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공연이란 무엇일까? 공연을 보면서,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과거의 인물’을 떠오르게 만드는 공연이 좋은 공연이라 생각한다. 좋은 기획이란 무엇일까? 공연기획자가 무대에 출연한 인물을 통해서, 과거의 인물과 연결고리가 확연하게 느껴지게 만들어 줄 때, 성공한 공연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공연을 만났다. 2024년 비지정문화재 영남민속전통연행물 공연 첫 번째 ‘천자만홍’이 딱 그랬다(2024. 9. 27. 국립부산국악원 연악당).
과거의 그 사람 vs. 무대의 이 사람
‘천자만홍’은 예술학박사이자 춤패 바람의 강주미 대표가 기획 연출했다. 기획 의도가 아주 분명했다. ‘문화정책적 보호나 육성의 정책에서 소외된 연행물들을 공연함으로 영남춤의 감성을 확장해 보는데 그 의도’가 있었다.
천자만홍(千紫萬紅)이란 공연을 보면서, 금상첨화(錦上添花)가 연결되었다. 좋은 공연은 마치 꽃과 같았고, 좋은 기획은 꽃을 더욱 값지게 만들어 준 비단과 같았다. 공연이 끝난 후 이런저런 말이 참 많은데, ‘금상첨화’는 고객만족도가 아주 높은 공연이라는 후문이다.
기획자 강주미는 영남지역의 소외된 ‘연행물’에 초점을 맞췄지만, 나는 그것을 통해서 이미 이 땅에 존재하지 않은 ‘연행자’에 대한 생각을 더 깊게 했다. 이미 존재하지 않은 과거의 인물이, 지금 무대 위에서 존재하는 인물을 통해서 새롭게 혹은 다시금 만나는 이 기분을 뭐라 표현할 수 있을까.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특정 지역의 민속예술을 만끽하는 묘한 쾌감을 어떻게 말해야 맞을까.
‘천자만홍’에는 지금 무대에 뚜렷이 보이는 다섯 예인이 있었고, 그들의 내면에는 지금은 존재하는 인물이 존재하는 것처럼 보였다. 운심(雲心), 강태홍, 정윤화, 박금슬, 김희상. 이 다섯 사람은 지금 이 땅에 존재하지 않는 예인이다. 김은희, 김온경, 박종환, 국수호, 강주미, 무대 위의 다섯 사람은 앞의 다섯 사람을 만나게 해준 매우 특별한 예인이었다. 나는 이 공연을 보면서 ‘또 다른 확장성’을 생각하게 되었다. ‘과거의 그 사람’과 ‘무대의 이 사람’을 연결 지으면서, “영남춤 혹은 한국춤이 어떻게 ‘감성적 확장’이 가능할까?” ‘천자만홍’은 나에게 또한 많은 사람에게 이런 화두를 던져 주었다.
앞으로 이 공연이 어떻게 시리즈물로 정착할지 기대되고 설렌다. 이 공연이 성공적이었다는 건, 나도 알고 남도 안다. 따라서 공연의 세세한 얘기는 여기서 삼가겠다. 이 글은 단순한 공연에 대한 리뷰가 아니라, 이러한 양질(良質)의 공연을 통해서 앞으로 ‘영남춤 또는 한국춤은 어떻게 더 감성적인 확산이 가능할까?’라고 차후의 과제를 생각하면서, 내가 아는 사실(史實)과 정보를 공유하면서 거기에 내 생각을 덧붙인 글이다. 강주미의 기획이 비지정문화재 (非지정 문화유산)에서 출발했듯이, 국가무형유산이나 시도무형유산으로 지정되지 않은 종목과 그와 관련된 인물에 관해서 우리가 앞으로 더욱더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웅변적 논조가 이 글의 밑바탕에 깔려있음을 특히 강조함을 역설한다.
운심과 김은희, ‘청성잡기’에서 ‘무예도보통지’까지
『청성잡기(靑城雜記)』에는 “밀양기생 운심이 한양으로 뽑혀왔는데, 그는 검무로 온 세상에 이름이 있었다”고 적혀 있다. 기생 운심(雲心)은 18세기에 활동한 춤꾼이다. 영조 때부터 정조에 이르기까지 살았다고 한다. 그의 스토리는 널리 알려져 있는데, 그중 하나가 묘향산소기(妙香山小記). 박제가는 묘향산 유람을 유람하다가, 용문사라는 절에 들렀다. 거기서 가무를 관람했다. 그때 검무를 보고 감동을 받았는데, 그녀가 바로 운심의 제자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운심은 밀양 출신이란 내용이다(近世舞劒, 稱密陽姬雲心, 此盖弟子).
밀양 태생의 김은희는 밀양의 역사와 민속에 밝고, 그와 연관된 춤에 관한 고증적 연구에 몰두해 온 인물이다. ’천자만홍‘에서 ’밀양검무‘는 김은희와 이미나의 대무(對舞)로 펼쳐졌다. 이 공연이 끝난 다음 날, 밀양검무보존회 김은희 회장은 운심 묘소를 찾았다. 밀양시 신안면 운심의 묘소가 재발견된 건 2003년 9월의 일이라 한다.
소설가 김춘복이 고향 밀양으로 돌아와 밀양의 인물을 탐구하던 중, 문헌 속에 존재하던 운심을 발견하고 현장을 찾아가 그의 묘소를 확인한 것으로 전해진다. 운심에 관한 얘기는 철저한 고증과 작가적 상상력이 더해져서, 소설로 출판되었다. 운심은 잘 보존되었는데 안타깝게도 2006년 장마로 인해서 사라졌다. 그러함에도 매년 밀양검무보존회(김은희 회장)는 음력 9월 9일에 제향을 지낸다고 했다.
앞의 소설의 출간과 더불어 김은희 회장은 이렇게 추천사를 쓴 바 있다. “밀양검무의 창시자인 운심이의 생애와 사상을 복원함으로써, 60년 넘게 춤만 추어온 내게 ‘나는 왜 춤을 추는가, 누구를 위하여 춤을 추는가?’ 이러한 원초적 물음에 대한 진지하고도 명쾌한 답변을 제공해준다.”(김은희 밀양검무보존회장)
김은희, 밀양검무만의 특장(特長)을 살려내다
김은희 회장의 밀양검무가 알려지면서, 우리는 이제 이런 말까지 하게 되었다. “진주에 ‘논개’가 있고 함안에 ‘월이’가 있다면 밀양에는 ‘운심’이 있다.” 김은희는 밀양검무를 복원하기 위해서 무예보도통지와 같은 책까지 두루 섭렵하면서, 오늘날의 밀양검무를 복원하였다. 전해진 신윤복의 그림 쌍검대무(雙劍對舞) 속 두 명의 무희가 살아서 움직이는 것과 같은 쾌감을 느끼게 해주었다.
’천자만홍‘에서 김은희는 그간 건강이 좋지 않았다는 풍문을 무색하게 할 정도, 무대에서 검무를 활달하게 보여주었다. 검무 혹은 밀양검무가 가지고 있는 특색을 매우 잘 살려내 주었다. 밀양검무는 ’장검‘을 사용한다는 이유만으로 다른 검무와의 변별성은 분명하다. 또한 다른 검무와 다르게, 맨 마지막에 칼을 던지고 끝나는 게 인상적이다. 여기에는 여러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 것이다.
강태홍과 김온경, 부산이 중심이나 부산을 벗어나야
김온경 명무를 보면 언제나 존경심이 절로 생긴다. 부산의 ’영남춤의 메카‘가 될 수 있는 건 춤과 관련한 여러 종목이 존재하기에 그렇지만, 김온경 명무와 같은 분이 실재(實在)하면서 중심축 역할을 해주기에 가능할 것이다. 강주미가 이런 공연을 기획하고 연출할 수 있는 배경에는, 김온경과 같은 분을 통해서 오랫동안 듣고 배우고 느끼고 생각한 것들이 있기에 가능했다는 생각은 나만의 추측만은 아니겠다.
김온경은 강태홍의 춤맥을 이었다. 너무도 고마운 일이다. 그런데 여기서 꼭 집고 넘어갈 게 있다. 부산에 정착하기 이전 강태홍에 관한 연구가 많지 않다는 점이다. 또한 강태홍에 대해서 음악적인 접근, 춤적인 접근은 있되, 이걸 통합해서 강태홍의 진면모를 논할만한 성과는 아직 없다.
지금 국악계의 원로는 김병호(1910-1968), 김죽파(1911-1989), 함동정월(1917-1994), 김윤덕(1918-1978), 성금연(1923-1986)을 직접 사사했다. 그들에 대해서 음악적인 외에 생애사적인 얘기도 가능하다. 그러나 강태홍은 다르다. 지금 국악계에서 활동하는 원로국악인 중에 강태홍을 직접 사사한 이는 단 한 사람도 없다. 말년에 강태홍의 후원자 역할을 한 김동민 (1910-1999)이 있었기에, 강태홍의 유음(遺音)을 세상에 공개된 걸로 알고 있다. 강태홍 선생을 직접 사사한 김춘지 등도 타계한 지 오래다. 강태홍도 그렇고, 김춘지도 그렇고, 원옥화도 그렇고, 모두 인생의 한 시점을 부산(영남)을 기반으로 살았다는 공통점이 있다.
강태홍, 병창에서 창극까지 가무악을 넘나들다
강태홍 또는 강태홍류 가야금산조는 대략 다음과 같은 특징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첫째, 강태홍류는 일찍이 리듬이 까다로운 산조로 알려졌다. 둘째, 강태홍류는 막으면서 뜯는 성음(c.s)이 많다고 알려졌다. 셋째, 강태홍류는 다른 산조에 비해서 묘사와 비유가 많이 전해진다. 개구리 울음소리 등이 그것이다. 넷째, 강태홍류 가야금산조에서 느껴지는 경상도의 억양이다. 이는 원래 그럴 수도 있고, 강태홍류가 특히 부산지역을 중심으로 전승되어서 그런 경향일 수 있다. 다섯째, 생전 강태홍의 삶에 연관해서 불교적인 영향이다.
강태홍 산조로 대표되는 강태홍 음악과 강태홍의 산조춤을 부산지역에서 잘 전승하고 있음은 고맙기 그지없다. 강태홍의 음악과 춤을 경상도적인 정서와 연결 짓는 것도 타당하다. 그러나 강태홍은 부산지역에 한정할 인물은 아니다. 앞으로 부산지역에서 강태홍이란 인물을 보다 더 총체적인 혹은 입체적인 입장에서 접근했으면 좋겠다. 지금의 우리에게 강태홍 하면 ‘가야금산조’이지만, 실제 일제강점기 경성방송 (JODK)에선 ‘가야금병창’으로 더 알려졌다.
강태홍은 조선성악연구회에서 주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유충렬전〉이라는 연쇄극 (영화와 무대극의 공존) 형태의 연쇄 창극을 공연했을 때(부민관 상영) 악역 정한담 역을 맡은 인물이다. 유충열은 정남희(월북)가 담당했고 간신인 정한담을 강태홍이 맡았다는 건 어떤 의미인가. 그가 빌런 역할을 맡을 만큼 연기력이 출중했다는 얘기다. 강태홍은 특히 이동백 명창의 총애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동백 명창의 고별 공연이 서울 부민관을 시작으로 여러 곳에서 펼쳐졌는데, 늘 강태홍을 대동했다.
이동백 사후, 강태홍이 부산지역에 정착한 게 맞다. ‘천자만홍’이 영남지역 또는 ‘영남음악’과 ‘영남춤’에 국한된 곳이 아니라면, 이제 강태홍이란 인물을 ‘부산’과 연관된 ‘산조춤’을 중심으로 해서, 강태홍의 가무악을 보다 확산해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게 바로 기획자 강주미가 생각하는 ‘영남춤의 감성적 확산’이 아닐까.
정윤화와 박종환, 부산적 남성성을 아름답게 드러내다
박종환은 현재 부산광역시 무형유산 부산농악 ‘장구’ 예능보유자이다. 지정된 무형유산을 잘 이끌어가는 인물 중의 하나다. 이런 그가 이번에는 비지정문화유산 (비지정문화재)인 ‘영남북춤’으로 무대에 올랐다. 박종환의 장기가 바로 이 북춤이란 걸 영남지역 사람이라면 많이 알 듯하다.
장구와 북은 농악에 중요한 두 악기인데, 이 악기의 캐릭터를 영남과 호남으로 나눌 수 있다. 장구는 아무래도 호남 장구가 으뜸이다. 북은 영남 북이 으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 지역정서와 딱 맞는 악기란 얘기다. 특히 영남 북에서 영남지역의 남정네 특유의 투박함과 솔직함이 느껴진다. 박종환은 이걸 매우 세련되게 드러내 주었다.
박종환은 부산대학교 85학번이란다. 197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문화운동의 언저리를 배회한 사람이라면, 탈춤 추고 풍물치고 민요 한 자락 부르는 게 익숙하다. 이미 삼사십 년이 지나고 오십 년에 가까운 사람도 있겠지만, 이들은 모두 가끔 ‘라떼’를 들먹일 거다. 그 시절 민속동아리나 풍물동아리를 통해서 춤추고 쇠치고 굿하던 추억담을 얘기할 사람은 많겠다.
하지만 박종환처럼 무대에서 살아있는 청년성(靑年性)을 보여줄 사람은 과연 몇 명이나 될까. 내가 박종환의 1980년대와 1990년대를 실제 본 적은 없지만, 이번 무대를 통해서 그 시절 박종환의 모습이 어떠했을까 짐작하게 된다. 그만큼 그의 북춤에는 1980년대와 1990년대, 그 시대를 살았던 젊은이 특유의 뜨거운 정서가 배어 있다.
부산시 아미동, 거기에 ‘농악소년’ 이성진이 살았다
부산농악은 원래 아미농악, 부산아미농악으로 불렸다. 부산시 아미동 출신으로, 아미초등학교에 다니던 소년이 미국에서 농악으로, 설장구로, 열두발상모로 크게 인기를 끌었던 사실을 알고 있는가. 바로 이성진이다. 대금산조의 명인 이생강의 동생이기도 하다. 그는 초기 리틀엔젤스 공연의 유일한 남자 단원이었다(1965년 12월 17일, 경향신문).
리틀엔젤스의 레퍼토리 가운데서 특히 2개가 큰 인기를 끌었다. 부채춤과 농악이다. 1부에선 부채춤으로 판타지적인 분위기로 관객을 사로잡고, 2부에선 농악으로 익사이팅한 무대를 연출했다. 이쯤이면 무대와 관객이 하나가 되는데, 이런 공연에서 하이라이트에 등장한 소년이 이성진이었다.
당시 신문을 보면 머리로 훌라후프를 돌리는 것이 가능한 신기에 가까운 기술이라 극찬했다. 그의 이런 기예를 배우기 위해서, 이성진은 특별히 미군 학교에서 특강을 했다는 기록도 있다. 이성진은 초기 해외 공연을 시작으로 대략 1974년까지 리틀엔젤스 공연에 관련한 것 같다. 남기수(소고 채상), 남기문 (설장구), 이성진(열두발상모) 의 공연자료가 지금도 남아있다.
2015년 10월 31일, 서울남산국악당에선 매우 뜻깊은 연주회가 열렸다. “이성진 선생 20주기 추모음악회 - 아버지의 이름으로”이란 공연이었다. ‘천자만홍’에선 전통음악그룹 판(유인상 음악감독, 장구)이 반주를 맡았는데, 이 연주단에서 특히 주목하게 되는 연주가 이성준(대금)이다. 그가 바로 이성진의 친아들이다.
리틀엔젤스 활동 이후, 이성진은 1970년대 중반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 20년간, 텔레비전 방송출연과 무용공연의 반주음악자로서 크게 활약했다. 친형인 이생강과 콤비를 이루면서, 산조 무대에 오르기도 하고, 이생강과 이성진의 형제와 임경주가 트리오로 연주한 무용음악과 공연도 많다. 이생강은 대금, 소금, 피리, 임경주는 가야금과 철가야금, 이성진은 장구, 목탁 등 여러 악기를 담당했다. 1980년대에 녹음한 무용음악CD가 남아있다. 특히 이성진은 작곡가 겸 색소폰 연주가 길옥윤이 좋아했던 국악연주가 중 한 사람이다. 이생강(대금), 길옥윤(색소폰), 유복성(봉고), 이성진(장구) 4인이 함께 크로스오버 음반을 내기도 했다.
그 시절, 부산의 이매방을 떠올리다
요즘 사람에게 승무라고 하면, 한영숙류 승무와 이매방류 승무를 떠올린다. 1970년대 초반에도 그러했을까? 1960년대의 무용계가 이매방의 승무를 잘 알고 있었을까? 이매방은 무대에서 공연할 때, 승무와 관련된 작품에 얼마나 비중을 두었을까. ‘이매방 = 승무’라는 등식이 생기기 시작한 건, 1977년이다.
한 해전인 1976년 이매방은 그의 주 거주지였던 부산에서 큰 공연을 펼친다. 이 공연으로 그는 부산지역의 최고의 문화상이라 할 ‘눌원문화상’을 수상했다. 이매방의 약력에는 1976년에 받은 걸로 기록되어 있으나 1977년에 수상했다(1977년 6월 16일, 부산일보).
1976년 1월 20일, 부산시민회관 대극장에서 펼친 ‘이매방 창작무용공연’은 어떤 공연이었을까? 당시 문예진흥원 (현 문화예술위원회)의 지원을 받아 펼친 규모가 큰 공연이었다. 1부에서는 소품, 2부에서는 무용극 ’신검(神劒)‘이 펼쳐졌다. 1부의 소픔은 검무, 즉흥무, 밤바다에서, 신로심불로, 살풀이 (지금은 ’살풀이춤‘이라고 하지만, 1980년대까지 ’살풀이‘는 곧 ’살풀이춤‘을 뜻했다), 삼현승무였다.
1960년대부터 이 시기까지만 하더라도 이매방의 대표 레퍼토리는 ’검무‘ 곧 ’장검무‘였다. 이매방이라는 예명이 중국의 경극배우 매란방(1894-1961)과 연관이 있듯이, 대중들이 가장 좋아했던 이매방의 레퍼토리는 검무(장검무)였다.
김소희 명창과 이매방 명무, 평생 한결같았던 오누이와 남동생 같은 사이
이매방의 무용공연에 음악적인 도움을 준 분은 김소희 명창이다. 짐작건대, 이매방이 이런 큰 공연을 성사시킬 수 있는 배경에는 김소희 명창이 있었던 것 같다. 이매방 (1925.3.30.-2015.8.7.)은 평생 김소희 (1917.12.1.-1995.4.17.)를 ’누님‘이란 호칭을 사용하면서 깍듯하게 모셨다. 이매방은 여타의 인물에 대해서 거침없는 입담으로 유명한데, 그가 평생 존경스러운 마음을 표한 몇 안 되는 전통예술계 인물이다.
김소희는 이매방이 예술적인 무대에서 공연하면서 그의 전통예술의 진면모가 널리 알려지기를 늘 바랐다. 이듬해인 1977년 이매방이 서울 무대에서 진출해서 ’승무‘를 제대로 보여주는 무대를 만들 수 있었던 것도 배후에 김소희 명창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 무대에서는 ’삼현승무‘와 ’보렴승무‘를 제대로 선보였는데, 보렴승무의 음악인 남도민요 ’보렴‘은 김소희와 그의 제자가 불렀다.
1977년 7월 30일, 서울 YMCA강당 (종로 2가)에서 열린 공연을 ‘무용가 이매방 씨가 40여 년 간 연마해 온 승무만의 첫 발표회’라고 기록하고 있다(1977년 7월 30일, 조선일보). 이매방의 승무의 가치를 널리 알리는 분은 알려진 대로 무용학자 정병호이다. 정병호는 ‘명무전’이란 공연에 이매방을 참여시켰고, 이후로 이매방의 승무는 급속도로 알려지지 시작했다.
그로부터 10년후 1987년 이매방류 승무가 무형문화재(현, 무형문화유산)로 지정받고, 세칭 ‘인간문화재’로서 대우받으면서, 이매방류 승무는 승승장구하게 되었다. 처음 이 승무가 소개되었을 때 이매방과 정병호는 ‘호남류’ 승무라고 했다. 이매방이 ‘7-8세 부터 고향 목포에서 고 이대조 박영규 씨(박영구라는 기록도 있다)를 사사’한 승무이고, 오히려 당시의 세련되고 양식화된 경향 각지의 숭무에 비해 ‘즉흥성이 많은 것’이 특징이라 했다.
이매방의 법고승무 이전, 박금슬의 바라승무가 있었다
그렇다면 1970년대 당시 앞의 기사에 등장하기도 하는 ‘세련되고 양식화’된 승무는 무엇이었을까. 한영숙류 승무와 박금슬류 승무를 말한다. 이번 공연에서 국수호 명무가 알려주었듯, 이매방류 승무가 등장하기 전 승무의 양대 산맥은 한영숙류와 박금슬류였다. 이 중 박금슬류는 보다 종교적인 이미지가 강하다 할 수 있다.
박금슬 (1925.3.25.-1983.2.16.) 인생에서 불교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박금슬의 인생에 곽서순이 있다. 수원의 법릉사에 기거하던 곽서순스님과 박금슬은 혼인하게 된다. 8·15해방 이후 강원도 백담사 오세암의 천월(千月) 스님에게 범패를 배우고 서울로 돌아온다. 1946년 6월, 서울 종로구 와룡동에 박금슬 무용연구소를 개소한다. 박금슬의 춤의 밑바탕은 불교적 세계관이다. 춤의 양식적인 측면에서 볼 때, ‘바라승무’를 특히 주목할 필요가 있다.
1960년대 범패와 작법을 발굴하고 무대화시키는 배경에는 둥국대 명예교수를 지낸 홍윤식 (1934-2020.5.28.)이 있다. 그는 평생 민속학의 시각에 기반을 두고 불교문화유산의 조사와 발굴, 이의 확산에 평생을 바친 분이다.
찬불가무(讚佛歌舞)에서 출발한 박금슬류 바라승무
1968년 5월 6일, 국립극장 (현 명동예술극장)에서 찬불가무(讚佛歌舞)라고 이름한 불교에 바탕을 둔 예술공연이 펼쳐졌다. 당시 홍윤식이 대표로 있는 불교문화예술원이 주최했고, 불교의 범패와 천수바라춤을 무대에 올리는 것에 큰 의미를 두었다. 지난 20세기 불교의 범패와 작법을 조사발굴 연구한 이들은 적지 않은데, 홍윤식은 특히 권수근에 주목했다.
홍윤식은 권수근을 ‘사라져가는 범패의 유일한 정통보유자’라고 했다. 당시 60세의 권수근은 강릉 관음사주지였다. 이날 권수근스님과 함께 서울 봉국사의 김수봉 스님은 천수바라춤과 나비춤을 공연했다. 홍윤식의 불교문화예술원에서 이러한 불교무용을 무대화시키고 예술화시키는 안무를 맡은 이가 박금슬이다. 당시 신문의 표현을 그대로 옮기면 ‘우리의 불교예술이 얼마나 고도(高度)했고 순화(純化)한 한국미(韓國美)를 갖추었는가를 인식’하는데 박금슬의 역할을 아주 컸다(1968년 5월 9일, 동아일보).
‘천자만홍’에서 공연한 ‘바라승무’는 예술적으로 매우 승화된 경지임을 확인했다. 내가 실제 본 건 아니지만, 1968년 명동예술극장(당시 국립극장)에서 올려진 ‘바라승무’가 오랜 세월을 거쳐서 2024년 국립부산국악원 연악당에서 새롭게 빛을 발하는구나 생각하니 숭고한 느낌마저 들었다.
이런 시각에서 보면 ‘바라승무’의 춤맥(脈)은 1대 권수근, 2대 박금슬을 잇는 3대 국수호의 계보라고 명명(命名)할 수 있겠다. 부산지역에서는 좀처럼 소개되지 않은 바라승무가 앞으로 널리 알려지길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다. 모든 승무가 다 불교와 일정 연관이 있겠지만, 실제 평생 불자(佛者)로서의 삶을 살아온 권수근과 박금슬의 순화(純化)의 예술혼이 거기에 담겨있기에 더욱 귀중하다.
체육지도자 혹은 무용교육자로서의 박금슬
박금슬에 관해선 좀처럼 언급할 기회가 없으니, 여기서 그에 관해 많은 정보를 풀어내야 하겠다. 시간을 좀 더 거슬러 올라가면, 박금슬의 인생에서도 한때의 중요한 인물이라 할 김상화가 있다. 시인이자 무용평론가인 김상화다. 그는 1950년 초반부터 무용평을 썼는데, 그 시절에 활약한 무용가로 김윤학, 송범, 정인방, 조용자, 박금슬 등 5인을 꼽았다(1955년 8월 12일, 평화신문). 박금슬은 1959년 3월 27일부터 29일까지 사흘 동안 원각사에서 신작 공연을 펼친다. 대개 한 시대의 무용 활동을 살필 때 신문 등에 기록된 ‘공연을 중심으로’ 살피게 되지만, 박금슬은 좀 다르다. 그의 춤계의 공헌은 ‘교육을 중심으로’ 살필 때 더 많은 걸 알게 된다.
박금슬은 일찍이 일본에 유학해서 배우고 익힌 내용을 한국에 돌아와서 교육을 통해 알리고자 하는 심리가 강했다고 생각된다. 당시에는 무용이 체육 교과 속에 존재했다. 1950년대와 1960년대에는 체육 관련 축제 내지 행사가 많았는데, 박금슬은 특히 여중과 여고의 일반 학생을 중심으로 해서 신체 훈련을 바탕으로 한 무용 교육에 펼치고자 하는 꿈이 있었다고 짐작된다. 생전 그의 행적을 통해서 잘 알 수 있다. 이미 오랜 세월이 지났다지만, 그 시절의 여러 자료를 뒤적이면 이런 사실을 더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가 대구 부산 등지에서 가르친 경험이 있다고 하는데, 이에 대해서는 더 소상히 알아볼 필요가 있다. 다음에선 박금슬과 관련해서 무용계에는 잘 알려지지 않는 ‘인천’과 연관된 내용을 소개하겠다.
박금슬, 밀양에서 활동하기 전, 인천에서 활동했다
박금슬이 1967년경 밀양지역에 정착하고, 1968년 밀양여중고를 중심으로 아리랑 무용을 지도하고, 대전에서 열린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 참가해서 ‘아리랑무용’으로 장려상을 받은 사실은 알려져 있다. 그런데 이런 활동을 그녀는 이미 오래전부터 해왔던 사실이 발견된다. 박금슬은 1961년 이전에 인천과 인연을 맺은 것 같다. 1961년 6월, 인천 신흥초등학교 강당에서 무용 발표회를 열었다. 당시 인천 신흥초등학교 강당은 규모나 접근성에 있어서 인천을 대표하는 공연장이었다.
1950년대와 1960년대, 인천의 무용이 매우 활발했다. 인천시 자체의 무용 콩쿠르를 열 정도로 인기가 있었다. 이에 관해서는 여러 요인을 찾을 수 있는데, 그중 하나는 박금슬과 같은 유능한 지도자가 인천에 거주하면서 여중고생에게 ‘체육(시간)과 연관된 무용’을 열심히 가르쳤기에 그렇다. 1961년, 서울 효창구장에서 ’제 42회 전국체전‘이 열린다. 스포츠 경기 후, ‘체육의 미전(美典)’이 열렸다. 여기서 무용공연이 펼쳐졌다. 김백봉, 박금슬, 권여성이 지도(안무)를 맡았고, 임성남무용연구소는 단독 개별프로그램을 맡았다. 여기에 출연한 학교는 숭의여중, 남인천여중, 부산여고, 박문여고 계성여고, 인천여상, 목포여고 등 7개의 여중고가 맡았다.
이 중에서 인천에 있는 학교는 무려 세 군데다. 남인천여중, 박문여고, 인천여상 등 3개 학교이다. 이 학교 학생을 누가 지도했을까? 김백봉과 권여성은 아니다. 박금슬이 지도했다. 이 시기에 박금슬은 당시 인천에서 개인 공연을 했기에도 그렇다.
박금슬이 공연한 인천 신흥초등학교에서 남인천여중과 인천여상은 아주 근거리이다. 박금슬은 인천여중고 학생 등을 대상으로 무용 또는 매스게임을 지도했을 것이다. 박금슬이 정확히 얼마 동안 인천에서 교편을 잡았는지는 아직 확실하게 밝혀지지 않았으나, 인천지역의 무용 발전에 크게 공헌한 건 사실이다. 이에 대해서는 앞으로 더욱 자료를 찾아낼 필요가 있다.
1968년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와 경남대표팀의 ‘아리랑무용’
박금슬은 1967년 밀양을 중심으로 활동했다. 밀양여중과 밀양여고 학생들에게 ‘밀양아리랑’을 테마로 한 작품을 지도했다. 박금슬에 관한 연보에서는 연도 수가 틀리게 기록되어 있다. 김은희는 이를 바르게 바로 잡고자 했다. 여러 자료를 찾아본 결과, 김은희 명무가 정확하게 알고 있음을 확인했으며, 앞으로 박금슬에 관한 언급에서 잘못된 부분을 바로잡고, 새로 밝혀진 부분들이 보충해야 할 필요가 절실하다.
1968년 대전공설운동장에서 열린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 관해서는 직접 참가한 국수호와 김은희 등 두 분의 명무가 소상히 말해 줄 수 있겠다. 박금슬이 밀양아리랑을 바탕으로 해서 ‘아리랑무용’을 만들어서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 참가한 것은, 전술한 바와 같이 이미 인천여중고생을 중심으로 해서 지도한 후 전국체전에 참여했던 연륜(노하우)이 쌓인 결과라고 짐작한다.
박금슬과 국수호, 버거운 시절을 함께 한 사제간
박금슬이 동세대의 무용가 중에서 일찍이 과학적인 방식으로 춤을 지도한 분이라는 사실은 춤계에 널리 알려져 있다. 한국무용을 할 때 호흡 싣는 법을 제자들에게 가르쳤으며, 한국무용을 할 때 사용되는 호흡도 장호흡(長呼吸), 중호흡(中呼吸), 세호흡(細呼吸), 멈춤호흡으로 나눠서 가르쳤다. 그의 춤과 관련한 교습에 심취하게 되면, 발 팔 손목 등 신체의 각 부분에 관한 춤동작 연구를 바탕으로 해서 어떻게 전체 동작을 완성해가는가를 알게 된다. 비정비필(非 丁非八) 등의 용어가 지금도 춤계에서 통용되고 있다.
현재 춤계에서 활동하는 박금슬의 제자로 국수호, 김은희, 박금슬이 ‘민속촌 농악단’을 통해서 가르친 정인삼, 김평호 등이 활동을 하고 있다. 박금슬 선생이 돌아갔을 때 제자 국수호가 쓴 글을 여기에 옮겨본다.
“그분은 무용가이자 이론가이셨다. 그러나 불행한 일은 우선 무용가가 지녀야 할 미모와는 거리가 먼 분이었다. 한국무용사에서 6 25(한국전쟁) 이후 30년간 우리 무용계의 경향은 예쁜 춤들, 아름다운 춤들이 관객을 사로잡던 시기였다.” (1983년 3월 7일, 경향신문)
1983년 2월 16일 새벽, 박금슬은 강원도 철원에 있는 딸 집에 급히 방문하게 되었고, 안타깝게 연탄가스 사고로 별세했다. 59세의 나이였다. 스승 박금슬의 타계 후 제자 국수호는 경향신문의 ‘나의 스승’이란 코너에서 ‘춤 체계화에 정열 바친 불운의 무용가’ 박금슬에 관련한 글을 게재했다. 1960년대와 1970년대를 살아온 우리 무용인들의 한 단면을 알게 해주는 귀중한 내용 중엔 이런 내용이 있다.
”두 번째 이사 간 하월곡동 3층 연구소 생활은 전보다 더 못한 생활이었으나 나의 무용 수업은 선생님과 1대 1의 가르침이 되어 온 정력을 쏟으며 나의 몸 구석구석에 그분의 살을 나누어 주었다.“
한국명무전, 박금슬의 마지막 큰 무대
박금슬의 인생을 돌아봄에 있어서 가장 의미 있는 무대는 명무전일 것 같다. 1982년 6월 3일, ‘한국명무전’이란 이름으로, 서울시립무용단의 명무전이 열렸다. 당시 단장을 맡은 문일지 기획이었다(1982년 6월 3일, 세종문화회관 대극장). 9명의 명무가 출연했다. 김천흥의 ‘춘앵전’, 한영숙의 ‘승무’, 정인방의 ‘신로심불로’, 최현의 ‘비상’, 이매방의 ‘살풀이’, 강선영의 ‘태평무’, 김진걸의 ‘내 마음의 흐름’ 등 모두 본인의 알려진 대표작을 무대에 올렸다.
박금슬의 작품은 좀 결이 달랐다. 그는 문둥이춤에 뿌리를 둔 작품으로 당시의 해설을 여기에 그대로 옮긴다. ”박금슬은 문둥이 꼽추 병신 등 개성 있는 무용 테크닉을 민속무용에 접합(接合)시킴으로써 독자적인 경지를 개척했다. 번뇌는 문둥이춤으로써 당시에는 문제의 전위적 작품으로 받아들여졌었다.“
박금슬 선생이 타계한 후, 첫 번째 추모 공연에서 김진걸 선생이 쓴 글의 일부를 옮긴다. ”타계 하시기 8개월 전 서울시립무용단의 명무전에서 ‘번뇌’를 추시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다른 작품도 많은데 하필 문둥이춤이냐고 놀림을 받으면서도 오직 예술에 대한 집념을 바탕으로 고집을 부리시면서도 동료와 후배들에게 따뜻하게 대하시던 선생님의 모습이 지워지지 않는다.“
이날을 기록한 사진이 한 장이 남아있다. 거기엔 최현, 박금슬, 김문숙, 이매방, 김천흥 강선영, 정인방, 일곱 분의 모습이 담겨있다. 아마 이 사진이 박금슬 선생의 생전 마지막 사진이 아닐까 싶다.
박금슬의 춤맥을 잇는 많은 사람들이 있다. 돌아가신 분도 있고, 활동하는 분도 있다 스승 박금슬 사후, 제자들이 한마음으로 뭉쳐서 3년간 추모 공연이 이어진 걸로 알고 있다. 국수호, 한보성, 정인삼, 김평호, 서한우, 방승환, 박영주(예인동), 조성돈 등 남제자와 김광숙, 김은희 등 여제자가 함께했다. 음악은 한유성이 담당해다. 또한 박금슬 사후 20년이 되는 2003년에는 서희주를 중심으로 박금슬의 춤동작을 재조명하는 특별한 무대가 펼쳐졌다. 하지만 지난 20년간 필자가 모르는 것일까. 박금슬을 제대로 조명한 무대를 만나지 못했다. 이번 ‘천자만홍’에서 국수호에 의해서 재현된 ‘바라승무’를 계기로, 앞으로 박금슬의 춤과 거기에 내재한 독특한 미학적 정신세계에 앞으로 더 큰 주목하게 되길 바란다.
김온경의 모둠장끼춤, 놀이로 춤을 보여주다
‘천자만홍’의 2부에선, 양산농악보존회의 영산농악을 충실히 알 수 있는 무대가 있었고, 이어서 동래줄다리기 장끼춤이 펼쳐졌다. 앞의 김온경 명무는 여기서 동래학춤과 모듬장끼춤을 펼쳐 보였다. 여기서 김온경 명무의 빼어남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김온경의 모둠장끼춤은 ‘춤’이 아니었다. ‘놀이’였다. 일정한 동작의 패턴 속에서 펼쳐지는 춤이라는 움직임이 아니라, 춤에 바탕을 두고 있지만 관객들과의 교감을 가능한 놀이의 경지였다. 이번 무대에서 김온경 명무를 통해 명불허전(名不虛傳)이란 진리를 다시금 확인하게 되었다. 동래줄다리기 안에는 ‘줄 이음춤’이라고 한 창작춤이 살짝 삽입되었는데 안무자와 춤꾼들의 재기발랄함이 엿보여서 좋았다.
강주미의 두꺼비춤, 놀이정신을 살려내야
강주미는 두꺼비춤을 추었다. ‘김희상제 김온경류 두꺼비춤’이다. 동래 두꺼비춤하면 김희상(1923-1995)이다. 1984년 9월 27일과 28일, 서울 국립극장 소극장에서 ‘명무전’이 열렸다. 이 무대에서 당시 50의 김희상은 두꺼비춤, 양반춤, 허튼춤을 선보였다. 실제 그 현장에서 이 춤을 보지 못해 아쉽다. 이후 부산에서 민속을 중히 여기는 젊은이들이 동래 두꺼비춤을 전승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렸다. 민족예술학교 울림터의 '우리 춤 한마당'을 통해서 두꺼비춤이 여러 차례 소개된 바 있으나, 굳이 부산에서 이걸 보게 되진 않았다.
내가 실제 ‘두꺼비춤’이란 걸 본 건 강주미가 처음이다. 내 예상을 거의 그대로 충족시켰다. 마당춤에 머물렀던 레퍼토리를 무대화시키는 열정과 노력에 큰 박수를 보낸다. 그런데 두꺼비춤은 ‘춤’이라고 이름이 붙여졌지만, 결국은 마당에서의 ‘놀이’였으면 하는데 강주미는 ‘놀이’보다는 ‘춤’에 가까웠다. 스승 김온경과 제자 강주미의 다른 점, 혹은 공력의 차이가 여기서 드러났다. 하지만 언제가 강주미도 스승 김온경처럼 ‘춤을 넘어서 놀이’ 혹은 ‘춤과 놀이가 공존하는 두꺼비춤’을 자기 스타일로 완성할 것이라고 기대한다.
두꺼비춤을 효과적으로 살린 〈보리피리〉 (김현자 안무)
이 지면을 통해서 부산 지역과 연관된 공연으로 꼭 하나를 알리려 한다. 1981년의 첫 공연의 성공에 힘입어서, 1982년에 재공연을 했고, 이 또한 큰 반향을 이룬 ‘보리피리’라는 작품을 알고 있는가. 부산시립무용단의 제9회 정기 공연 〈보리피리〉(김현자 안무, 부산시민회관 대강당)란 작품이 있었다. 지난 20세기 한국무용사에서 수작으로 기록해야 할 작품이다. “문둥이의 애환을 통해 상징적인 수법으로 인간 본능을 원색적으로 표현, 성공한 작품”으로 평가를 받고 있다.
당시 경향신문의 김유경 기자는 부산에 펼친 이 공연을 통해서 현학적인 주제를 즐겨 다루는 서울의 무용과는 달리 ‘토착적인 힘과 야성을 명쾌하게 보여준’ 〈보리피리〉의 안무자로서 김현자를 높이 평가했다(1982년 10월 23일, 경향신문).
영남지역의 마당에서 펼쳐진 민속춤을 무대화시킨 작품이다. 당시까지 무대에서 잘 볼 수 없었던 두꺼비춤 도굿대춤 보릿대춤 등을 동원한 것이다. 그러니까 ‘보리피리’ 속의 ‘두꺼비춤’은 ‘창작 속 전통’이란 점에서도 의미가 있다. 이 작품의 음악은 당시 부부의 연을 맺고 있던 송순섭 방성춘이 맡았고, 김영민의 단소등이 함께 했다. 송순섭도 훗날 눌원문화상을 받았다.
천자만홍, 영남 특유의 정서를 살려낸 신명판
앞에서도 얘기했듯이, 지금까지의 글은 단순한 한 공연의 리뷰가 아니다. 출중한 기획이 바탕이 된 ‘천자만홍’이란 공연과 연관해서, 20세기의 춤 현장을 다수 지켜보았던 필자가 이 공연과 연관된 여러 사실과 정보를 엮어내면서 ‘천자만홍’의 가치와 앞으로 이 공연이 더욱 풍성하게 확장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쓴 글이다.
기획자 의도대로 이 공연은 ‘시민 여러분과 함께 울긋불긋 신명판의 첫 봉우리’를 틔운 의미 있는 공연이었다. 예술학박사이기도 한 강주미의 그간의 열정과 노력, 곧 ‘지역 민간 아카이빙 기초 사업의 현장적 토대’가 바탕이 되었기에 이런 공연무대가 가능하다는 것에 모두 공감하게 된다.
공연의 제목이 된 천자만홍(千紫萬紅)의 미를 생각한다. 이는 형형색색(形形色色)과는 비슷한 듯 다르다. 천자만홍이라 함은 자색(紫色)이라도 그게 천(千)개나 되고, 같은 홍색(紅色)이라도 그게 만(萬)개가 된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일반적인 눈으로 볼 때는 그저 같은 자주 빛 혹은 그저 같은 붉은 빛으로 보여도, 그걸 자세히 보면 그 색깔(명도, 채도, 양감, 질감)에 차이가 있다는 말이다. 영남춤 혹은 전통춤도 그러하겠다. 무형유산으로 지정된 춤의 가치를 충분히 인정하지만, 무대 위에서 펼쳐지는 이른 춤을 객석에서 지켜보면서, 사람도 다르고 장소도 다른데 모두가 너무도 같은 색깔로 천편일률(千篇一律)로 춤을 추어서 답답함과 아쉬움을 느꼈던 적이 있을 것이다.
‘천자만홍’의 가치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곧 같은 듯하면서도 다르고, 다른 듯하면서도 같은 종목을 무대에 올리면서, 그것이 얼마나 시간과 장소, 사람과 환경에 따라서 변화하고 있는가 하는 ‘전통춤의 스펙트럼’에 있다고 생각한다. 기획자 강주미가 말하는 ‘영남춤의 감성을 확장’이 바로 이런 것이 아닌가 싶다.
다시 한번 이 공연을 통해서 과거 부산의 공연물의 특징, 곧 타지역에서는 넘보기 어려운 부산(영남) 특유의 에너지를 느꼈다. 나 또한 이 공연의 성과를 ‘영남지역의 토착적인 힘’과 ‘야성을 명쾌하게 풀어낸 안목’으로 요약하겠다. 2024년 비지정문화재 영남 민속전통연행물 공연 ‘첫 번째’가 잘 끝났다. 이번 ‘천자만홍’의 뒤를 잇는 ‘두 번째’ 무대가 벌써 기대된다.
글_ 윤중강(공연평론가)
사진제공_ 박병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