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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비평

남촌의 서정, 남강의 서사, 남원의 교술: 살풀이춤으로 써 내려간 세 편의 춤에세이

공연비평

Vol.113-1 (2025.1.5.) 발행

글_ 윤중강(공연평론가)

사진제공_ 이동준

 

 


“〈살_푸리〉는 한 춤꾼이 인생을 이야기하는 세 가지 주제를 담아 세 가지 살풀이춤으로 그려낸다.” 최지은의 〈살_푸리〉를 보았다(2024.11.29. 플랫폼 엘). 최지은은 춤을 잘 추는 것에 머무는 춤꾼이 아니었다. 최지은은 미학을 아는 춤꾼이었다. 춤을 통해서 시를 쓴다고 할까? 춤으로 수필을 쓴다고나 할까? 춤꾼 중에는 회화적인 춤꾼이 있고 연극적인 춤꾼이 있는데, 최지은은 매우 문학적이었다. 내 눈에 비친 최지은이 그랬다.


연주와 반주 사이


〈살_푸리〉의 큰 특징 중 하나는 음악이었다. 기존의 살풀이춤과 달랐다. 최지은의 생각과 느낌을 짐작하게 했다. 그는 춤을 그대로 지키면서 음악의 변화를 주면서, ‘전통춤의 동시대성’을 생각하는 것 같았다. 음악적인 변화를 주고자 했던 시도 자체는 매우 긍정적이다.



그러나 그 결과가 모두 좋은 건 아니었다. 정가의 김보라는 다소 과했다. 그러나 이젠 그런 과도함이 누구에게는 김보라만의 개성으로 정착한 것 같다. 지명인은 새로운 발견이었다. 소리에서 투박한 진정성이 전달된다.


이와 같은 춤판을 펼친 최지은의 음악적 의도를 살린 베테랑은 아쟁(김영길), 대금(김선호), 거문고(이재하)이다. 반면 장고(윤호세), 25현가야금(박지현), 콘트라베이스(노태헌)는 그렇지 못했다. 앞의 3인과 뒤의 3인은 어떻게 달랐나? 아주 분명한 차이가 있다. 전자의 3인은 반주자였다. 연주자임에도 반주(伴奏)라는 입장을 잘 견지(堅持)했다. 춤꾼의 호흡을 알고, 춤꾼에게 음악적 에너지를 전달했다.


후자의 3인은 연주자였다. 춤꾼과의 교감이 아쉽다. ‘논개별곡’의 음악 지체는 매우 좋았다. 그러나 어느 순간 25현가야금과 콘트라베이스의 두 악기로 어긋났다. 춤반주라는 의식이 약해 보였다. 매끄럽지 못한 음악으로도 춤꾼은 깊이 몰입했다. 자신의 호흡을 지키면서 춤의 완성도를 높이려는 최지은이 대단해 보였다.


전자의 3인과 마찬가지로, 후자의 3인도 분명 음악성을 갖춘 베타랑 연주가일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다른가. 춤의 무대에서는 자신의 소리가 얼마만큼 지금 춤과 어울리고 있는가에 대한 스스로 점검이 부족했다.


장구가 특히 거슬렸다. 전반적으로 너무 강했다. 모든 장단을 다 강조하듯 치다 보니, 귀를 막고 싶을 때도 있었다. 장구의 채편(오른쪽)에 힘이 너무 들어가 있었다. 신경질적으로 들려서 거슬렸다. 전통춤은 장구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훌륭한 음악을 공급할 수 있다. 그만큼 장구는 중요하다. 장구를 잡은 사람으로서 음악적인 긴장감을 유지하고자 하는 의도였던 것 같은데, 그런 것이 자연스레 이완감으로 이어지지 못해 안타까웠다. 어쩌면 장구 연주가가 장구라는 악기의 특성을 지나치게 강조하면서, 전체 음악을 리드하고자 하는 강박(強迫)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런 강박이 강박(强拍)을 남발했던 건 아닌지? 앞으로 춤꾼의 움직임에 주도면밀하게 대처하면서, 그에 따라 완급을 조절하면서 세련된 음악을 만들어주길 기대해본다.


최지은의 세 개의 살풀이춤은 각각의 특징이 살아있다. 그러함에도 순위를 매기게 된다. 제일 좋았던 건 ‘논개별곡’이다. 다음이 ‘민살풀이춤’이고, ‘이매방류 살풀이춤’은 상대적으로 감흥이 적었다. 왜 ‘이매방류 살풀이춤’이 돋보이지 못했을까. 실제 최지은은 이 춤으로 큰 상을 받은 건 널리 알려져 있다.


그건 어쩌면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이 이매방 명무가 추는 살풀이춤의 무대 조건이 익숙해서 그런지 모르겠다. 확실히 기방(妓房) 계통의 춤은 병풍과 돗자리가 있어야 느낌이 산다.이건 내가 20세기적인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해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최지은의 춤은 서사는 탁월했고, 교술은 우월했으나 서정은 평범하다”


나는 앞에서 그의 춤이 문학적이라고 했다. 이와 연관한다면, 위와 같은 한줄 평이 가능하다. 서양에서는 시를 서정시(抒情詩), 서사시(敍事詩), 극시(劇詩)로 구분한다. 이렇게 시를 바탕으로 해서, 문학 전반에 걸쳐서 셋으로 구분하는 경향이 있다. 곧 서정문학, 서사문학, 극문학인데, 한국에선 여기에 하나 더 한다. 『한국문학통사』를 쓴 조동일의 분류법이다. 서정문학, 서사문학, 극문학에 하나를 더해서 교술문학으로 나눈다.


이런 4분법을 그대로 춤에도 적용할 수 있다. 서정춤, 서사춤, 극춤, 교술춤이다. 서정춤은 시처럼 추는 춤이고, 서사춤은 이야기가 전달되는 춤이고, 극춤은 당연히 무용극이 대표적이다. 그렇다면 교술춤이란 무엇인가. 일기나 에세이와 같은 춤이다. 춤으로 일기를 쓰거나, 에세이를 쓰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무형식의 형식 혹은 자유로운 형식이다. 그러하면서도 그 어떤 장르보다도 ‘글 쓰는 자신’ 혹은 ‘춤추는 자신’을 가장 잘 드러내는 게 교술문학 혹은 교술춤의 특징이다.


이매방류 살풀이춤은 서정춤, 논개별곡은 서사춤, 민살풀이춤은 교술춤


내 눈에 비친 세 개의 살풀이춤은 변별성이 분명했다. 이매방류 살풀이춤이 서정춤이다. 논개별곡은 서사춤이고, 민살풀이춤은 교술춤이다. 그렇다면 이 세 개의 춤을 다른 춤꾼도 그렇게 적용할 수 있을까. 아니다. 이건 최지은에게 해당한다. 최지은의 춤 안에 시적인 정서와 문학적 감성이 내재해 있다.


그렇다면 이런 춤의 강점은 무엇인가. 상상력이다. 이는 두말할 것 필요도 없다. 최지은의 춤을 보면서 문학적 상상력이 더해졌다. 춤을 통해서 또 다르게 ‘예술적 외연’이 넓혀졌다는 얘기다. 어떤 이는 춤을 통해서 회화적 상상력을 자극하고 어떤 이는 춤을 통해서 연극적 상상력을 자극한다. 최지은은 확실하게 ‘문학적 상상력’을 자극한다.


대한민국에 이렇듯 춤을 통해서 ‘춤 자체의 기량 전달에 머무는 게 아니라’ 관객에게 예술적 상상력을 제공해주는 춤꾼이 많아지길 바란다. 이번 공연에서 이런 예술적 상상력을 제공하는데 밑힘이 되어준 건 영상(이동준)이다. 영상은 넘치지도 않고 모자라지도 않았다. 무엇보다도 춤의 호흡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살풀이춤, 살(煞)을 푸는 춤일까


이번에 선보인 춤은 모두 살풀이춤이다. 살풀이춤을 ‘살(煞)을 푸는 춤’으로 해석한다. 최지은 또한 이런 시각에서 출발했는지 모른다. 그런데 나는 다르다. 살풀이의 살(煞)은 ‘죽일 살’이라는 것에 동의를 하지도 않으며, 설령 그렇다손 치더라도 앞으로는 이것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하는 입장이다. 아무리 그 뒤에 ‘푼다’ 혹은 ‘풀린다’는 긍정적인 의미가 있다손 치더라도, 춤의 명칭을 죽일 살(煞) 자를 쓰거나 그런 의미로 해석한다는 건 섬뜩하다.


실제 일제강점기에 이와 관련된 춤을 보면 살(煞)의 의미로 사용하는 경우가 없다. 한성준의 살풀이춤은 전혀 이런 춤이 아니다. 오히려 젊은 여성의 흥취(興趣)가 느껴지는 춤으로 해설하고 있다. 살풀이춤의 살의 의미가 고착된 건 대략 1960년대이다. 21세기의 살풀이춤은 같은 춤일지라도 다른 미학, 다른 정서를 담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아니, 다른 미학, 다른 정서가 요구되는지 모른다. 이런 측면에서 나는 최지은의 춤을 다른 방식으로 설명하고 싶다.


속살, 빗살, 햇살


만약 ‘살’이란 음절(音節)을 그로 살리면 ‘풀이’를 연결한다면, 이매방류 살풀이춤은 ‘속살’이요, 논개별곡은 ‘빗살’이요, 민살풀이춤은 ‘햇살’이다. 이매방류 살풀이춤에선, 마치 아지랑이가 속[內]살에 파고들 듯 따스한 느낌이다. 논개별곡은 거치는 강물 위에 소낙비가 내리는 느낌이라고 할까. 거센 빗[雨]살이 느껴졌다. 매우 극적이고 처연하지만, 결국 그 소나기가 강물과 하나 되는 묘한 동질성을 받게 된다. 민살풀이는 눈꽃이 햇[日]살처럼 빛이 났다. 최지은은‘손끝에서 피어나는 눈꽃’이라고 했는데, 그 눈꽃이 매우 밝고 맑은 햇살이 느껴진다.



이매방류 살풀이춤: 남촌(南村)의 서정 또는 호남(湖南)의 서정


산너머 南村에는 누가 살길래/해마다 봄바람이 南으로 오네

꽃피는 사월이면 진달래 향기/밀 익는 오월이면 보리 내음새

어느 것 한 가진들 실어 안 오리/남촌서 남풍 불 제 나는 좋더라


최지은의 이매방류 살풀이춤을 보면서, 김동환 시인의 〈산넘어 남촌에는〉이 떠올랐다. 이매방류 살풀이춤은 ‘어깨’의 춤이었다. 어깨의 조임과 풀림이 느껴졌다. 전라도 어느 땅, 그 남쪽에서 봄날 남풍이 불어오는데, 그 바람을 느끼면서 어깨를 움직이는 여인네가 느껴졌다.


논개별곡: 남강(南江)의 서사 또는 물결의 서사


흐르는 강(江)물은 길이 푸르리니/그대의 꽃다운 혼 어이 아니 붉으랴

아, 강낭콩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최지은의 〈논개별곡〉을 보면서, 변영로의 시 〈논개〉를 떠올린 건 나만이 아니었으리라. 논개가 빠진 진주 남강을 생각한 건 나만이 아니었으리라. 논개별곡은 김수악에서 시작해서 김경란으로 이어졌다. 김수악의 살풀이춤이 버전1이라면, 김경란의 살풀이춤(논개별곡)은 버전2에 해당된다. 지금까지 서울교방을 중심으로 버전2의 여러 바리에이션이 있었다. 그것 모두 가치가 있다. 박순아가 연주하는 25현가야금을 통해서 소개된 바 많은데, 이 모든 것은 김경란의 논개별곡의 변주 형태로 보게 된다.


이번의 최지은은 달랐다. 논개별곡의 버전3으로 칭하겠다. 왜 그렇게 말할 수 있는가. 논개별곡은 ‘손’의 춤이다. 거기에는 놀림과 엮음이 있다. 살풀이 수건의 손놀림 중에서, 가장 다채로운 건 역시 논개별곡임은 모두 동의해 보인다. 이번에 선보인 최지은의 춤에선 이런‘놀림’과 함께‘엮음’이 느껴졌다. 그것이 새로운 동작이 아닐지라도, ‘그만의 것’이란 얘기다.



‘엮음’은 전통음악의 한 형식이다. 수심가에서 엮음 수심가가 생겨났고, 아라리가 엮음 아라리로 이어졌다. 민요에서의 ‘엮음’은 앞의 느린 가락을 가져와서 보다 빠르고 촘촘하게 배치해서 부르는 곡조나 창법을 말한다.


‘거룩한 분노’, 춤으로 형상화하다


엮음의 특징이나 엮음의 미학은 무엇인가. 나는‘청승의 극복’ 혹은 ‘신파의 배격’이라고 말하려 한다. 수심가와 아라리는 매우 정서적으로 우수한 곡조임은 틀림없으나, 이것이 지속될 때 청승스러워질 수 있다. 감정을 지나치게 드러낸다는 얘기다.


이것이 엮음으로 이어지면서 감정을 점차 덜어내게 된다. 논개별곡은 ‘전통 기반의 창작’으로서의 가치를 지니고 있으나, 이런 논개의 서사가 매우 신파조로 갈 수 있는 소지가 있다. 말을 달리한다면, 그런 분위기는 20세기에는 매우 강렬할 수 있었으나, 21세기에는 공감대를 형성하는데 방해가 될 수도 있다.


변영로의 시 〈논개〉의 가치는 무엇일까. 거기서는 ‘분노’가 비분강개(悲憤慷慨)가 아니었다. ‘거룩한 분노’이고, 그것은 ‘종교보다 더 강한 힘’을 지녔다고 했다. 내 눈에 비친 최지은의 논개가 그러했다. 거기서 나는 ’거룩한 분노‘가 느껴졌다. 내가 최지은의 춤이 문학적이고 미학적이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은 〈논개별곡〉을 봤을 때의 감흥을 전제로 한 것이다.


민살풀이춤: 남원(南原)의 교술 또는 눈꽃의 교술


설월(雪月)이 만정(滿庭)한데 바람아 부지마라

예리성(曳履聲) 아닌 줄은 번연(判然)히 알건마는

그립고 아쉬운 마음에 행여 긴가 하노라


조선시대의 시조다. 마당에 눈이 가득한데,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 바람이 불어서 눈발이 날리고 있는데, 마치 그 소리가 눈밭에서 신발이 끌리는 소리처럼 들리는 거다. 조상들은 이 소리를 이성(履聲) 또는 예리성(曳履聲)이라 했다. 이성은 신발 소리라면, 예리성은 끌 예(曳)가 들어가면서 보다 동적(動的) 정서를 드러낸다.


그의 공연의 마지막 순서인 민살풀이춤을 함께 하면서, 남원의 조갑녀를 떠올렸다. 그러면서 묘한 기분이 들었다. 첫 번째 이매방류 살풀이춤은 호남(湖南)살풀이춤이요, 두 번째 논개별곡은 진주 남강(南江)과 연관이 있으며, 세 번째 민살풀이춤은 남원(南原)에 뿌리를 둔 춤이기에 그렇다. 모두 남(南)이라는 한자가 존재하고, 이것이 남녘의 세 시점이 연관이 있는 걸 발견한 것이다.



남원권번의 마지막 예인, 남원춘향제의 영원한 전설로 통하는 조갑녀의 민살풀이춤을 최지은은 ’손끝에서 피어난 눈꽃‘이라 이름 붙였다. 마치 눈의 결정체를 보여주는 듯한 그의 손 모양에 주목하게 되지만, 내가 줄곧 ’민살풀이춤‘을 보면서 느끼게 되는 건 치마폭 속의 발이다. 거기에는 ’끌림과 멈춤의 교차‘가 있다. 민살풀이가 갖는 미학은 수건을 들지 않는 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움직이면서도 움직이지 않고 싶고, 움직이지 않으면서도 움직이고 싶은 발에 무게 중심이 있다.


최지은은 꾸미지 않는다. 그래서 교술춤이다.


최지은의 〈살_푸리〉는 다른 모습의 살풀이춤 셋을 가지고, 음악을 달리하고, 영상의 도움과 함께 ’살풀이춤의 동시대적 공감‘이라고 말할 만큼 결과적 성취가 분명하다.


진선미(眞善美)와 연관해서 그의 춤을 살펴보고 싶다. 많은 춤꾼이 미(美)를 기반으로 춤을 춘다. 이는 너무도 당연하다. 그러나 최지은의 춤은 달랐다. 그의 춤에서 선(善)이 보였다. 춤을 전제로 해서, 선(善)과 미(美)의 차이는 ‘꾸밈’의 정도로 분명히 갈린다. 미를 지향할수록 꾸밈이 많고, 선을 지향할수록 꾸밈이 적다. 최지은의 이번 살풀이춤은 근년에 본 살풀이춤 가운데서 가장 꾸미지 않은, 혹은 꾸미지 않으려는 춤이었다. 그가 의도적으로 그랬다기보다는, 그가 자연스레 그렇게 된 것 같다.


이렇게 선(善)을 기반으로 한 최지은의 춤이 앞으로 어떤 모습으로 나갈지 궁금하다. 그의 춤의 장점은 ‘서사성’ 혹은 ‘교술성’이다. ‘서정성’은 아닌 것 같다. 최지은의 춤은 ‘미의 서정성’보다는 ‘선의 서사성’ 혹은 ‘선의 교술성’을 지향하고 있어 보인다.


한국의 전통춤과 연관해서 서정성, 서사성, 극성의 춤은 이미 존재한다. 그러나 ‘교술춤’이라고 한다면, 용어 자체부터 생경하다. 그러나 분명 한국의 전통춤이나 창작춤 중에서도 ‘교술성’이 드러나는 작품이 존재한다.


교술춤을 잘 추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문학에 비유한다면, 에세이를 잘 쓰는 사람이다.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는 일기를 공개할 수 있는 사람이다. 최지은이라는 춤꾼을 통해서 한국춤에서 ‘교술춤’이 하나의 영역으로 뿌리를 내렸으면 좋겠다. 운율을 맞춰야 하는 시(詩)라기보다 ‘붓 가는 대로’ 쓰는 수필처럼 자연스러운 게 최지은의 춤인 듯싶다. 따라서 최지은은 ‘몸 가는 대로’ 추는 교술춤이 가능할 것 같다. 최지은의 일기가 언젠가 그대로 최지은의 춤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