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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과 춤 아닌 것의 경계를 사유하다 - 국립현대무용단 <¡No Dance! : Between Body and Media>


 


국립현대무용단 전시 및 퍼포먼스

2013. 12. 23 ~ 2013. 12. 31

제로원디자인센터

 

 국립현대무용단<¡No Dance! : Between Body and Media> 간혹 아이들과 비디오를 보다가 동영상을 빠르게 돌릴 때가 있다. 화면 속 인물들은 평소보다 어색하게 빠르게 움직이며 이리저리 돌아다니고 아이들은 그 움직임을 보며 웃음보를 터뜨린다. 그 장치를 이미 알고 있는 우리 어른들조차도 때때로 그 빠른 움직임이 재미있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 움직임은 우스꽝스럽게 보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일상적 움직임이 아닌 리듬에 맞춘 춤처럼 보이기도 한다.

 

 영화가 처음 탄생했던 100여 년 전의 흑백 무성영화에서 인물들은 그러한 속도로 어색하게 움직인다. 최초의 영화로 이야기되는 <뤼미에르 공장을 나서는 노동자들>(1895)이 전시장을 내려가는 시작점에 배치되어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 영화는 본 전시에서 공장과 노동자라는, 어찌 보면 춤이라는 예술과는 대척점에 놓여 있을 법한 소재를 촬영한 영상물이 어떻게 춤과 연결점으로 작용할 수 있을까에 대한 물음을 던져주고 있다.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공장에서 우르르 쏟아져 나오는 노동자들은 다소 빠른 움직임과 반복적 편집으로 인해 일종의 리듬을 갖는 군무처럼 보인다.

 

 입구에서 스쳐 지나갔던 뤼미에르의 영화는 본격적인 전시장으로 들어서면서 그 의미가 확장된다. 도처에 배치된 스크린과 모니터 안에서 사람들은 끊임없이 춤을 추고 움직이고 있었는데, 그 중 가장 커다란 전시장의 안쪽에 일렬로 죽 늘어선 12개의 모니터들에서는 뤼미에르의 영화와 더불어 공장을 나서는 노동자들의 영상을 동시에 보여준다. 하룬 파로키의 2006년 작 <110년 동안 공장을 나서는 노동자들>이다. 여러 대의 모니터에서 동시적으로 움직이는 사람들은 노동자들이다. 노동자들의 투박하고 일상적인 몸과 춤추는 몸은 상이해 보인다. 그러나 숙련된 노동자들의 노련한 몸놀림은 마치 춤동작을 연상시킬 만큼 춤꾼의 동작과 통한다. 가까이는 근대화된 공장의 자동기계 시스템에 맞추어 자동화된 공장노동자의 움직임이 그러하다. 찰리 채플린의 유명한 영화 <모던 타임즈>에서도 볼 수 있듯이 나사를 조이는 노동자의 움직임은 일정한 리듬에 맞추어 몸과 하나가 되었다. 보다 긍정적으로 우리 삶 속에 녹아있는 노동의 움직임으로는 일을 좀 더 능률적이고 즐겁게 하기 위하여 농업 혹은 수공업의 일꾼들이 춤을 추듯 몸을 놀리는 모습을 생각할 수 있다. 실제로 그들은 일하는 것이 곧 춤이 되는 경지에 이르기도 하였다. 단순히 생산 수단으로서의 움직임인 노동과 예술 매체인 몸 움직임의 접점을 흩트림으로써 이 전시는 관객들에게 춤의 경계와 의미를 환기시키고 있다.

 

 춤의 경계는 전시장 곳곳에서 무너지는데, 그 두 번째 지점은 이본 레이너, 윌리엄 포사이드, 빔 반데키부스 등 실제 안무가들이 안무한 작품들의 영상물이다. 춤 영상이라고 하면 춤을 있는 그대로 화면에 담아내기만 한 영상이 있는가 하면, 전시된 작품들처럼 춤이기도 하면서 하나의 영화와 같은 영상미를 갖고 있는 작품이 있다. 전시에서 선택한 작품들은 (1989), (2005), (2006) 등 춤 작품을 단순히 기록한 것이 아닌 하나의 새로운 영상물로 재탄생시킨 것들이다. 이 영상들에는 춤의 고유함이라 할 수 있는 현장성이나 땀 흘리는 몸의 현존이 부재한다. 그 대신에 역동성을 두드러지게 하는 카메라 움직임과 현란하고 다양한 영상 기술이 스크린을 사로잡고 춤을 더욱 춤적으로 만들어준다. 서로 다른 미디어의 조합으로 만들어진 새로운 춤이자 춤 영화인 것이다.

 

 이 전시에는 특히 관객들의 눈을 사로잡을만한 몇 가지 영상들이 있었는데, 비토 아콘치의 (1971)나 구동희의 (2013), Sasa[44]의 (2011) 등이 그것이다. 이들은 퍼포먼스를 통하여 몸의 일부를 극대화한다거나 특정 행위를 강조함으로써 관객들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에서 한 남자(작가)는 팔을 뻗어 비디오 모니터 상의 자신의 이미지를 가리키고 있다. 자신의 손가락이 스크린의 중심에 있도록 하고 그곳으로 초점을 좁혀나가는 작업을 하는데, 이는 마치 그 남자가 스크린을 바라보고 있는 관객들을 가리키는 이미지로 왜곡되어 버린다. 관객들은 발걸음을 옮겨보지만 계속해서 자신을 응시하는 스크린에서 불편함을 느끼고, 영상은 응시자와 응시대상의 끊임없는 왜곡을 통해 영화의 시스템을 폭로한다. Sasa[44]는 에서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행위(노동)하는 손을 클로즈업하여 보여준다. 손톱을 깎고 통닭의 살을 뜯어내고 해체하는 손, 야채를 씻고 다듬는 손, 예쁘게 과일을 깎아 담는 손, 강박적으로 비누질하여 씻는 손. 그 손들의 모습을 보며 관객들은 그 이면의 보이지 않는 모습을 상상하고 바라보게 된다. 이러한 작업은 구동희의 에서 더욱 강렬하다. 스크린을 가득 메운 것이 몸의 한 부분이라는 것을 알아채는 데만도 어느 정도 시간이 걸리는 이 작품은 어느 밸리 댄서의 배꼽에 줄을 달아 카메라에 연결하여 움직임에 따라 배와 배꼽, 줄이 함께 움직임을 보여준다. 관객들은 배꼽의 구멍과 줄에 연결되어 늘어난 살이 그로테스크하게도 보이는 영상 속에서 줄의 흔들림에 따라 댄서의 보이지 않는 움직임을 바라본다.

 

 영상 미디어와의 조합과 충돌은 몸 움직임에 새로운 의미를 생성시키고 관객들로 하여금 무한한 움직임을 만들어낼 수 있게끔 한다. 그것은 때로는 퍼포먼스의 영역에서 작용하기도 하고 춤 작품으로서의 영상물을 통해 가능하기도 하고, 기대 밖의 순전한 영화 매체 속에서 나타나기도 한다. 본 전시는 <¡No Dance!>라는 제목에 걸맞게 춤이 아닌 것으로 춤을 바라보고 춤의 의미를 더욱 두드러지게 하는 작업이었다. 일상과 춤의 넘나듦, 춤의 경계 확장과 몸의 재고찰을 통해 춤을 더욱 풍부하게 사유해보고자 하는 흥미로운 시도였다.

 

 

+ 사족: 본 전시에는 전시의 목적을 부각시키기 위한 퍼포먼스도 함께 했다. 일상적 움직임에서 춤으로 넘어오는 경계를 보여주는 작업이나 영상과의 협업을 보여준 작업들이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퍼포먼스는 장소를 전시장으로 옮겨왔을 뿐, 전시물들에 녹아들어가지 못하였고 오히려 전시된 모니터 속으로 관객들의 시선을 빼앗기는 아쉬움을 남기었다.

 

 

글_ 이희나(한국춤문화자료원 공동대표)

사진_ 국립현대무용단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