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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부산국악원 무용단 〈춤, 남겨진 유산〉에 관객이 감동한 까닭: 한성준의 삶과 예술, 육하원칙에 담아내다


“늙은 몸에 오늘 이러한 광영(光榮)을 입게 되니 무엇이라 감상을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생각하면 여덟 살 때부터 조선춤을 전공하여 오늘에 이러한 표창(表彰)을 받게 된 것임에 앞으로 더욱 후진을 책임지고 지도해야 할 줄 알며 특히 이런 기회에 은퇴를 앞두고 손녀 영숙(英淑)을 나의 후계자(後繼者)로 만들게 되었다.” (1941. 5. 7. 매일신보) 


조부 한성준과 손녀 한영숙 


1941년 5월 6일, 제 2회 ‘모던日本’이 제정한 조선예술상 시상식이 반도호텔 (현, 롯데호텔)에서 열렸다. 한성준은 그 자리에서 손녀 한성준이 자신의 후계자임을 천명(闡明)했다. 다른 신문에는 한성준이 상패를 들고 한영숙이 함께 찍은 사진까지 게재했다. 


한성준은 자신의 인생이 얼마 남지 않음을 스스로 예감한 걸까? 4월 11일, 수상을 축하하는 모임이 일찍이 명월관에서 열렸다. 이 자리는 실제 한영숙 후원회를 조직하고자 하는 목적이었다. “그 자리에서 한양의 예술을 북돋고 전도(前途)를 격려하자는 뜻으로 한영숙후원회를 조직하자는 의견이 일치되어 연예협회를 중심으로 활동하게 되었는데 후원회의 결성을 보면 제 1회 무용발표회를 열리라고 한다. (1941. 4. 13. 매일신보) 


하지만 연예협회가 주최하는 한영숙 무용발표회는 열리지 못했다. 1941년 9월 3일, 한성준은 예산군 덕산면 복당리 자택에서 영면(永眠)했다. 한성준을 중심으로 음악인과 무용인들이 밤낮없이 드나들던 조선음악무용연구회(서울 경운동 47번지)도 역사의 장소로 남게 되었다. 


1941년 12월 25일과 26일 이틀간, 성보극장 (훗날 국도극장, 을지로 4가 310번지)에선 ‘故  한성준 추도 명창대회가 열렸다. ‘반도 연예계의 제 1인자’ 또한 ‘조선명창계의 중진과 제 1인자 총출연’이라는 광고처럼, 조선성악연구회와 조선음악무용연구회에서 활동하면서 한성준과 인연을 맺은 모든 이들이 무대에 올랐다. 


앞서 한영숙후원회를 조직했던 연예협회가 주축이 된 공연이었고, 한영숙도 출연해서 승무를 추었다. 그러나 이후 한영숙 개인 발표회는 열리지 못했다. 한성준 타계 후 한영숙의 삶은 어려웠다. 그 시절의 한영숙이 어떻게 활동하면서 어떻게 극복했는지는 다른 지면을 통해서 소상히 말하고 싶다. 

 

1960년대 초반, 한성준춤이 다시 시작되다 


한성준의 춤이 다시 꽃을 피우기 시작한 건, 1960년대 초반이다. 조선일보가 주최하는 공연(1955년)에 한영숙이 출연하기도 했다. 훗날 국악예술학교의 뿌리가 되는 민속예술학원에서 김소희, 박귀희와 함께 한영숙이 춤을 가르쳤다. 그러나 과거 부민관 무대의 대(代)를 이었다고 볼 수 있는 공연은 동아일보가 주최하는 명창명인대회! 


1962년 4월 11일. 동아일보 주최 제1회 명창명인대회가 시민회관 (현,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렸다. 1930년대-1940년대에 걸쳐서 조선樂과 조선舞로 이름 날린 이들이 다시 뭉친 이 자리에선, 한영숙의 승무, 김천흥의 탈춤이 선보였다. 둘 다 조선음악무용연구회 출신이다. 이듬해 1963년 5월 29일, 시민회관에서 열린 제2회 명창명인대회에서는 한영숙은 살풀이춤, 강선영은 승무를 추었다. 1940년 조선음악무용연구회 東京공연의 주역이 다시 뭉친 셈이다. 


한성준의 삶과 춤, 미화하지 않고 사실에 충실하다. 


국립부산국악원 무용단 기획공연 무용극 〈춤, 남겨진 유산〉은 왜 관객에게 큰 감동을 주었을까. (2024.9.6.-9.7. 국립부산국악원 연악당) 한성준에서 한영숙으로 이어지는 춤맥을 사실에 근거하여 보여주었기에 그렇다. 


한성준 탄생 140주년에도 좋은 공연이 있었고, 올해 한성준 탄생 150주년에도 좋은 공연이 많았다. 한성준은 사후(死後) ‘조선예술계의 지보(至寶)’로 추앙받았고, 1998년 9월 문화부가 ‘이달의 문화인물’로 한성준이 선정되어 ‘한성준의 달’이란 이름으로 여러 곳에 공연이 펼쳐지면서 한성준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후의 많은 공연이 그를 ‘민속무용의 개척자’로 크게 알려졌지만, 실제적으로는 한성준의 삶과 예술에 관해서 구체적으로 제시해 주면서 공감의 폭을 넓힌 공연은 많지 않다. 


대한민국 전통 공연에선 그간 선대(先代)의 명창명인, 명무명고를 추앙하는 공연이 부지기수다. 저마다 의미가 있는 것은 인정하지만, 이런 공연의 한계는 분명하다. 무대가 먼저 달아오르는 게 문제였다. 출연자가 미리 앞서서 존경심을 표하거나 때론 지나치게 미화했기에, 이에 반해서 객석의 감동은 줄어들었다. 무대의 감동에 그저 들러리를 서면서 손뼉이나 치면 되는 공연도 많았다. 


〈춤, 남겨진 유산〉은 딱 반대였다. 무대는 오직 한성준만을 내세웠다. 그리고 한성준의 입장에서 진솔한 얘기를 할 뿐이었다. 대본에서 최대한 미사여구를 자제하고, 진솔하고 담백한 문체(어투)로 접근한 것이 좋았다. 1938년의 한성준을 중심으로 해서 역사적 진실, 곧 사실(史實)에 근거하고 있다. 


1930년대 전통 예인에 딱 어울리는 정윤형 


〈춤, 남겨진 유산〉은 무용극이라 이름하였는데, 이런 형태의 무용극은 흔치 않았다. 극에 해당하는 인물은 딱 두 사람으로, 한성준 역은 정윤형(성악단), 한영숙 역은 박혜미(무용단)였다. 연극으로 치면 마치 모노드라마처럼 오직 한성준만이 대사를 할 뿐이다. 한영숙 역의 박혜미는 대사가 없다. 춤으로만 얘기하고 대답하는 모습이었다. 이렇게 한성준을 ‘오직 춤으로’ 표현한 것이 ‘신의 한수’라는 생각이 든다. 


한성준역의 정윤형은 참 잘 어울렸다. 판소리를 전공한 정윤형은 고제(古制) 판소리에 관심이 많았다. 예전 무형유산원 등에서 펼친 공연(이동백과 하규일)에선 이동백으로 분한 바 있다. 무용극 〈춤, 남겨진 유산〉에서 나레이터 겸 연기자로 분한 정윤형은 작품을 살린 일등 공신이라 해도 좋겠다. 대부분 무용극에선 억지로 만들어진 스토리가 부담스럽고, 때론 지나치게 짜맞춘 스토리에 관객은 지쳐간다.




 

〈조선고전무용대회〉 vs. 〈춤, 남겨진 유산〉 


한성준 (1874.7.25. 음6.12. - 1941.9.3.)의 생애 있어서 가장 기쁜 날은 언제였을까. 조선일보사가 주최하는 〈조선고전무용대회〉였음이 분명하다. 평생 조선춤의 맥을 잇기에 평생을 바친 한성준이 조선음악무용연구회를 발기(1937.12.28)한 후, 부민관에서 열린 첫 번째 발표회였기에 그렇다. 


〈춤, 남겨진 유산〉은 이날의 한성준에 초점을 맞춰서, ‘6하 원칙’에 의해서 근거가 확실하게 전개하고 있었다. 한성준이, 1938년 5월 2일 밤, 부민관 (府民館, 현 서울시 의회 자리)에서, ‘조선고전무용대회’라는 이름으로, 조선의 전통춤을 보여주면서, 1930년대 식민지 시대를 살아가는 경성시민에게 ‘조선의 자랑스러운 예술적 긍지를 심어준 공연’이 〈조선고전무용대회〉다. 


그동안 한성준과 관련된 자리에선 육하원칙이 정확하지 않거나, 잘못 알려지기도 했다. 〈춤, 남겨진 유산〉은 실제 기록과 사진을 보고, 가능한 현 상황에서 최대한 정확하게 접근하려고 한 태도를 높이 평하고 싶다. 


<조선고전무용대회>에선 모두 열두 작품을 공연했는데, <춤, 남겨진 유산>에선 그 중 넷을 선택했다. 그 넷은 무엇인가. 한성준에 의해서 무대화(舞臺化)되었고, 한영숙에 의해서 전승화(傳承化)한 작품이다.





‘전통춤의 사군자’, 한영숙에 의해 시작되다 


한성준의 춤에서 가장 ‘춤다운 춤’, 움직임이 매력적으로 강조된 레퍼토리는 무엇일까. 승무, 살풀이춤, 태평무, 학춤, 검무다. 한성준의 제자이자 손녀인 한영숙은 생전 특히 이 중에서 네 가지 종목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한영숙 명무는 이를 ‘춤의 사군자’라 했다. 한성준에서 한영숙으로 이어지는 춤에는 매란국죽이 존재하는데, 학춤이 매화, 태평무가 난초, 살풀이춤이 국화, 승무가 대나무이다. 


한영숙 명무 시절에는 늘 이런 시각으로 춤을 보았지만, 한영숙 명무의 타계 이후에는 그런 생각으로 한영숙류를 추거나 감상하는 일은 매우 드물었다. 〈춤, 남겨진 유산〉은 한영숙류를 주종목으로 계보를 잇고 있는 복미경 예술감독이 한성준의 춤을 어떻게 진지하고도 편하게, 그러면서 대극장에 맞는 작품으로 거듭날 수 있는가에 대한 연구의 결과라고 보여진다. 


다시 강조하건대, ‘춤의 사군자’라는 말은 한영숙에게서 시작되었다. 한성준은 실제 그런 용어를 쓴 바 없다. 그러나 자신이 만든 작품 중에서 특히 춤 자체의 측면이 강조되는 이들을 중시한 것은 분명하며, 특히 승무 태평무 살풀이춤은 한영숙을 통해 잘 전승되길 바라는 마음이 컸다는 건은 한성준과 관련한 여러 기록의 행간을 통해서 전해진다. 


신성한 학춤, 질탕한 태평무, 흥겨운 살풀이춤, ‘순수하고 정화된 예술’ 승무 


한성준은 이 네 가지 춤의 본질(특성)을 뭐라 했을까. 학춤은 ‘신성한 춤’이라고 했다. 학춤이 신성(神聖)이라면, 태평무는 질탕(佚蕩, 跌宕)이다. 신이 나서 그 정도(程度)를 넘긴 상태를 말한다. ‘이 땅에 평화를 가져 옮을 상상한 춤’이 태평무이다. 평화로운 시대를 맞아 궁중에서 벌어지는 질탕한 잔치에서의 춤이라고 했다. 살풀이춤은 요즘과 같이 한과 연결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다 웃음과 해학이 춤있는 춤이고, 살풀이춤 ‘흥에 겨워 추는 춤’이라고 했다. 


승무는 무엇이라 했을까. 조선음악무용연구회의 부민관 공연에서 주역으로 활약한 이강선(이선)을 예로 하면서, 승무는 ‘능숙한 연기’와 ‘우아한 자태’가 조화를 이루어야 하며, 조선에서 ‘순수하고 정화된 예술’이라고 했다. 다른 춤과 다르게 승무만큼 ‘예술’이란 단어를 사용한 건 그저 지나칠 순 없다. ‘승무’가 한국 전통춤에서 시작이자 끝이라는 시각이 한성준과 한영숙에게 크게 자리하고 있었음은 분명하다.


이번 공연의 춤의 네 종목은 사군자의 매란국죽과 같이, 학춤 태평무 살풀이춤 승무로 전개되었다. 도입부의 학춤은 좋았다. 학춤은 복미경 예술감독은 국가무형유산 학연화대무 이수자이기도 한데, 지난번 정기공연에서의 ‘학’에서와 같은 스토리텔링은 배제하고, 연악당 무대를 여러 마리의 학으로 품격있게 채우고 있었다.




 

태평무, 원래 여성 2인이 왕과 왕비가 되어 추는 춤 


〈춤, 남겨진 유산〉에서 매우 반가웠던 건, 태평무가 2인무였고, 왕와 왕비를 모두 여성으로 설정했다는 점이다. 실제 한성준이 그랬다. 왕은 이강선(이선), 왕비는 장홍심, 2인무로 춤을 췄다. 이후에는 한영숙 강선영의 2인무였고, 한성준이 타계한 후에는 한영숙과 한영순의 2인무로 이어졌다. 


〈춤, 남겨진 유산〉에서 손효진(왕)과 김동후(왕비)의 태평무는 춤이 영글었다곤 할 수 없다. 그들은 한성준을 기리는 이 무대에서 태평무를 췄다는 사실이 큰 자부심이 될 것이다. 이런 자부심이 사명감이 되어서, 태평무 2인무가 앞으로 더욱 보편화되길 희망한다. 한성준이 혼자 춘 ‘왕꺼리’(왕의 춤)이 아닌 ‘태평춤’과 ‘태평무’라는 이름한 춤은 분명 한성준이 왕과 왕비를 설정해서 2인무로 만든 작품임이 틀림없다. 


한성준의 살풀이춤엔 웃음과 해학이 있다! 


〈춤, 남겨진 유산〉에서 특별히 눈 여기게 되는 춤이 ’살풀이춤‘이다. 살풀이춤은 무속과 연관해서 액을 푸는 춤이고, 여성의 한이 담긴 춤이란 건 대체 언제 어디서 누구에 의해서 시작된 살풀이춤과 관련된 설명일까. 1938년에 부민관에서 2회에 걸쳐서 펼쳐진 살풀이춤은 여성 3인 혹은 여성 4인의 춤이다. ‘


살풀이춤’과 관련한 한성준의 해설에는 한(恨)이라는 글자가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웃음과 해학이 있는 흥(興)에 춤이 살풀이춤이라고 정의를 하고 있다. 한성준의 춤의 레퍼토리 중에서 가장 ‘젊은 여성’ 또는 아름다운 고결한 ‘여성성’이 잘 담고 있는 춤이 ‘살풀이춤’이다. 1960년대 이후 고착된 ‘살풀이춤 = 한’ 이란 등식에서 벗어나야 하는데, 이번 〈춤, 남겨진 유산〉 그런 계기는 된 것 같다. 이번 무대의 ‘살풀이춤’에서 그리 밝고 활기찬 분위기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쳐지고 어두운 분위기에서는 일단 벗어난 것이 다행이다. 


한성준의 살풀이춤은 기방춤이 아니다! 


일제강점기의 조선예술을 정한(情恨) 혹은 한(恨)으로 보는 시각은 앞으로 재검토될 필요가 있다. 이는 일본에서 민예론(民藝論)을 내세운 야나기 무네요시와 같이 일본 지식인들의 선입견적인(고정관념적) 시각의 연장선일 수 있다. 잃어버린 나라에서 사는 쓸쓸한 백성을 바라보는 연민(憐愍)과도 같은 시각으로 조선의 민속예술, ‘살풀이춤’ 등을 바라보는 시각은 앞으로는 정정되어야 하며, 살풀이춤이 담고 있는 ‘흥의 정서’가 복원될 필요가 있다. 


한성준이 생각한 살풀이춤은 엎드려 흐느끼거나 살풀이천을 입에다 무는 ‘기방춤’이 절대 아니다. 봄날 처녀들의 설렘을 표현한 춤이라는 게 오히려 더 맞다. 수건을 마치 너울처럼 두르고서 맵시를 뽐내기도 하는 춤이었을 것으로 짐작한다.




살풀이춤, 한성준 일행의 음원부터 복원해야


이러기 위해서는 살풀이춤의 반주음악의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조선고전무용대회〉에서 한성준 일행이 지금의 살풀이춤과 같이 남도(南道)식, 계면조. 특히 그 계면의 농도가 짙은 ‘진계면’으로 반주했다는 건 도저히 연결되지 않는다. 살풀이춤의 반주가 지금과 같이 ‘육자배기 토리’라는 건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특히 ‘구음시나위’는 더더욱 아니다. 


살풀이춤의 반주음악으로 한성준 일행의 합주를 들어봐야 한다. 콜롬비아 레코드에 녹음된 굿거리 합주(1940년를 듣고 또 들어볼 필요가 있다. 이 음원의 선율구조, 악기편성, 분위기 등을 참고해서 복원할 때, 진정한 한성준의 살풀이춤이라 하겠다. 한성준은 살풀이춤을 ‘웃음과 해학과 통속미’가 있는 춤이라 했음을 상기해야 한다. 

 

살풀이의 음악을 ‘남도시나위’로 한다거나, ‘구음시나위’로 해서 계면조 중심으로 전개된 건 1960년대 새롭게 만들어진 ‘신전통’으로 짐작된다. 우리는 그런 ‘신전통’을 지금 ‘전통’으로 착각하는 거다. 한성준의 조선음악연구회와 조선음악연구회에서 음악과 관계된 인물을 떠올려 보라. 그들이 그렇게 ‘진한 육자배기 토리’의 반주음악을 했을까. 특히 구음을 했다는 건 상상하기 어렵다. 


한성준 일행의 기악음악을 보면 ‘신아위’란 기록이 많다. 실제 연주를 할 때 염불 타령 신아위 굿거리로 이어지는데, 신아위(시나위) 또는 굿거리를 주목해야 한다. 요즘 분류법에 따른다면, 한성준 일행은 결코 남도시나위를 연주하지 않았고, 경기시나위라 불리는 음악을 연주했을 가능성이 훨씬 높다. 


승무, 실력 내지 공력의 편차 


‘승무’에서 단원의 실력 혹은 공력의 편차가 드러났다. 창작춤을 전문으로 하거나, 전통춤과 창작춤을 공존하는 국시립무용단체의 단원 중에 승무를 제대로 못 추는 단원들이 분명 있을 거다. 국악 전공자가 영산회상 한바탕과 산조 한바탕을 꾸준히 익히는 것과 마찬가지로, 한국춤 전공자들도 승무를 늘 익히는 춤꾼들이 많이 있겠지? 몇몇 사람의 승무는 다소 아쉬웠다. 몇몇 춤꾼은 균형감을 상실하고 다소 위태하게 보였다. 


‘창작춤’을 하면서 여러 춤을 접하게 되면 춤의 테크닉적인 면에서는 발전할 수 있겠지만, 그런 테크닉이 늘어가는 게 자신의 춤실력(춤집)이 늘어가는 것이라고 착각해선 곤란한다. 결국 전통춤에 대한 꾸준한 수련이 없이는 ‘스스로를 속이고, 관객까지 속이는’ 춤의 현혹(眩惑)스런 동작만 늘어갈지 모른다. 국악인들에게 영산회상과 산조가 그러하듯이, 승무도 춤꾼에게 있어서 자신이 지금 어느 수준에 있는지, ‘춤의 현주소’를 알려주면서 ‘반성과 도약’의 계기가 될 것이다. 이번 〈춤, 남겨진 유산〉에서 승무를 맨 마지막으로 설정한 건 이런 측면에서 볼 때도 매우 유의미하다. 

 

안선우 & 이왕수 콤비의 수작 


〈춤, 남겨진 유산〉은 한성준이란 인물을 내세워 춤에 익숙하지 않은 관객에게 이런 춤을 이해하는 방식이 깨끗했다. 이런 에듀테인먼트 (edutainment)라고 하겠다. 공연이라는 흥밋거리를 안에서, 그 공연이 담고 있는 역사성과 예술성을 동시에 알려주는 교육적인 효과가 컸다. 관객은 ‘즐기면서 배우게 되는’ 형식에 만족한 거다. 그러면서 마지막에 부민관 공연을 끝내는 것과 동시에 마지막 한성준의 멘트를 통해서, 한성준이란 인물의 퇴장(죽음)을 보게 되고, 마치 유언(遺言)처럼 남기는 ‘전통춤’이란 유산의 가치에 올곧게 인식하게 된다. 


21세기의 기술과 테크닉에 의존한 공연이 팽배한 현실에서, 〈춤, 남겨진 유산〉은 아날로그적 공연이 오히려 관객에게 더 깊은 울림을 줄 수 있음을 알려주었다. 국립부산국악원 연악당을 부민관 무대를 설정하여 ‘노 세트’로 간 것도 좋았다. 이왕수 연출은 무대 중앙에 작은 중정(中庭)을 만들어놓고 거기에 악단을 배치했다. 한성준도 여기서 등장했고, 춤이 펼쳐질 땐 거기 앉아서 보았다. 한성준이 이끈 단체가 ‘조선음악무용연구회’라는 이름처럼, 춤이 그저 반주 역할을 하지 않는다는 것도 상징적으로 알려주는 의미도 느끼게 되었다. 


한성준이 부민관 전체 공연을 보고 나서, 뒷모습을 보이며 걸어가는 모습, 이게 바로 이 공연의 또 하나의 하이라이트였다. 관객은 뭔가 뭉클해지고 숙연해지는 심정을 경험한다. 그동안 여러 형태의 전통 공연에서 콤비를 이룬 ‘안선우 작가와 이왕수 연출이 만들어낸 또 하나의 수작’이었다. 


〈대청여관〉에서 빨랫줄에 걸린 천으로 살풀이춤을 춘 김성수 


앞에서 말했듯 한성준은 정윤형이 맡았는데, 6인의 무용단 단원(서한솔, 이동재, 신명관, 박세준, 이시원, 정동영)이 한성준 분신이 되었다. 이들은 복미경(재구성안무), 박숙영(안무자, 조안무), 김성수(조안무)의 지도하에 정적(靜的)이고 처질 수 있는 무대에 생동감을 불어넣는 역할을 했다. 이런 남성단원의 움직임의 저변에서 김성수의 안무적 능력을 재발견하게 된다. 


국립부산국악원 단원 김성수는 ‘어느 순간, 캐릭터를 포착해서 춤으로 살려내는 능력’이 출중함을 확인한 바 있다. 예전 국립부산국악원에서 국악극 〈대청여관〉(2016-2019)을 공연했다. 피난 시절 부산 대청동을 중심으로 한 이야기인데, 그 중 한 장면에서 빨랫줄에 걸린 흰 천을 가지고 즉흥적으로 살풀이춤을 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예술이란 건 ‘순간을 영원으로’ 만드는 것에 의미를 두는 인간의 행위라면, 김성수는 이런 것을 잘 할 수 있는 기본적 심성과 잠재적 능력을 충분히 갖춘 것으로 보인다. 


국립부산국악원, 춤공연 제작에 특화된 노하우 


이번 공연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한성준에서 한영숙으로 이어진 ‘한영숙류’의 춤맥을 꿰뚫고 있는 복미경 예술감독이 있었기에 가능하다는 건 거의 모두 다 인정하는 사실일 듯하다. 


단기간에 작품을 제작했음에도, 교육적인 측면과 공연적인 측면을 전제하에 예술성과 대중성을 모두 만족시킨 작품이 탄생한 것이 매우 기쁘다. 이는 오래도록 춤을 바탕으로 해서 공연물을 제작하는데 노하우가 쌓인 국립부산국악원의 제작 시스템의 튼튼한 받침이 있었기에 가능할 것이다. 시민 관객이 한 장면도 놓치지 않고 즐겁게 몰입할 수 있도록, 한성준에서 한영숙으로 이어진 춤의 네 종목을 한 시간에 딱 압축했다는 점도 높이 산다. 일회적으로 끝나기에는 너무도 아깝다.



글_ 윤중강(공연평론가)

사진제공_ 국립부산국악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