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의 출현과 발전, 그로 인해 변화할 인류의 미래는 더 이상 SF 장르의 전유물이 아니라 직면한 현실이 됐다. 이에 대한 여론은 일자리 대체로 인한 비관론과 삶의 질 개선이라는 낙관론으로 분분하다. 문화 예술계에서도 Chat GPT의 등장 이후 창작에 대한 윤리성 문제가 불거진 바 있다. 이런 모든 논란은 인공지능으로 인해 혁신될 인간 삶에 대한 기대와 우려 사이에서 비롯한다. 시대의 관심은 그 혁신 이후 맞이할 변화에서 인류가 어떤 존재로 자리매김 하느냐일 것이다. 불확실한 미래에서 주체성의 유지와 새로운 정체성의 획득을 두고 동시대의 고민은 클 수밖에 없다.
장르 불문 픽션에서는 그중 비관적 전망을 활용해 지난 세기부터 흥미로운 상상력을 선보였다. <은하철도 999>, <터미네이터>, <바이센테니얼맨> 등으로 대표되는 그 상상력의 중심에는 기계 문명이 초래한 인간 주체성 박탈의 공포가 있다. 즉 트랜스휴머니즘(trans-humanism)의 가속화가 결국 비인간화를 이끌고 인간 존엄성까지 침해할 수 있다는 경계심이다. 한마디로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관한 문제다. 몸을 매개로 하는 무용가들에게 이 주제는 더 근원적이고 현실적인 명제로 다가올 수밖에 없다.
전작 <아난(ANON)>에서 이미 인공지능과 미래 인류학적 담론을 선보였던 정훈목은 신작 〈Yaras〉에서 다시 한 번 이 문제에 초점을 맞추며 ‘포스트휴먼’에의 관심을 이어간다. 무대 위에 덩그러니 놓인 로봇 개로부터 시작되는 작품은 처음부터 과학기술과 인류의 미래라는 테마를 직설적으로 드러낸다. 로봇 개는 지난 세기의 익숙한 창조물이지만, 그것이 상징하는 미래성은 여전히 유효하다. 흔히 인공지능으로 대표되는 첨단 과학기술의 요점은 업무의 패턴을 발견해 자동화하는 효율성에 있다. 그 효율성이 진화할수록 불확실성은 줄어들고 많은 것이 통제 가능한 영역으로 포섭된다. 그런 시대에서 인간 존재의 의미는 무엇일까. 정훈목은 ‘Yara’라는 기괴한 집단의 모습을 통해 다음 세대의 인류상을 인상적인 방식으로 그려낸다.
ⓒSang Hoon Ok
ⓒSang Hoon Ok
로봇 개와 Yaras로 대표되는 두 영역의 충돌은 이 작품의 가장 큰 뼈대를 이룬다. 그중에서도 작품을 이끄는 힘은 Yara라고 하는 집단의 조명에 있다. 인류의 메타포임에도 이들은 하나의 정체성으로 설명되지 않고 분류할 수도 없는 각양각색의 개성을 지닌 존재들이다. 가상의 종족이자 미래 인류일 수도 있는 Yaras는 강렬하고 기괴한 퍼포먼스로 나름의 인간성을 묘사한다. 화려하고 다채로운 문양의 가운을 걸친 채 등장한 여성들은 다양한 해석을 가능하게 하지만, 그것을 벗어던지고 고유의 신체를 드러내자 모든 해석은 혼란에 빠진다. 처음에는 신체 노출과 접촉을 통해 성적 코드를 활용하는 듯하지만, 그 예상은 금세 빗나간다. 온몸에 타투를 새긴 리더 여성, 성별이 불분명한 중재자, 아가미로 호흡하는 개체 등 이들의 정체는 인종이나 민족, 성별로 특정할 수도 없다. 공통적인 특징이 판별되지 않는 이들은 인공지능으로 대표되는 과학기술이 통제할 수 없는 존재들이다.
그렇기에 이들의 모습은 일정 부분 퇴행적이고 이질적으로 비치며 어디에도 속해 있지 않다. 그 자체로 혼돈이다. 언뜻 원시 부족처럼 보이는 순간에는 로봇 개와 로봇 새가 등장해 무리에 섞이며 그 혼돈을 강화한다. 이해할 수 없는 불쾌한 소리와 몸짓을 경합하듯 반복하는 이들의 무질서한 행태는 ‘인간의 범위’를 재고하게 한다. 쩝쩝대며 무언가를 먹거나 게워내고, 트림을 연거푸 하는 미개한 개체의 모습에선 문명인으로서 지녀야 할 최소한의 품위를 찾기 어렵다. 이런 통제되지 않는 혼돈의 현장에서 느껴지는 것은 오로지 날것의 생명력뿐이다. 정훈목은 자신이 내세운 대안 인류이자 현 인류의 이면 같은 Yaras를 통해 무엇으로도 규정되지 않는 불확실성, 어떤 질서로도 통제되지 않는 자유로운 야성이 인간다움의 핵심이라고 설파하는 듯하다.
하나의 기준으로 규정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 집단의 정체성은 참신하다. 대개 인공지능과 관련한 인류의 미래라는 소재는 반기계주의나 자연주의와 접목돼 온기 어린 감성의 드라마로 연결되곤 한다. 그 과정에서 신체성을 강조하거나 아날로그적 정서를 찬양하는 뉘앙스가 담기기도 한다. 그런데 Yara들의 퍼포먼스는 시종일관 그런 전형을 벗어난다. 규범을 초월한 이들의 모습에서 포착되는 것은 무엇으로도 통제할 수 없는 순수한 ‘광기’다. 인간 경계에서 이탈하는 어떤 순간들은 얼마 전 마약 중독 후유증으로 화제가 됐던 필라델피아 거리의 좀비들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스스로를 통제하지 못하는 좀비와 달리, 이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스스로 통제하며 존재감을 발화한다는 측면에서 주체적이다.
다만 Yaras가 제안하는 미래 인류의 방향성은 초기의 아이디어에서 본격적으로 나아가지 못한 채 제자리를 맴돈다. Yaras가 보여주는 불확실성과 통제 불능의 신체들이 지닌 에너지는 매력적이지만, 작품의 전제였던 인공지능과 인류 미래의 관계에서 오는 화학작용은 본격적으로 다뤄지지 않는다. 〈Yaras〉는 전시장에 놓인 로봇 개로 공연을 시작하고, 다시 Yara 종족을 전시 라인 안의 피사체로 설정하는 연출로 끝내면서 객석에 앉은 관객에게 이 문제를 타자화하며 들여다보기를 권한다. 추상적인 거대 담론을 전시회라는 형식으로 제한하며 공연 전체를 대상화하는 수미쌍관의 연출은 영리하고 효과적인 설정이었다. 다만 이러한 작품의 외형이 유효하기 위해서는 로봇 개나 로봇 새, 반구형 세트를 활용한 인공지능과 인류의 두 키워드 간 상호작용이 보완될 필요가 있어 보인다.
ⓒSang Hoon Ok
〈Yaras〉는 정훈목이 전작에서 보여줬던 개성과 특징을 그대로 보여주는 작품이다. 인공지능 시대가 초래할 변화를 주요한 테마로, 그에 대한 인간의 대처라는 다소 거대한 담론을 정훈목 특유의 감각적 연출과 에너지로 풀어가는 방식이다. 이러한 방식은 언뜻 테마가 품고 있는 작품의 아이디어와 완벽하게 부합하지 않는 것처럼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정훈목은 주장을 관철하기보다 감각적인 자극을 통해 다양하고 열린 사유를 유도하는 데 관심이 있어 보인다. 독특한 해석과 상상력을 발동시키는 연출과 함께, 다분히 연극적이면서도 미장센을 활용하는 영상 문법까지 동원하며 아날로그적인 몸의 한계를 극복하는 방식이 다음 무대도 기대하게 한다.
글_ 송준호(춤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