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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성은 회복돼야 하고, 지역성은 확장해야 한다: 독공독무 서울교방 6인전

공연비평

Vol.115-1 (2025.3.5.) 발행


글_ 윤중강(공연평론가)

사진_ 옥상훈



‘독공독무 서울교방 6인전’이란 제목을 보고 두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하나는 ‘서울교방’이고, 또 하나는 ‘교방춤’이다. 서울교방은 2010년 동인단체의 성격으로 출발했고, 한국 춤계에 공헌한 바 크다. 과거의 ‘도제(徒弟)적 사승(師承)’과는 달리 ‘도반(道伴)적 수련(修練)’을 통해서 춤의 생태계가 건강해지는 큰 역할을 했다. 이런 측면에서라면 독공독무(獨工獨舞)라는 타이틀은 지당(至當)하다. 궁극적으로 각자의 수련 과정 또는 결과를 보여준다는 뜻이 강하게 전달되었다.


하지만 한국의 전통사회를 바탕으로 한 교방춤 또는 기방춤과 연결할 땐 달라진다. ‘독공독무’가 썩 어울리진 않는다. 춤꾼 자신에게는 춤이 ‘종교적 수행’일 순 있다. 그러나 그건 그 개인의 생각에 머물러야 한다. 관객에게도 수행과 같은 춤을 함께 느끼도록 강요할 순 없다. 특히 교방춤의 영역에 속하는 춤이라면 더욱 그렇다.


교방춤은 사교춤이다!


교방이란 어떤 곳인가? 교방은 왜 존재했는가? 교방에선 가무악을 두루 수련했다. 그건 ‘독공독무’는 아니다. 교방은 전통사회에 존재했던 사교(社交)의 공간이다. 사회적 교류의 장이었다.


교방이 존재함으로써 갈등의 요소가 순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정치적 경제적인 거리감이 교방에 존재하는 가무악을 통해서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었기에 그렇다. 교방은 전통사회에서 중앙과 지역과의 관계를 원활하게 해주었다. 예(禮)를 중시한 조선사회에서 악(樂)을 통해서 소통의 기반을 마련했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교방(敎坊)이라고 하지만 결국 교방(交坊)인 셈이다. 교방은 결국 사람과 사람과의 순탄하고 원활한 관계를 위해서 존재하는 곳이다. 따라서 교방은 한국의 전통적인 사교장(社交場)이다.


따라서 교방춤은 ‘개인적 기예’ 이상으로 ‘관계적 소통’을 중시해야 한다. 나의 생각은 분명하다. “교방춤은 사교춤이다.” 이게 교방춤의 존재론적 테제(These)이고, ‘교방춤’으로 뭉친 서울교방 동인이 매우 중시하며 지향해야 할 명제(命題)라 생각한다.


‘독공적’ 노문선, 김미애, 김미선 vs. ‘소통적’ 서진주, 진현실, 최주연


‘독공독무’를 통해서 여섯 춤꾼이 모두 개인적 수련의 깊이를 보여주었다. 이들은 선명히 이분(二分)되었다. 독공적 측면이 강했던 춤꾼이 있고, 사교적(소통적) 측면이 강한 춤꾼이 있다. 노문선, 김미애, 김미선은 독공적 측면이 더 두드러졌고, 서진주, 진현실, 최주연은 소통적 측면이 더 두드러졌다.


어느 쪽이 더 좋다는 건 어리석은 생각이다. 둘의 의미가 다르고, 둘의 가치가 분명하다. 그러함에도 내 입장에선 후자를 더 주목한다. ‘교방춤 = 사교춤’이라는 입장이기에 그렇다. 서울교방의 춤의 수련 과정이 ‘독공독무’일 순 있겠으나, 과거 ‘교방춤’의 연행 방식을 떠올릴 때는 보다 현장에서의 소통을 중시해야 한다.


궁중무용을 보는 즐거움과 민속무용을 보는 즐거움과 다르다. 그렇다면 교방춤의 즐거움은 무엇일까. ‘사교의 설렘’이 있어야 교방춤이다! 내 생각은 그렇다. 춤꾼이라는 생산자와 구경꾼이라는 수용자, 둘 사이의 즐거운 설렘을 전제로 한 팽팽한 긴장이 느껴져야 한다. 제목이 주는 강박(强迫) 때문일까. 몇 해간 서울교방의 춤꾼의 동인전을 보게 되는데, ‘독공독무’는 관객과의 교감적 측면에선 아쉽다.


노문선의 민살풀이춤: 춤에게 몸을 맡기길 바란다


‘독공독무’의 시작은 노문선이었다. 연배가 어리고, 첫 순서라는 부담감이 무척 컸겠다. 그러함에도 첫 단추를 잘 채워주었다. 이런 긍정적인 평을 전제로 해서, 이 춤꾼에게 조언을 하려 한다.



노문선은 아직은 직업무용단과 서울교방의 ‘사이’ 또는 ‘경계’에 존재하는 춤꾼으로 비춰졌다. 노문선과 같이 직업무용단에서 활동하는 무용수의 강점은 선명하다. ‘보여주는’ 춤에 익숙하다. 안무자가 있건, 본인이 짰건, 그간 준비했던 안무를 무대에서 잘 보여주는 게 직업무용단의 숙명적 과제다. 춤은 보이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란 전제하에, 순간적인 임팩트가 아주 좋다.


노문선은 특히 이런 강점이 두드러졌다. 그러나 이것이 꼭 교방춤에서의 장점은 아니다. 노문선은 처음부터 끝까지 ‘보여주는’ 춤을 위해서 ‘만들어진’ 동작을 연결했다. 모든 춤이 원래 그런 것이 아니냐고 반문할지 모르겠다. 노문선의 동작은 모두 선명하고 나무랄 데가 없었다. 그런데 한 가지가 느껴지지 않았다. 그건 ‘흐름’이다. 동작의 연결이 곧 흐름이 되는 건 아니다. 때론 어떤 동작을 임팩트 있게 했을 때, 그게 춤의 흐름과 무관하거나 춤의 흐름을 깰 수가 있다.


민살풀이춤이야말로 어떤 춤보다 흐름이 살아나야 하는데, 너무도 수련된 동작의 연속처럼 보였다. 전형적인 ‘춤추듯 추는’ 춤이었다. 이에 대해서는 글의 후반에서 다시 언급하겠지만, 서울교방 춤의 매력 하나는 ‘추는 듯 안 추거나’ ‘안 추듯 추는’ 춤이다. 다소 극단적이지만, 직업무용단 출신은 순간적으로 정확한 동작을 보여주고, 그를 통해서 관객을 향해 어필하려는 심리가 강해서, 이런 단계에는 이르기가 어렵다.


노문선은 춤을 잘 추는데, 이것이 서울교방의 교방춤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몸으로 춘다’가 아니라 ‘춤에게 내 몸을 맡긴다’라는 사고의 전환이 절실하다. 그렇게 된다면, 이 춤꾼이 지금까지 쌓아 올린 공력이 교방춤에서도 자연스럽게 드러날 것 같다. 노문선이 직업무용단의 경험을 잘 살려내면서, 서울교방만의 특장(特長)을 점차 잘 보충해 갈 것이라고 믿는다.


서진주의 구음검무: 소리가 바뀌어야 춤이 돋보인다


검무라는 게 교방춤에서 빠질 수 없는 종목이라서 그럴까. 서진주는 교방춤을 잘 이해하고, 교방춤에 특화된 춤꾼이란 생각이 절로 들었다. 긍정적인 뜻의 교태미(嬌態美)가 몸에 잘 배어있다. 밖으로부터 가져온 것이 아니라, 안으로부터 끄집어 낸 것이었다. 흥을 가지고 있는데, 그걸 능란하게 쓸 줄도 안다. 그러나 춤의 감동은 적었다. 왜일까? 춤과 음악의 부조화가 확연히 드러났다.


춤의 서진주도 대단하고, 구음의 김보라도 대단하다. 하나 두 사람의 만남은 대단하진 못하다. 음악이 춤을 받쳐주지 못했다. 음악이 춤을 계속 ‘앞서려고’ 느낌이다. 여기서 앞선다는 건 두 가지 측면에서 모두 그렇다. 실제 춤보다 소리가 앞섰다. 말을 바꾸면 소리보다 춤이 늦었다. 또한 소리가 계속 춤을 앞서려는, 곧 이기려는 듯한 인상을 지울 수가 없다. 이는 김보라의 의도는 절대 아니겠지만, 김보라의 독특한 창법과 선율진행으로 인해서 어쩔 수 없었다. 보여지는 게 주인공인데, 들려지는 게 주인공으로 바뀌는 듯한 인상이었다.


매우 안타까웠다. 김보라의 구음으로 춤이 산 경우도 많다. 그러나 이번에는 정말 아니었다. 따뜻함과 차가움의 온도차가 분명했다. 서진주의 춤은 ‘안온(安穩)한 둔각(鈍角)’인데, 김보라의 구음은 ‘청량(淸凉)한 예각(銳角)’이었다. 서진주의 춤은 봄풀(春草)같은데, 김보라의 구음은 낙엽(秋葉)이다. 서로 다른 짝을 찾았으면 좋았겠다. 서진주에게 봄 느낌이 강한 음악이 필요하다. 곧 염양춘(艶陽春)과 같은 피리도 좋겠다. 서울교방을 알리는 데 톡톡한 역할을 한 구음검무는 춤꾼에 따라서 새로운 버전으로 변화해야 하는 시점에 와있다.


우연성이 몸에 밴 서진주


이 글은 ‘우연성’과 ‘지역성’을 키워드로 쓰는 글이다. 한국이 전통춤의 발전 혹은 진화를 위해서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우선 우연성을 언급하자. 이번 여섯 명의 춤꾼 중에서, ‘우연성’의 가능성에 가장 열린 춤꾼은 누굴까.



내가 말하는 우연성은 흔히 즉흥성과도 상통한다. 그러나 엄밀하게 구분해야 한다. 즉흥성은 극단적으로 말하면 ‘어느 부분에서 느닷없이 예상하지 않는 것’을 하게 되는 것이다. 우연성은 좀 다르다. ‘어느 부분을 이미 설정해 놓고 그 부분을 자유스럽게 하는 것’이다. 무대에서 그 순간 자기의 생각과 느낌에 충실하면서 만들어내는 부분이다. 우연성 음악(Chance music, Aleatoric music)이 그러하듯이, 한국의 춤도 그래지길 바란다.


거슬러 올라가면 이미 한국의 전통예술 속에는 우연성의 부분은 이미 존재했다. 오래전에 존재했던 것들이 언제부턴가 퇴화(退化)의 과정을 겪은 것인데, 서울교방은 퇴화한 걸 다시금 끄집어내서 새롭게 진화시킬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단언한다. 서울교방의 춤을 좋아하는 이유 중의 하나가 김경란의 춤에서 발견되는 우연적인 요소와 동작이다.


진현실의 승무: 동작보다 자세에, 분위기보다 전달력에


진현실의 승무는 ‘부유(浮游)에서 침잠(沈潛)으로’ 가야 한다. 지금의 춤은 떠 있다. 춤이 부유하면 다변적(多辯的)일 수밖에 없다. 뭔가를 많이 하는 것 같으나 실제 강하고 깊게 남는 건 적어진다.


춤은 사유적(思惟的)이어야 한다. 떠 있는 춤은 결코 사유적일 수 없다. 가라앉은 춤이라야 사유적일 수 있다. 이런 사유적(思惟的)인 춤이 사변적(思辨的)인 춤으로 승화될 수 있을까. ‘경험에 의하지 않고 순수한 이성에 의하여 인식하고 설명하는 것’을 사변적이라고 한다. 승무란 춤은 한국의 춤 중에서 종교성을 전제로 한 철학성이 내재한 춤이다. 그러기 위해선 춤꾼 자신의 ‘순수한 이성’이 매우 중요한 틀이 된다. 진현실의 춤에서도 이러한 단계를 확인하고 싶다.



진현실의 춤을 보면서, 한 부류의 아나운서가 생각났다. 야외 공개방송이나 중계방송에 익숙한 아나운서가 있다. 이들은 목소리가 떠 있거나, 목소리를 띄우는 데 주력한다. 진현실의 춤이 딱 그렇다. 진현실은 실내의 알찬 무대보다는 야외의 넓은 무대가 익숙한 것 같다. 소수정예가 아닌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하는 현장에 자주 접하는 사람일수록 자신도 모르게 그리 되는 경향이 짙다.


야외 공개방송에 익숙한 아나운서는 어느 순간부터는 자신의 목소리가 ‘떠’ 혹은 ‘들떠’ 있다는 걸 모른다. 습관화되어 그렇다. 이럴 때 주변에서 진심의 조언을 해준다. “목소리를 한 옥타브 내려주세요.” 그래야 청취자에게 편하게 들린다. 서울교방의 춤 혹은 교방춤은 태생적으로 혹은 본질적으로 소수의 마니아를 위한 춤이다. 이게 바뀔지도 모르나 현재로선 그렇다. 서울교방의 춤꾼은 공개방송이나 중계방송을 하는 게 아니다. 스튜디오의 아나운서와 같아져야 한다. 분위기보다 전달력이 중요하다. 드러나는 틀보다는 담겨있는 뜻을 찾아야 한다.


승무의 생명은 무게감이다. 유파를 막론하고 그렇다. 진현실의 승무에서 전반의 舞부분에서는 진중함이 부족했다. 땅의 기운을 더 많이 느꼈어야 했다. 후반의 鼓부분에선 좀 나아졌지만 말이다. ‘동작’보다는 ‘자세’를 더 염두에 두면 좋겠다. 어느 부분을 장쾌하게 한다거나, 어느 부분을 섬세하게 한다거나, 이건 차후다. 일단 단전에 힘을 주고 참선하듯, 몸의 무게중심을 계속 아래로 내릴 필요가 있다. 아나운서에게 한 옥타브를 내려달라는 말과 같다. 충심(衷心)의 내 조언이 진현실 춤꾼에게 거부감없이 전달되길 바란다.


김미애의 논개별곡: 정답은 버려라. 해답을 찾아라


김미애는 그대로 춤이다. 오직 춤이다. 춤추는 김미애를 보면, 어떤 다른 생각이 들지 않는다.

‘잘 추는 춤’이고 ‘깊은 춤’이란 생각이 절로 든다. 김미애의 칭찬은 여기까지 하자. 이번 ‘독공독무’에서의 김미애는 어떤가. 김미애는 독공에 참 어울리는 춤꾼이다. 그동안 얼마나 많이 노력했기에 저런 기량이 나올까 탄복한다. 여기서 하나의 선입견 내지 고정관념을 얘기하겠다.


춤의 장르에서 가장 탄복하게 되는 건 발레다. 난 그렇다. 발레리나 또는 발레리노를 보면 그렇게 된다. 그러나 지금 우리의 무대는 ‘교방춤’이다. 교방춤은 한 개인 춤꾼의 극대화된 역량에 탄복하는 자리인가. 김미애의 춤의 기량에는 탄복했지만, ‘저게 교방춤의 이상적 모습일까.’ 이런 의구심이 동시에 들었다. ‘교방춤의 무대화’ 또는 ‘교방춤의 예술화’란 생각이 들었다. 오해는 말라. 지금의 교방춤이 무대춤이 아니고, 지금의 교방춤이 예술춤이 아니란 말이 아니다.


교방춤의 무대에선 ‘교방춤다운 공감’이 있어야 한다. 교방춤의 예술은 ‘교방춤다운 특성’ 속에 공감되어야 한다. 이번 김미애의 춤에선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만약 김미애의 춤을 국립극장 달오름에서 봤을 때는 달라졌을지 모른다. 남산국악당에서도 김미애의 춤은 근거리(近距離)적 몰입감을 통해서 감동을 일으키게 해주긴 했다. 그러나 다시 얘기하건대, 교방춤의 뿌리와 교방춤적 소통 측면에서 거리감이 느껴졌다.


‘교집합적 결합’은 아쉬우나, ‘긴장 품은 절제’가 돋보였다


김미애의 논개별곡은 나무랄 곳이 없다. ‘나무랄 곳이 없다’는 게 매력이 될 수 없다. 김미애의 논개별곡에선 김미애만의 매력은 많이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지금까지 논개별곡을 춘 사람들, 혹은 현행 탑 레벨의 한국무용가의 ‘공통분모적 장점’을 집합해 놓은 듯한 인상이었다. 타인의 장점이 아무리 많이 모인다고 해서, 그것이 나의 장점이 될 순 없어 보인다. 어쩌면 그렇게 될 때, 자신의 개성은 더 드러나지 않을 수도 있다.



김미애는 그간 국립무용단의 주역 무용수로 활약하면 그만의 ‘김미애 스타일’을 만들어냈다고 확언한다. 그렇듯이 교방춤에서도 ‘김미애스타일’이 만들어지길 바라다. 그러기 위해선 김미애가 교방춤에 투자하는 시간이 많아지고, 교방춤에 관한 탐구가 좀 더 깊어야 하지 않을까. 서울남산국악당에서 선보인 김미애의 교방춤은 지금까지의 교방춤에 근거해서 합쳐져서 완성된 정답(正答)은 될 수 있다. 하지만 김미애가 열과 성을 다해서 찾아낸 교방춤의 해답(解答)은 아니다.


김미애와 같은 탑 레벨의 춤에 대해선 더욱 냉정해져야 하는 게 평자(評者)의 역할이라 생각한다. 그러함에도 진정 칭찬 혹은 찬사를 하나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번 논개별곡에 내재한 ‘긴장 품은 절제’다. 김미애는 무용극에 특화되어 있다. 김미애가 논개별곡을 극적인 춤으로 만들려면 얼마든지 그렇게 만들 수도 있었겠다. 아마 현장에서는 아주 큰 박수를 받았을 거다. 그러나 논개별곡을 ‘극의 범주’에서 접근하지 않은 태도가 참 귀해 보인다.


지역성을 더욱 살려야 할 두 춤: 교방굿거리춤와 민살풀이춤


이 글의 키워드는 우연성과 지역성이라 말했다. 여기선 지역성에 초점을 두겠다. 지금 대한민국은 인구 소멸과 지역 소멸의 시대에 살고 있다. 이를 특별히 막을 길은 없다. 그렇다면 이 시대를 사는 예술가로서 사명과 역할은 무엇일까. 지역 소멸의 시대에 지역정서를 잘 간직하고 이를 널리 알리는 일이다.


특정 지역이 사라져도, 특정 지역만의 지역정서는 계속 이어질 수 있다! 이를 일찍이 경험한 사람이다. 나와 같이 인천에서 태어나 성장한 이들은 공감한다. 인천엔 북한에서 이주한 실향민이 많다. 황해도 사람이 많이 거주했다. 인천을 중심으로 황해도의 전통예술을 뿌리내리는 데 크게 역할을 했다. 어린 시절 나는 인천 특유의 예술과 정서도 경험했지만, 그보다 황해도 지역의 예술과 정서를 더 크게 받아들이며 성장했다.


서울교방에서 ‘교방춤’을 받아들이는 시각은 동인마다 차이가 있을 거다. 서울교방의 춤을 근간이 된 김수악, 조갑녀, 장금도 춤의 지역성은 매우 중요하다. 예술가가 의식하건 의식하지 않건 간데, 자연스럽게 배어있는 지역적 DNA가 있다.



최주연의 교방굿거리춤이 더 빛난 이유가 그렇다. 지역성이 느껴졌다. 최주연의 교방굿거리춤이 ‘김경란류’라 부를지라도 뿌리는 김수악이다. 김수악의 예술적 정서에 가장 크게 영향을 끼친 건 경상남도이다. 마산 출신의 최주연의 교방굿거리춤에는 그대로 경상남도의 춤이었다.


김미선의 질감있는 춤태, 최주연의 양감있는 춤집


다소 거치지만, 여기서 경상도와 전라도의 정서를 구분하겠다. 경남 출신의 최주연과 전북 출신의 김미선이 앞으로 ‘서울교방’ 혹은 ‘전통춤’을 위해서 할 일은 무엇일까. 지역성을 더욱 확연하게 드러내면서, 춤의 지역적 특성을 정립하는 일이다. 김미선의 민살풀이춤은 조갑녀로 시작해서 김경란으로 이어진 춤맥을 바르게 잇고 있지만, 김미선의 춤에는 전주 출신 최선의 DNA를 무시할 수 없다.


전라도가 질감(質感)의 춤이라면, 경상도는 양감(量感)의 춤이다. 흔히 춤계에서 말하는 용어를 가져온다면 질감은 춤태요, 양감은 춤집이다. 경상도 출신의 최주연은 춤집이 좋고, 전북 출신의 김미선은 춤태가 좋다.



동양인이나 한국인의 전통적인 비유를 따르자면, 전라북도춤 혹은 김미선의 춤을 매란(梅蘭), 곧 매화와 난초와 같다면, 경상도춤 혹은 최주연의 춤은 송죽(松竹)이다. 김미선의 춤은 디테일의 질감을 바탕으로 섬세한 움직임이 좋다. 최주연의 춤은 스케일의 양감을 통해서 대담한 움직임이 좋다.


교방춤의 매력: ‘하는 척 안 하거나’, ‘안 하는 척 하거나’


서울교방의 춤은 진주의 김수악, 남원의 조갑녀, 군산의 장금도의 춤맥을 근간으로 성장했다. 따라서 나는 서울교방이 이런 3인의 춤맥 뿐만 아니라, 지역적 정서를 잘 드러내는 춤꾼이 더 많아지길 희망한다. 그런 면에서 최주연과 김미선이 참 고맙다.


전라도의 감영적 태도, 경상도의 서원적 태도


이제 이 두 지역의 정서를 또 다르게 구분하려 한다. 춤의 동작하고도 밀접한 연관성이 있다. 전라북도 사람들은 ‘하는 척 안 하고’, 경상도 사람들은 ‘안 하는 척 결국 한다’, 말을 바꾸면 하는 듯 안 하는 게 전라도춤의 매력이 될 수 있고, 안하는 듯 하는 게 경상도춤의 특징이 될 수 있다. 전통적 지역성을 연구하는 내 시각에선 그렇다는 것이고, 그것이 춤에서도 여지없이 드러난다는 걸 강조하려 한다.


전라북도 사람에겐 아전(衙前)적 사고가 깔려있다. 이런 사고의 중심지가 감영(監營)이다. 따라서 감영적 사고라고도 할 수 있다. 감영의 관찰사는 언제 올지 또 언제 갈지를 모른다. 가변적이다. 전라북도 사람은 그 앞에서는 하는 것 같지만, 결국은 하기 싫은 건 안 한다.


경상도 사람에겐 서원(書院)적 사고가 깔려있다. 이런 사고의 중심지가 문중(門中)이다. 문중의 어른은 바뀌지 않는다. 불변적이다. 경상도 사람은 그 앞에서는 불만을 강하게 드러낸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족보(族譜)적 테두리를 중시한다. 투덜거리면서 불평이 많지만, 결국은 하기 싫어도 한다.


서울교방의 춤 또 김경란의 춤을 보면서 내가 감동하는 건 어느 때일까. 진정으로 무대를 향해 추임새를 보내는 때는 언제인가. 이를 국악의 기악명인들의 산조 연주와 비교하면서 말하려 한다.


나와 같은 사람 혹은 국악계의 귀명창이 추임새를 하는 때는 언제인가. 악기의 명인이 ‘연주하는 듯 연주할 때’의 추임새는 너무 일반적이다. 마음 깊이 우러나오는 추임새는 대개 이럴 때 나온다. 소리 내는 듯 소리가 안 나게 할 때가 있고, 소리 안 내는 듯 싶게 소리를 내는 법이 있다. 이럴 때 귀명창들이 추임새를 한다. 이런 것을 흔히 즉흥성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즉흥적인 게 아니다. 오랫동안 악기의 물성(物性)과 산조의 물리(物理)를 터득한 명인만이 해 낼 수 있는 고도의 기술이다.


춤판에서도 종종 경험한다. 서울교방의 춤과 김경란의 춤을 볼 때 우러나는 추임새를 보내고 싶을 때가 있다. 김경란의 춤에는 춤을 추는 안 추는 부분도 있고, 춤을 안 추는 부분도 있다. 춤과 음악이 맞아떨어지면서 가지만, 때론 조금 당기거나 조금 늦출 때가 있다. 서울교방의 춤을 볼 때 이런 묘한 즐거움을 느끼게 되는 건 김경란을 비롯 김미선의 춤과 서정숙의 춤을 볼 때 그렇다. ‘독공독무’를 통해서 최주연의 춤도 그 계보에 들어갈 수 있음을 확인한다. 아쉽게도 직업무용단 출신에게선 일반적으로 이런 추임새를 부르는 사위가 많지 않았다. 물론 직업무용단의 무용수에게도 이런 측면에 능란한 춤꾼도 있을 것이다.


진정한 추임새는 우연성이 드러날 때 나온다


글의 끝자리에서 우연성을 재차 강조하겠다. 산조 명인의 연주에서 어떨 때 추임새가 나오는가. 연주자가 연주가를 향한 탄복(歎服)하는 추임새가 있다. 일반인에게선 기대하기 어려운 추임새일 수 있다.


우리 춤의 대가는 참 많다. 모두 다 우열을 가릴 수 없는 대가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좀 다른 데가 있다. 한영숙, 강선영, 이매방의 춤은 매우 예술성이 높은 춤인데 비해서, 김수악, 조갑녀, 장금도의 춤은 또 다른 가치가 있다. 그 가치는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나는 그들의 예술적 자유로움에 탄복한다. 난 그걸 우연성과 결부하고 있다. 이들의 춤을 잇는 서울교방의 춤도 그래야 하지 않을까. 나는 서울교방이 한국 전통춤의 우연성을 회복시키고 이를 확장해 주길 무척 바라고 있다.


우연성의 매력은 무엇인가. 우연성은 어떻게 나올 수 있는 것일까. 악기의 연주건 춤의 동작이건 지나치게 인과(因果)의 틀 속에 있다면 재미없다. 우연성은 이런 인과에서 벗어났을 때 가능하다. 말을 바꾸면 정격(正格)으로 가다가, 탈격(脫格)을 만들어내는 기술인 셈이다.


김미선이 김미선하길


이 글도 이제 ‘독공독무’에 마지막으로 무대에 오른 김미선으로 마무리 짓겠다. 김미선의 춤을 매우 인정한다. 많은 이들이 ‘역시 김미선’이라고 했다. 이번에 나는 아니다. 그의 춤을 너무나 기대한 탓일까. 내가 어렴풋이 서울교방의 돌아가는 움직임을 짐작해서 그럴까. 김미선이 서울교방의 자신의 무대뿐 아니라, 여러 신경 쓸 일이 많았을 걸로 짐작한다. 예전과는 다르게, 춤에 몰입하는 기운이 좀 아쉽다. 나는 늘 기대한다. 또 많은 이들이 그럴 거다. “김미선이 김미선했다.” 이런 말이 회자될 날을 기대한다. 물론 또 다른 춤꾼에 대해서도 그런 말이 나오는 날을 기대한다. “000가 000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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