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현대무용단의 창작공모전 <아카이브 플랫폼>은 현대 무용의 시류를 고스란히 반영한 공연이다. 세 개의 출품작들은 저마다 ‘아카이브’ 활용이라는 기획의도에 맞추기 위해 심혈을 기울인 흔적이 역력하다. 첫 번째 작품 <버자이너의 죽음>은 조지프 켐벨의『신의 가면』을 텍스트로 제시하고, 신화 속의 여신성의 변화에 대해 언급하며 여성의 성기에 대한 기능과 역할의 역사를 수집했다. 안무가와 출연진들은 자신들이 펼쳐 놓은 구상의 의도와 의미를 관객에게 이해시키고자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 자막을 활용하고 나레이션을 넣고 책자까지 발행해서 배부하고 읽어준다. ‘버자이너’는 주로 페미니즘을 주제로 할 때 다루곤 하던 소재로 참신한 발상은 아니다. 그러나 아카이브를 활용하여 과거의 자료를 근거로 이 시대의 고정관념을 뒤집어 본다는 시도는 신선했다.
두 번째 작품인 <삼인무 교육부>는 듀엣이나 군무에 비해 주목받지 못했던 삼인무를 아카이빙 대상으로 선택했다. 현대무용사에서 걸출한 삼인무 장면들이 등장한다. 3이라는 숫자로 구성된 사물과 사건들을 역사 속에서 시대 순으로 나열한다. 이들의 3에 대한 탐구는 현학적으로 흐르지 않고 재치가 번뜩이는 장면들로 속도감 있게 구성되었으며 희극성이 풍부하여 관객의 웃음보가 연이어 터졌다. 삼인무는 늘 다루던 갑과 을의 관계에서 병으로까지 그 관계를 확장한다. 정반합의 원리를 아주 쉽게 풀어 놓았다. 역동적인 움직임으로 춤의 기량도 충분히 보여주면서 무용계의 고질적인 문제들을 넌지시 호소하는 춤에 대한 성찰적 무대였다.
세 번째 작품 <유익한 수난>은 아카이브 활용이라는 미션에 대해 모호한 해석을 던지며 춤을 사유와 사색의 도구로 삼았다. 실행보다 해석이 더 그럴듯한 언어 유희적 작업이다. 네 명의 출연자 중 무용수는 단 한 사람이고 나머지 셋은 안무가, 연주자겸 해설자, 그리고 공연의 진행자 역할이다. 그들의 배역은 설정인 듯 실제인 듯 연기 역시도 준비된 대사를 하지만 라이브처럼 진행한다. 익히 알려진 ‘농–당스’ 형식의 작품이며, 뉴다큐멘터리 공연에서 활용되고 있는 것으로 이른바 ‘디에게시스’라는 개념 하에 논의되고 있는 연기 스타일이다. 인물의 캐릭터나 갈등, 특정 사건 없이 진행된다. 독일의 극단 리미니프로토콜의 <자본론>이란 공연이 내한하면서 확산된 이러한 연기는 무용계와도 일맥상통하고 있다. ‘일상의 전문가(expert in a daily life)’ 또는 ‘레디메이드(ready-made)’라 불리는 일반인 출연자들이 등장하여 자신의 전문적인 지식, 자신의 경험, 생활양식 등을 바탕으로 전통적인 연기가 아닌 자기 자신에 대해서 자신의 지식과 경험 등에 대해서 이야기하며, 스스로를 전시한다. 무용에서도 이미 잘 알려진 ‘자기이야기 서사’는 지금 극과 무용 각각의 장르에서 출발하여 근접한 지점에서 논의되고 있다.
이들의 여파는 전통적 관점에서 보면, 연극에서 연기를 사라지게 하고 무용에서 춤의 비중을 축소시켰다. 그러나 염려되는 것은 앞으로 춤이 없는 춤공연이 당연해지면 이제 무용의 무대는 글쟁이 말쟁이의 사유의 장으로 활용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무용수는 관념 놀이의 도구에 불과하다. 춤을 통해 사유하자는 것이지만 유럽에서와는 달리 우리의 관객은 개념적인 소통에 익숙하지 않다.
예로서 독일의 경우를 말하면, 개념무용은 관념에 집착하는 독일적 근성과 잘 어울린다. 독일의 정신사적 맥락에서 볼 때 정치적 기반이 약했던 1700년대 정치혁명 대신 정신의 혁명을 꾀했던 독일인의 관념적 토양, 19세기 근대 시민들의 교양교육에서부터 시작하여 중·고등학교 때부터 철학을 배우고 문학작품을 읽고 토론하는 것이 일상화된 그들의 사고 체계 하에서 일어나는 무대 위의 절제된 움직임, 정지된 몸은 그저 움직임이 축소된 것 이상의 해석을 지닌다. 그 해석은 작품 내재적 해석에서 그칠 수 없다. 너무나 당연한 말이겠지만 그들의 문화와 역사적 배경으로 그들의 장르를 이해해야 한다. 그런데 이러한 당연함은 무시되기 일쑤다. 유행이랍시고 무작정 수용하는 한국의 공연 현실이 안타깝다. 우리는 그들의 껍데기를 수용하여 가볍게 칠만하고 공허한 무대를 책임지지 못하고 있다.
포스트드라마가 탄생된 독일에서 이제 드라마연극에 대한 관심이 다시 고조되고 있다. 시류는 시류일 뿐, 시간과 함께 사라지고 변한다. 그렇기에 어디까지나 일시적인 실험 현상으로 인식하면 된다. 시의적 경향을 시도하되 신봉하지는 않았으면 한다.
글_ 서지영(공연평론가, 드라마투르기)
사진_ 국립현대무용단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