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 가장 깊은 곳에 선 무용수에게 조명이 모아진다. 동트기 전 같은 희끄무레한 어둠 속에 한 남성의 윤곽만이 희미하게 드러난다. 뒤에서 쏘는 조명 빛을 받아 확대되기 시작한 몸 그림자가 객석 위 공간에 검은 구름처럼 투영된다. 검은 망사 의상에 몸매가 드러난 여인이 무대 가운데로 걸어 나온다. 나지막이 울려오는 규칙적인 북소리가 원초의 신비스러움을 더해주는 곳에 검은 옷의 남녀(이정윤, 김미애)가 어우러지며 에너지가 분출되기 시작한다. 태초의 태극으로부터 음과 양이 생겨나고 음양의 조화가 천지간 모든 변화의 모태라는 주역사상을 설명해주는 것 같다. 하나의 양과 하나의 음이 만나 도를 이루고 이를 계승하는 것이 선이라던 도덕경 구절(一陰一陽爲之道 繼之者善; 일음일양위지도 계지자선)도 생각난다. 테로 사리넨이게 있어 도(道)는 자연이고 선(善)은 춤이다. 50세의 젊은 서양무용가가 어떻게 동양철학의 진수를 깨닫고 이렇게 춤과 연결할 수 있었을까. 국립무용단의 2014년 신작 <회오리>(4.16~19, 국립극장 해오름)공연을 보고나오면서 가졌던 의문이다.
<회오리>는 안호상 국립극장장과 윤성주 국립무용단장이 취임한 후 객원안무가를 초청하여 무대를 맡긴 세 번째 작품이다. <단>(안성수)과 <묵향>(정구호)이 먼저 시도했던 작품들이다. <회오리>가 전작들과 구별되는 것은 안성수와 정구호가 공통적으로 자신의 색채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국립무용단 무용수들을 춤 도구로 활용하는데 그친데 비해서 사리넨은 동양철학의 이해란 바탕 위에서 가장 한국적인 춤을 추는 국립무용단 무용수들과의 화학적 결합을 이루어냈다는 것이다. 양자 간의 이러한 공감은 다른 듀엣(최진욱 박혜진)은 물론이고 송설의 나비날개 춤과 남녀 12명씩이 출연한 군무에서도 혼연일체가 된 모습으로 나타난다.
80분 공연은 세 개의 주제를 차례로 다룬다. 밀물과 썰물의 움직임을 형상화한 조류(tides)는 영겁의 세월을 거치면서 쉬지 않고 되풀이되는 자연의 법칙을 빛과 어둠과 사람의 등장을 통해 보여준다. 검은 듀엣에 이어 흰색 듀엣이 등장하여 4인무를 이루다가 점차로 흰색을 주조로 변화해가는 모습에서 두 번 째 주제인 전승(transmission)을 읽을 수 있다. 앞서 추는 검은 듀엣이 동적이고 외면적이라면 뒤에 나타나는 희색 듀엣은 정적이고 내면적이다. 세 번째 주제는 두 날개를 힘차게 퍼덕이면서 무대를 누비는 송설의 몸짓을 통해 전승된 에너지가 새로운 도약과 완성을 향한 회오리바람(vortex)을 일으킨다는 희망찬 메시지를 전해준다. 나비효과를 의식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윤성주가 기획한 외부안무가초청프로젝트는 테로 사리넨의 역동성과 국립무용단의 격조가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융합하면서 최고의 궁합을 성취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작품의 성공에 음악감독 장영규가 이끄는 비빙의 역할을 빼놓을 수 없다. 비빙은 가야금, 피리, 해금, 북 등 국악기 외에 소리꾼까지를 포함한 전통음악그룹이다. 불교음악과 즉흥을 뒤섞으며 고요한 바람소리와 너울지는 파돗소리, 정감어린 산사의 풍경을 시종일관 부드러운 톤으로 그려내고 있다. 소리꾼(이승희)의 찬불가에 맞춰 백댄서가 된 듯 춤추는 국립무용단원들도 이채롭다. 사리넨과 오랫동안 호흡을 맞춰온 조명감독 미키 쿤투와 의상디자이너 에리카 트루넨의 작업도 인상적이다. 검정과 흰색, 그 중간색을 주조로 한 조명과 의상은 일본 전통무용인 부토로부터 영향을 받은 듯하다. 단조로운 색깔만을 고집하기 보다는 넘치는 에너지의 표현을 위해 전승과 회오리 등 후반부에선 태극의 붉은색과 푸른색을 옷 입혀도 좋았을 것이다. 피날레를 장식한 군무와 송설의 회오리 춤 또한 일품이었다. 한 때 사리넨이 심취했던 동양무예의 품새들이 힘과 기와 예가 하나로 결집된 국립무용단을 만나 군무의 미학을 새롭게 창조한 감동적인 장면으로서 기억될 수 있을 것이다.
글_ 이근수(무용평론가, 경희대 명예교수)
사진_ 국립극장 제공
*이 글은 몸 2014.5월호에 실린 무용리뷰를 부분 수정했음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