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국립부산국악원 무용단 정기공연 〈학(鶴)〉의 무대는 깔끔했다(3.29.-30. 국립부산국악원 연악당). 정감 있고, 따스했다. 무대가 깔끔하다고 하면, 국립무용단의 작품을 떠올릴 거다. 깔끔하고 세련된 건 분명하다. 그러나 그런 무대를 보면서 한국적이란 생각은 들지 않는다. 젠 스타일(Zen Style)의 간결한 세련된 느낌의 연장선이다. 서구인들이 생각하는 오리엔탈리즘을 만족하는 무대이긴 하나, 거기서 한국적인 색감이나 미학은 느껴지지 않는다.
이번 국립부산국악원 무용단 정기 공연의 무대는 달랐다. 국립무용단의 무대처럼 강렬하진 않아도, 그 안에서 한국적인 미학과는 연결되는 지점이 존재했다. 서울 무대에서 오래도록 ‘연출이 보이는 춤’에 지쳤는데, 부산 무대에서 ‘춤이 보이는 연출’을 만난다는 게 참 기뻤다.
이재환, 춤을 살리는 연출
이재환이 연출한 ‘학’의 무대는 백색(白色)이라기보단 미색(米色) 느낌이 났다. 백색은 이미지를 강렬하게 드러내지만, 눈이 쉽게 피로해서 춤에 집중하기 어렵다. 미색은 백색처럼 처음에 강렬함은 없어도, 춤에 집중할 수 있다. 백색이 밀가루라면, 미색은 쌀이다. 한국인의 주식이 밀이 아니라 쌀이듯이, 완전한 화이트 색상은 한국적인 색감이 아니다. 백색은 차갑고, 미색은 따뜻하다. 도입부에서부터, ‘학’은 우리의 마음을 따뜻하게 만들 작품으로 기대감을 높였다.
이재환은 프로그램북에 이렇게 썼다. “이번 국립부산국악원 무용단 정기공연을 준비하면서 공연 당일까지 잊지 않으려는 원칙을 세웠다”고 하면서, 세 가지를 들고 있다. 그 세 가지는 어떤 것일까? “첫째, 무용수의 춤이 드러나는 공연을 하겠다”는 것.
이 글을 읽으면서, 성기숙 무용평론가의 글이 생각났다. “작품 〈향연〉이 성공했다면 그 절반은 탁월한 미의식과 초절정 공간미학 그리고 자본주의적 시장경제논리에 최적화된 의상디자이너 정구호에게 연출 및 무대미술 혹은 포괄적 의미의 안무에 해당하는 창작의 주도권을 내준 결과일 것이다.”
앞의 인용문에서 가볍게 지나가선 안 될 게 ‘창작의 주도권’이다. 요즘 무용공연에선, 무용이 중심이 아니란 생각마저 들게 한다. 이런 현실에서 춤을 잘 보여주는 것 자체에 최대한 노력을 기울인 작품을 본다는 게 얼마나 기쁜 일인가? ‘학’은 춤이 잘 보이는 작품이었다.
연출가 이재환은 ‘창작의 주도권’을 가져오려고도 하지 않았고, 복미경은 물론 ‘창작의 주도권’을 주려고도 하지 않았다. 복미경은 예술감독과 안무가의 역할에 매우 충실했다. 연출은 예술감독의 안무 의도를 최대한 살리면서 ‘춤이 드러나는 공연’을 만들었다. 이건 너무도 당연한 사실인데, 지금의 무용공연이 연출에 의해서 좌지우지되는 상황이 개탄(慨嘆)스러워서 여기에 이렇게 강조할 수밖에 없다.
〈학〉이란 작품은 ‘춤’에 기반을 둔 작품이고, 그런 춤을 ‘연출’이 잘 살린 작품이다. 연출이 이러하니, 다른 제작진도 마찬가지였다. 이건 너무도 당연한 얘기겠지만, 요즘 춤이 들러리같이 보이는 무용공연이 많기에, 여기서 이 말을 꼭 하지 않을 수 없다. 무대디자인(황경호), 영상디자인(황정남)이 좋았지만, 모든 게 춤을 살리는 역할이다. 특별히 무대 쪽의 어느 하나가 튀어서 불편하진 않았다.
신현식, 너무도 촘촘한 음악
김덕수 명인(장구)이 특별출연하고 신현식이 음악감독을 맡아서 앙상블 시나위를 중심으로 만들어낸 음악은 좋았다. 음악 자체로는 아주 좋았다. 그러나 훌륭한 음악이라고 치더라도, 그게 꼭 무용음악으로서 좋은 거라고 말할 수 없다.
좋은 무용은 무엇일까? 난 이렇게 생각한다. 첫째, 좋은 무용음악은 ‘춤을 살리는 게’ 제일 목적이다. 둘째, 관객에게 ‘상상력을 제공하는 게’ 좋은 무용음악이다. 이번 음악은 ‘음악 자체로서’ 너무 촘촘했다. 따라서 춤을 여유롭게 즐길 수 있는 여백을 만들어주지 않았던 게 아쉽다.
무용음악은 춤을 출 수 있는 여지(餘地)가 있어야 한다. 음악 자체에 여유 공간이 있어야 한다. 관객의 마음이 들어갈 수 있는 빈틈이 있어야 한다. 쉴 수 있는 청각적 공간을 배당받아야 하고, 그것이 춤을 느낄 수 있는 시각적 공간으로 전이(轉移)되어야 하는데, 이번 공연은 그렇지 못했다.
신현식은 너무 채우려 했다. 음악 자체로 너무 완벽했다. 무용음악이라기보단, 인성(人聲)과 악기가 매우 빼곡히 채워진 연주곡이었다. 음악 자체로서는 완벽하지만, 춤음악으로서는 부담스러운 게 사실이다. 여러 부분에서 음악이 좀 더 성글고 여유로웠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음악이 강렬하니, 어느 장면에선 ’춤이 음악에 묻혀버리는‘ 안타까움이 존재했다.
이 작품을 다시 보고 싶은 마음이 큰데, 그럴 땐 ‘소리의 덜어냄’이 중요하겠다. ‘음악에 대한 집중’이 아니라 ‘춤을 향한 몰입’을 유도하는 음악이 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소리를 줄이고, 악기를 과감하게 버려야 한다. 장면마다 악기 또는 인성을 선택적으로 사용해야 더 효과적이고, 관객들도 더 편하게 들으면서 춤에 집중할 수 있다.
복미경, 〈학〉을 풀어낼 적임자
그간 국립부산국악원에서 만든 작품 중에 수작도 있다. 그렇다면 〈학〉은 어떤 성과를 냈는가? 복미경 무용단 예술감독이 취임 후 첫 작품은 왜 여러 전문가에게 호평 받았는가? 그 성과는 아주 분명하다. ‘한 작품 안에서 궁중정재와 영남춤의 각각의 특성이 아름답게 공존’했기에 그렇다. 이건 어쩌면 예견된 성공인지 모른다.
대한민국에 훌륭한 안무가가 많지만, 그간 궁중정재와 민속춤을 두루 넘나들면서 커다란 성과를 발휘한 안무작품은 거의 없다. 복미경 세대에서 복미경만큼 궁중정재에 통달한 인물은 드물 것이다. 복미경은 국가무형유산 ‘학연화대무’의 이수자다.
복미경은 일제강점기 이왕직아악부에서 국립국악원으로 이어지는 궁중정재와 관련된 인물, 곧 김보남 김천흥을 시작으로 해서 이흥구에게 이어지는 춤의 맥락을 이어받았기에 그렇다. 그간 궁중무용의 이론적 지식과 함께 실제 무대적 재현(再現)에 앞서왔던 그간의 노력과 성과가 이번 작품 ‘학’에서도 밑그림처럼 배어있었다.
복미경은 여러 민속춤을 두루 학습했지만, 기본적으로 한영숙의 춤이 바탕에 깔려 있다. 한영숙의 태평무로 널리 알려졌고, 한영숙의 살풀이 또한 수준급인데, 이번 작품에는 이런 것들이 또한 큰 역할을 했다.
말하자면 복미경은 자신의 특장(特長)인 궁중정재와 한영숙류를 국립부산국악원 무용단에 이입(移入)했고, 국립부산국악원 무용단은 그간 지나치리만큼 열심히 정진했던 영남춤을 이번 작품 속에 용해(溶解)시켰다. 이번 작품은 ‘학’은 이런 예술감독과 단원 간의 ‘이입과 용해의 상생(相生)’ 속에서 탄생한 작품이기에, ‘학’ 창작공연의 초연임에도 어설프거나 무리한 생경함이 없었다. 이러하기에 평단과 관객에게 두루 호평 받았다고 생각된다.
특별히 돋보인 박숙영
국립부산국악원 무용단의 개인의 역량은 인정한다. 하지만 대작을 만들기에는 인원의 부족함이 드러냈다. 〈학〉은 서막 및 종막과 함께 모두 6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니까 모두 춤이 8개의 섹션(section)으로 이뤄져 있다. 작품(스토리)을 제작하는 당사자들은 모든 게 다 필요하다고 생각하겠지만, 나와 같이 객석에서 보면서 평론의 입장에선 보면 8개의 섹션은 너무 많고 때로는 하나의 장을 몰입해서 감상하는데 다소 방해되는 면도 없지 않았나 싶다.
이런 아쉬움과 한계 속에서, 무대에서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는 무용수는 분명 존재했다. 그 첫 번째로 박숙영(조안무, 지도)의 춤을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춤이 편하다는 게 박숙영의 최고의 장점이자 미덕이었다. 춤은 일단 편해야 한다. 그걸 전제로 해서, 느낌을 살려내야 한다. 하지만 적잖은 춤꾼이 편하게 춤을 추지 않는 게, 혹은 춤을 추지 못하는 게 현실이다. 이건 스스로 무대 만족도는 높일지 몰라도, 관객의 만족도를 높이는 춤이 아니라는 걸 명심해야 한다. 관객에게 한국춤의 편안함을 전해주는 건, 무용가로서는 그 무엇보다도 우선해야 하는 필요조건이다.
춤을 기술의 영역으로 대하지 않고, 예술의 영역으로 대한다고나 할까? 제5장 학명(鶴鳴)은 내게 가장 돋보이는 장면이었다. 유여진, 신윤정, 김주희, 안민진, 박혜미, 박혜진을 이끌면서 살풀이춤 정서를 밑바탕에서 깔면서 추는 박숙영의 춤을 보면서, 이제 박숙영은 그 만의 류(流)를 만들 수 있는 수준에 도달해 있음을 확인한다.
기대되는 이도영와 김동후 그리고 신명관
전통적인 춤사위를 바탕으로 해서 짠 부분에선 모든 단원이 고르게 역량을 발휘했다. 그런데 학의 이미지를 춤적인 동작으로 연결하는 부분에서는 편차가 보였다. 돋보였던 건 이도영과 김동후가 그랬다. 두 명의 젊은 춤꾼은 이번 작품에 무용수(단원)으로 참가하는 것이지만, 자신만의 작품을 창작할 안무적 역량이 갖춰졌음을 짐작하게 한다.
남성단원은 제2장 현학(玄鶴)에서 소나무, 제3장 폐학(閉學)에서 무관, 제4장 피학(避鶴)에서 방상시 역할을 맡았다. 연이어서 의상도 바뀌다 보니, 뭔가 몰입되지 못하는 어수선함이 느껴졌다. 소나무 역할까지는 그래도 괜찮았다. 이후에는 관객의 시선을 받기엔 역부족이었다. 특히 폐학 부분에서는 여성단원을 문관, 남성단원을 무관으로 설정했는데, 도식적인 이분법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는 아쉬움을 드러냈다.
의상이 교체되고 등퇴장의 어려움이 분명히 있었을 것 같은 남성단원의 노고를 생각하게 되는데, 신명관은 그 중 특출한 한 명으로 꼽고 싶다. 다소 가라앉기 쉬운 무대를 역동적인 느낌으로 만들어주는데 그의 에너지 넘치는 움직임이 한몫을 단단히 했다.
여기서 의상디자인(민천홍)에 대해서 얘기한다면 전반적으로 좋았다. 그러나 현학 부분에서 ‘소나무’ 역할을 한 남성들의 의상은 보는 것 자체는 좋았으나, 영남춤 특유의 민간 학춤의 역동성이나 발의 움직임을 느끼기에는 너무나 ‘치렁치렁한’ 느낌을 주지 않았나 싶다. 비주얼적인 성공이 곧 무드먼트적인 성공과 연결이 되지 않는다는 점을 무용의상 디자이너는 염두에 두어야 할 듯싶다.
합설(合設)은 스토리도, 무용극도 아니다
2024 국립부산국악원 무용단 정기공연 〈학(鶴)〉은 부제가 ‘상생과 평화의 영남춤 합설’이다. 합설(合設)은 궁중정재에서 2-3개의 춤을 하나로 함께 연결해서 공연하는 형태를 말한다. 이번 작품은 ‘합설’이란 제목으로 이질적인 걸 연결하려 했다. ‘궁중정재와 민속무용’이란 춤은 물론이요, ‘전통과 창작’을 하나의 작품에 녹여냈다.
무엇보다도 시(詩)로서 풀어낸 대본을 맡은 박희준은 스토리 연결에도 고심한 듯 보인다. 특히 “사람이 학이 되다. 학이 사람이 되다”란 시어(詩語)에서 알 수 있듯이 ‘학과 사람’이 합설까지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 이런 시각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듯이, 장자의 호접몽(胡蝶夢)에서 “내가 나비인가, 나비가 나인가”와의 연결을 유추할 수 있다. 이런 접근은 작가의 고유한 영역이겠으나, 폐학과 피학 부분은 지나치게 스토리를 작위적(作爲的)으로 만들고자 한 느낌이 강하다.
〈학〉을 다시 한 번 쭉 살펴본다면, 폐학과 피학이 없어도 작품으로서 하나의 손색이 전혀 없다. 단지 춤을 만들어내는 사람들이 스토리의 연결에 집착하고, 무용극이란 강박을 전제로 해서 창작춤에 대한 고정적 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하기에 그렇다. 한국의 전통춤의 큰 줄기인 ‘궁중춤과 민속춤’을 만나게 하고, 그것이 ‘영남춤의 텃밭’을 기반으로 했다는 점에서, 이번 작품은 아주 이상적인 ‘합설’이라고 할 수 있다.
중언부언(重言復言)하지만, 서막은 안무적 측면, 무대적 측면, 연출적 측면에서 참 좋았다. 마치 뭔가 정화되는 듯한 느낌의 서막을 시작으로, 제 1장 입학(入鶴)과 제 2장 현학(玄鶴)까지는 나무랄 데가 없었다. ‘국립’이란 타이틀을 가진 단체의 작품에 딱 걸맞은 품격 넘치는 작품이었다. 그러다가 그러나 제 3장 폐학과 제 4장의 피학에선 무리하게 스토리를 만들어낸 것이 그대로 드러났다.
대본의 시어(詩語)가 무대의 춤언어(體語)로 바뀐다는 게 쉽지 않기도 하지만, “내게 깃든 학은 청산으로 돌아가고 나는 오도 가도 못하여 세상에 갇혔네”는 대본 자체가 갖는 대구적(對句的) 함정인지 모른다. ‘사람과 학’의 ‘합설’을 지향하는 측면에 있어서, 그 전제를 만들기 위해서 안간힘을 쓴 듯한 느낌이며 ‘지나치게 피상적이고 표피적인 설정’이 아닌가 싶다.
한국춤이여! 관념적 집착, 서사적 강박에서 벗어나라
이는 과거 ‘합설의 전통’과도 거리감이 있는 것이며, 전체적으로 1980년대와 1990년대의 한국창작춤에서 ‘의식이 있는 춤꾼’으로서 작품 속에 ‘사회적 메시지를 담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처럼 다가왔다. 그땐 그게 필요했을지라도, 2020년대에는 작품 자체의 내재적 흐름을 방해하는 ‘관념적 집착’ 또는 ‘서사적 강박’, 곧 스토리에 대한 강박은 이제 한국무용계가 극복해야 할 영역의 하나가 아닌가 싶다. ‘한국의 전통춤 사위가 갖는 충분한 매력인 요소들을, 어떻게 동시대적인 움직임으로 승화시켜야 할 것인가’에 대한 연구가 오히려 더 중요하다.
글_ 윤중강(공연평론가)
사진제공_ 국립부산국악원
전세계의 독자들을 위해 '구글 번역'의 영문 번역본을 아래에 함께 게재합니다. 부분적 오류가 있을 수 있음을 양해 바랍니다.
Please note that the English translation of "Google Translate" is provided below for worldwide readers. Please understand that there may be some errors.
The right person to interpret ‘Crane’ co-exists with a production that revives ‘dance’: Yeongnam dance joint essay of coexistence and peace 〈Hak(鶴)〉
The stage of the 2024 Busan National Gugak Center Dance Troupe’s regular performance 〈Hak〉 was clean(3.29.-30. Yeonakdang, National Busan Gugak Center). It was affectionate and warm. When you think of a neat stage, you'll think of the National Dance Company's work. It is clear that it is clean and sophisticated. However, while watching such a performance, I do not feel that it is Korean. It is an extension of the simple and sophisticated feel of Zen Style. Although it is a stage that satisfies the Orientalism that Westerners think of, there is no sense of Korean color or aesthetics there.
The stage of this regular performance by the National Busan Gugak Center Dance Company was different. Although it was not as intense as the National Dance Company's stage, there was a connection with Korean aesthetics within it. I was tired of ‘dancing with visible direction’ on the Seoul stage for a long time, but I was very happy to meet ‘direction with visible dancing’ on the Busan stage.
Lee Jae-hwan, directing that brings dance to life
The stage of 〈Hak〉 directed by Lee Jae-hwan felt off-white rather than white. White brings out the image powerfully, but it makes it difficult to concentrate on the dance because it easily tires the eyes. Although off-white is not as intense at first as white, it allows you to concentrate on dancing. If white is flour, off-white is rice. Just as the staple food of Koreans is rice, not wheat, the color completely white is not a Korean color. White is cool, off-white is warm. From the beginning, 〈Hak〉 raised expectations as a work that would warm our hearts.
Jaehwan Lee wrote this in his program book: “While preparing for the regular performance of the National Busan Gugak Center Dance Company, I set a principle that I would not forget until the day of the performance,” he said, citing three things. What are those three things? “First, we will perform a performance that showcases the dancers’ dance skills.”
As I read this article, I was reminded of an article by dance critic Seong Ki-sook. “If the work 〈Feast〉 was successful, half of it would be the result of giving the creative leadership of directing and stage art, or choreography in a comprehensive sense, to costume designer Jeong Gu-ho, who has excellent aesthetic sense, transcendent spatial aesthetics, and is optimized for the capitalist market economic logic.”
In the previous quote, something that should not be overlooked lightly is ‘creative initiative.’ In dance performances these days, it even makes you think that dance is not the focus. In this reality, how happy is it to see a work that puts the utmost effort into showing dance well? 〈Hak〉 was a work that showed good dancing.
Director Lee Jae-hwan did not try to take the ‘initiative of creation’, nor did he try to give Bok Mi-kyung the ‘initiative of creation’. Bok Mi-kyung was very faithful to her role as artistic director and choreographer. The director created a ‘performance that reveals dance’ while maximizing the artistic director’s choreographic intentions. This is an obvious fact, but I have no choice but to emphasize it here because I find it deplorable that the current dance performance is dominated by direction.
The work 〈Hak〉 is based on ‘dance’, and the ‘direction’ brings this dance to life well. As the directing was like this, so were the other production crew members. This may be an obvious statement, but these days, there are many dance performances where dancing seems like a bridesmaid, so I cannot help but say it here. The stage design (Hwang Kyung-ho) and video design (Hwang Jeong-nam) were good, but everything plays a role in making the dance come alive. It wasn't particularly uncomfortable because anything on the stage side stuck out.
Hyunsik Shin, very dense music
Master Kim Deok-soo (Janggu) made a special appearance and Shin Hyun-sik served as music director, and the music created around ensemble Sinawi was good. The music itself was very good. However, even if it is considered great music, it cannot necessarily be said to be good as dance music.
What is good dance? I think like this. First, the primary purpose of good dance music is to ‘keep the dance alive.’ Second, good dance music ‘provides imagination’ to the audience. This music was too dense ‘as the music itself.’ Therefore, it is unfortunate that no space was created to enjoy dancing leisurely.
Dance music must have room for dancing. There must be room for the music itself. There must be a gap into which the audience's mind can enter. You need to be allocated an auditory space where you can relax, and that needs to be transferred to a visual space where you can feel the dance, but that wasn't the case with this performance.
Shin Hyun-sik tried to fill it too much. The music itself was so perfect. Rather than being dance music, it was a performance piece filled with human voice and instruments. Although the music itself is perfect, it is true that it is burdensome as dance music. In many areas, I wish the music was a little more laid back and relaxed. The music was strong, so in one scene, there was a feeling of regret that ‘the dance was being drowned out by the music.’
I have a great desire to see this work again, but in that case, ‘reducing the sound’ will be important. It should be music that induces ‘immersion into dance’ rather than ‘concentration on music’. To do this, we need to reduce the sound and boldly abandon the instrument. It is more effective to use instruments or personalities selectively for each scene, and the audience can listen more comfortably and focus on the dance.
Bok Mi-kyung, the right person to solve ‘Hak’
Among the works created so far at the Busan National Gugak Center, there are some masterpieces. So what kind of results did
Although there are many excellent choreographers in Korea, there are very few choreographic works that have achieved great results while crossing over both royal court dance and folk dance. In Bok Mi-gyeong's generation, there are few people who have mastered court affairs as much as Bok Mi-gyeong. Bok Mi-gyeong is a graduate of the national intangible heritage ‘Hakyeonhwadaemu’.
This is because Bok Mi-gyeong inherited the context of dance, starting with figures related to royal court affairs from the Lee Wangjik Aakbu to the National Gugak Center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starting with Kim Bonam and Kim Cheonheung and continuing to Lee Heunggu. The theoretical knowledge of court dance, as well as the efforts and achievements made prior to actual stage representation, were reflected like a sketch in this work, 〈Hak〉.
Bok Mi-kyung has learned a variety of folk dances, but Han Young-sook's dance is basically the foundation. Han Young-sook is widely known for her Taepyeongmu, and her salpuri is also of a high standard, and these also played a big role in this work.
In other words, Bok Mi-kyung transferred her special leaders, Gungjungjeongjae and Han Yeongsuk, to the Busan National Gugak Center dance troupe, and the Busan National Gugak Center dance troupe dissolved the Yeongnam dance, which they had been working too hard on, into this work. This work, 〈Hak〉, was born from the ‘coexistence of empathy and dissolution’ between the artistic director and the members, so even though it was the premiere of a 〈Hak〉 original performance, it did not feel awkward or unreasonable. For this reason, I think it was well received by both critics and audiences.
Park Sook-young stands out especially
The individual capabilities of the National Busan Gugak Center dance troupe are recognized. However, it was revealed that she lacked the resources to create her masterpiece. 〈Hak〉 consists of a total of six chapters, along with a prelude and a final act. So, the dance consists of 8 sections. Those involved in creating the work (story) may think that everything is necessary, but from the perspective of a critic watching from the audience like me, I think 8 sections are too many and sometimes it may be a bit of a hindrance to immersing in and appreciating a single chapter.
Despite these regrets and limitations, there were definitely dancers who captured the audience's attention on stage. First of all, I don't think I can forget Park Sook-young's(choreography, guidance) dance. Park Sook-young’s greatest strength and virtue was that she was comfortable dancing. First of all, dancing has to be comfortable. With that as a premise, you have to bring out the feeling. However, the reality is that quite a few dancers do not dance comfortably or are unable to dance. You must keep in mind that although this may increase your own satisfaction on stage, it is not a dance that will increase the satisfaction of the audience. Delivering the comfort of Korean dance to the audience is a necessary condition that a dancer must prioritize above all else.
Should we say that dance is not treated as a realm of technology, but as a realm of art? Chapter 5: The scientific name Hakmyeong(鶴鳴) was the scene that stood out the most to me. Watching Park Sook-young dance while leading Yoo Yeo-jin, Shin Yun-jeong, Kim Joo-hee, Ahn Min-jin, Park Hye-mi, and Park Hye-jin while laying down the emotion of Salpuri dance as the foundation, we can see that Park Sook-young has now reached a level where she can create her own style.
Do-young Lee, Dong-hoo Kim, and Myeong-gwan Shin are highly anticipated
All members demonstrated their abilities evenly in the part that was based on traditional dance moves. However, deviations were seen in the part where the image of the crane was connected to dance movements. The ones that stood out were Lee Do-young and Kim Dong-hoo. Although the two young dancers are participating in this work as dancers(members), it can be assumed that they have the choreographic ability to create their own work.
The male member played the role of a pine tree in Chapter 2 Hyeonhak(玄鶴), a military officer in Chapter 3 Pyeonghak(閉學), and Bangsangsi in Chapter 4 Pihak(避鶴). As the costumes changed one after another, I felt a sense of clutter that prevented me from immersing myself in something. The role of the pine tree was still okay. After that, it wasn't enough to get the audience's attention. In particular, in the section on abolition studies, female members were designated as civil servants and male members as military officers, but it was disappointing to not be able to significantly break away from the schematic dichotomy.
I think about the hard work of the male members, who must have had difficulties getting in and out after changing costumes, and I would like to single out Shin Myeong-gwan as one of them. His energetic movements played a big part in making the stage, which was prone to sinking, feel dynamic.
If we talk about the costume design(Min Cheon-hong) here, it was overall good. However, the costumes of the men who played the role of ‘pine tree’ in the Hyeonhak part were nice to look at, but I think they gave a too ‘shabby’ feel to feel the dynamism or foot movements of the folk crane dance that is unique to Yeongnam dance. I think dance costume designers should keep in mind that visual success is not directly related to mood success.
Hapseol(合設) is neither a story nor a dance drama
The subtitle of the 2024 Busan National Gugak Center dance troupe’s regular performance, 〈Hak〉 is ‘Yeongnam dance joint performance of coexistence and peace.’ joint statement refers to a form of performing two or three dances linked together in a royal court performance. This work attempted to connect disparate things with the title ‘Hapseol’. It combines not only the dance of ‘court jeongjae and folk dance’ but also ‘tradition and creation’ into one work.
Above all, Park Hee-jun, who was in charge of the script, which was told as a poem, seems to have put a lot of effort into connecting the story. In particular, “People become cranes.” As can be seen from the poetic phrase, “A crane becomes a person,” ‘a crane and a person’ had even Hapseol in mind. As can be fully guessed about this perspective, the connection with “Am I a butterfly, or is the butterfly me?” can be inferred from Zhuangzi’s Phalaenopsis Dream. This approach may be the author's unique domain, but the parts about abolition and masochism have a strong feeling of trying to make the story too contrived.
If we look at 〈Hak〉 one more time, it is no less worthy of being a work of art even without the philandering and masochism. This is simply because the people who create dance are obsessed with the connection of the story, and cannot escape the fixed idea of creative dance based on the obsession with dance drama. This work can be said to be a very ideal ‘combination’ in that it brings together ‘court dance and folk dance’, which are the main stems of Korean traditional dance, and is based on the ‘garden of Yeongnam dance’.
I may repeat myself, but the prologue was really good in terms of choreography, staging, and directing. Starting with a prelude that felt like something was being purified, there was nothing to criticize until Chapter 1, Entrance, and Chapter 2, Hyeonhak. It was a work full of dignity, perfect for the work of an organization with the title ‘national’. However, in Chapter 3, Pneumology, and Chapter 4, Pneumology, it was revealed that the story had been created unreasonably.
It is not easy to change the poetic language of the script into the dance language of the stage, but the paraphrase of the script itself is, “The crane that dwells in me has returned to the clearing, and I am stranded and trapped in the world.” It may be a trap. In terms of aiming for the ‘unification’ of ‘people and science’, it feels like a lot of effort was made to create the premise, and I think it is an ‘overly superficial and superficial setting.’
Korean dance! Free yourself from ideological obsession and narrative obsession
This is a distance from the ‘tradition of joint dance’ in the past, and as a whole, it came across as an ‘obsession to include a social message’ in the work as a ‘conscious dancer’ in Korean creative dance in the 1980s and 1990s. Although it may have been necessary back then, in the 2020s, the ‘ideological obsession’ or ‘narrative obsession’ that disrupts the inherent flow of the work itself, that is, the obsession with story, seems to be one of the areas that the Korean dance world must overcome. Rather, research on ‘how to sublimate the attractive elements of Korean traditional dance into contemporary movements’ is rather more important.
Written by Yoon Jung Kang (Critic of Performing Arts)
Photo provided by Busan National Gugak Cent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