셀로프, 손유희와 이현준, 엘리자베타 체프라소바와 이동탁, 홍향기와 강민우의 네 커플이 주역으로 나섰다. 올해 브누아 드 라 당스 최고여성무용수상을 수상하며 무용 인생의 금자탑을 세운 강미선이 개막과 폐막 공연을 책임지며 한층 높아진 기대에 부응했고, 파트너인 콘스탄틴 노보셀로프 역시 능청스러운 바질을 선보이며 물오른 연기력을 증명했다. 두 주역의 긴밀한 호흡은 까다로운 테크닉의 향연인 매 장면을 매끄럽게 잇는 주 동력원이다.


발레 무대로 간 민중들의 노동


<고집쟁이 딸>은 현존하는 전막 발레 중 가장 오래된 작품으로 꼽힌다. 1789년 안무가 장 도베르발은 로코코 시대 화가 보두엥의 그림 ‘어머니에게 꾸중 듣는 소녀’를 보고 작품에 대한 영감을 받았다. 그림에는 허름한 헛간을 배경으로 잔뜩 화가 난 표정을 짓고 있는 어머니와 그런 어머니에게 야단을 맞느라 주눅이 든 딸, 두 사람 뒤로 도망치는 남자의 뒷모습이 그려져 있다. 도베르발은 이 그림에서 착안해 어머니에게 비밀 연애를 들킨 딸 리즈와 그 연인 콜라스라는 발레의 주인공들을 창조해냈다.


남편 없이 홀로 딸을 키우는 과부인 지주 시몬은 외동딸 리즈를 부유한 포도밭 주인의 아들 알랭과 결혼시키려 한다. 하지만 리즈는 농부 콜라스와 비밀 연애를 하며 결혼할 꿈에 부풀어 있다. 시몬은 리즈와 콜라스 사이를 의심하며 알랭과의 결혼을 서두르지만 결혼 계약을 맺는 날 리즈가 침실에서 콜라스와 함께 있는 것이 들통나며 계약은 무효가 된다. 시몬은 마침내 리즈와 콜라스의 사랑을 허락하고, 마을 사람들 모두 기뻐하며 두 사람을 축복한다.


장 도베르발의 원 안무는 소실되어 현재 남아 있지 않고 국립발레단은 2005년에는 쿠바발레단의 필립 알론소가 개정한 버전을 선보였고, 지난해부터는 영국 로열발레단의 프레데릭 애쉬튼 버전을 레퍼토리로 공연하고 있다. 그랑파드되나 디베르티스망이 없는 대신 1막에서 리즈와 콜라스가 추는 리본 파드되, 일명 ‘파니 엘슬러 파드되’와 1막 후반부 마을 축제에서 군무진이 추는 리본춤 등에서 리본은 두 주인공의 사랑을 은유하고 춤의 스펙터클을 더해주며 작품의 시그니처 역할을 하고, 시몬이 추는 나막신 춤은 애쉬튼 버전을 상징하는 명장면으로 인기가 높다.

  

국립발레단 <고집쟁이 딸>

 

앞서 언급한 것처럼 현존하는 전막 발레 중 가장 오래된 작품이다 보니 시몬처럼 남성 무용수가 맡는 여성 캐릭터의 전형도 <고집쟁이 딸>에서 그 틀이 만들어졌다. <잠자는 숲속의 미녀>의 카라보스, <신데렐라>의 계모와 두 언니, <라 실피드>의 마녀 매지 등과 같이 ‘여성스러움’의 전형에서 벗어난 여성 캐릭터를 남성 무용수가 연기하는 것이 발레 무대의 전통으로 굳어졌다.


또한 <고집쟁이 딸>에는 버터를 젓고, 물레로 실을 잣고, 곡식을 수확하는 등 당대 농가에서 행해지던 노동이 마임으로 다수 삽입되어 있다. 공연이 초연된 것은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나기 불과 2주 전으로, 이는 농민과 노동자 계급이 빠르게 부상하고 있던 당대 현실이 무대에도 반영된, 민중발레의 귀중한 단편으로 볼 수 있다. <돈키호테>에 삽입된 민속춤 판당고 역시 본디 곡식 심기와 추수, 어로(漁撈, 물고기를 잡는 일) 등 집단 노동에 대한 보답으로 베풀어지던 연행이었으나 오늘날에는 그 노동의 의미가 거의 삭제되고 춤으로만 남아 있다. 현대 발레에서는 <안나 카레니나> 등에서 노동자들의 모습이 일부 묘사되고 있기는 하나 <고집쟁이 딸>은 농가에서 여성들이 수행하던 가내 노동을 무대에 올리고 품삯을 지불하는 시몬의 모습을 통해 지주와 노동자의 관계를 드러내며 노동하는 일상을 좀 더 촘촘하게 비춘다.


5일간 6회차의 공연을 올린 <고집쟁이 딸>은 박슬기-허서명, 조연재-박종석, 심현희-하지석의 세 커플이 주역으로 나섰다. 심현희를 제외하면 모두 초연의 주역들로, 심현희는 이 작품은 처음이지만 다른 작품에서 이미 여러 번 호흡을 맞춘 바 있는 하지석과의 무르익은 파트너십을 바탕으로 무대를 안정적으로 이끌었다. 지난해에 이어 시몬 역을 맡은 배민순 역시 배역과 더욱 일체감 있는 모습으로 신 스틸러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다만 나막신 춤에서 오케스트라와의 호흡은 좀 더 신경 쓸 필요가 있을 것이다.

  

국립발레단 <고집쟁이 딸>

  

비혼⸳비연애의 시대에 결혼각본의 미래는


무대예술 가운데 ‘결혼각본’에 가장 충실한 장르인 발레에서 결혼은 이야기의 알파요 오메가다. 주인공은 대부분 왕자와 공주이며, 이들의 결혼 과정에 마법이나 정령의 힘이 개입해 결혼이 성사되거나 파투나는 결말을 갖는다. 왕자나 공주가 사는 왕궁의 화려함이나 마법의 강력한 초자연적 힘이 결혼이라는 대주제를 가리기 십상인 것과 달리 <돈키호테>와 <고집쟁이 딸>은 이 같은 발레의 초현실적 세계에서 벗어나 현실의 사랑이야기를 다루었다. 젊은 연인들의 결혼을 가로막는 것은 전능한 마법이 아니라 경제력이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결혼’을 이야기하는 두 작품 속으로 한 걸음만 들어가 보면 그 안의 본질은 딸을 부자와 결혼시키려는 아버지 혹은 어머니의 현실적인 계산과 가난하지만 사랑하는 남자와 결혼하고 싶어 하는 딸의 낭만적인 이상 간의 대립이다. 이 대립은 딸의 승리로 끝나고 작품의 결말은 돈이 아니라 사랑을 택한 연인이 행복한 결혼식을 올리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그러나 발레 작품 속 청춘 남녀들이 이처럼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기’라는 인생을 건 숙제에 매달리는 것과 달리 현실의 청춘 남녀는 연애도 결혼도 외면하고 있다. 지난해 인구보건복지협회가 만 19~34세의 비혼 청년 1047명을 대상으로 시행한 온라인 설문조사에서 결혼을 하지 않은 청년 3명 가운데 2명은 “연애를 하고 있지 않다”고 답했다. 이 가운데 70%는 ‘자발적으로 연애를 하지 않는 것’으로 밝혀졌으며, 이 자발적 비연애 비중을 성별로 나누어 살펴보면 남성이 61%, 여성은 83%까지 올라갔다.


올해 8월 한반도미래인구연구원에서 실시한 조사 결과도 크게 다르지 않다. 전국의 만 15~59세 남녀 2300명을 대상으로 결혼⸳출산과 관련해 설문조사를 한 결과 20~39세 미혼 청년 10명 중 4명은 결혼할 의향이 없는 것으로 확인됐다. 미혼남성의 비혼 응답률은 36.4%, 미혼여성은 50.2%로 성별에 따라 13.8%p의 격차를 보였다. 201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젊은 세대가 경제적 이유로 연애와 결혼과 출산을 포기한다는 ‘삼포(三抛)세대’의 담론이 활발했던 것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다.


시류에 민감한 대중문화에서는 아예 로맨스에서 벗어나 연애와 결혼이 아닌 다른 이야기로 방향을 돌리거나 ‘비혼주의자’로 등장한 주인공이 결혼에 도달하는 반전을 꾀하는 등 이 같은 분위기를 반영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렇다면 ‘결혼각본’을 가장 충실히 따르며 연애와 결혼을 이야기하는 발레 무대에도 변화가 찾아올 수 있을까. 대중화라는 기치 아래 관객 저변을 넓히고자 하는 발레 단체의 노력과 연령대가 내려갈수록 비혼과 비연애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관객들의 성향이 어느 지점에서 만날 수 있을지도 고민해봐야 할 주제다.

  

유니버설발레단 <돈키호테>

 


글_ 윤단우(공연칼럼니스트)

사진제공_ 유니버설발레단, 국립발레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