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꺼지지 않는 창작의 불씨: 1950년대 이후 신무용 2세대

신무용 2세대 6인의 춤, 지금 잘 이어지고 있는 걸까? 

인성의 김백봉, 본성의 최희선, 지성의 김진걸, 지혜의 송범, 낭만의 최현, 인상의 황무봉 



〈2024 세실풍류〉는 8번 공연했다. 공연마다 특징이 분명했다. 여기선 ‘1950년대 이후: 신무용 2세대’를 다루려 한다(4.9. 공연).


신무용 1세대 배구자(1905-2003), 최승희(1911-1969), 조택원(1907-~1976) 3인에 이어서, 신무용 2세대의 김진걸(1926-2008), 송범(1926-2007), 김백봉(1927-2023), 최현(1929-2002), 최희선(1929-2010), 황무봉(1930-1995) 6인을 만났다. 그런데 신무용 1세대와 신무용 2세대의 사이에 김해랑(1915-1969)이 있다. 김해랑은 신무용의 1세대와 나이 차이가 크게 나진 않다. 그러나 당시 사회적 영향력과 활동 시기를 고려할 때, 김해랑을 신무용 1.5세대라고 규정하고, 그가 신무용 2세대에게 연결고리가 되었음은 확실하게 짚어줘야 한다. 


김해랑, 신무용 1.5세대


1953년 11월 27일, 한국무용예술인협회가 발족했다. 김해랑을 이사장으로 해서 김민자, 김백봉, 송범, 진수방 4인이 이사가 됐다. 협회 사무실을 낙원동에 있는 김백봉무용연구소로 하고, 마산에 거주한 김해랑이 이사장을 맡았다. 대한민국에서 지역에 거주하는 인물이 예술협회의 총책임을 맡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당시 김해랑의 위치 및 영향력이 컸음을 증명한다. 


신무용 1.5세대인 김해랑은 1세대와 같이 일본에 가서 이시이 바쿠(石井漠) 계열의 무용을 사사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1세대의 3인과 확실하게 다른 점은 무엇인가? 김해랑은 일찍부터 조선의 전통춤을 경험했다는 사실이다. 동래권번에서 조선춤을 수학한 경험은 매우 중요하다. 그만큼 전통춤 혹은 지역춤에 대한 토양이 굳건하단 얘기가 된다. 신무용 1세대의 3인이 이시이 바쿠의 무용이나 덴카츠 등 일본의 영향력을 받아서 무용계에 투신을 한 것관 다르게, 김해랑은 일찍이 민족적 또는 조선적 춤정서가 내적(內的)으로 확고했다는 걸 짚어야 한다. 


1959년 4월 10일, 한국무용예술인협회의 소속 회원은 당시 문총(文總, 지금의 예총)에 모여서 한국무용예술인협회를 발전적으로 해체하고 한국무용협회로 다시 결집하게 된다. 한국무용협회가 점차 자리가 잡히면서, 무용상을 제정하게 된다. 공로상, 작품상, 신인상의 3개 부문으로 시상을 하게 되는데, 제1회 무용상(공로상)은 조택원(1964년), 제2회는 김민자(1965년), 제3회는 김해랑(1966년)이 받았다. 그 이후 1970년대 초반까지 무용상(공로상)을 받은 인물은 없다. 이러한 사실을 통해서도, 한국전쟁 후 1960년대에 걸쳐서 무용계가 결집하는데 김해랑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확인하게 된다.


스승 김해랑과 제자 최현


신무용 2세대에 해당하는 최현은 널리 알고 있듯 김해랑의 제자다. 1946년 김해랑무용연구소(마산)에 1기로 입학했다. 최현(본명 최윤찬)은 원래 부산 출신으로 지역의 가극단에서 소년가수로 활동을 하였는데, 김해랑이 발탁(拔擢)해 무용계에 입문하게 된다. 최현은 영화 〈삼천만의 꽃다발〉(1951년, 신경균 감독)로 영화배우로 데뷔하였고, 〈시집가는 날〉(1956년, 이병일 감독)부터 〈청일전쟁과 여걸 민비〉(1964년, 신상옥 감독)까지 총 12편의 영화에 출연했다. 그가 마지막 출연한 〈청일전쟁과 여걸 민비〉에서는 명성황후(최은희)의 내연(內宴)에서 남녀 2인무(사랑가)에 등장한다. 그러나 작품 크레딧에서 최현의 이름은 없다. 단지 춤 장면에만 출연했을 뿐이다. 최현은 이렇게 무용가였으나, 한 시절 배우로서의 삶을 병행했다. 


신무용가의 춤에 내재한 지역성


신무용 2세대의 6인의 춤에 관해서 이야기하는 이 글에서, 나는 최현의 자리에 김해랑을 우선 넣고 이야기를 풀겠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무용가의 출생지와 성장배경이 얼마만큼 중요하다는 걸 알리기 위해서다. 그렇게 접근해야 신무용 1.5세대 및 2세대의 춤의 특성을 더 정확히 알 수 있음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지금까지는 신무용 계통의 무용가들 사사 계보를 바탕으로 해서, 춤의 특징에 관한 언급을 했지만, 난 다른 시각이다. 신무용 1.5세대 및 2세대의 춤에서도 그들의 출신 지역의 특징과 정서가 확실하게 보인다. 따라서 이들의 춤에 내재(內在)한 지역성을 보다 더 확실하게 끄집어낼 필요가 있다.


6인을 대표하는 지역은 어디인가? 김백봉은 평양 태생이요, 김진걸은 서울 태생이다. 두 지역의 정서는 전혀 다르다. 김해랑(최현)은 마산이요, 황무봉은 부산이다. 비슷한 면이 있어도, 더 파고들면 꽤 다르다는 걸 지역민은 잘 알 거다(황무봉의 출생 및 집안에 관해서는 뒤에 가서 자세히 말하겠다). 


최희선은 대구 출신이요, 송범은 청주 출신이다. 최희선은 대구에서 성장기를 보냈다. 최희선은 권명화의 춤을 보면 대구의 춤이 어떤가를 확실하게 전달받게 된다. 송범은 성장하면서 서울로 이동했다고는 하나, 그가 작품을 통해서 무용가로서 성장하는 과정에선 ‘충청인의 기질’ 또는 ‘충청인의 특성’이 잘 반영되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나의 이런 접근은 민족음악학(ethnomusicology)에서 출발한다. 민족음악학의 시각에선, 한 민족 안에서 ‘같으면서도 다른’ 특정한 지역의 지역성을 매우 중시한다. 대한민국 춤계도 민족무용학적인 시각으로 한반도의 지역성을 중시하는 이론가 또는 평론가가 있겠다. 그런 사람이라면 내 주장에서 일치점을 찾으며 공감할 것이다. 그들에 의해서 여기서 다룬 내용을 좀 더 깊게 파고들게 되길 바란다.




김백봉과 평양기질: 깔끔함과 담백함


김백봉은 평양 출생이다. 김백봉의 춤엔 평양 기질이 있다. 깔끔함과 담백함이다. 관서(關西) 내지 서도(西道)의 특징이 김백봉의 춤에서 발견된다. 서도소리는 대동강 물맛을 알아야 제대로 부를 수 있는데, 김백봉의 춤이야말로 서도(西道, 황해도와 평안도)의 참 멋이 담겼다. 


서도의 특징은 무엇일까? 군더더기 없는 담백함이다. 경기소리와 남도소리와 다르게, 서도소리는 반주가 많지 않다. 경기소리와 남도소리처럼 여럿이 함께 부르지 않는다. 혼자 부르는 게 제격이고, 많아야 2명이다. 그래야 서도 특유의 깔끔하고 담백한 맛이 산다. 


김백봉의 춤이 딱 그렇다. 훗날 부채춤도 군무로 만들어져서 더 큰 인기를 얻었으나, 김백봉 명무의 홀춤 형태의 부채춤은 얼마나 보기 좋은가? 편안하면서도 세련됨을 잃지 않는다. 나는 김백봉의 춤의 미학에 관해서, 김백봉의 작품 〈청명심수〉를 예로 하면서 ‘청명’을 키워드로 삼았다. 김백봉의 춤은 청명(晴明, 淸明)하다. ‘맑음, 밝음, 푸름’이 있다. 


치장하지 않는 세련됨이 평양문화의 특징이다. 서울문화의 특징과는 좀 다르다. 서울에는 서슬이 없고, 평양에는 서슬이 있다. 전통예술을 살피면, 서울의 노래가 더 따뜻하고 다정할 순 있어도, 평양의 노래만큼 맑거나 푸르다곤 하기 어렵다. 


시창(詩唱) ‘관산융마(關山戎馬)’라는 곡조가 있다. 장단이나 박자에 연연하지 않으면서, 매우 품격 있게 길게 뻗으면서 진행하는 곡조다. 서도의 정서, 평양의 정서, 또한 김백봉의 춤의 정서와도 연결된다. 청명이 봄의 ‘산뜻한 맑음’이라면, 관산융마는 늦가을의 ‘차가운 맑음’이다. 


나는 여태껏 김백봉의 춤을 김백봉 명무 이상으로 잘 춘 사람을 못 봤다. 신무용 1세대와 신무용 2세대는 모두 대단한 인물이다. 그러나 실제 그들만큼 또는 그들 이상으로 춤을 잘 추는 후세대를 봤다. 김백봉만큼은 예외였다. 


안귀호, 제2의 김백봉


2024 세실풍류를 통해서, 안귀호를 발견했다. 안귀호에게서 서도의 정서, 관서의 정서가 풍겼다. 대동강의 물맛을 아는 사람이 추는 춤 맛이 저럴 것이다! 안귀호의 춤을 보면서, 대뜸 ‘제 2의 김백봉’이 연결되었다. 김백봉의 춤엔 아직 이르지는 못하나, 김백봉 춤 특유의 맑음, 밝음, 푸름이 그대로 살아있다. 


평양인(平壤人) 특유의 정갈함과 냉정함의 사이에 존재하는 맑은 춤이 김백봉과 안귀호에게 공존한다. 차이가 있다면, 안귀호는 이를 ‘여인의 감성’이라기보다는 ‘소녀적 감성’으로 풀어내는 느낌이다. 춤을 보면서 김백봉이 평양에서의 어린 시절의 춤이 저러하지 않았을까 하는 상상을 펼칠 수 있었다. 안귀호는 관객에게 느끼고 생각하면서 상상할 수 있는 기쁨을 전해주었다. 이 얼마나 큰 행복인가! 


김백봉의 춤은 한마디로 ‘인성의 춤’이다. 여기서 인성은 일단 ‘人性’을 말하고, 더 나아가서 ‘仁性’을 뜻한다. 김백봉과 안귀호의 춤에선 어진 기운이 더 많이 느껴진다. 오해는 하지 말길 바란다. 그간 김백봉을 훌륭하게 소화해낸 춤꾼의 춤에도 어진 기운이 존재하고 있음을 확실히 밝힌다.




김진걸과 서울기질: 분명함과 단호함


김진걸은 서울 태생이다. 김진걸의 춤엔 서울 토박이의 정서가 그대로 배어있다. 서울춤이란 무엇일까? 일단 전라도춤, 경상도춤과 매우 다른 게 서울춤이라 말하겠다. 음악으로 비유한다면, 서울노래(경기민요)는 남도민요(전라도, 경상도)와는 다르게 음정이 매우 분명하며 음의 순차진행(順次進行)이 많다. 서울노래가 순차진행(順次進行)이 많다면, 남도노래는 상대적으로 도약진행(跳躍進行)이 많다. 


소리를 움직임으로 바꾼다면, 서울춤은 남도춤에 비해서 움직임의 폭이 크지 않다. 비유컨대 돌다리를 건널 때, 남도사람이 돌다리를 다 밟지 않고 ‘성큼’ 걸어간다면, 서울사람은 돌다리마다 혹여 다른 느낌일까 모두 찬찬히 밟으면서 ‘총총’ 걸음으로 가는 형상이랄까. 


김진걸의 춤이 딱 그렇다. 결과를 급히 보이기 위해, 과정을 생략하지 않는 치밀함이 있다. 김진걸의 춤사위는 분명하다. 모호함이 없다. 그런데 분명함이 점차 강해지다가, 어느 부분에서는 슬쩍 ‘단호함’을 드러낸다. 이게 서울 기질이자, 한양인(漢陽人)의 매력이다. 


서울과 평양을 비교할 때, 평양의 예술이 더욱 긴장감이 있다. 서울의 예술은 오히려 이완감이 많이 느껴진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순간적으로 단호하게 긴장감을 만들어내는데, 김진걸의 산조춤 〈내 마음의 흐름〉에서도 그런 특성을 발견할 수 있다. 김진걸의 산조춤은 다른 산조춤과 같이 흥(興)에 겨워서 추는 춤이 아니다. 마음의 영역에서의 ‘흐름’과 기분의 영역에서의 ‘흥’의 차이를 안다면, 김진걸의 춤의 본령을 이해하게 된다. 


시각에 따라서 전라도춤이나 경상도춤이 서울춤보다 더 우리적 또는 한국적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일면 타당하다. 서울이란 중심지가 일찍이 외래문물을 받아들이는 지역이었기에 그럴 수 있다. 김진걸의 산조춤도 그렇다. 전라도춤이나 경상도춤에 익숙한 이들에게는 완연한 전통적인 산조춤이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내 생각은 완전히 다르다. 김진걸의 산조춤은 20세기 후반에 만들어진 산조춤의 성공작이라고 생각된다. 한국의 전통적인 요소를 충분히 살려내면서도, 서구의 현대적인 신체 훈련이 함께 공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김진걸은 격식과 품격을 지향하기에, 손과 발의 움직임과 시선과 방향과 각도 등에 흐트러짐이 없는 일관됨을 확인할 수 있다. 김진걸은 자신의 춤을 무보(舞譜)화 한 걸로도 유명하다. 이것이 서울 사람의 특징이고, 그러하기에 김진걸의 춤을 서울춤이라 단언한다. 


정민근, 색다른 소년성


정민근의 ‘내마음의 흐름’을 보면서 놀라는 부분이 많았을 것이다. 어느 부분에선 너무도 김진걸명무답기에 그렇다. 그간 김진걸의 산조춤을 ‘보고 또 보면서’ 그 춤을 자기 안으로 끌어들여서 ‘느끼고 또 느끼며’ 완성을 향해 간 춤이다. 


김진걸의 춤이 ‘남자’의 춤이라면, 정민근의 춤은 ‘소년’의 춤 느낌이 강하다. 우선 정민근의 춤에서는 서울 기질이 발견되지 않는다. 분명함은 있되, 단호함은 적다. 그러나 정민근에겐 분명 정민근만의 독특한 캐릭터가 있는데, 그게 바로 무동(舞童)적 이미지이다. 그의 춤에서 느껴지는 순수한 소년성(少年性)은 전통사회의 무동과 연결될 수 있다. 


김백봉의 인성(人性)의 춤, 김진걸의 지성(知性)의 춤


김백봉의 춤이 ‘인성(人性)의 춤’이라면, 김진걸의 춤은 ‘지성(知性)의 춤’이다. 김백봉의 춤이 태생적이요 자연적이라고 한다면, 김진걸의 춤은 교육적이요 훈련적이다. 김진걸의 춤이 담고 있는 지적인 에너지는, 최현의 춤이 담고 있는 로맨티스트적인 자세와는 사뭇 다르다. 최현의 ‘낭만지향’과 김진걸의 ‘지성지향’은 태도적 측면에서 꽤 다르다. 


애티튜드(attitude)라는 것이 단순한 움직임에서 느껴지는 태도가 아니라, 한 지역 또는 한 가문에서 오래도록 지켜져 온 것의 대물림이다. 같은 남성무용가이나, 최현이 등장해서 움직일 때의 에티튜드, 또 송범이 등장해서 움직일 때의 애티튜드는 김진걸이 등장해서 움직일 때의 애티튜드와 시작부터 다르다. 김진걸은 서울 토박이 특유의 격(格)있는 몸놀림(attitude)이 돋보인다. 이게 바로 ‘서울춤’이다. 

 

김해랑과 마산기질: 뜨거움과 의연함


한국인 중에서 가장 뜨거운 피를 가진 사람이 마산사람이다. 마산은 서울이나 평양에 비해서 더욱 정치적인 도시라는 말이 가능하다. 광주민주화운동 이전, 부산과 마산에서 민주화항쟁이 먼저 일어났다. 이른바 당시에는 ‘부마사태’라고 불렀다. 그런데 우리나라 근현대사에서 ‘마산사태’라는 말이 그 이전에 이미 등장했다. 이승만 정권의 3.15 부정선거에 대하여 가장 먼저 분연(奮然)히 일어난 지역이 마산이다. 


김주열(1944-1960, 전북 남원 태생)을 기억하는가? 당시 마산상업고등학교 1학년에 입학한 그가 부정선거에 맞선 데모(항쟁)를 하다가 경찰의 진압에 의해 중상을 입었다. 놀랍게도 그의 시신은 실종 27일 만에 발견되었다. 마산의 중앙 부두서 낚시하던 어부 갈고리에 걸려 시신으로 떠올랐다. 당시 정부는 '용공 분자의 난동과 좌익 폭동'으로 몰아갔는데, 한 청년의 덧없는 죽음에 마산시민은 더욱 분연히 일어났고, 이것이 바로 4.19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 


마산을 가리켜 '4월 혁명발원지’라 한다. 김해랑은 마산사람이다. 마산사람은 용기와 과단성이 있다. 서울사람은 감히 생각하지 못하거나, 주저하게 되는 마산 특유의 지역성이다. 


해방 이후 남과 북의 이념에 갈려서 무용계도 둘로 갈린 이후, 한국전쟁 후 처음으로 한반도 남쪽에서 결성한 무용단체의 최고 책임자를 마산사람 김해랑이 맡았다는 사실은 그저 그냥 지나칠 사실이 아니다. 김해랑은 혹여 개인의 피해를 감수하면서도 뭔가 책임지고 일어나는 선구자(先驅者) 혹은 선동자(煽動人)로서의 역할을 한 인물이다. 


나윤규, 윤봉춘 그리고 김해랑


김해랑의 제자는 널리 알려진 최현, 정민, 한순옥을 시작으로 진영자, 김송자, 김신덕, 김행자, 정양자, 이남주 등이 있다. 이들에게 김해랑의 대표작을 꼽으라면 각각 다를 수 있겠으나, 김해랑춤에 담긴 역사성과 민족성을 연관해서, 김해랑의 무용극 〈아리랑〉을 꼽을 제자가 많겠다. 


〈아리랑〉은 많은 무용가에게도 소재로서 작용했다. 신무용 1세대의 배구자에게도 아리랑이 있다. 그러나 김해랑의 아리랑은 다르다. 나운규의 무성영화 〈아리랑〉을 무용극으로 만든 작품이 김해랑의 〈아리랑〉(1막 5경)이다. 이 작품은 2020년 재현된 바 있다.(2020.11.10. 마산 3·15아트센터 소극장) 


2000년 3월 7일, 서울 아르코예술극장(당시 문예회관)에서 김해랑 선생 추모 공연이 열렸다. 최현을 비롯 김해랑의 춤맥을 잇고 있는 무용가들이 출연했다. 이 프로그램에는 김해랑과 관련해서 무용협회가 주는 제3회 무용상 시상식(1966)에서 제자들과 찍은 사진 외에, 특별히 주목하게 되는 사진이 있다. 


당시 문화계에 중요한 역할을 한 조택원과 윤봉춘이 김해랑을 축하하기 위해서 함께 찍은 사진이다. 영화배우이자 영화감독 윤봉춘(1902-1975)은 춘사 나운규(1902-1937)와 평생 영화의 동지, 인생의 동지로 지낸 사람이다. 윤봉춘은 함경남도 정평 출생이지만, 유년기를 보낸 곳은 함경남도 회령이다. 바로 이곳 회령에서 평생의 동지 나운규를 만나게 된다. 


나운규와 윤봉춘, 그리고 김해랑에게 공통적인 점은 민족의식을 바탕으로 한 예술작품을 만들어냈다는 점이다. 윤봉춘은 〈유관순〉이란 제목으로 세 편의 영화를 만들었다. 1948년엔 고춘반, 1959년엔 도금봉, 1966년엔 엄앵란 주인공의 유관순이었다. 이외에도 윤봉길 의사(1947), 논개(1956), 한말풍운과 민충정공(1959, 윤봉춘과 남홍일 공동연출) 등의 작품이 있다. 이외에도 나운규의 아리랑과 연관한 영화에 여러 형태로 관여했다. 이를 통해서 영화계에 윤봉춘이 있다면, 무용계에는 김해랑이 있다는 등식을 가능하게 한다. 이들의 작품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것이 뜨거움과 의연함이다.



 

정혜진, 최현의 〈신로심불로〉를 잘 살려내다


김해랑의 제자인 최현은 어떠할까? 김해랑에게선 분명히 ‘마산적 정서’ 내지 ‘마산적 기운’이 확실하지만, 최현까지 그렇게 연결할 수 있을진 모르겠다. 최현이란 인물에게서 분명한 건,  확실히 그의 춤에는 드라마가 있다는 점이다. 이번 무대에선 최현의 작품 〈신로심불로(身老心不老〉였다. 그간 정혜진은 〈고풍〉, 〈남색끝동〉과 같은 최현의 품격있는 여성성이 담긴 작품을 잘 춘 것으로 유명하다. 그런데 이번에는 노인으로 분장해서 〈신로심불로〉를 잘 보여주었다. 


서울예술단의 예술감독으로서 드라마 타입의 작품을 런칭해서 성공한 바 있는 그이기에 일견 예견되기도 했으나, 대한민국 여성무용가 중에서 〈신로심불로〉를 정혜진처럼 잘 살려낼 춤꾼이 드물다는 건 내 생각만은 아닐 듯싶다. 아니다. 남녀를 막론하고 이 작품을 가장 잘 표현해내서 오래전 고인이 되었지만, 스승 최현을 흡족하게 해 준 춤이 정혜진의 〈신로심불로〉였다. 


황무봉의 해양기질 vs. 송범의 내륙기질


‘황무봉은 20세기 후반 부산에서 신무용의 꽃을 피운 한국춤의 대표적인 교육자이자 창작무용가다’ 〈세실풍류〉 프로그램북에 실린 그에 관한 첫 줄을 되새겨 본다. 실제 해방 이후 및 한국전쟁 이전 부산에 정착해서 부산무용의 뿌리를 내린 인물은 박성옥이다. 여성국극은 1948년에 생긴 장르인데, 1949년 여성국극 〈햇님과 달님〉이 크게 인기를 끌었다. 이 작품의 음악감독을 맡은 이가 박성옥으로, 그가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전부터 부산과 가까웠다. 


황무봉의 지역성을 부산으로 설정하는 건 다소 무리가 있다. 황무봉은 일제강점기에 후쿠오카(福岡)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경상남도 고성으로, 고성권번과 고성오광대 등과 연관이 깊다. 외조부가 고성오광대 3대 중시조로 꼽히는 분으로 알려졌다. 황무봉이 부산에 완전히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 것은 1957년이다. 그 이전에 서울과 진주 등지를 전전하면서 춤을 익히거나 춤을 가르쳤다. 물론 부산무용에 끼친 영향은 지대하다. 황무봉의 인생에 있어서 주요한 세 지역은 후쿠오카, 고성, 부산으로, 모두 바다가 면한 해양도시라는 공통점이 있다. 


송범은 청주 태생이다. 일찍이 서울에 와 생활했지만, 어린 시절 청주에서의 기억은 깊게 자리하고 있었을 것이다. 충청북도는 바다가 면하지 않은 지역이고, 청주는 그 중심이 된다. 송범은 전형적인 내륙기질적 사고방식의 인물이다. 황무봉과 전혀 다르다. 


내륙문화와 해양문화는 기질이 아주 다르다. 황무봉은 같은 세대 무용가 중 가장 해양성 기질이 충만하다. 해양문화의 기질이란 무엇인가? 상황적 가변성(可變性) 또는 상황적 포용성(包容性)이 강하다. 


황무봉의 예술적 행보를 보면, 어떤 자신이 내재적으로 주체적인 생각과 또는 춤 관(觀)을 설정하고 작품을 만들기보다는 ‘상황에 따라서 새로운 걸 수용하면서 자기화 시키는 방식’으로 예술 활동을 이어왔음을 짐작하게 된다. 


송범과 매우 다른 지점이다. 송범은 일찍이 다양한 예술 사조(思潮)를 경험했으나 1970년대가 되면 뚜렷하게 자신만의 주체적인 생각과 춤 관을 정립한다. 그 후에는 자신의 이념과 부합하는 작품에 전념했다. 이게 황무봉과 송범의 차이인데, 어떤 것이 더 좋다고는 말할 수 없다.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건, 이런 차이가 바로 해양기질과 내륙기질의 차이라는 점이다. 


두 사람의 공통점은 무얼까? 무용극에 관한 관심이 지대했다. 그런데 그 무용극이 참 다르다. 송범의 무용극이 드라마틱(dramatic)함을 표방했다면, 황무봉의 무용극은 포에틱(poetic)한 측면이 있다. 황무봉의 무용극 〈춘향전〉과 송범의 무용극 〈은하수〉를 비교해보면 공감할 것이다. 


앞에서 나는 김진걸의 춤을 지성(知性)의 춤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평생 정다운 맞수였던 송범의 춤은 어떤가. 송범의 춤은 지성(智性)의 춤 또는 지혜(智惠)의 춤이다. 김진걸의 춤이 ‘몸’으로부터 출발했다면, 송범의 춤은 ‘머리’로부터 출발한다. 그렇다면 황무봉의 춤은 어떻게 말해야 할까? 황무봉에 대해서는 더 연구해 볼 필요가 있다. 현재 단계에서 말할 수 있는 건 황무봉의 여러 다른 형태를 거부감 없이 수용하면서도, 그를 통해서 자신만의 인상(印象)을 남기려는 특성이 있다는 점이다. 비교컨대 매우 로맨티스트적 삶을 산 최현이 ‘낭만주의 경향’의 범주에 존재한다면, 황무봉은 상대적으로 ‘인상주의 경향’이 강하다는 점이다. 마치 부산 앞바다에서 떠오른 해가 시간과 공간에 따라서 다른 모습으로 존재하는 것처럼, 그런 상황적 가변성(可變性)을 바탕으로 자신의 춤 세계를 구축해 갔다고 볼 수 있다.





    

손병우 최영숙 김장우, 국립무용단 출신의 춤의 베테랑


〈세실풍류〉에서 〈송범의 은하수〉는 김장우와 최영숙 듀오, 〈세실풍류〉를 통해서 새삼 확인하는 거지만, 국립무용단 출신들은 정말 춤을 잘 춘다. 특히 1970년대와 1980년대를 거쳐서 송범의 무용극을 경험한 이들이 더 그렇다. 두 사람의 춤을 보면서, 그간 〈은하수〉에 출연했던 많은 단원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송범의 무용극을 전체 다시 공연하긴 힘들더라도, 예를 들어서 〈도미부인〉의 ‘사랑의 춤’과 같은 부분은 아름다운 소품으로써 가끔 공연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송범의 참회〉는 손병우가 공연했다. 그의 프로그램북에 실린 글을 옮기면 이렇다. “〈참회〉는 대학 때부터 국립무용단에 입단하면서까지 30여 년 동안 저의 스승이셨던 송범 선생님의 작품으로, 한국무용협회(대한무용협회)의 명작무로 지정되었으며, 세실풍류에서도 원작을 담아내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언제나 어디서나 진정성이 느껴지는 춤을 손병우답게, 이번 무대에서도 후세대들이 ‘손병우를 통해서 송범을 느낄 수 있도록’ 해주었다. 


김혜윤, 질감과 양감을 두루 갖춘 춤꾼


〈황무봉의 연연(連緣)〉은 김혜윤이 춤을 추었다. 김혜윤의 춤을 보면, 부산여인의 춤이라는 걸 느끼게 해준다. 서로 다른 개성이지만, 부산지역과 연관해서 여성춤의 대가를 떠올리면 김현자, 김매자, 이영희를 떠올리게 된다. 김혜윤 또한 그런 계보를 잇고 있음이 분명히 느껴진다. 


부산정신을 가리켜서 ‘의리정신과 저항정신’이라는 주장이 있다. 적극 공감한다. 김혜윤에게서도 뭔가 모를 그런 기운이 느껴지는 게 사실이다. 김혜윤이 추는 〈논개별곡〉이 꽤 좋다. 춤해설을 옮기면 이렇다. “‘의암(논개)별곡’은 논개를 기리며 논개제에서 추어진 김수악의 유작을 받들어 김경란이 창안한 서사적인 춤이다. 진주기방계열의 수건춤에 남해안 무속의 색채가 가미된 독창적인 수건사위가 돋보인다.” 김혜윤은 이런 특징을 매우 잘 표현한다고 생각한다. 논개야말로, 의리와 저항의 상징이라 할 수 있고, 부산출신의 김혜윤에게서 그런 이미지가 딱 전달된다. 


반면 김혜윤이 추는 〈연연〉은 아쉽다. 일단 김혜윤은 ‘춤집’이 좋다. 양감(量感)을 느끼게 해주는 춤꾼이다. 한국춤을 추는 이들이 선(線)을 잘 살려내면서 질감(質感)도 잘 살려낸다. 마치 옷감으로 친다면, 명주 삼베, 무명의 질감이 다르듯이, 저마다 추는 춤의 그러한 표면적인 요소는 잘 드러낸다. 그런데, 그런 질감(texture)을 양감(feeling of volume)으로 전환하는 능력의 차이가 있다. 김혜윤은 이런 능력을 갖췄다. 


그러나 뭔가 아쉽다. 김혜윤은 거의 모두에게 춤을 잘 추는 축에 속하는 인물일 것이다. 그런데 춤이 안정적이나 편안한 느낌은 아니고, 움직임이 활달하나 살아 숨 쉬는 생동감이 부족하다. 춤꾼 스스로가 즐기면서 추는 춤이라거나 뭔가 깊은 것에 몰입했다는 느낌을 받지 못한다. 나이가 들면 자연스럽게 터득할지는 모르나, 아직은 그런 한계가 분명하게 전달된다. 


그런 이유는 무엇일까? 김혜윤 스스로가 극복해야 할 숙제라 생각한다. 나는 이를 ‘명암(明暗)의 부족’이라 얘기하고 싶다. 양감(부피감)이 있으나, 보다 입체적으로 드러내지 못하는 느낌이다. 예술적 모호성(模糊性, ambiguity)이 부족하다고나 할까? 하나의 정서 또는 하나의 표현이 거기에 국한할 뿐, 그 겹치는 정서가 아쉽다. 


다시 말해서, 춤의 이면(裏面)이 보이지 않는다. ‘동서양 구별 없이 잘 추는 춤을 보면, 춤을 추고 있는 순간에도, 관객을 궁금하게 만드는 능력이 있다. 김혜윤의 춤은 잘 추는 춤은 분명하나, ’궁금하게 만드는 춤‘은 아니다. 


서울교방 동인 중에서 몇몇 춤꾼을 특별히 인정하는 이유는 ‘춤의 이면’을 그려낼 줄 안다는 점이다. 춤 속에 ‘속내’가 느껴지고 궁금해진다. 춤추는 사람의 배경이랄까? 뭔가 저 춤이 탄생하기까지의 과정(인생의 과정, 수련의 과정)이 궁금해지는데, 김혜윤은 그렇지 않다. 김혜윤은 아직 그 단계까지 내공이 쌓이지 못했다는 말이 더 정확하겠다. 김혜윤이 그 단계에 이르기를 기대한다. 





최희선와 윤미라, 대구출신의 같음과 다름


최희선은 대구출신이다. 윤미라도 대구출신이다. 그런데 내 눈에는 대구사람 특유의 느낌은 상대적으로 적다. 정도의 차이를 말하는 것일 뿐이니, 오해는 금물이다. 


누군가가 최희선의 춤을 ‘뚝배기 같은 여인의 멋’을 가졌다고 했다. 그렇다면 윤미라의 춤은 ‘도자기 같은 여인의 멋’의 춤이라 할 수 있다. 도자기는 뚝배기보다 더욱 고급스럽고, 세련되고 고급 취향이지만, 뚝배기처럼 쉽게 깨지지 않을 것 같고 친근한 느낌은 덜하다. 윤미라는 일단 춤을 잘 추고, 그의 이런 특징은 매우 매력적이고 존중받아야 하지만, 내 시각에선 ‘달구벌 입춤’에선 다소 아쉽다. 


최희선과 윤미라는 변별성이 확실하다. 뚝배기 같은 최희선에겐 ‘갈필(渴筆)의 묵직함’이 있다면, 윤미라는 ‘세필(細筆)의 정교함’을 추구한다고 할까. 나는 전자가 더 대구정서에 맞다고 생각한다. 보수성향이 강한 대구사람에겐 다른 지역이 어떠하든 상관없이 자신들만의 주관을 지키는 처변불경(處變不驚)의 소신적 확고함이 있다. 


두 사람은 이런 비유도 가능하다. 최희선은 베토벤과 같다면, 윤미라는 모차르트다. 같은 대금산조라고 치더라고, 최희선은 서용석명인과 같은 느낌이라면, 윤미라는 이생강명인과 같다. 가야금으로 비유한다면, 최희선은 ‘강태홍류 가야금산조’라고 한다면, 윤미라는 ‘성금연류 가야금산조’와 같다고나 할까. 


이게 두 사람의 차이이자, 각자의 매력이지만, 윤미라가 달구벌 입춤의 적자(嫡子)로서 수석 계승자란 측면에서 보면, “최희선의 특성을 보다 더 자신의 춤 안에 끌어들여야 하지 않을까”조심스럽게 주문한다. 


최희선 = 교방춤x마당춤 vs. 윤미라 = 교방춤x무대춤


정곡을 찔러서 말하려 한다. “최희선의 춤은 ‘마당춤’의 느낌이 살아있는데, 윤미라의 춤은 언제나 ‘무대춤’이다.” 최희선의 ‘달구벌입춤’이 교방춤에 마당춤이 결합된 형태라면, 윤미라의 ‘달구벌입춤’은 교방춤에 무대춤이 결합한 느낌이다. 윤미라의 춤은 앞으로 어떠할까? 이런 간극(間隙)을 제대로 인지하면서, 그 자신도 나이가 들면서 스승 최희선에 더 가까워질까? 아니면 지금처럼 ‘최희선제 – 윤미라류’의 형태로 더욱 굳어질까? 


최희선이란 무용가는 그 이전 세대와 동세대의 춤꾼들과 다른 변별성이 분명하다. 호남적인 장구가 아니라, 영남적인 북이 참 어울리는 춤꾼이다. 나는 지금까지 북을 메고 있는 여성춤꾼의 모습에서 최희선처럼 잘 어울리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대한민국에서 그런 춤꾼이 다시 탄생하길 바란다. 그래서 최희선의 춤태(舞態)를 이어주길 바란다. 


앞에서 김백봉을 가리켜 ‘인성의 춤’이라고 했는데, 최희선의 춤은 ‘본성(本性)의 춤’이다. 뚝배기와 같은 우직함을 전제로 한 진솔한 춤이다. 연기자 중엔 연기하듯 연기를 하는 배우가 있고, 연기를 안 한 듯 연기를 하는 배우가 있다. 최희선은 후자에 속한다. 이런 정서는 진보성향보다는 보수성향에서 나오는 특성이다. 그런 성향은 대구와 매우 상통한다. 최희선의 춤을 요즘 유행어에 비유한다면, ‘꾸안꾸’이다. 그의 춤엔 '꾸민 듯 안 꾸민 듯’한 매력이 있다. 이건 대구의 정서의 한 모습이다. 무릇 대구 출신으로 대구와 관련된 춤을 추고자 한다면, 이를 명심하면 어떨까? 


신무용 2세대의 특성을 확연하게 알려준 〈세실풍류〉

 

글을 마무리하면서, 6인의 춤을 마음에 새긴다. 김백봉의 인성(人性)의 춤, 최희선의 본성(本性)의 춤, 김진걸의 지성(知性)의 춤, 송범의 지성(智性)의 춤, 최현의 춤은 낭만(浪漫)의 춤, 황무봉의 인상(印象)의 춤이 더욱 그리워진다. 〈세실풍류〉를 통해 다시금 돌아보니, 신무용 2세대는 저마다 특성이 분명한 훌륭한 춤꾼이었다. 이 여섯 빛깔을 우리는 지금 잘 이어나가고 있는 것일까? 특히 이 춤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 인물이라면, 이 〈세실풍류〉를 통해서 자기 점검을 할 필요가 있다.



                                              글_ 윤중강(공연평론가)

                                          사진제공_ 국립정동극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