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실(內實), 영남춤축제에 딱 맞는 말이다. 2024 영남춤축제에는 ‘내적인 가치와 충실성’이 가득한 프로그램이 많았다. '한국전통춤판'은 특히 해를 거듭할수록 열기를 더해서, 이젠 ‘영남춤축제의 꽃’이라고 해도 좋을 것 같다. 올해도 공모를 통해서 30명을 선정했다. 20대부터 60대까지, 다양한 연령층을 고려해서 선정했다. 하루에 6명씩, 총 5회에 걸쳐 펼쳐졌다. 객석은 만석이었고, 관객의 호응이 대단했다. 이 글에선 올해의 ‘한국전통춤판’을 쭉 돌아보면서, 2024년 '한국전통춤판'의 성과를 되짚어 보겠다.
영남춤의 맷 잇기: 강주미, 김진영, 남선주
‘한국전통춤판’에서는 역시 ‘영남춤’을 더욱 집중하게 된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강주미 김진영 남선주를 주목한다. 이들은 이번에 공연한 춤 종목 하나만을 언급하지만, 앞으로 기회가 되면 이들 각자 내재(內在)한 영남춤의 토양과 매력에 대해서 좀 더 깊이 파고들고 싶다.
영남춤이 ‘덧배기춤’이라면, 강주미가 확실하게 덧배기 특유의 정서를 월등히 잘 드러낸다. 다른 지역에서 성장한 춤꾼은 도달하기 어려운 지점이다. 강태홍에게 시작되어 김온경으로 이어진 춤맥을 잘 이어온 것이 보인다. 하지만 지금은 너무도 ‘전승자’로서의 맥을 잇기에 좀 더 집중한 듯 보이기도 한다. 앞으로는 강주미 특유의 자유스러움이 느껴지면 더 좋겠다. 덧배기의 생명은 그 어떤 사위보다도 속박에서 벗어난 자유스러움에 있지 않을까.
올해도 어김없이 황무봉(1930~-995)을 춤맥을 확인했다. 황무봉이라는 영남춤의 대가의 춤 중에[선, 김진영과 남선주를 주목한다. 김진영의 춤에는 이른바 예전 고전무용학원(고전무용연구소)를 거친 춤꾼에서 느껴지는 정감(情感)이 살아있다. 중고등학교와 대학에서만 무용을 배운 사람에게는 존재하지 않는 질감(質感)이다. ‘장구춤’은 이름 그대로 ‘장구’와 ‘춤’이 하나가 되어야 한다. 농악의 장단에만 익숙하고, 춤의 동작에만 익숙한 춤꾼에게선 ‘장구춤’의 진정한 매력이 느껴지기 어렵다.
김진영은 달랐다. 1960년대와 1970년대의 장구춤을 알고 있었다. 표정을 짓는 것에서도, 그 시대의 느낌을 살아있었다. 그 시대의 춤을 좋아하고 다시 부흥하기를 희망하는 나로선, 김진영의 춤이 매우 호감(好感)이었다. 한 사람의 춤꾼이 내적으로 정감(情感)을 간직하고, 외적으로 질감(質感)을 드러내며, 이를 통해서 자신의 춤과 자신의 매력을 발산해서 호감(好感)을 만드는 게 매우 중요한데, 김진영은 그 방법을 알고 있었다.
남선주는 이 지역의 춤꾼으로 크게 주목하게 된다. 춤의 공력은 느껴졌지만, 아쉽게도 ‘황무봉류 산조춤’이 완전히 체화된 느낌이 아니었다. 태(態)는 살았으나, 류(流)엔 이르지 못했다. 동작과 순서의 교치성(巧緻性)은 인정할 수 있어도, 이런 것들이 아직은 하나의 자연스러운 흐름을 만들기엔 다소 아쉬움이 있다. 부산을 대표하는 춤꾼의 한 사람으로서, 남선주의 춤이 영남춤의 보다 깊은 세계로 향하길 응원한다.
김수악이라는 레퍼런스: 나인선, 성윤선, 박정화
나인선의 ‘진주교방굿거리춤’도 주목하게 된다. 이 춤은 현재 서울교방을 통해서 체계적으로 잘 전승되고 있다. 매우 반가운 일이지만, 다소 걱정스러운 점도 있다. 너무도 ‘서울교방’적인 스타일로 고정화된 것이다. 이건 김수악(1926-2009)에서 김경란으로 이어진 춤맥으로 매우 중요하긴 하나, 이것이 곧 ‘김수악류’라고 하긴 곤란하다. 지난 20세기 김수악춤의 전승과정을 생각하면 더 그렇다.
지난 20세기에 김수악의 춤을 무대에서 활발히 재현한 인물로 송화영(1950-2006)을 우선 꼽을 수 있다. 당시는 ‘기방굿거리춤’이라는 이름으로 공연했다. 송화영의 춤에도 김수악이 있고, 김경란의 춤에도 김수악이 있다. 하지만 그들 또한 스승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해서 일찍이 자기 스타일을 만들어냈다. 따라서 송화영의 춤만을 김수악류라고 말할 수 없고, 김경란의 춤만을 김수악류라고 말하기 어렵다.
앞의 두 사람이 김수악이란 대가를 통해 받아들인 춤의 정서가 사뭇 다르듯이, 40대의 나인선에게도 김수악의 춤맥을 이을 또다른 요소가 존재할 것이다. 작은 불씨일지라도, 김수악에 관한 모든 자료를 섭렵하면서 연구한다면, 또 다른 형태의 ‘김수악류’를 존재할 수 있겠다는 기대를 하게 한다. 할머니를 흠모하는 손녀의 진솔한 접근이라고나 할까. 앞으로 ‘진주교방굿거리춤’의 다양한 전승을 위해서도 나인선이란 이름을 기억하며 응원하게 된다.
이번 ‘한국전통춤판’에선 두 사람의 〈논개별곡〉을 만날 수 있었다. 성윤선과 박정화는 아주 달랐다. 성윤선은 카리스마라면, 박정화는 모더니티였다. ‘주관적 몰입도’의 성윤선과 ‘객관적 거리감’의 박정화라고도 가능하다.
성윤선은 드라마로 비유한다면 ‘TV문학관’같은 고품(古品)스럽다면, 박정화는 마치 ‘진품명품’에서의 고품(高品)의 가치가 발견되었다. 관객의 취향에 따라서 이 춤의 평가는 갈린다. 성윤선은 20세기적, 박정화는 21세기적이라는 말도 가능하다. 성윤선은 마치 모노드라마의 배우와 같았다. 지금의 적절한 수위를 유지하고 있지만, 좀 지나치면 신파가 되기에 딱 맞다. 박정화는 다큐멘터리 나레이션 같다고나 할까. 성윤선의 춤에서 신파적 물기를 빼내야 해고, 박정화의 춤에선 다큐적 건조함을 경계해야 한다. 두 명의 춤꾼 다 기본기가 튼실해 보였지만, 상대가 표현하는 ‘논개’에 대해서 연구해 볼 필요가 있다.
전통의 계승, 그 이상을 찾아야: 이미희, 정주미, 김유나
이미희, 정주미, 김유나. 연배도 다르다. 주 종목의 춤도 다르다. 자신의 춤을 향한 접근방식도 다르다. 그런데 세 사람에게는 공히 발견되는 큰 특징이 있다. 춤을 향한 순수성이다. 진정성이라고 말을 바꿔도 좋겠다. 무대에서 자신의 춤에 집중하는 에너지는 가히 높이 평가한다. 이런 측면을 매우 존경하지만, 실제 이들의 춤에서는 공히 발견되는 뭔가 아쉬움을 또한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춤꾼 자신에게는 상처가 되지 않을까 싶은 걱정이 앞서지만, 냉정하고 객관적인 평가는 훗날을 위해서 도움이 되리라 믿는다. 이들에 대한 ‘약간의 아쉬움’은 이제 곧 ‘끝없는 기대감’으로 변하길 바라면서 세 사람에 관한 글을 매우 조심스럽고 어렵게 써 내려가겠다.
이미희는 ‘정재만춤’의 계보 속에서 이미희만의 특별한 자리매김을 기대할 수 있다. 그러나 아직은 아주 확실하게 글로 표현하기엔 주저하게 된다. 어쩌면 필자의 이런 심정을 이미희 자신이 더 잘 알고 있을지 모른다. 정재만이라는 춤의 거장의 맥을 잇는 한 사람으로서, 정재만의 춤을 잇는 훌륭한 춤꾼이 많은 현실에서, 이미희라는 춤꾼의 특장(特長)은 어떤 것일까. 이것에 대한 깊은 생각을 병행하면서, ‘허튼춤’을 주요 레퍼토리로 삼을 필요가 있다.
이동안류 춤의 전승에 있어서 정주미의 역할과 노력이 가히 대단하다. 이렇게 쓴 ‘한 줄’이 너무도 대단하기에, 그 어떤 내용을 가감하기가 어렵다. 이동안류를 떠난, 정주미라는 춤꾼의 춤에 관해서는 여기선 언급을 하지 않는 게 좋겠다. 앞으로 이동안류를 더 오래 지켜달라는 당부로 대신한다.
신무용 스타일의 특징을 자연스럽게 표현해낼 줄 아는 김유나에 주목하게 된다. 그러나 이런 춤은 개인의 역량과 노력의 최대치를 발휘해서 매우 가치가 있고 아름다운 것이 분명했지만, 춤의 미학적인 측면과 연관해서는 매우 독창적인 면을 발견하기 어려웠다. 실력을 인정하지만, 매력은 아직 영글지 않았다고 해도 좋을까.
정주미, 이미희, 김유나의 춤이 모두 품격을 갖추고 있는 건 분명하다. 이런 것을 어떻게 관객과의 소통할 것인가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다. ‘감정의 영역’이 아닌 ‘감성의 영역’에서 정(情)을 느끼게 해준다거나, ‘이성의 영역’이 아닌 ‘지성의 영역’에서 격(格)을 느끼게 해주는 걸 터득한다면, 이들의 춤은 더욱더 빛이 날 것이다.
강점은 친근함, 약점은 느슨함: 강민호, 조도근, 이우선
강민호의 '달구벌입춤', 조도근의 '우도설장구춤'을 좋아하는 청중이 많았다. 오랜 시간 춤을 함께 한 사람에게 느껴지는 편안함과 안정감은 느껴졌다. 그러나 어떤 류(流)를 만나는 느낌이 상대적으로 적다. 춤꾼의 자기화가 강한 느낌이다. ‘그래서 좋다, 그래서 나쁘다’ 이런 차원이 아니다. 아쉬운 건 이들이 춘 춤이 어떤 하나의 ‘작품’으로 느껴지진 않았다.
춤의 여러 종목을 배열해서 관객들과 소통하는 ‘갈라쇼’의 하나의 레퍼토리로서는 매우 흥미로웠다. 두 사람의 역량을 크게 인정한다. 하지만 어떤 ‘춤의 대중화’의 측면이 너무도 강하게 전달되니, 정작 ‘춤의 고급화’ 또는 이 춤꾼만이 가지고 있는 매력과 가치는 상대적으로 덜 보였다.
이우선의 ‘살풀이춤’도 그렇다. 일찍이 전통에 푹 젖어서 성장해온 춤꾼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정작 이 춤을 이 춤꾼의 대표작으로 내세울 수 있는가 할 때는 다소 머뭇거리게 된다. 공연에 너무 익숙한 사람들에게서 느껴지는 ‘느슨한 편안함’ 혹은 ‘익숙한 이완감’이라고나 할까. ‘상쾌한 긴장감’이나 ‘새로운 즐거움’은 상대적으로 발견되지 않았다.
세 명의 춤꾼은 이른바 ‘춤의 대중화’의 측면에서는 매우 바람직한 역할을 해내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자신이 추고 있는 ‘춤의 원류’와 연관해서는 다시금 자기 점검 내지 자기 수련이 필요하다. 오래 춘 사람으로서의 익숙함은 장점이라지만, 이 춤과 관련해서 특별한 공력을 인정하기엔 뭔가 주저하게 되는 면이 있다.
실제 최희선과 김병섭의 춤을 가까이 접해본 사람들이라면, 이들의 춤에서 어떤 거리감 같은 것이 느껴진다. 그래서 잘못됐다는 것도 아니고, 그래서 좋다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라는 거다. 이게 이들에게 있어서의 숙제가 아닐까 싶다. 다시 최희선과 김병섭에 대해서 더 깊이 연구해야 한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자신의 내공을 끄집어내서 ‘강민호류’ 혹은 ‘조도근류’가 되도록 뼈를 깎는 연구를 요한다.
세 사람의 춤은 상설 공연의 한 레퍼토리를 보는 느낌이었다. 어떤 춤꾼에게는 대중성이 부족한 것을 지적할 수 있지만, 이 세 사람은 오히려 이제 이런 대중성을 떠나서 자신만의 예술성을 무대에서 더 많이 보여주길 주문하고 싶다.
훗날을 기대해야 할 7인의 춤꾼
이주연의 교방굿거리춤은 안정적이나 생기가 충만했으면 좋겠다. 지금까지 서울교방 출신의 교방굿거리춤과 비교해서도 그렇고, 아직은 이 춤을 최주연의 주몽목으로 내세우기엔 약간의 아쉬움이 느껴진다. 하지만 최주연이 춤을 잘 추는 춤꾼임은 인정하게는 된다.
김현숙의 〈원향지무〉는 너무 태(態)에 치중한 건 아닐까. 80년대 창작무용극에 삽입된 전통춤의 한 장면을 보는 듯 아름답지만, ‘전통의 올곧음’ 내지 ‘전통의 정통성’과 연관해서는 수련의 시간이 더 필요할 것 같다.
박수은의 ‘진도북춤’은 성실했다. 그러나 북춤 특유의 에너지가 느껴지지 않았다. 말을 바꾸면 ‘춤’으로서는 어느 정도 인정할지라도 ‘북’으로서는 그렇게 되질 않는다.
정지윤의 ‘달구벌입춤’도 그렇다. 무난했다. 특별히 춤꾼의 어떤 특별한 매력이 내겐 발견되지 않았다. 단지 스승보다는 어떤 측면에서는 더욱 ‘대구적인’ 느낌이 있었고, ‘마당춤적’ 느낌도 있긴 했다. 전해진 춤 종목의 ‘계승’적 측면이 아니라, 이 춤의 갖는 매력을 확실히 포착하면서, 그 중에 어떤 것을 보다 더 내 춤으로서 ‘확산’시킬 수 있을까 연구해 볼 필요가 있다.
김한샘의 ‘태평무’는 마치 왕후와 같은 귀티가 느껴지면서 한성준, 한영숙, 박재희의 계보를 잘 잇고자 하는 마음도 전달되었지만, 김한샘 특유의 매력과는 아직 거리가 있었고, 마치 틀리지 않고 잘 하려는 이수자 시험과도 같은 인상도 받았다.
위송이의 ‘무산향’은 나무랄 곳은 없었다. 특별히 정재를 추었다는 것만으로 의미가 있긴 하다. 또한 국립국악원 스타일이 아닌 정재의 살아있는 증인 이흥구 선생의 춤을 잇고자 하는 측면에서 의미가 더 해진 건 분명했다.
유선후의 ‘승무’를 인정하긴 조심스럽다. 유선후의 창작춤의 경우 안무를 인정한다. 그러나 전통춤의 영역에서는 평가가 달라진다. 춤은 결국 ‘몸’을 어떻게 잘 다루느냐가 관건이다. ‘춤의 시각화’적인 측면에선 유선후의 창작춤을 인정할 수 있지만, ‘춤의 표현력’적인 측면에선 유선후의 전통춤은 그에 따르지 못한다. 춤꾼 스스로가 미학적 심리와 철학적 사고를 철저히 장착하고 춤판에 서고, 땅의 기운을 느끼면서 무게감을 추려는 ‘태도’는 전달되지만, 전통춤 특유의 긴장과 이완, 죔과 품, 혹은 신체의 움직임과 굴신(屈伸)의 자연스러움이 ‘자세’로서 특별히 인정할만한 단계는 아니었다.
일찍이 전통춤을 십 수 년을 해 온 춤꾼에게서 느껴지는, 어떤 종목의 춤을 추던가에 ‘입춤’으로부터 다져진 ‘오래된 수련에서 생겨나는 자연스러운 움직임’이 유선후에게선 아쉽지만 느껴지지 않았다. 특별히 멋과 맛을 ‘부리지 않는 것’과 멋과 맛이 ‘느껴지지 않는 것’은 완연히 다르다. 유선후 자신의 태도는 전자이겠지만, 관객의 입장은 때론 후자일 수 있다. ‘긴장이 없는 이완’의 흐드러짐이 그냥 흐트러짐이라면, ‘이완이 없는 긴장’의 다부짐이 아니다. 내적인 ‘다져짐’이 없는 외적인 ‘다부짐’은 한국춤의 경계해야 할 경직(硬直)일 뿐이다.
‘손, 어깨, 발’은 한국전통춤을 추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잘 다스릴 줄 안다. 그러나 의외로 ‘목, 허리, 무릎’을 잘 못 다루는 춤꾼이 많다. 한국의 전통춤을 잘 춘다는 것은, 결국 신체의 여러 뼈마디를 그 춤에 맞게 움직일 때 가능하다. 유선후는 매우 안타깝게도 후자였다. 춤의 깊이를 더 드러내고자 할수록 신체적 유연성이 좋아야 한다. 그걸 드러내지 않는 것과, 그걸 드러내지 못하는 건 다르다.
2024 ‘한국전통춤판’을 특별히 빛낸 10인의 춤의 장인들
이제 이번 춤판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10명의 춤을 언급하겠다. 30명의 춤꾼 모두에게서 개성과 매력을 찾을 수 있었지만, 여기서 10명을 특별히 언급한 건, 필자의 ‘취향과 가치’가 반영된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또 다른 중요한 이유도 있다. 그 춤꾼의 춤이 21세기에 더욱 가치가 느껴지는 춤이기에 호감도가 높았다. 한국의 전통춤은 이제 지난 세기의 미학적 언어에만 머물 수 없다. 이제 더 이상 한국춤을 한(恨)과 흥(興), 태(態)와 멋 등과 같은 용어 또는 개념 속에서만 파악해선 안 되는 신념(信念)에 연유한다.
20대의 빛나는 춤꾼: 수려한 김소연, 담백한 배우진, 명쾌한 정지수
김소연은 수려하다. 김소연의 ‘태평무’는 화려하지 않고 수려했다. 여배우로 치면 이하늬 같다고나 할까. 자신의 매력을 알고 있었고, 그걸 세계화시킬 줄 아는 능력을 갖추고 있어 보인다.
일찍이 춤을 잘 배웠고, 그런 춤을 지금 몸으로 잘 표현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김소연이 참 돋보였다. 한국춤에도 ‘아이돌’같은 개념을 도입할 수 있다면, 그게 김소연에게 딱 맞다. 오래도록 연습생으로서의 트레이닝을 잘 받아왔다는 것이 그대로 느껴진다. 그런 수련 과정을 거치면서 자신에게 잘 맞는 춤이 어떤 것인가도 현명하게 터득하고 있다. 그게 ‘태평무’였다.
‘강선영류 태평무’를 20대가 이렇게 안정감 있게 춤을 춘다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다. 한국춤으로 표현해 낼 수 있는 ’엘레강스‘한 세련미가 무엇인가를 알고 있다. 성실함과 현명함을 양날의 검으로 삼아서 훗날 크게 성공하는 예술가를 미리 보는 듯싶다.
배우진은 담백하다. 배우진의 ‘민살풀이춤’은 단정하기에 나올 수 있는 담백함이 존재한다. 여배우로 치면 김태리라고나 할까. 다른 사람과 비교할 수 없는, 자신만의 세계를 이미 장착하고 있었다. 20대의 춤꾼이 ‘힘을 뺄 줄 알고’ 춤을 추기보다는 ‘멈춰있을 때’ 에너지를 잘 다스릴 줄 안다는 것이 신중하다. ‘시크’한 매력이 있다고나 할까.
정지수는 명쾌했다. 정지수의 ‘설장고춤’은 명석하기에 나올 수 있는 명쾌함이 존재한다. 지성과 감성의 적절한 조화가 매우 자연스럽게 내재되어 있었다. 여배우로 치면 김태희라고나 할까. 지적인 아름다움과 세련미가 느껴졌다. 장구춤을 추면 보통 들뜨기 쉬운데, 20대의 정지수는 절대 그렇지 않았다. 매우 안정감이 있었다. 정재와 같은 전통춤도 잘 알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30대의 진지한 춤꾼: 고결한 하나경, 향기로운 김민지, 점잖은 김진우
하나경의 ‘입춤’은 고결했다. 경건함(piety)이 전달된다. 숭고한 성화(聖畫)앞에서 추는 춤 같기도 했다. 이 사람에겐 춤이 종교가 아닐까 싶었다. 하나경은 20대가 가지고 있는 신선함과 40대에서 농익은 에너지를 두루 품고 있었다. 춤꾼 안에 여러 스타일이 있는데, 그걸 배우로 친다면, 다양한 배역을 소화해낼 줄 아는 춤꾼이다. 이번에는 입춤을 소화해 냈는데, 정갈함을 넘어서서 숭고함까지 만들어낼 줄 알았다.
김민지의 〈산조춤 香〉은 향기로웠다. 생생함(graphicness)이 전달된다. 정교한 사실화를 보는 듯싶다. 춤꾼은 대체적으로 아름답다. 그런데 그런 춤을 보면서 꽃을 연상한다. 그런데 그런 춤이 마치 조화(造花) 같은 경우가 많다. 향기를 머금지 못했다. 김민지에게는 생화와 같은 신선함과 향기로움이 있었다. 꼭 〈산조춤 香〉 때문은 아닌 것 같다. 춤을 통해서 판타지를 만들어낼 줄 아는 춤꾼이었다. 그를 통해서 관객도 그런 경험을 할 수 있게 해주었다. 앞으로가 기대되는 춤꾼이다.
김진우의 ‘민살풀이춤’은 점잖았다. 젊은 춤꾼인데, 춤은 젊지 않았다. 부정적인 얘기가 아니다. 젊음의 들뜸이나 젊음의 과장이 없었다. 적절성(propriety)이 무엇인가를 알고 있었다. 지나치게 격식을 차려서 굳어지지도 않았고, 지나치게 방종을 해서 풀어지지도 않은 상태를 유지하면서 춤을 계속 이어갈 수 있다는 건, 그간의 춤의 수련이 매우 튼튼했다는 걸 증명한다.
전통춤의 가치를 확인시켜 준 4인방: 고재현, 최정윤. 강은영, 김수현
일반적으로 40대 이상이 꾼이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이 이른바 ’쪼‘다. 자기 스타일이 나오는데, 때로는 매우 올드하다. 매우 안타까운 사실은 정작 춤을 추는 자신은 그것이 올드하다는 느낌을 받지 못하는 거다. 그걸 자신의 춤의 특징으로 착각해서 안타깝다.
40대와 50대의 춤꾼을 지켜보면서, 이런 것을 참 안타깝게 생각되었다. 40대에서 60대에 이르는 춤꾼 중에서, 나의 취향과 안목, 또한 21세기 한국전통춤이 갖춰야 할 덕목과 가치의 측면에서 다음 네 명의 춤꾼이 확실히 돋보였다.
고재현은 쉴 줄 알고, 최정윤은 풀 줄 알고, 강은영은 놀 줄 알고, 김수현은 설 줄 알았다.
이번 춤판을 통해서, 가장 생생하게 기억되는 춤꾼은 고재현이다. 송화영의 춤을 진정 잘 잇고 있다. 어쩌면 송화영의 춤에 나타나는 여성성 혹은 교태미가 누군가에게는 거부감을 일으킬 수도 있겠으나, 고재현은 그렇지 않았다.
고재현의 ‘화문석입춤’은 말 그대로 ‘화문석’이란 공간의 가치를 제대로 알려주었다. 그 공간이 교방이나 기방일지라도, 화문석이라는 공간 위에서 추는 춤의 고상함이 전달되었다. 동작과 동작 사이에의 자연스러운 약간의 정지가 내겐 참 인상적이었다.
송화영의 춤세계를 ‘송화영 이상으로’ 잘 알고 적절하게 표현하는 이 춤꾼을 보면서, 나는 실장 조금 눈물을 찔끔 흘렸다. 일찍 세상을 떠난 송화영 춤꾼에 대한 아쉬움과 함께, 송화영의 춤이 이렇게 잘 이어지고 있다는 것에 대한 감격스러움이 합쳐졌다.
최정윤의 〈매향무(梅香舞)〉는 그 자신이 만든 춤이다. 인생을 살아오면서 삶과 고비마다의 정서를 춤을 풀어냈다. 최정윤은 풀 줄 아는 춤꾼이었다.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낼 줄 안다는 의미에서도 그렇다. 긴장과 이완, 곧 죔과 품의 교체가 자연스러웠다는 측면에서도 그러하다. 그러나 이 춤이 명작무가 되기 위해선, 앞으로 다듬어야 한다. 그의 삶의 더욱 성숙해지는 것처럼, 이 춤 또한 그렇게 최정윤의 삶과 예술과 함께 성장하길 기대한다.
강은영의 ‘진도북춤’엔 무슨 말이 필요할까. 일찍이 여성춤꾼 가운데서 북을 맨 모습이 가장 어울린 춤꾼이 최희선이었다면, 당대의 춤꾼 중에서 강은영이 가장 어울린다. 소리북을 다스릴 줄 아는 고수(鼓手)이기도 하기에, 강은영의 북가락에는 남다름이 있다. 강은영을 ‘여자 박병천’이라고 하는 건 허언(虛言)이 아니다. 몸과 북, 춤과 소리가 자연스럽게 습합(習合)되어서 구별되지 않는다.
‘한국전통춤판’의 최고의 연장자는 김수현이 아닐까. 김수현은 창작무용이나 안무가로서도 알려져 있지만, 꾸준히 연마한 ‘전통’ 혹은 ‘신전통’이 무대에서 빛을 발한다. 김수현은 ‘도살풀이춤’을 추었다. 도살풀이춤하면 떠오르는 세 분이 있다. 모두 김숙자 명무를 직접 사사한 분들인데, 이제 세월이 지나니 그들의 춤은 ‘김숙자류’이긴 분명하나 또 그 분 마다의 류가 된 것 같은 느낌도 받는다.
김수현의 도살풀이에서 김숙자의 도살풀이가 많이 보이는 건 큰 기쁨이었다. 그러면서도 김수현의 도살풀이가 현재진행형이라는 점이 더욱 끌렸다. 보통 옛 춤을 가져와서 중견춤꾼이 춤을 출 때는 ‘라떼’스럽거나, ‘꼰대’스러운 경우가 많은데, 김수현은 절대 그렇지 않다. 정말 김수현에게는 철들지 않는 그 무엇이 긍정적으로 작용하는 것 같기도 하다. 이건 어쩌면 늘 배우겠다는 학구적 태도와, 나는 아직 완성되지 못했다는 겸양의 태도로 인한 것 같다. 춤판에서 서 있을 때도 춤의 움직임이 느껴지고, 춤의 연장성으로 에너지를 전달받게 될 때, 그런 춤꾼이야말로 참 춤꾼이라 할 수 있다. 도살풀이를 추는 김수현이 그랬다.
네 명의 춤꾼에게선 설멋짐이 없었고, 참멋짐이 있었다. 영남춤축제의 ‘한국전통춤판’은 세대별, 지역별, 유파별로 안배해서 매년 30인을 선정해왔다. 내년에는 또 어떤 춤꾼들이 무대에 등장할까. 자신의 고유한 색깔을 유지하면서, 그 안에서 다양한 춤꾼들이 마음껏 기량을 발휘할 수 있는 영남춤축제에 박수를 보낸다.
글_ 윤중강(공연평론가)
사진제공_ 영남춤축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