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2월 6일 8시 동래문화회관 대극장에서 ‘한국춤 프로젝트 가마’의 세 번째 프로젝트 <회(回)>(안무 한지은)를 무대에 올렸다. 런닝 타임 50분에 류현정, 곽민지, 정서영, 김연주, 이녹양, 정혜지, 이소희, 김나영, 조아영, 안혜연, 어혜민, 한지은이 출연했고, 무대미술 황지선, 의상 민천홍이 맡았다. “回(Hui) 회는 사전적 의미로 ‘돌다, 돌아오다, 돌리다, 돌이키다’의 뜻을 내포하고 있으며 문자 자체로도 동적인 느낌을 주고 있다. 돌다 보면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다고 하여 ’돌아온다‘의 뜻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작품 <회>는 관찰자적 시각에서 바라본 시간을 말하고 있다. 관찰자의 시각에서 시간은 돌고 돈다는 이미지를 가지게 되었는데 이는 매 순간 일어나고 사라지는 연속적인 일련의 일들이 반복적으로 행해지는 것에 초점을 두었다.” (안무자의 말, 팸플릿)
<회>에서 시간은 선형적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윤회한다. 윤회라고 해서 종교적 색깔을 입히지는 않았다. 돌다가 결국은 다시 돌아오는 ’回회‘는 명사에 머물지 않는 동사이다. 즉 동사적 시간은 개념이나 추상이 아니라는 의미다. 이런 시간을 관찰하기 위해서는 먼저 시간의 변화를 감각하고, 나아가 그 감각을 인지하는 동시에 메타인지(meta cognition)까지 가능해야 한다. 쉽지 않은 이런 상황은 구도자가 수련을 통해 도달하려는 경지이다. 그런데, 한지은은 이런 상황을 아무렇지 않게 말한다. 무용가이기 때문일 것이다. 무용은 몸이 세계와 직접 감응하는 예술이어서 무용가는 추상적 시간을 다른 사람과 다르게 감각할 수 있다. 관객은 무용가 한지은이 몸으로 감응해 메타인지 한 시간을 작품으로 보는 것이다. <회>는 ‘回 1, ~로부터’ ‘回 2, 시간을 조각하다.’ ‘回 3, 시간을 보다.’ ‘回 4, 시간을 보내다.’ ‘回 5, 축’ ‘回 6, 돌고 돌아 돌아가다.’ 등 모두 6장으로 짜였다. 이 구성은 절대적 시간이라기보다 인간의 시간, 즉 상대적이면서도 보편적인 시간을 삶에서 감각하고 인지하는 과정을 펼친 것이다. 어떤 픽션이나 서사는 없다. <회>는 이야기로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작품이 아니다. 관념적 시간이 무용수의 몸을 통해 현전하는 이미지로 나타나는 경이로운 경험을 관객에게 선사한다. <회>의 인상은 다면적이다.
<회>는 낭만적이고 미니멀 하다. 서구 예술사조에서 낭만주의는 인간의 본성에서 로고스(이성)보다 파토스(감성)의 작용이 더 기본적이라는 신념에서 출발한다. 무용에서 미니멀리즘은 무용이 거대설화나 메타 서사로 인해 신비화하는 것을 막고, 보다 일상적이고 객관적인 것이 되도록 하는 경향을 말한다. <회>가 ‘시간’이라는 추상적인 주제를 내세우기는 했지만, 결국 시간 속에서 살아가는 일, 즉 삶의 보편성에 관한 이야기다. 누구나 영위하는 일상 말이다. 그래서 <회>는 ‘미니멀한 낭만적 (한국)무용’으로 요약할 수 있다. ‘한국’을 괄호에 넣은 것은 이 작품의 춤사위는 한국무용 바탕에 충실하지만, 그것을 풀어내는 방식은 한국 무용의 범위 안에만 머물지 않고, 경계면에 있다는 의미이다. 그렇게 해서 드디어 한지은의 색깔이 묻어나기 시작한 <회>의 춤은 간결하고 품위가 있다.
<회>는 회화적이다. 채도 낮은 보라와 회색 조의 의상과 각 장이 바뀔 때마다 변화하는 조명의 색조 그리고 간결한 무대와 춤이 어우러진 모노크롬 풍경의 파노라마, ‘춤-풍경’이다. 무용수 머리 위에 떠 있는 사각 틀 4개는 수렴하고 확산하는 시간을 상징하는 개념적 공간이다. 각 틀이 서로 물리적으로 연결되지 않은 설정은 과거, 현재, 미래가 각기 다른 흐름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서로 영향을 주는 이중적 특성을 상징하는 듯하다. 그 아래에서 춤추는 열두 명의 공간은 일상의 공간이자 삶의 터전이다. 시간이라는 개념은 현실을 지배하듯 무용수의 머리 위에 떠 있지만, 그 무게는 체감할 수 없는 추상이다. 시간의 무게는 무용수의 몸에 깃들어 있다. 이러한 복합적인 상황을 <회>에서 공간, 색, 빛 그리고 몸으로 직조한 몇 개의 풍경으로 그린다. ‘풍경’은 ‘landscape’이다. 현실(land)을 담은 전지적 시각(scape)인 셈이다. 시간은 그런 것이 아닐까? 있으면서도 없는 듯한 시간을 체감하는 길은 현실밖에 없다.
<회>는 철저히 춤에 의존한다. 표현주의 무용의 영향 때문인지는 몰라도 요즘은 무용에 연극적 요소를 포함하는 것이 전혀 새롭지 않다. 어떤 작품은 춤보다 극적 요소의 비중이 높다. 무용에서 극적 요소란 뚜렷한 서사를 내세우는 것만이 아니라, 대사, 일상 동작 등을 이용하는 것을 말한다. 무용에 극적 요소가 많아지면 메시지나 감정 전달이 수월해지고 관객 이해도가 높아지며 안무자가 이용할 표현 방식의 폭을 넓혀준다. 문제도 있다. 이런 방식의 안무에서는 춤이 소홀해질 수 있다. 춤으로 주제를 표현하고 메시지를 전달하려면 독창적인 움직임을 고민해야 하는 수고가 필요하지만, 연극적 요소를 이용하면 그 수고를 덜 수 있다. 그래서 뚜렷한 방향이나 의도 없이 춤보다 연극적 요소에 의지하려는 작품이 많다. ‘댄스시어터’ 형식을 완성한 피나 바우슈는 무용에 연극적 요소를 적극 도입한 선구자이다. 그런데 피나는 대부분의 작품에서 춤을 우선하고 극적 요소를 부차적으로 이용한다. 그렇게 해서 그녀의 작품은 무용 작품의 정체성을 넓히면서 강화한다. <회>에는 연극적 요소가 아예 없다. 독할 정도로 처음부터 끝까지 춤으로 밀고 나간다. 어쩌면 당연하다고 여길 수 있는데, 그렇지 않다. 장르 간의 상호교류가 일상이 된 시대에 이처럼 춤에 충실한 작품을 만나기는 어렵다. <회>의 가치는 여기에 있다. 한지은의 고집은 춤 형식이 어느 때보다 다양해지고, 예술 장르 간 교류가 일상적인 시대에 다시 춤이 무엇인지에 관한 묵직한 메시지를 던진다.
<회>의 백미는 끝나지 않는 되돌이표로 마무리한 엔딩 장면이다. <회>는 무대인사가 끝난 뒤에도 진지하게 춤을 추면서, 끝맺기보다 춤추면서 사라지는 편을 선택했다. 마치 저렇게 무대 뒤로 사라졌어도 어디서인가 계속 춤추고 있을 것만 같은 여운을 남겼다. ‘回’가 돌고 돌다가 다시 돌아오는 것이기에 확실한 마무리는 애초에 불가능했다. <회>는 이 의미를 조명이 꺼질 때까지 지켜나갔다. 공연은 끝났어도 시간은 흐르는 것처럼 우리 모두 따로 또 같이 각자의 삶을 살아간다는 지극히 당연하지만, 잊고 있었던 현실을 보여준 <회>는 사라지면서도 절대 사라지지 않는 삶의 풍경이다.
<회>는 열악한 무대 조건에도 불구하고 흔들리지 않았지만, 노력만으로 채울 수 없는 아쉬움을 남겼다. 동래문화회관 대극장은 암전이 불가능하다. 비상구 불빛이 고스란히 무대로 스며들어 조명을 전부 끈 상태에도 암전이 안 된다. 다른 극장들은 비상구 불빛이 무대에 파고드는 경우가 없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조건은 작품의 완성도에 영향을 주었다. <회>의 여러 장면에서 조명의 극적 효과가 필요했다. 조명은 밝음과 어두움의 대비로 극적 효과를 내는데, 암전이 되지 않았던 탓에 결정적인 장면 몇 군데에서 대비 효과가 빛을 발하지 못했다. 또한 무대 공간이 좁아 춤의 기운이 확산하지 못한 예도 있었고, 춤추는 공간과 비워 둔 공간의 대비 효과도 떨어졌다. 안무자와 출연자들은 할 수 있는 바를 다했지만, 작품의 가치 가운데 제대로 관객에게 전달하지 못한 면이 생겼다. 기회가 된다면 <회>를 제대로 된 극장에서 다시 공연해 더 많은 관객이 온전히 이 작품을 즐길 수 있기를 바란다.
글_ 이상헌(춤평론가)
사진제공_ 박병민(사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