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정(情)이란 무엇인가? 한국인이 가진 정(情)이란 사랑과는 또 다른 정서이다. 뜨겁고 열정적이기 보다 따뜻하고 은근하다. 서양의 어떤 단어로도 표현하기 힘든 정(情)을 아름다운 신체의 움직임으로 그려낸 유니버설발레단의 40주년 공연 <코리아 이모션 정(情)>이 유니버설아트센터에서 2월 16-18일 화려하게 펼쳐졌다. 특히 이번 공연이 뜻 깊었던 이유는 불혹을 맞이한 수석무용수 손유희의 은퇴 무대였기 때문이다. 무용수로서 힘든 상황에서도 화사한 표정과 날렵하고 정확한 테크닉을 구사하며 자신을 불사른 손유희에 대한 유니버설발레단의 감사의 마음을 마지막 영상을 통해 그녀에 대한 정(情)으로 표현될 때는 모두의 마음이 뭉클하기도 했다. 또한 한국 최초의 민간 발레단으로서의 위상을 세계로 알린 유니버설발레단이 창단 40주년을 맞아 한국화, 세계화를 실천한 그들만의 정체성을 명백하게 보여준 동시에 한국이 지닌 감성을 부각시킨 공연이었다는 점에서 그 의의도 컸다.
첫 순서 <동해 랩소디>는 자진모리와 드렁쟁이 장단이 분위기를 고조시키며 <코리아 이모션 정(情)>의 서곡을 맡았다. 자유로운 즉흥연주와 자유로운 움직임은 발레 테크닉과 한국춤의 춤사위가 하모니를 이뤄 극적인 완성도를 높였다. 군무진들의 화려하고 역동적인 움직임은 상체는 한국춤, 하체는 발레 움직임이 이질적이지 않게 녹여내며 붉은 가을산을 배경으로 한국춤이 지닌 신명을 담아냈다. 금수강산에서 펼쳐지는 신명나는 몸짓에 감정이입이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달빛유희>는 여성 4인무(강미선, 서혜원, 홍향기, 한상이)로, 달빛이 비추는 깊은 밤 경기도당굿의 도살풀이장단에 맞춰 무용수 각각의 캐릭터를 살리며 여성미와 서정성이 강력하게 그려졌다. 하늘거리는 긴 의상과 6박을 쪼개 긴박하게 이뤄지는 움직임의 구성이 조화와 대비, 절제와 분출을 드리마틱하게 표현하고자 했던 안무가의 특색을 오롯이 담은 수작이었다. 별빛이 가득한 배경 속 가녀린 무용수들의 몸짓이 몽환적이면서도 과하지 않은 유혹으로 우리를 설레게 하는 작품이었다.
이어진 <찬비가>는 <달빛유희>와 대비되는 남성 4인무(이현준, 이고르 콘타레프, 이동탁, 이승민)였다. 부채를 활용한 안무에 파워풀한 점프와 스피디한 턴으로 남성미를 부각시켰다. 조선 중기의 문신 임제가 쓴 시조 <한우가(寒雨歌)>를 소재로 만든 곡으로 평양 기녀의 심성과 마음의 소리를 차가운 비에 비유했다고 한다. 노련한 이현준과 이동탁이 중심을 잡아주었고 이승민의 깔끔한 움직임이 힘을 더한 경우였다. 여성들의 아름다움에 비해 힘과 강렬하게 발산되는 에너지가 돋보인 <찬비가>는 관객들의 마음에 깊게 각인되었다.
다솜 Ⅰ·Ⅱ는 한국인의 정(情)의 또 다른 면모를 잘 형상화한 작품이다. 사랑의 순우리말인 ‘다솜’은 남녀간의 사랑이 아니라 모녀, 자매간의 정(情)과 형제간의 정(情)을 다뤘다는 점에서 유병헌 안무가는 ‘정(情)’의 범위를 명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동성에서 느껴지는 또 다른 인간관계를 여성 듀엣(엘리자베타 체프라소바, 서승윤)에서는 부드러우면서도 외유내강의 힘으로, 남성 듀엣(패트릭 부르파처, 임선우)에서는 의외로 서정적이면서도 섬세하게 다루면서 특성을 살려냈다. 무용수 개개인의 기량이 돋보인 무대였다.
하이라이트였던 손유희와 이현준의 <미리내길>은 가슴 아린 무대였다. 부부간의 호흡은 역시나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밀도있고 뛰어난 감정표현의 순간은 손유희의 은퇴를 아쉽게 느끼게 만들었다. 죽은 남편에 대한 아내의 그리움을 형상화한 안무로, 슬프고도 먹먹한 감정의 고조를 드러냈다. 마지막 불꽃을 태우듯 그간 손유희가 보여주었던 어떤 <미리내길> 보다 뛰어난 감정표현과 무르익은 테크닉을 선사해 그녀 스스로의 다양한 감정을 잘 살려낸 순간이었다.
<비연(悲戀)>은 제목에서 드러나듯 슬픈 사랑과 그리움의 무대였다. 산맥으로 이어진 배경영상 속에서 4쌍의 커플들은 닿을 듯 닿지 않는 사랑과 정을 풍성하고 힘차게 그려냈다. 지평권의 비연(드라마 <짝패> 메인테마) 음악이 더욱 감정을 깊이 있게 표현하는데 기여했다. <달빛 영>은 반대로 먼저 떠난 아내를 그리워하는 남자의 슬픔을 그려낸 작품으로, 이동탁과 전여진의 애절함이 인상적이었다. 남성적인 이동탁은 가녀리고 단아한 전여진과 어우러져 훌륭한 장면을 연출해냈다.
<강원, 정선아리랑>은 대미를 장식했는데, 아홉 쌍의 남녀무용수들이 지평권의 크로스오버 앨범 ‘다울 프로젝트’ 음악에 다양한 선형을 보이며 그들의 최고조의 모습을 완성해냈다. 한국인에게 친숙한 아리랑 선율에 움직임을 담아 어려운 고비, 위기를 극복하는 한국인의 기상과 의지를 엿볼 수 있는 웅장한 피날레를 선사했다는 점에서 정점을 찍었다. 일사불란한 군무와 남녀 무용수들의 조화가 드라마틱하게 펼쳐지면서 공간을 역동적으로 가로지르고 상승하는 신체의 이미지가 새벽하늘의 환상적이며 힘찬 에너지를 증폭시켰다.
2023년 9개의 작품으로 확장되면서 올해 40주년의 시작을 알린 동시에 한국의 아름다움이 세계로 뻗어나가는 데 기여한 유니버설발레단의 <코리아 이모션 정(情)>은 앞서 언급했듯이 한국 춤사위와 발레 테크닉이 만나 새로운 컨템포러리 발레를 지향한 좋은 일례였다. 앙상블 시나위의 음악과 유병헌의 안무가 막힘없이 유려하게 흐르며 여기에 감각적이고 세련된 한복의 이미지가 더해져 완성도를 더했다는 점에서 <심청>, <발레 춘향>에 이어 유니버설발레단의 대표작인 동시에 K-Ballet의 대표작이 되길 기대해본다. 더불어 강미선, 한상이 등 어머니라는 위치에서 현역 활동을 펼치고 있는 주역들이 그 강인함을 바탕으로 오래 함께 하길 바라는 마음이다.
글_ 장지원(춤 평론가)
사진제공_ 유니버설발레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