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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기 위한’ 발레가 아닌 입을 가진 존재들의 ‘하기 위한’ 발레: 윤상은 <메타발레: 비(非)-코펠리아 선언>


윤상은의 신작 <메타발레: 비(非)-코펠리아 선언>이 두산아트랩의 올해 첫 공연으로 지난 1월 11일부터 13일까지 두산아트센터 스페이스111에 올려졌다. 두산아트랩은 두산아트센터가 40세 이하의 공연 창작자, 35세 이하의 미술 창작자를 대상으로 새로운 실험을 지원하는 프로그램이다. 공연의 경우 연극의 강세 속에 윤상은의 작품이 무용으로는 유일하게 선정되었다.


윤상은은 발레를 향해 꾸준히 질문을 던져온 창작자다. 창작자의 활동이란 본디 질문에서 시작되는 것이지만 윤상은이 질문하는 대상이 발레라는 점에서 그의 질문에 귀가 더욱 쫑긋해진다. 예술가가 그 업을 계속 이어가려면 질문을 멈추지 말아야 하는 것과 정반대로, 예술은 예술가의 질문을 통해 외연을 넓히게 되리라는 기대를 배반하고 그 세계의 권위를 후광으로 두르거나 혹은 장르의 문법 같은 내재적 규범으로 제압하고, 그도 아니면 교본이 된 정전을 모범으로 내세우며 질문을 차단하기 일쑤다.


특히 발레는 서양 궁정예술이라는 역사 위에 세워진 제국주의적 권위로, 오랜 기간의 전문적인 훈련이 필요한 고난도의 테크닉으로, 무대 위 종합예술로서의 절대적인 아름다움으로 예술에 대한, 장르에 대한, 정전에 대한 질문을 금기시해 왔다. 이 같은 발레의 교조성은 안무가들이 아예 발레라는 장르의 바깥으로 뛰쳐나가 클래식이 아닌 모던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창안하게 된 한 이유이기도 하다.


공연에 드라마터그로 참여한 손예운은 작품 노트에서 이를 “귀족적 애티튜드, 문법적 움직임, 왕관과 분칠, 구태한 서사, 백인 중심주의, 엘리티즘, 마른 몸 우상화, 차이콥스키”로 축약해 비판하며 “우리가 클래식에 대한 도그마에 둘러싸여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질문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도그마를 걷어내고 난 뒤의 발레는 무엇이 될까. 윤상은은 <메타발레: 비(非)-코펠리아 선언>을 통해 우리가 여태까지 알아 온 도그마로서의 협소한 발레만이 발레가 될 수 있는지 묻는다. 제목이 말하고 있는 그대로 발레를 통해 발레에 대해 묻는 ‘메타발레’다.




‘발레가 아닌 것’은 무엇인가


발레를 향한 윤상은의 첫 번째 질문은 그의 2015년 작 <코펠리아-입을 다문 존재는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 같아>로 거슬러 올라간다. 제목의 ‘코펠리아’는 생레옹이 안무한 희극 발레 <코펠리아>에서 따온 것으로, 발레는 인형인 코펠리아를 사람으로 착각하고 벌어지는 소동극으로 전개되지만, 윤상은은 오랫동안 발레 작품 속 캐릭터의 이름이었던 코펠리아를 ‘입을 다문 존재’로 재명명한다. 발레 <코펠리아>가 레퍼토리 작품으로 안착한 이래 코펠리아는 인형이라는 설정으로 어떠한 감정 표현도 없이 움직임만 주어지던 캐릭터였다. 하지만 윤상은이 ‘입을 다문 존재’라는 새로운 정체성을 불어넣음으로써 코펠리아는 외부의 위력에 의해 말을 하지 못하게 되었건 자신의 의지로 말을 하지 않기로 결심했건 간에 무언가 말을 할 수는 있지만 입을 다물고 그것을 드러내지 않는 존재로 재탄생하게 되었다.


그렇기에 윤상은의 <메타발레: 비(非)-코펠리아 선언>은 그의 9년 전 작업으로 거슬러 올라가 코펠리아가 아닌 존재, 즉 ‘입을 다물지 않는 존재’로서의 나를 드러내는 선언으로 읽을 수 있다. 이때 입을 다물지 않음이란 발언 또는 질문을 멈추지 않음이다. 이번 공연은 윤상은이 지난해 세 차례에 걸쳐 진행한 워크숍 ‘모든 몸을 위한 발레’의 움직임 실험이 집약된 결과물이었는데, 제목에 충실하게도 발레 무대에서는 만나기 어려운, 참으로 다양한 셰입(shape)과 질감을 가진 몸들이 모여 매우 비전형적인 움직임을 보여주었다. 의상 또한 발레 연습실에서 볼 수 있는 레오타드와 메쉬 스커트가 아닌 민소매 티셔츠나 후디, 레깅스나 트레이닝복 바지 등 좀 더 편안한 차림이었다.


공연은 출연자들이 기본적인 발레 움직임을 수행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무용 전공자와 비전공자가 섞여 있는 출연자들의 움직임은 실제 발레 클래스가 진행되는 스튜디오에서라면 과연 진도를 나갈 수 있을까 우려가 들 만큼 어설프고 자유분방하다. 정답이 정해져 있고 그 정답의 완성을 추구하는 발레에서 이런 움직임이라니, 심지어 이런 움직임을 무대에 올리다니, 클래식 발레 무대에 익숙하고 또 사랑하는 관객이라면 공연을 보는 동안 충격을 받거나 실망했을지도 모른다.



출연자들의 수행이 ‘게으른 파세’, ‘움츠러드는 프로미나드’, ‘털난 앙호’, ‘짜증내는 피루엣’, ‘난폭한 아라베스크’ 등 원 동작이 그와는 가장 어울리지 않는 수식어와 결합되어 재현되는 장면에 이르면 객석에서도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리고 만다. 그런가 하면 출연자들은 저출생에 대해, 테슬라 공장에서 일어난 로봇에 의한 인명 사고에 대해, 나아가 테슬라 주식 매수에 대해서까지 이야기를 나누고, 감정 표현에 둔한 자신의 성향을 선호하는 발레 작품의 특성과 연관 짓기도 한다. 이 이야기들이 다 발레와 무슨 상관인가 싶지만 중요한 건 이들이 입을 가진 자들이며, 그 입을 다물지 않은 채로 발레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들에게 발레는 목적이 아니라 도구일 뿐이다.


그러나 발레를 도구로 사용하고 있다고 해서 이들의 수행이 가벼운 것은 아니다. 이들은 사뭇 진지하게 <라 바야데르>에서 니키야의 애절한 죽음을, <목신의 오후>에서는 목신 판의 나른한 관능을 재현한다. 이들의 웃음기 없는 진지한 연기는 다른 한편으로 그동안 발레 무대가, 그리고 예술이 요구해 온, 전문가에 의해 구현되는 ‘완성도’에 대한 질문을 환기시킨다. ‘완성도’ 있는 수행이란 무엇이며, 어떤 수행에 대한 ‘완성도’를 승인하는 주체는 누구인가? 그리하여 결국 이 수행의 결과물은 누구의 것으로 수렴되는가?



마지막 날 공연이 끝나고 진행된 아티스트 토크에서 한 관객은 윤상은에게 왜 굳이 발레로 이와 같은 작업을 하는지 물었다. 이는 듣기에 따라 발레를 작업의 도구로 사용해 온 창작자에게는 매우 무례할 수 있는 질문으로, 도구로서의 발레가 아니라 정체성의 발레로서 발레 안무가에게는 ‘너는 왜 너인가’라는 질문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질문은 신분제가 무너지고 극장을 채우는 것이 더 이상 귀족들과 귀족을 선망하는 부르주아들만이 아닌 시대, 더더욱 시민들의 문화예술 향유를 위해 공공에서 앞장서서 예술과 시민 간의 거리를 좁히기 위한 노력을 경주하고 있는 시대에 발레는 왜 옛 규범 안에 남아 있어야 하는가라는 또 다른 질문을 도출한다.


윤상은은 자신의 작업을 발레와 발레가 아닌 것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것이라 설명했는데, 여기서 다시 짚어야 할 것은, ‘발레가 아닌 것’은 무엇이며, 그것을 발레가 아니라고 결정하는 것은 또 누구인가라는 것이다(니진스키가 1912년 파리에서 고대 그리스 혹은 이집트 벽화에서 움직임 모티브를 가져온 <목신의 오후>를 처음 선보였을 때 ‘이것은 발레가 아니다’라는 반발과 맞닥뜨렸음을 기억하자). 윤상은이 보여준 ‘비-코펠리아’의 움직임은 <라 바야데르>와 <목신의 오후>의 특정 안무를 수행하는 가장 진지한 장면에서조차 시종일관 몸에 힘을 뺀 무겁지 않은 것이었으나, 그들이 몸을 통해 던진 질문은 그 어떤 전막 발레보다 무겁고 또 대답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리고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서는 우리가 발레의 권위와 아름다움에 압도되어 놓치기 쉬운 ‘주어’가 무엇인지 먼저 떠올려야 하는데, 이 ‘주어 찾기’는 어쩌면 윤상은의 다음 작업에서 가장 치열한 전장이 될지도 모른다. 



글_ 윤단우(공연칼럼니스트)

사진제공_ ⓒ두산아트센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