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두움 속에서 법고소리가 나직이 울려온다. 빛이 들어오면 무대 한가운데 설치된 계단 앞에 흰 장삼을 걸친 스님이 정좌해있다. 계단이 끝나는 곳에 놓인 커다란 법고 앞에서 관음보살이 천천히 계단을 내려온다. 스님(정설웅)과 보살(지다영), 여인(임지영)의 3인무가 시작된다. 보살은 부처(佛)이고 여인은 중생(衆生), 부처와 중생 사이에 스님(僧)이 있음을 상징한다. 무대 네 귀퉁이에서 등장한 여인들이 두 줄로 늘어서며 통로를 만들고 보살이 공중에 들려 불전 앞을 떠나간다. 여인들의 군무가 계속되는 사이 화면엔 4계의 변화가 영상으로 보여 진다. 낙엽 지는 가을풍경에 이어 대지에 쌓이는 하얀 눈송이가 겨울을 알려주고 초목이 싹터 오는 봄날의 정경과 여름의 짙푸른 녹음이 연속으로 펼쳐진다. 4계의 풍경에 이어 나타나는 별자리 영상은 되풀이되는 시간의 무한성을 보여준다. 여인들의 의상도 계절 따라 바뀐다. 갈색에서 붉은 색으로, 다시 흰색과 녹색으로 갈아입는 색감이 세련되고 브람스의 클래식한 음악은 고즈넉한 산사의 정경과 조화를 이룬다. 불도와 세속의 선택에서 망설이던 스님이 하산을 결심한 듯 장삼을 벗어던지고 여인들의 군무 속에 어울린다.
도박과 이권, 다툼이 끊이지 않는 속세는 검은 옷의 군상들, 주사위판과 돈 가방으로 그려지고 야한 의상의 남녀가 흥청거리며 춤추는 재즈 바는 타락한 사회의 축소판이다. 재즈선율과 시끄러운 전자음, 팝 음악의 가사가 말해주듯 믿을 수 없는(unreliable), 무책임한(irresponsible), 예측할 수 없는(unpredictable), 그리고 방어할 수 없는(undefensible) 세상에 스님도 함께 있다. 화면에는 불규칙한 디지털이미지가 어지럽게 명멸한다. 합장한 여인들이 나타나고 보살 춤이 스님에게 손짓한다. 환속을 결행했지만 속세에 적응할 수 없는 스님은 다시 산으로 돌아간다. 흰 장삼을 챙겨 입고 불전에서 그를 맞아주는 보살과 함께 환희의 춤을 춘다. 주지스님(이상만)이 등장한다. 불도를 버리고 욕심을 따라 산을 떠났다가 돌아온 스님은 포용될 것인가. 장삼이 벗겨지고 스님은 계단을 올라 법고를 두드린다. 찢겨진 법고와 장삼을 벗은 스님을 애처로워하는 관음보살의 춤이 삶의 무상이란 슬픈 메시지를 남겨준다.
문화체육관광부의 2013년 창작산실지원사업에 선정된 네 개의 발레 작품 중 마지막으로 공연된 것이 리발레단(이상만)의 <무상(無常, 2013,12,26~27, 아르코대극장)>이다. 텍스트가 단순하고 창의성이 약한 것, 춤이 정설웅(스님)에 집중되면서 보살 춤이나 군무 등과의 밸런스를 잃은 것, 사회상을 묘사한 2,3장에 비해 무상의 주제라 할 수 있는 마지막 부분(4장)이 축소된 것 등이 아쉽다. 그러나 다양한 음악과 다채로운 의상, 감각적인 조명과 영상이 작품에 녹아들어 전체적으로 작품은 편안하고 여운이 있다. 대본과 안무를 맡고 직접 무대에도 오른(순경과 주지스님) 이상만이 작품 속에 자신의 삶을 투영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힘들게 투병생활을 계속하고 있는 그는 첫날과 둘째 날 모두 의사의 만류를 뿌리치고 무대에 올랐다. <무상>이 그의 마지막 작품이 될지도 모른다는 절실함이 그를 춤추게 하고 이를 바라보는 관객들의 마음을 떨리게 했을 것이다.
한양대를 졸업한 이상만은 22세 나이로 임성남 발레단에 입단한 후, 국립발레단 주역을 거쳐 일리노이 내셔널 발레(National Ballet Illinois)와 뉴욕발레단(New York Downtown Ballet Co.) 등에서 활약하다가 1985년 리 발레단을 창단하고 1995년부터는 다시 한국에 정착했다. 메밀꽃 필 무렵(1997), 무녀도(1999), 아리랑(2001), 금시조(2004), 춘향(2006), 바람의 화원(2010) 등이 그 후에 만들어진 대표작들이다. 향토색 짙은 한국적 소재를 찾아내고 토속적 정서에 서양적 발레언어를 접목시키는 독특한 발레세계를 구축해온 그를 한류발레의 원전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서양발레의 번안물에 익숙해진 우리 발레계에서 올바른 평가를 받지 못하면서도 40년 넘도록 토속적인 발레 한 길만을 걸어온 66년의 역정에서 그가 발견한 진실은 결국 삶의 ‘무상(無常)’함이었을까. 독립발레단으로서의 힘겨운 살림을 감내하면서 귀국 후 한해도 거르지 않고 무대에 작품을 올렸던 뜨거웠던 그의 발레사랑은 무엇을 위한 것이었을까. 외면 받는 현실세계에서 무대만이 줄 수 있는 뜨거운 자유, 그리고 그 자유로운 공간에서 마음껏 펼칠 수 있는 영혼의 눈부신 선택 때문이 아니었을까. 지난 10월, ‘무상’을 안무하며 안무노트에 남긴 고독한 메시지가 절실한 아픔으로 남아있다.
“혼자 날기엔 너무도 쓸쓸해
나의 몸은 빨갛게 타고 있어요.
그 겨울엔 세상을 변화해 보고 싶은 열정의 고뇌와
빨갛게 타다 못해 열기 속에서 품어내는
사치스런 고독이 떨고 있겠지...
그곳엔 또 다른 자유와 눈부신 선택이 기다릴 거야.
겨울의 ‘무상’이 날 기다리고 있기에,
그것은 오직 하나뿐인 나의 뜨거운 자유이기에...”
나이에 아랑곳없이 마지막 순간까지도 뜨거운 자유를 꿈꾸었던
영원한 현역발레리노인 그의 명복을 빈다.
후기: 12월 26일과 27일 이틀 연속 무대에 섰던 이상만 씨가 2014년 1월 8일 밤 10시 37분, 영면의 길로 떠났습니다. 발레를 처음 시작하던 날 아라베스크에 취해 그 동작이 일생동안 계속될 것 같은 예감에 몸을 떨었다는 그의 예감대로 마지막 작품이 된 <무상>의 무대에 올랐던 열흘 후였습니다. 이 글은 그가 떠나기 직전 서울문화투데이 평론칼럼에 게재되었던 글을 일부 수정한 것임을 알려드립니다.
글_ 이근수(무용평론가, 경희대 명예교수)
사진_ LEE 발레단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