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으로 오랜만의 내한이었다. 필립 드쿠플레의 <샤잠!(shazam!)>을 본 것은 1999년. 춤을 공부하던 내게 이 작품은 커다란 충격을 안겨주었을 뿐 아니라 춤을 바라보는 시각을 새롭게 해 주었다. 3차원의 무대와 2차원 영상의 마술 같은 충돌과 그것이 빚어내는 새로운 바라봄의 시선, 레이저 홀로그램과의 이인무를 통한 가상과 현실의 조우, 배경막에 지나지 않았던 영상은 주인공 못지않은 역할로 진출하여 실제 무용수와 춤을 주고받았다.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환상적인 향연이나 매체간의 혼합이 작품 전반을 지배하며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냈지만 결코 몸 움직임을 등한시 하지 않았기에 더욱 인상적인 작품이었다.
이듬해 내한 공연을 했던 <트리통(Triton)>은 <샤잠!>과는 다른 방식으로 관객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했다. 극대화된 마임과 우스꽝스러운 광대의 서커스를 통해 발산되는 유머와 유쾌함은 <샤잠!>에서 보여줬던 다매체적 융합과는 또 다른 한 편의 쇼였다. 그것은 드쿠플레가 초기부터 뿌리를 두고 있었던 마임과 서커스적 요소였으며 프랑스적 색채가 담긴 드쿠플레만의 매력이었다.
<파노라마(Panorama)>는 지난 30년간의 작업이 90분 안에 응축되어 있어 드쿠플레의 다면적 매력을 한꺼번에 맛볼 수 있는 작품일 것으로 기대가 컸다. 앞서 말한 <샤잠!>과 <트리통>뿐 아니라 초창기 작품인 <텅빈 카페>(1983), <점프>(1984), 그리고 이후 작품 <쁘띠뜨 삐에스 몽테>(1993), <데코덱스>(1995) 등의 장면들이 발췌, 변형되었다. 작품을 그대로 재현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춤추는 공연자들에 맞게 동시대성을 고려하여 재조합되었기 때문에 30년이 지난 것이라도 전혀 촌스럽거나 철지나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이 구사하는 유머는 관객 대중들의 공감대를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드쿠플레가 한국에서 이처럼 인기가 있었나?” 싶을 정도로 객석에서는 시종일관 유쾌한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드쿠플레는 이번 공연에서 전적으로 즐거움과 유쾌함을 선사하려고 했다. 아직 공연이 시작되기 전 극장 로비가 갑자기 떠들썩해지면서 등장한 공연자들은 악대 퍼레이드를 펼치며 손님몰이를 하였고 이어 극장 안에서도 축제 분위기를 한층 끌어올렸다. 그리고 시작한 본 공연은 춤과 서커스, 그림자놀이와 우스꽝스러운 몸 극의 연속으로 이어졌다.
아치형 철제 구조물이 드러나 있는 무대 양 옆에는 분장실을 옮겨놓아 공연자들이 땀을 닦고 의상을 갈아입는 모습, 등장 전에 대기하는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일반 관객들은 이마저도 꽤 흥미롭게 바라보고 있었다. 춤은 다소 난해하며 지루한 것이라는 통념을 유머와 재치로 뒤엎는 힘은 드쿠플레만의 매력이 확실했다.
남녀 무용수가 도르래를 사이에 두고 늘어진 줄의 양쪽 끝에 서로의 몸을 묶고 번갈아가며 오르내리며 춤을 춘다. 한명이 우아한 비상을 할 때 다른 한 명은 바닥을 기어 다니며 우스꽝스러운 발버둥을 치기도 한다. 혹은 와이어를 단 공연자들이 소파를 텀블링 삼아 무대 위를 비상하는 아크로바틱 서커스를 즐긴다. 건장한 육체의 흑인 공연자는 이미지와 다르게 엉덩이를 씰룩거리는 발랄한 움직임으로 박장대소를 자아낸다. 문어나 미생물, 혹은 외계인처럼 보이기도 하는 그로테스크한 의상을 입고 무대 위를 배회하는가 하면, 세 명의 남성 공연자들이 벤치에 앉아 절묘한 타이밍으로 움직이는 시차놀이를 즐긴다.
객석에서 가장 많은 호응을 얻은 장면은 공연자들이 게임 캐릭터로 분하여 파이트 게임을 겨루는 부분이다. 컴퓨터 게임 속 캐릭터가 된 공연자들은 각종 기술을 구사하며 상대방을 무찌른다. 게임 사이사이마다 하이힐을 신고 라운드 걸을 자청한 남자 공연자를 보고 관객들은 또 한 번 박장대소를 한다.
장면 사이사이에 설명을 곁들이며 놀라운 손가락 그림자극과 몸놀이를 보여준 매튜 펑쉬나와 그의 통역자 역할이자 또 한 명의 빼놓을 수 없는 공연자이기도 한 우리나라 배우 장재호의 조합은 매우 성공적이었다. 드쿠플레의 작품에서 대사는 자막처리를 하여 메시지 전달하는 데 치중하기보다는 소리와 대사 그 자체의 청각적 자극 자체가 공연의 일부가 되기 때문에 해설자의 역할이 더욱 중요하다.
30년이라는 시간적 간극에도 불구하고 관객들의 큰 호응을 받는 작품으로 재탄생시킨다는 것은 동시대의 관객들과 소통할 수 있는 코드를 만들어내는 드쿠플레의 능력일 것이다. 그러나 과거 그의 작품에서 받았던 새로운 충격을 기대했던 나로서는 그 때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 들어 조금 아쉽기도 했다. 1992년 알베르빌 동계올림픽 개막식에서 드러났던 그의 천재성, <샤잠!>에서 목격한 다매체의 놀라운 조화, 가상과 실제를 넘나드는 무대예술의 극치, 이를 통해 상상해보았던 디지털 시대 공연 예술의 미래를 이번 <파노라마>에서는 찾기 힘들었다. 이는 그의 상상력이 고갈되었다기보다는 그가 했던 많은 시도들이 이제는 더 이상 새로운 충격이 아니게 된 때문일 것이다. 이미 지금 시대의 많은 공연들이 그가 시도했던 유산을 실현하고 있다. 지금은 드쿠플레 스스로에게 있어서도 한 숨 돌리며 자신의 발자취를 되새겨보는 시기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그의 엉뚱하고 기발한 상상력과 재치는 이번 작품에서도 충분히 발현되었다. 그러하기에 드쿠플레에게 마술과 같은 놀라움을 끊임없이 기대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글_ 편집장 이희나(한국춤문화자료원 공동대표)
사진_ LG아트센터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