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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척 잘했음에도 매우 안타까웠던 이유: 서울춤연구시리즈 1. 묵은 조선의 새 향기

대한민국에 훌륭한 무용 단체가 많다. 춤 잘 추는 단체가 많다. 춤은 춤으로 말하기에, ‘춤만 잘 추면’ 되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 말을 좀 바꾸면 ‘춤만 잘 추는’ 단체이기도 하다. 한국의 전통춤과 관련해서 춤만 잘 추면 다 되는 걸까? 내 생각은 좀 다르다. 


서울경기춤연구회를 주목해야 하는 이유 


전통춤이 전통춤인 이유는 무얼까? 무대에 올려진 춤이라는 연행(演行)이 과거 춤의 역사와 연결(連結)되어야 한다. 그게 명실상부한 전통춤이다. 그러기 위해선 필연적으로 연구(硏究)와 병행(竝行)하여야 한다. 춤의 역사에 관한 연구가 바탕이 된 춤은 확실히 다르다. 품격이 다르고, 깊이가 다르다. ‘묵은 조선의 새 향기’가 그러했다. (2024. 6. 11. 서울남산국악당) 


서울경기춤연구회를 왜 주목해야 할까? 전통춤과 관련해서 ‘연구와 연행을 병행’한다. 남겨진 자료를 최대한 찾아내고 공부하면서 거기에 ‘근거가 있는 상상력’을 더해서 전통춤을 무대에 올렸다. 서울경기춤연구회의 이런 노력을 뭐라 할 수 있을까? ‘전통춤의 전통성 회복’이다. 


전통춤이란 무엇일까? 전통의상을 입고 등장하고 전통음악에 함께 춤을 추는 춤은 모두 전통춤일까? 그렇게 말할 수 없다. 어떤 춤에서는 ‘전통성’ 그 자체가 느껴지지 않은 경우가 있다. 이런 춤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지 참 곤혹스럽다. 


음식과 비교하면 발효(醱酵)가 덜 된 것이다. 발효란 것이 ‘미생물이 탄수화물을 분해해서 에너지를 얻는 작용’이다. 전통에 기반을 둔 춤에서도 그런 과정이 느껴져야 한다. ‘과거의 춤을 분해, 즉 해석해서 그를 통해서 새로운 에너지, 즉 느낌이 신선한 작품을 만들어내야 한다.’


‘묵은 조선의 새 향기’에서 만난 일곱 작품 


서울경기춤연구회의 정기공연 ‘묵은 조선의 새 향기’는 비교적 앞에서 얘기한 내용과 근접했다. ‘묵은 조선의 새 향기’는 원래 한성준이 인터뷰한 것을 바탕으로 한 기사의 제목이다. (1938. 1. 6. 조선일보) 한성준 탄생 150주년을 맞는 올해, 서울경기춤연구회가 이런 공연을 만들어냈다는 게 뜻이 깊다. 


공연에선 모두 7개의 작품을 무대에 올렸다. 1937년 말 한성준은 조선음악무용연구회를 발족했다. (1937. 12. 28. 천향원) 이듬해인 1938년 두 번의 큰 공연이 부민관에서 열렸다. 서울경기춤연구회의 이번 작품 중에서 여섯 작품(신선무, 승무, 바라무, 군노사령무, 검무, 급제무)은 부민관 공연 레퍼토리와 같다. 


서울무당춤은 그 자리에 올린 작품이 아니다. 조선일보의 ‘묵은 조선의 새 향기’의 가무편은 2회에 걸쳐서 연재되었는데, 여기서 한성준의 대표적인 레퍼토리를 40개 언급했는데, 그 중 하나가 서울무당춤이요, 하나는 시골무당춤이다. 


신선무, 서울무당춤, 검무가 돋보인 이유 


일곱 개의 작품 중에서 가장 돋보였던 건, ‘신선무’와 ‘서울무당춤’이었다. 신선무는 이미 강선영 명무의 공연에서도 재현된 바 있고, 그걸 후세대가 매우 잘 이어가고 있었다. 신선의 윤종현, 학의 임윤수 이동환, 선녀의 황재윤이 마치 부민관 시절의 공연으로 안내해주는 듯 ‘전통춤’으로서의 ‘전통적 가치’를 충분히 담아냈다.


서울무당춤에서의 윤종현은 돋보였다. 발디딤새도 그러하거니와, 무엇보다도 처음부터 끝까지 일정한 긴장감을 유지하면서 관객을 몰입시키게 하는 능력이 돋보였다. 그동안 많은 ‘무당춤’을 보았지만, 특별히 ‘서울무당춤’으로 지칭한 춤은 크게 주목된 기억이 없는데, 이 작품을 갈고 다듬는다면 훗날 또 하나의 명작무가 탄생하지 않을까 기대하게 된다.





검무 또한 괜찮았다. 원래 한성준 일행의 공연에서 검무는 늘 대무(對舞)였다. ‘묵은 조선의 새 향기’에서도 박소영 김예지의 2인무였다. 1938년 2차례의 공연에서도 이강선(이선)과 장홍심의 2인무였다. 1993년 3월 27일과 28일, 호암아트홀에서 펼치진 명무전에서 장홍심이 출연했다. 첫째 날은 승무, 둘째 날은 검무를 소개했다. 이런 자료를 참고한다면, 한성준의 검무에 대해서 더 깊게 접근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1935년, 한성준은 부민관에서 개인발표회를 하지 않았다


승무와 바라무도 볼만했다. 그런데 이것은 꼭 짚고 넘어가야 한다. 프로그램북(팜플랫)에 실린 승무와 관련된 내용은 틀렸다. “한성준이 처음 승무를 무대에 올린 것은 1935년 부민관에서 열린 〈제 1회 한성준 창작무용발표회〉 공연이다”란 내용은 명백한 오류다. 


1935년 12월 10일, 부민관이 낙성 및 개관식을 거행하게 되어 2000명이 참석을 했다는 기사 등 이와 관련한 기사는 많다. 그러나 한성준이 1935년에 개인발표회를 열었다는 기사는 어디서도 찾아보기 어렵다. 왜 이렇게 된 것일까? 소설가 박용구가 쓴 〈풍류명인야화〉 명무 한성준 편을 이후 검증도 없이 계속 옮긴 탓이다. 


박용구의 글은 연도상 오류와 내용상 오류가 있었음에도, 그것을 모두 사실로 받아들여서 논문 등에까지 그대로 이어진 탓이다. 한성준 탄생 150주년이 되는 해인 2024년, 그간의 한성준 관련 모든 잘못된 기록이 바로 정정되길 바란다. 


승무는 ‘우아한 자태’ vs. 바라무는 ‘신묘한 재간’


승무는 한성준이 창작한 춤이라고 보기 어렵다. 이미 이전 조선의 경향(京鄕) 각지 권번에서 그 나름의 승무가 존재했기에 그렇다. 마치 아리랑이 한반도 여러 곳에 존재하다가 나운규의 영화 〈아리랑〉을 통해서, 요즘 우리가 부르는 아리랑(본조아리랑)이 정착한 것처럼, 부민관에서의 승무도 그렇게 보는 게 타당하다. 


한성준 일행의 고전무용대회와 관련된 기사에서 승무 설명을 여기에 옮겨본다. “승무는 조선의 고전무용 중에는 가장 순수하고 정화된 예술이다. 이강선양의 능숙한 연기와 우아한 자태가 더욱 승무를 빛나게 할 것이다” 


이 당시 이강선이 춘 승무엔 법고가 있었을까. 승무에는 언제나 법고가 있었던 것일까. 확실한 기록은 없다. 불교계의 반발 같은 내용도, 박용구의 소설 속의 내용에서만 발견된다. ‘승무 = 법고’라는 등식은 언제부터 고착되었을까. 예전엔 꼭 법고를 쳐야만 승무인 것도 아니었다. 승무는 ‘춤’만으로도 훌륭하게 존재했다. 오히려 이것은 승무가 무형문화재로 정착되면서, 법고(북가락)을 강조하면서 그리 인식된 경향도 강하다.




‘바라무’ 또한 이미 존재했으나, 오늘날까지 주요한 전통춤의 주요한 레퍼토리의 하나로 정착하는데 한성준의 역할이 컸을 것이다. 불교에서의 의식이 아닌, 극장이란 공연예술 공간에서 추는 바라춤을 말한다. 이에 대해서는 앞으로 다각도 연구를 요한다. 


조선음악무용연구회의 부민관 두 번째 공연에서는 鉢羅舞(僧舞), 곧 바라무(승무)라고 적혀있고, ‘바라춤’이라고 했다. “이 바라춤은 조선 유일한 고전무용입니다. 특히 이선(李仙)양은 이 무용연구회의 명성일 뿐 아니라 특히 이 바라춤에는 신묘한 재간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선은 이강선이다. 이강선은 조선음악무용연구회 이전, 조선성악연구회에도 가담해 공연했다. 전해지는 얘기에 의하면, 한성준과 내연(內緣) 관계로 실제적 부인 역할을 하는 이의 딸이다. 한성준은 이강선(이선)을 수양딸로 여기고 조선음악무용연구회에서 춤의 주역으로 큰 활약을 하였다. 


그러나 두 차례의 부민관 공연 이후 이강선은 자취를 감춘다. 훗날 한성준은 한 인터뷰에서 여성을 제자로 가르치면 결혼과 함께 집안에 들어앉게 되어서 아쉽다고 술회(述懷)한 바 있는데, 이는 수양딸 이강선을 두고 하는 얘기로 짐작된다. 한성준의 공연에서 승무와 바라무는 모두 홀춤으로 선보였다. 


‘고전무용대회’는 가무악희가 공존


부민관에서 열린 조선음악무용연구회의 ‘고전무용대회’라고 했다. 그러나 신문 기사에 나온 설명 등과 출연한 사람의 당시 활동을 살펴보면, 이 공연은 지금의 시각과 같은 춤공연이 아님을 확인하게 된다. 춤을 중심으로 해서 가무악희(歌舞樂戱)를 두루 보여주는 형식이었다. 


1938년 5월 2일 부민관 대강당에서 한성준이 이끄는 조선음악무용연구회의 공연은 전조선향토연예대회 (全朝鮮鄕土演藝大會)의 하나였다. 당시 광화문(태평로) 앞에 특설무대를 설치하고 공연이 펼쳐졌고, 부민관에서도 공연을 함께 한 이원무대였다. 이 때 한성준은 12개의 레퍼토리를 선보였다. 이 공연의 대성공에 힘입어서, 6월에는 당시 조선 문화계에서 큰 영향력이 있던 조광회가 주최한 초청 공연이었다. 


歌 노래로 이야기를 전달하는 춤: 단가무(短歌舞), 군로사령무

舞 춤 자체의 동작에 충실한 춤: 승무, 검무, 한량무, 학무, 살풀이춤, 태평무   

樂 연주를 중시하며 풀어낸 춤: 신선무(神仙舞), 사호악유(四皓樂遊) 

戲 놀이로 엮어낸 춤: 농악, 급제무, 상좌무, 사자무, 소경춤


1938년 6월 23일, 부민관의 같은 장소에서 열린 공연은 모두 14개의 레퍼토리가 있다. ‘전조선항토연예대회’의 야외공연장(광화문 특설무대)에서 인기를 끌었던 두 레퍼토리 수용하게 되는데, 하나는 농악이요, 또 하나는 맹인재담(소경춤)이다. 한성준일행의 두 개의 공연의 레퍼토리는 다음과 같이 가, 무, 악, 희로 나눠서 살필 수 있다. 


‘춤 자체의 동작에 충실한 춤’으로 분류한 종목인 한량무, 학무, 태평무, 살풀이춤도 보는 시각에 따라서 스토리텔링이 내재(內在)한 춤으로 볼 수 있다. 실제 춤을 극장공연 형태로 만들고자 했던 한성준에게 있어서 춤 속에 담아낼 수 있는 스토리는 매우 중요했다. 이건 그가 판소리의 고수로의 삶을 살았던 것과 유관하다. 판소리 자체가 이야기 아닌가! 춤을 통해서도 이야기를 전달하고 싶어 했던 한성준의 내재적 욕구는 한성준의 삶을 입체적으로 살피고, 한성준의 춤에 관한 기록을 보면 확연하게 드러난다. 


맹인재담(전조선향토연예대회) vs. 소경춤(고전무용대회) 


“장님이 갖은 재롱과 꼽추와의 여러 가지 포즈를 가지고 포복절도할 신기한 춤을 추게 될 것입니다” 한성준의 소경춤에 관한 설명이다. 한성준은 소경춤이라고 이름했지만, 실제 이는 ‘맹인재담’이라는 공연물이다. 전조선향토연예대회의 야외공연에 인기를 끌었던 레퍼토리가 ‘춤’이란 이름으로 거듭나게 된 공연물이다. 


박천복은 ‘춤꾼’이었을까. 아니다. ‘재담꾼’이다. 맹인재담을 연행한 박천복은 1960년대까지도 이 레퍼토리로 큰 인기를 끌었다.  주로 이은관, 김진환(김뻑꾹) 등과 활동했는데, 그들의 증언도 박천복은 ‘재담꾼’이다. 그와 함께 등장한 이정업도 춤꾼은 아니다. 원래 줄꾼(줄타기), 곧 승도(繩渡)가 그의 장기였으며, 고수를 병행하는 인물이었다. 


단가무의 조연옥, 조금향은 어떠한가? 당시 조선일보를 살피면, 단가무라는 것은 ‘한성준씨가 특별히 창작한 무용’으로 기록되어 있고, ‘이번 여기에 출연하는 조연옥 조금향 두 양은 노래에만 능(能)할 뿐 아니라 춤에 특별한 천품(天稟)이 있어서 이 창작된 춤을 살리기에는 가장 놀라운 재주를 가졌다’고 했다. 조연옥과 조금향은 남도명창(南道名唱)이다. 춤꾼이 아니다


둘이 콤비를 이뤄서 경성방송국(JODK)에 출연했고, 한성준이 다수 장단을 잡았다. 두 사람은 가야금병창을 하기도 했는데, 한성준은 이들의 기예를 바탕으로 해서 춤 레퍼토리로 만든 셈이다. 비유컨대 노래만 할 줄 아는 가수에게 춤을 가르쳐서, ‘춤추는 가수’로 데뷔시키는 것과 같은 이치다.



군노사령무(조선음악무용연구회) vs. 군로사령무(서울경기춤연구회) 

 

단가무에 성공한 한성준은 ‘군로사령무’를 만들었다. 역시 2인의 소리꾼은 조연옥과 조금향이요, 춤추는 두 사람이 합류했는데, 한영숙과 박농옥이다. 조연옥과 조금향은 주로 노래를 부르고, 한영숙과 박농옥이 군로사령 2인으로 분했던 것으로 알 수 있다. 이 춤은 ‘군로사령이 춘향을 잡으러 갈 때의 ’능청맞은 춤‘이라고 했다. 


임윤수와 이동환 2인으로 구성한 군노사령무의 도입부는 참 좋았다. 판소리 〈춘향가〉 중 ‘군노사령 대목’은 ‘설렁제(덜렁제)’라고해서 매우 호걸스러운 분위기다. 높은 소리로 호령하듯 질러내는 소리가 특징인데, 도입부는 이에 딱 맞았다. 그러나 이후로 갈수록 원래의 ‘군노사령무’와는 거리가 있게 느껴졌다. 


이 대목은 훗날 영화를 통해서도 이어지는 대목이다. 영화 〈성춘향〉(1961년, 신상옥 감독)에는 김희갑과 구봉서가 군로사령으로 분한다. 처음에는 당당하게 춘향을 잡으러 가지만, 술과 돈으로 매수한 월매의 기지로 인해서 만취해서 동헌으로 돌아온다는 매우 코믹한 부분이다. 실제 한성준의 춤이 남아있는 건 아니지만, 한성준은 딱 이런 드라마를 바탕으로 춤을 엮었을 것으로 짐작한다. 


급제무(조선음악무용연구회) vs. 급제무(서울경기춤연구회) 


서울경기춤연구회의 ‘묵은 조선의 새 향기’에서 가장 안타까운 작품은 ‘급제무’이다. 서울경기춤연구회는 김홍도의 그림 ‘평생도’를 참고하는 등 사전조사 등 노력했으나, 실제 한성준이 만든 ‘급제무’와는 꽤 거리가 있었다. 


급제무가 과거 급제자의 삼일유가에 근거한 춤은 분명하나, 선배관원 (한성준)과 신급제(이정업)이 있어야 했다. 새롭게 과거에 급제한 이가 자신의 스승과 선배에게 고마움을 표시하는 예가 있어야 했다. 그리고서 흥겨운 판을 벌린다. 


실제 한성준의 공연에선 ‘창우’라는 이름으로 3인이 등장한다. 이들은 모두 원래 춤꾼은 아니다. 그러나 분명 춤도 잘 췄으리라 짐작된다. 김봉업은 이정업과 함께, 1930년대 줄타기꾼으로 이름을 날렸다. 김세준은 소리꾼이자 고수로 활약했다. 김광채는 요즘말로 멀티맨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 경성방송국의 창극에도 출연하고, 신아위(시나위)를 연주했으며, 또한 고준성과 콤비를 이루면서 ‘팔도재담’으로 유명했다. 훗날 그는 전통공연예술의 기획자 역할을 했다. 그의 동생이 김광식으로 대금연주가이다. 이들 중 누군가가 과거 급제자의 본가(本家)에 홍패를 전하면서 기쁨을 알리는 ‘홍패사령춤’을 췄을 걸로 짐작된다. 


한성준의 삶을 알아야, 한성준의 춤을 보인다


조선의 예술을 가무악희(歌舞樂戲)라고 보았을 때, 한성준은 악희(樂戲)에 종사하면서 가무(歌舞)를 통섭한 사람이다. 노래는 실제 전문적으로 부르는 이는 아니었으나, 고수라는 친분을 통해서 노래 부르는 사람 이상으로 노래를 잘 알게 되었다. 그러면서 노래춤(단가무)을 만들어 냈다. 한성준의 춤을 복원하기 위해선, 한성준의 이런 삶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한성준은 궁중음악이나 선비음악(풍류), 민간 거상악(연회음악)에는 특별한 춤이 없다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면서, 이런 음악에는 이런 춤이 맞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조선음악무용연구회’를 조직해서, ‘음악을 기반으로 한 고전춤의 창작’을 해 낸 사람이다. 


이야기로 통하는 춤, 그림으로 읽히는 춤, 웃음을 동반한 춤 


한성준의 춤에서는 연극성과 회화성이 강조된다. 연극처럼 춤 속에는 이야기가 있다. 마치 동양화 속의 인물이 살아서 움직이고 있는 작품도 있다. 때론 코믹성이 강조된 작품도 있다. 이런 작품은 지금 제대로 전승이 되지 않아서 아쉽고, 실제 복원되기를 바란다. 


연극성이 강조된 작품으로 과거 급제한 사람의 행적을 보여주는 삼일유가(三日遊街)를 그려낸 ‘급제무’, 한량과 별감 사이에서 기생의 갈등을 깔고 있는 ‘한량무’가 있다. 회화성이 강조된 작품으로는 동양의 네 명의 신선이 바둑을 두고 차를 마시는 모습을 담은 ‘사호악유’, 동양화 속의 신선과 같은 고사(高士)의 모습이 그려지는 ‘신선무’가 있다. 


코믹성이 강조된 작품으로는 ‘군로사령무’가 있는데, 춘향을 잡으로 간 김번수와 박번수가 춘향은 잡지 못하고 술에 취해 돌아온다는 판소리 사설을 무용화시킨 작품이다. 소경춤은 1930년대부터 1960년대까지 크게 인기 끈 박천복의 ‘맹인재담’을 춤으로 만든 것으로, 여기에 이정업의 곱사춤이 함께 했다. 


‘이강선과 장홍심’에서 ‘한영숙과 강선영’으로 


1938년 부민관에서의 2회의 공연을 성공시킨 조선음악무용연구회의 인기는 대단해서, 한반도 전역과 일본 또한 만주까지 공연하게 된다. 그런데 달라지게 된 것은 부민관 공연의 두 주역인 이선(이강선)과 장홍심이 등장하지 않는다. 이선은 이후 예술활동을 중단한 것으로 보인다. 장홍심은 고향인 함흥으로 돌아가서, 그곳에서 활동을 이어가게 된다. 


그 이후의 공연에 등장하는 한영숙, 강춘자(강선영), 박연화, 한영순 등이다. 한영숙은 부민관 공연에서도 활약했지만, 이선과 장홍심이 조선음악연구회와 관계가 없어진 후 –벽사 한영숙 고희 기념집 ‘춤을 지키는 마음’에서는 ‘두 언니’라는 호칭으로 두 사람을 지칭하고 있다- 조선음악무용연구회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한성준 일행은 1941년 일본 공연을 성공한 후, 북선(北鮮, 한반도 북쪽지방)과 만주 순회공연에 나섰다. 모두 24인이다. 이 중 남성 14인, 여성이 10인이다. 남성은 거의 음악을 담당했다. 고준성은 만담이 주 종목이다. 10인의 여성 중에서 무용으로 주요한 역할을 이는 한영숙, 강춘자(강선영), 박연화 등이다. 이들이 태평무, 바라무, 살풀이 등을 담당했다. 함께 참여한 김초향 김명화 등은 춤을 전문으로 하기보다는 소리가 전공이다. 부민관 공연에서의 조금향, 조연옥의 역할을 그들이 이어받은 거다.



한성준 일행의 춤은 남아있지 않지만, 한성준일행의 음악은 남아있다! 


조선음악무용연구회는 이름 그대로 ‘음악’과 ‘무용’을 결합한 단체다. 조선의 ‘고전무용’을 공연한 단체이지만, 그 구성원에는 음악 쪽이 절반 이상인 걸 확인하게 된다. 한성준의 일행이 연주한 음원(유성기 음반)이 남아있다. 또 한성준 일행과 관련해서 함께 음악활동을 했던 이들의 제자가 역시 전통공연계에 계속 종사한 이들도 있다. 


한성준의 춤과 관련한 영상자료는 남아있지 않아도, 한성준의 음악과 관련한 음향자료는 꽤 남아있다. 한성준이 평생 함께 음악활동을 한 이들은 아주 분명하다. 모두 충청도 및 경기남부 출신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김덕진(해금), 방용현(대금), 심상건(가야금)이 한성준과 당시 호흡을 가장 많이 맞춘 연주가들이다. 조선음악무용연구회의 후진으로 이충선(피리, 대금)은 2차례의 부민관 공연에 모두 참여했고, 김재선(농악, 고수), 이정업(줄타기, 해금, 고수), 김광채(대금, 타악)는 한차례 참여했다. 


한성준의 춤은, 한성준의 음악을 모르거나, 그런 음악을 사용하지 않을 때, 그건 실제로 복원이라고 하기 어렵다. ‘서울경기춤연구회’의 이번 공연에서 가장 아쉬운 지점이 바로 이것이다. 참여한 악사가 모두 열심히 연주했음에도, 한성준 음악과는 거리가 있었다. 한성준이 남긴 유성기음반과의 연결성이 매우 약했다. 


한성준의 춤에는 어떤 음악이 사용되었을까? 여기의 몇몇의 예를 들어보자. 컬럼비아 고악단(古樂團)의 ‘굿거리 합주’(1940년 녹음, Columbia 40904(1 22834)가 있다. 춤에도 ‘기본무’가 있다면, 한성준 관련 음악에서 ‘기본악’이 바로 이것이다. 음반에는 ‘지휘 한성준’으로 표기되어 있고, 연주자들은 모두 조선음악무용연구회 소속으로, 부민관 공연 등에 관계했다. 


김덕진(해금), 정해시(퉁소), 방용현(대금), 심상건(가야금) 등이 1930년대 한성준 일행으로서 무용음악을 함께 연주한 악사들이다. 이런 전통은 이충선을 비롯해서 지영희, 김광채, 김광식 등에 계속 이어졌다. 실제 해방 이후 지영희를 중심으로 많은 무용음악이 만들어졌다. 


한성준의 ‘학춤’과 빅타조선악단의 ‘세령산’ 


한성준의 학춤은 어떤 음악을 사용했을까? 빅타조선악단이 연주하는 ‘세령산’이 있다. 역시 한성준 공연에 함께한 심상건, 정해시, 김덕진(김덕준), 한성준이 연주했다. 춤공연에서 학이 등장을 할 때 세령산을 연주한다. 극장공연에서 그런 전통이 확립된 것도, 한성준과 연관이 있다는 걸 확인하게 된다. 


한성준이 중심이 된 농악도 있다. 1930년대 후반, 충청도 지역 중심의 ‘매구’의 모습을 음악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빅터 유성기 음반(Victor Junior KJ-1004-A)에서는 ‘野外樂(야외악) 매구’로 소개되어 있다. 


한성준의 춤 공연을 이렇게 입체적으로 살피면, 실제 무대에서 춤을 추는 인원은 많지 않았음을 확인한다. 한 춤에 투입되는 인원은 4인을 넘지 않으며, 실제 춤을 전공으로 하는 인원은 8인 정도이다. 


승무는 1939년부터 한영숙이 주로 추었다. 세적(피리)는 지용구, 대금 방용현, 해금 김덕진, 장구 한성준 등 4인이 반주했다. 법고무는 김동옥, 강춘자(강선영), 한량무는 한영숙, 박연화, 강춘자(강선영)에는 3인이 추었다. 3인이 곧 한량, 대감, 기생으로 분한 것이다. 부민관 공연에서의 동기(童妓)는 빠진 셈이다. 부민관 공연에서는 등장하지 않았지만, 한성준은 독무로 훈령무를 추었다. 


이런 공연에서 심상건의 ’가야금병창‘, 방응교의 창극조(판소리)가 빠지지 않았다. 또 정해시가 ‘봉황곡(鳳凰曲)을 연주했는데, 이는 지금 국악계에서 말하는 ’봉장취‘에 해당한다. 한성준 일행의 도일공연의 사진 자료가 증명하듯이, 한성준은 고수와 춤꾼으로만 활약한 것이 아니다. 한성준은 연주가였고, 자신의 공연에서도 그러했다. 종적(縱笛)에 해당하는 피리, 퉁소 등을 불었다. 방응교는 충청도 출신의 판소리명창이다. 1930년대 방응교가 경성방송국(JODK)에 출연했을 때, 고수는 모두 한성준이었다. 두 사람의 관계가 얼마나 밀접한가를 알 수 있다. 따라서 한성준의 공연을 무용공연으로만 보긴 어렵다. 

 

음악을 통해서 춤을 복원하는 것이 수순 


’묵은 조선의 새 향기‘가 매우 진지하고 일정한 성과를 달성했음에도, 내가 가장 안타까웠던 점이 바로 이것이다. ‘묵은 조선의 새 향기’에는 한성준의 춤은 존재했어도, 한성준의 음악이 존재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조선음악무용연구회에 뿌리를 둔 한성준의 춤은 어떻게 재현하는 게 가능할까? 단언컨대, 춤만의 연구로는 불가하다. 우선 음악을 알아야 한다. 그를 바탕으로 춤을 복원하는 게 수순(手順)이다.



글_ 윤중강(공연평론가)

사진제공_ 서울경기춤연구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