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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량가영(淸凉歌詠), 동희스님이 들려주고 보여준 숭고한 경지: 원문(遠聞) 천상의 소리와 작법, 동희스님


2024년 10월 29일, 서울남산국악당에서 펼친 ‘遠聞 천상의 소리와 작법, 동희스님’은 제아무리 대단한 평론가라도 평(評)할 수 없다. 이 공연은 평의 대상이 아니다. 서울남산국악당은 그간의 공연장이 달랐다. 두 시간 동안 이어지는 공연에는 엄숙함과 평온함이 공존했다. 누구는 마치 천년도량(千年寺刹)에 온 듯한 엄숙함을 경험했을 것이다. 지치고 버거운 삶에 지친 누군가는 마치 목욕재개(沐浴齋戒)와 같은 평온함을 느꼈을 것이다. 


범패와 작법을 통한 귀의삼보(歸依三寶)


나는 오랜만에 귀의삼보(歸依三寶)를 할 수 있었다. 무릇 불자(佛者)라면 부처님께, 가르침에, 스님들께 자신의 심신(心身)을 맡기고자 하지만, 우리네 일상에서 그게 어디 쉬운가. ‘천상의 소리와 작법, 동희스님’에선 귀의삼보가 가능했다. 불교의 노래(소리)와 작법(춤)가 쭈욱 이어지는 2시간이 그러했다. 부처의 불(佛, Buddha), 가르침의 법(法, Dharma), 스님의 승(僧, Saṃgha), 3보(三寶)가 하나 되어서 중생의 생각과 마음을 다독여주고 있음을 실감했다. 동희스님 그리고 함께한 분께 마음으로 삼배(三拜)를 올렸다. 


2024년 10월 29일과 30일, 이런 공연이 가능한 건 동희스님이 계시기에 가능하다. 동희스님은 알다시피 대한민국 최초로 조계종 비구니로서 어산어장(불교 의례를 집전 관장하는 최고 책임자)이 되신 분이다. 


이런 분이 이끄는 ‘천상의 소리와 작법’은 더욱이 단순히 감상하는 자리는 아니겠다. 불교 신자이든 아닌 듯, 전공자이든 아니든, 이 자리에서 함께한 모두는 저마다 다 다르겠지만 ‘마음’에 뭔가 하나 잡히는 게 있지 않았을까. 


국악(國樂)하는 나로선 지난 40년 범패의 언저리를 맴돌며 기웃거린 세월이 파노라마처럼 겹쳐 흘렀다. 2024년에 40년 전으로 회귀하는 느낌이었다. 지난 40년 동안 불교음악인 범패와 관련한 중요한 여러 장면이 있는데, 이것을 바탕으로 정리하면서 이번 공연의 의미를 되짚어야겠다. 


범패의 연구를 개척한 이혜구와 한만영 


1984년, 서울대학교 국악과에는 교수 한만영이 있었다. 당시 음악학 분야에서 거의 유일하게 범패를 연구한 학자였다. 『불교음악연구』(서울대학교 출판부, 1981)라는 책을 발간했다. 한만영에게 영향을 준 스승은 이혜구다. 국악계에서 범패의 연구는 이혜구로부터 시작된다. 「신라의 범패」( 『한국음악연구』, 국민음악연구회, 1957)와 「한국범패의 연혁」( 『한국음악서설』, 서울대학교 출판부, 1975)라는 글을 통해서, 범패의 역사와 현재까지의 연혁을 정리했다. 


1960년대 중반 스승 이혜구와 제자 한만영은 범패의 실태조사를 하는 프로젝트에 가담했다. 그 덕분으로 1968년 봉원사에서 3박 4일간 영산재가 열렸다. 5월 13일부터 16일까지 계속된 영산재는 송암스님의 지원을 통해서 가능했고, 한만영은 당시 142곡의 범패를 채록해서 악보로 만들었다. 이것이 서울대학교 국악과 혹은 국악 전공자가 범패를 접하는 유일한 통로였다. 


서울대학교 국악과 학생이라면 거의 이혜구에서 시작되고 한만영에 의해서 심화한 범패연구를 어떤 의문도 없이 그대로 받아들였다. 40년이 지난 지금, 이번 ‘원문(遠聞)’이란 타이틀이 함께 한 ‘천상의 소리와 작법, 동희스님’을 보면서 새삼 40년 세월 동안 용어를 포함 여럿이 좀 바뀐 것이 발견된다. 


‘과거가 맞고 지금이 틀리다’는 게 아니다. 세월이라는 것이 범패 또한 용어 등을 바뀌게 했는데, 어쩌면 ‘과거는 틀리고 지금은 맞다’고 할 수도 있겠다. 왜냐? 그 시절의 범패라는 것은 연구자와 구연자(口演者)가 너무도 제한적이었다. 또한 당시의 연구는 ‘영산재’ 중심이었고, 이후에 ‘수륙재’ 중심으로 확대되었다고 할 수 있다. 20세기 후반의 범패를 경험한 나로서는, 21세기 사람에게 이런 것을 알려주는 알려주면서 ‘생각의 실마리’를 제공해 주고 싶다.




범패와 관련된 것들, 무엇이 어떻게 달라졌을까? 


범패는 그대로 존재하는 것인데, 이것과 관련된 용어 등은 알 듯 모를 듯 변했다. 여기선 그중에서 다섯 가지를 언급하겠다. 


첫째, 범패는 그저 ‘범패’였다. 


지금처럼 ‘경제’ 범패라는 용어는 전혀 없었다. 이른바 서울지역의 범패가 문화유산(무형문화재)이 되고 나서, 그 이후에 지방 문화유산 (무형문화재)인 범패가 속속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되면서 기존의 서울 경기지역의 범패를 특별히 ‘경제(京制)’라고 이름을 하게 된다. 그것이 곧 이번에 본 공연이며, 동희스님이 송암스님으로부터 배운 문화유산이다. 다시 말하면 송암스님을 중심으로 봉원사에서 전승되는 ‘경제’ 범패인데, 이것에 대한 음악적인 접근도 매우 세분화하게 된다. 이는 손인애 등의 논문을 살피면 알게 된다. 


둘째, ‘범음’과 ‘범패’를 구분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범패와 범음은 거의 동의어로 사용되었다. 아직도 민족문화대백과사전 등을 비롯한 사전류에서는 거의 범패, 범음, 인도소리 등은 동일한 걸 지칭한다. 그러나 이번 프로그램북에서도 볼 수 있듯이 범음(梵音)은 짓소리이고, 범패梵唄)는 범음을 제외한 나머지 제반 불교전통음악을 일컫는 말로 정착되고 있는 듯하다. 앞으로 범음과 범패가 확연히 구분해서 정착될지 궁금하다. 


셋째, 범패의 미(美)에 관한 용어다.


이에 대해선 예나 지금이나 깊게 접근하지 못한 것 같다. 국악계에서 3대 성악곡이라는 말이 전해온다. 언제부터 누구에 의해서 시작됐는지는 더 살펴봐야 한다. 분명한 건 가곡(歌曲), 판소리, 범패(梵唄)를 예외 없이 3대 성악곡이라고 한다. 그간 가곡이나 판소리의 발성 등에 기반을 두고 미적 고찰에 관한 연구는 활발했지만, 범패는 그렇지 못하다. 범패 특유의 발성과 그로 인해 범패라는 성악의 미적 가치에 관해선, 그때나 이제나 답보상태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범패에 관한 미감(美感)을 표현한 말은 대동소이하다. 이 사람이 썼던 말을 저 사람이 조금 달리하면서 계속 재사용했을 뿐이다. “심산유곡에서 들려오는 범종의 소리같이 그윽하고 고요하고 맑고 심오하며 의젓하고 소박한 범패소리” (김명곤, 음악동아 1987년 1월호)라고 하면서, 그 소리는 “마치 파도를 그리는 듯 들리고 유현청화(幽玄淸和)하여 의젓하고 그윽한 맛이 있으며, 장인굴곡(長引屈曲)하여 유장하고 심오한 맛이 있다.”라는 것이다. 


범패의 음악적인 특징을 설명하는 표현은 늘 두 가지 용어에 국한되었는데, 장인굴곡(長引屈曲)과 유현청화(幽玄淸和)이다. 이것이 범패의 음악적인 특징을 설명해 주는 용어로서 틀린 바는 없지만, 과연 ‘천상의 소리와 작법, 동희스님’의 공연에서의 예술적인 아름다움을 기존의 두 단어로 또 말할 수 있을까 의문이다. 이제는 새로운 미학적 용어를 등장시켜야 한다. 


넷째, 불교의 사물(四物)과 관련된다.


1980년대, 사물놀이가 크게 유명할 때, 실제 사물은 불교의 사물로서, 범종, 목어, 운판, 법고로 가리키는 것으로 배운 바 있다(민속학자 이보형). 그러나 불교에선 이를 범종각(梵鍾閣)이란 야외 전각에서 대사물(大四物)을 말하며, 법당 안에서는 소사물(小四物)로 목탁, 요령, 태징, 북이라는 것을 새롭게 알게 되었다.


다섯째, 스님의 지칭(指稱)이 달랐다.


196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는 확실하게 스님들의 법명에도 성씨를 붙였다. 박송암 스님, 김구해 스님, 한동희 스님, 우리는 이렇게 배웠고 이렇게 알았다. 속가(俗家)의 성씨라서 그런가. 언제부턴가 송암스님, 구해스님이라고 했다. 따라서 21세기에 인연을 맺은 동희스님의 제자도 ‘한동희’ 스님으로 불렸다는 사실조차 모를 수 있다. 


이 외에 큰 차이는 아닐지라도, 1980년대에는 나비춤, 바라춤, 법고춤이 더 익숙했다. 지금은 

나비무, 바라무, 법고무라고 더 많이 부른다. 이런 것들은 매우 지엽적인 것일 수 있으나, 분명 ‘달라지는 것에는 이유가 있다.’ 범패가 더욱더 가치가 있는 예술로 자리매김하기 위해서는, 범패와 관련한 용어 또는 시각의 변화 등을 감안하면서, 범패라는 ‘예술’ 장르를 좀 더 입체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고음의 박송암, 저음의 장벽응 


1973년 범패가 국가무형유산(전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고, 1987년 영산재(靈山齋)로 명칭이 바뀌었다. 박희덕(朴喜德, 범패), 장태남(張泰男, 범패). 이재호(李在浩, 작법)를 예능보유자로 지정했다. 

 

여기서 꼭 알리고 싶은 건, 1980년대의 시각으로 범패의 두 거장이 매우 상보(相補)적이었다는 사실이다. 이를 ‘고음의 박송암, 저음의 장벽응’이라 명명하겠다. 박송암은 비교컨대 테너처럼 청아하다면 짱짱했다면, 장벽응은 바리톤이나 베이스처럼 무게감이 있고 구수했다. 다소 주관적인 느낌이기도 하지만, 송암(松岩) 박희덕이 예인(藝人) 같았다면, 벽응(碧應) 장태남은 도인(道人) 같았다. 


송암스님은 서울 서대문 봉원동 사람이고, 벽응스님은 경기도 파주군 장마루촌 사람이다. 한 분은 서울 토박이요, 또 한 분은 경기 토박이다. 출생과 성장의 배경도 결코 무시할 수 없다. 송암스님의 짱짱한 성음과 벽응스님의 구수한 성음도 출생과 성장과도 분명 연관이 있다고 짐작된다. 


벽응스님은 생전 범패와 관련해서 요두전목(搖頭轉目)을 지적했다. 범패를 부를 때는 결코 머리를 흔들거나 눈동자를 굴리면 안 된다는 말씀이다. 해방 이후 대한민국의 범패를 살리는데, 이 두 분의 역할은 매우 중요했다. 따라서 21세기 사람들도 두 분 모두를 기억해 주길 바라는 마음이다. 


송암스님은 2000년 2월 1일 서울 봉원사에서 세수 86세, 법랍 67세로 입적했고, 벽응스님은 2002년 1월 25일 김포 문수사에서 세수 92세, 법랍 75세로 입적했다. 이 두 분이 이전에 벽해스님(1898-1970)과 운파스님(1907-1973)이 계셨다는 사실을 더불어 기억하면 더 좋겠다. 


판소리의 진채선 vs. 범패의 한동희 


범패의 계보에서 동희스님은 어떻게 자리매김할 수 있는가. 범패를 학습한 최초의 비구니(여승)라는 건 이미 널리 알려졌다. 전통 성악의 관점에 비교한다면, 판소리의 진채선과 비교할 수 있다. 판소리에서 진채선이 등장함으로써 여성 명창의 새로운 길이 열렸듯이, 범패에선 동희스님이 등장함으로써 범패에 정진하는 비구니의 길이 열렸다는 점이다. 이겐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종교적으로 그럴 뿐 아니라, 예술적으로 그렇다는 얘기다. 


단지 남녀의 구별을 떠나서, 진채선과 한동희에서 공통점이 찾을 수 있다. 여성의 등장과 함께, ‘예술적으로 정교해지고 섬세해지면, 궁극적으로 세련화의 과정’이 가속화된다는 점이다. 스승 박송암 비구와 제자 한동희 비구니는 ‘범패’를 통해 인연으로 맺어졌다. 박송암은 ‘사찰’과 ‘의식’ 안에서 범패를 인식했다면, 한동희는 이를 넘어서 ‘예술’과 ‘공연’으로 범패를 확장했다는 사실이다. 이는 ‘동서를 막론, 종교적 음악을 예술적 음악으로 확장한 여러 인물과의 인생사’와 통하는 가치이다. 



1974년, 비구니의 나비춤을 선보인 동희스님 


1995년 12월 3일, 서울 국립극장 소극장(달오름)에서 열린 동희스님의 ‘영산대작법’은 유명하다. 당시로도 그랬고, 지금 또한 그렇다. 범패와 작법으로 개인 발표 형식의 예술적 무대는 이것이 처음이다. 1995년은 해방 40년이요, 해방둥이로 태어난 동희스님이 만 50세가 되는 뜻 깊은 해였다. ‘불교행사의 일부가 아니라 개인발표회 형식’의 공연에 대해서 매스컴도 이목을 집중했다. 동희스님의 개인 공연에는 박송암스님과 김구해스님이 힘을 실어주었고, 당시 승무 준인간문화재였던 이애주(1947-2021)가 특별출연했다. 이 공연과 연관해서 동희스님은 대한불교 조계종 총무원장 포교상을 수상하다. 


이 공연이 동희스님의 첫 공연인가? 아니다. 동희스님의 종교적이면서 예술적인 활동은 50년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74년부터 ‘종교적 예술활동’ 또는 ‘예술적 종교활동’이라고도 할 수 있는 행보가 시작되었다. 

 

1974년 8월 26일, 국립박물관 신축이전 2주년 기념 ‘불교무용의 밤’이 국립박물관 중앙홀에서 열렸다. 이때 송암스님의 총괄하에 바라춤, 나비춤, 법고춤 등 세 가지가 선보였다. 바라춤은 김구해, 마명찬, 나비춤은 한동희 현동성, 법고춤은 박송암 김운궁이었다. 송암스님은 나비춤에 한동희를 왜 세운 것일까. 이런 추측이 가능하다. 불교의 작법 중 나비춤은 비구니에게 더 어울린다고 게 송암스님의 숨은 생각이었을까? 

 

1977년, 범패의 영역에 존재하는 화청을 제대로 알리다


1977년 ‘한국전통불교범패의식’이란 LP음반 (성음제작소)이 출반되었다. 대한불교조계종 성자 이차돈선양회 화장 윤일선(尹日禪) 스님이 기획한 음반이다. 당시 국립국악원 최고의 기량의 연주자의 ‘영산회상’과 함께, 범패가 실렸다. ‘지장불공’은 박송암, ‘천수바라’는 김운공이 불렀고, ‘회심곡’과 ‘백발가’는 한동희가 불렀다. 신문 기사에선 ‘범패의식으로 이름이 높은 한동희 스님’으로 적고 있다(1977. 10. 27. 동아일보).


당시 범패의 인간문화재는 왜 ‘회심곡’을 동희스님에게 부르도록 한 것일까. 1970년대엔 경기민요를 하는 여성 명창이 ‘회심곡’을 즐겨 불렀다. 이미 1960년대부터 강옥주 명창이 ‘회심곡’을 불러서 큰 인기를 얻은 바 있다. 강옥주명창의 회심곡은 불교계에서도 인정해서, 부처님오신날 조계사에서 공연하기도 했다. 그러나 송암스님은 1970년대 경기명창이 부르는 ‘회심곡’은 과히 탐탁하지 않게 생각했다. 송암스님은 그렇게 부르는 ‘회심곡’은 ‘화청’이 아니라 ‘동냥 염불’이라고 말한 바 있다(1999. 11. 17. 국악음반박물관 노재명 관장).


이런 생각의 송암스님은, 자신의 문하에서 ‘화청’을 수학한 동희스님을 통해서 회심곡을 제대로 알리고픈 마음이 강했다고 생각된다. 이미 그해 부처님오신날(1977. 5. 25)을 맞아, 하루 전에 방송한 KBS-TV ‘국악의 향기’를 통해서 한영숙(승무 보유자), 김운공, 한동희가 출연한 바 있다(1977. 5. 24).


1995년 동희스님의 개인 공연 이전의 몇몇 활동에 대해서 여기서 소개했고, 2000년 이후 국립국악원 개원 50주년 ‘불교음악의 미’(2001), 삼청각문화관 개관기념 공연 (2001), ‘여무 – 허공에 그린 세월’(2004), (사)동희범음회 설립기념 공연 ‘梵音’(2005) 등 2000년대부터의 활동은 이미 널리 알고 있을 것이다.




불교의식의 무대화와 무용화, 과연 좋은 것일까 


이번 동희범음회 공연 ‘원문’에서 특히 인상 깊었던 건 ‘도량게 작법’이다. 동희스님의 소리와 함께, 나비무(백재화, 성예진, 장혜수, 차명희, 조연채, 문서주)가 함께 했다. 남성의 나비무를 기억하는 나로서는, 오히려 21세기의 여성만의 나비무가 새삼스러웠는지 모른다. 


고요한 바라의 울림을 경험한 명발(鳴鈸)에서 느끼는 바가 많다. 무대화된 바라춤은 이미 1930년대 한성준 시대부터 존재해 왔지만, 지금은 때론 너무도 ‘타악 퍼포먼스’처럼 보인다. 두 개의 바라를 가볍게 두드리는 경건함은 요즘 바라춤에서는 도저히 경험할 수 있다는 사실이 오히려 조금은 서글프게 느껴졌다. ‘무대화’와 ‘무용화’가 반드시 좋은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동희스님의 소리에서는 비록 짧았지만, 가영(歌詠)이 더욱 가슴에 파고들었다. 우리의 노래는 부르는 것이 아니라 읊는다[詠]는 새삼 확인했다. 기교가 있되, 그 기교를 드러내지 않는 동희스님의 노래는 종일 들어도 질리지 않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송암은 없었으나, 송암이 있었다 


후반의 ‘법고’에선 실로 오랜만에 동희스님의 법고와 구해스님의 태징이 함께 했다. 여기에는 송암스님이 없었지만, 그 시절 송암–구해–동희, 세 분의 승려가 함께한 무대가 겹쳐졌다. 또한 덕림스님의 봉청(奉請)에서 송암스님의 느낌도 받았다. 


예전 사진을 보면, 동희스님의 법고무가 많다. 왤까? 춤을 전문으로 하는 이들의 법고(승무)는 모두 고깔을 쓰고 춘다. 동희스님은 일찍이 민낯을 그대로 보여주면서 그 안에 경건함과 숭고함을 담아냈다. 이런 동희스님의 승무(법고)를 어찌 세 치 혀로 말할 수 있겠는가.


나는 평론을 업으로 삼고 있다. 이제 동희스님의 범패를 ‘평론의 언어’로 정의할 시점에 와 있다. 그간 범패는 장인굴곡(長引屈曲)이라 했고, 유현청화(幽玄淸和)라고 했다. 장인굴곡이란 말은 다소 ‘격정적’인 느낌을 받는다. 범패라는 음악은 그렇게 길게 끌다가[長引], 소리를 동글게 푸는 것을[屈曲] 강조하는 음악은 아니다. 


예전 범패를 연구한 한만영은 범패가 마치 파도가 밀려오다가 바위에 부딪히는 소리라고 했는데, 이 또한 도량에서 불리는 소리가 마치 속가(俗家)의 속가(俗歌)처럼 취급받는 것이 아닐까 하는 걱정도 생긴다. 물론 한만영 선생의 탁견(卓見)을 수긍하면서도 그러하다. 범패가 유현청화(幽玄淸和)한 것은 맞지만, 꼭 범패에게만 이런 표현을 적용할 수 없다. 거문고 정악이나 가곡에서 유현청화를 경험한다. 


淸凉歌詠 또는 淸亮歌詠


나는 동희스님이 중심이 된 동희범음회의 범패를 청량가영(淸凉歌詠)이라 부르려 한다. 청량(淸凉)은 청량(淸亮)으로 해도 무방하다. 봄을 지나 여름에 듣는 범패는 청량(淸凉)하여 매우 시원할 느낌일 거다. 가을 지나고 겨울에 듣는 범패는 어떨까. 밝음을 넘어서 따뜻함에 이른 그 소리는 가히 청량(淸亮)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청량가영’의 청량은 동희스님의 도량인 청량사(서울특별시 동대문구 청량리동 61)에서 유래한다. 지금으로부터 100년전 청량사는 서울 시외였다. 그러나 이곳에 많은 사람이 찾았는데, 특히 예술을 지향하는 문인이 좋아했던 공간이다.



송암의 봉원사 vs. 동희의 청량사 


송암스님의 거처는 봉원사요, 동희스님의 거처는 청량사이다. 일제강점기 경성에서 봉원사는 시내(市內)요, 청량사는 시외(市外)였으나. 그 공간의 분위기는 달랐다. 봉원사는 시내에 있지만, 일반인들이 잘 찾지 않는 곳이었다. 봉원사 주변에서 대처승 가족들의 거처 공간이었다. 청량사는 열린 공간으로 많은 사람이 찾았다. 


1934년 7월 16일, 청량사에서 이태준 단편집 ‘달밤’의 출판기념회가 열렸고 30여 명의 문인이 모였다. 달밤에는 주인공(황수건)이 부르는 노래 한 대목이 나온다. 아마 일본 노래의 첫 가사만 알 것이라고 하는데, 그 노래는 이렇다. “사케와 나미다까 다메이키까(酒は涙か 溜息か; 술은 눈물인가 한숨인가)”. 타카하시 키쿠타로(高橋掬太郎) 작사, 고가 마사오(古賀政男) 작곡의 1931년 노래다. 이 노래는 너무도 유명해서 당시 조선의 가수 채규엽이 번안해서 불렀다. ‘술은 눈물인가 한숨이련가’라는 제목이다. 단편소설 ‘달밤’ 속 나(화자)는 그(황수건)가 부르며 지나가는 서툰 노래를 듣게 된다. 그를 부르려다가 얼른 나무 그늘에 몸을 숨기면서 소설은 끝난다. 


술은 눈물인가 한숨인가. 그다음이 이어지는 가사는 ‘마음의 근심을 버리는 곳’이다. 봉원사도 그러했겠지만, 청량사도 마음의 근심을 버리는 곳은 분명하다. 특히 동희스님의 계신 곳은 더욱 그러하다. 동희스님이 중심이 된 동희범음회와 함께 할 때, 그 장소가 어디든지 우리는 ‘마음의 근심을 버릴 수 있는 곳’이며, 거기서 ‘청량가영’을 몸소 경험하게 될 것이다.



글_ 윤중강(공연평론가)

사진_ 박상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