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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의 전통춤, 거기서도 ‘흐름’은 중요하다!: 세실풍류, 독각 그리고 득무-우리 시대의 전통춤

공연비평

Vol.117-2 (2025.5.20.) 발행


글_ 윤중강(공연평론가)

사진제공_ (재)국립정동극장



새로 만발하는 전통춤 꽃봉오리가 피기까지 (2025. 4. 17. 국립정동극장 세실) 

 

국립정동극장의 ‘세실풍류’가 고유한 브랜드로 확고히 정착했다. 3년에 걸쳐 ‘장족의 발전’을 이룬 셈이다. 첫해 2023년에 ‘세실풍류’란 고유명사로 출발했다. 국가무형유산과 시도무형유산의 보유자의 공연을 시작으로 한국의 전통춤을 유파별로 정리했다. 매우 시의적절했고 뚜렷한 성과를 냈다. 이듬해 2024년엔 ‘법고창신–근현대춤 백년의 여정’이란 부제가 달렸다. 한국춤 100년의 역사가 무대를 통해서 정리되며 알려졌다. 대한민국의 홀춤의 역사가 이렇게 풍성했는가를 확인하기도 했고, 그런 맥락을 잇는 지금은 과연 어떠한가, 현재를 돌아보게 했다.


작가주의적 시각으로 바라본 ‘우리 시대의 전통춤’ 


2023년이 공시적(共時的, synchronic) 시각이라면, 2024년은 통시적(通時的, diachronic) 시각이다. ‘독각(獨覺) 그리고 득무(得舞)-우리 시대의 전통춤’이란 제목의 2025년의 세실풍류를 어떻게 볼 것인가. 2023년과 2024년에 비해서, 2025년엔 주관성이 객관성보다 더 반영된 듯한 의견도 있다. 분명 ‘우리 시대’ 곧 ‘이 시대’를 보는 시각은 ‘현재진행형’이기에 저마다 다른 시각이 존재할 수 있다. 


이들의 춤은 저마다 개성과 가치가 있지만, 보는 시각에 따라서는 ‘우리 시대’라는 대표성과는 거리감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분명한 건 하나 있다. 이번 무대에 오른 춤꾼, 곧 자기의 작품을 안무하면서 무대에서 실연하는 그들을 ‘작가’라고는 부를 수 있다. 그들의 춤이 현재의 춤을 대표하거나, 그들의 춤이 앞으로 활발히 전승되리란 보장은 누구도 할 수 없다. 그러나 그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그들은 모두 ‘작가주의’적 입장에서 자신의 춤을 무대에 올렸다는 공통점이 있다. 


전통춤 vs, 우리 시대의 전통춤 (신전통춤) 


‘우리 시대의 전통춤’이란 무엇인가? ‘전통춤’이 있기에, ‘우리 시대의 전통춤’이 존재하겠다. 춤이론가 김영희는 ‘우리 시대의 전통춤’을 ‘신전통춤’이란 명칭 아래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고 있고, 이번 공연에도 그 잣대를 잘 적용하고 있다. 그가 말하는 전통춤과 신전통춤의 공통점은 이렇다. “신전통춤은 전통춤의 기법을 그대로 구사한다. 전통춤의 호흡과 굴신, 국악의 장단과 선율, 의상과 소품 등을 그대로 연행(演行)한다.” 이런 측면에서 전통춤과 신전통춤은 같은 맥락에서 파악할 수 있다. 


반면 전통춤과 신전통춤의 차이 혹은 전통춤에서 신전통춤이 어떻게 변이 또는 진화되었는가에 대해서도 설명한다. “여기에 새로운 동선과 인원 구성, 조명과 이미지 등이 추가되고 있고, 무엇보다 새로운 표현 욕구와 색다른 정조(情調)가 새로운 전통춤을 발동(發動)시키고 있는 것이다.” 

 

흐름, 한국전통예술의 키워드 


나는 이런 의견에 동조하면서, 여기에 한 가지 더 추가하고 싶은 게 있다. 전통춤이나 신전통춤이나 모두 ‘흐름’을 중시해야 한다는 측면이다. 흐름은 한국의 전통예술에서 가장 중요한 특성이자 존재가치다. 한국의 전통음악인 영산회상이나 산조는 모두 중간에 쉼 없이 이어진다. 장단이 바뀌어도 악상이 바뀌어도 그러하다. 


이는 리듬이나 악상이 바뀔 때 휴지가 존재하는 서구와는 다르다. 서구에는 소나타형식이 있다면, 한국에는 산조형식이 있다는 말이 가능할진대, 서구는 ‘흐름’을 차단하면서 정서적 변화가 만들어진다면, 우리는 ‘흐름’을 이어가면서 정서적 심화를 이끈다고 할 수 있다. 


흐름이란 무엇일까? 그 말처럼 잘 흘러가야 좋은 흐름인 것은 분명하다. ‘흐름’은 의도적으로 만드는 게 아니라,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것이다. ‘흐름’은 한국의 전통예술의 가치를 논할 때 중요한 요소이지만, 이 또한 오해는 금물이다. 흐름이 있다고 좋은 춤이요, 흐름이 없다고 좋은 춤이 아니라는 점은 아니다. 


흐름, 만드는 게 아닌 맡기는 것! 

 

중요한 건 춤꾼이 어떻게 흐름을 만들어내고, 그런 흐름이 어떻게 관객에게 전달되느냐가 관건이다. ‘흐름’은 춤꾼이 의도적으로 의식했다고 해서, 그것이 그대로 무대에서 반영되는 건 아니다. 흐름에는 ‘맡긴다’라는 말이 어울린다. ‘무대에서 몸과 마음으로 춤(이란 존재)에게 맡길 때’ 흐름은 자연스럽다. 이제 이번 세실풍류의 세 번째 무대를 대상으로 해서 ‘흐름’이란 키워드를 통해서 그들의 춤을 파악해보고자 한다.  


‘흐름’이란 키워드로 나눈다면, 이번 여섯 작품은 둘로 확연히 갈린다. 권영심, 김현아, 염복리에게는 흐름이 확연하게 존재했으나, 서정숙, 이희자, 권명주는 그렇지 않았다. 다시 한번 분명히 해 둘 것은 서정숙, 이희자, 권명주의 작품이 훌륭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나의 시각에서 보면, 그것은 분명히 ‘창작춤’의 영역에서는 가치가 있겠으나, ‘신전통춤’을 ‘흐름’이라는 키워드로 보았을 때는 거리감이 있다는 점이다. 


우리 시대의 전통춤: 신명지향 vs. 여운지향


이제 조금 다른 잣대를 적용해서, 각각의 춤적 가치를 논하자. 한국의 전통춤 및 존전통에 기반을 둔 춤을 보면 정서적으로 확연하게 구분되는 두 정서가 있다. 나는 이를 ‘신명지향’과 ‘여운지향’으로 가른다. 둘 다 가치가 있겠다. 한국의 새로운 전통춤이 보다 고아(古雅)하면서도 고아(高雅)해지는 걸 원하는 입장에선 단연 ‘여운지향’에 끌릴 수밖에 없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여섯 작품은 또 다르게 가를 수 있다. 신명지향의 작품은 김현아, 염복리, 권명주이고, 여운지향의 작품은 서정숙, 권영심, 이희자. 앞의 작품은 무대와 객석을 혼연일치시키면서 신명적인 즐거움에 목적을 둔다면, 뒤의 작품은 오히려 작품이 끝나고 난 뒤의 여운에 더 방점이 찍힌다. 이렇듯 또 다른 잣대(키워드)를 적용할 때는 춤에 대한 평가가 확연히 달라진다는 걸 전제로 하면서, 여기서는 오직 ‘흐름’이란 측면에서만 파악하겠다. ‘흐름’이라는 키워드로 살펴볼 수 있는 세 작품은 이렇다. 

 

권영심의 〈담소풍〉: 흐름이 살려낸 비대칭적 자유로움 


권영심의 〈담소풍(淡笑風)〉은 ‘신전통춤’, 곧 ‘우리 시대 전통춤’의 가장 바람직한 모습이었다. 거기엔 전통춤과 신전통춤이 아름답게 공존하고 있었다. ‘흐름’이라는 키워드로 보았을 때 가장 이상적이었다. 자연스러운 흐름이 있다. 흐름이 자연스러울 때의 특징은 무엇인가. 전통춤과 신전통춤의 차이를 만들어낼 수 있는 또 하나의 근거는 대칭(對稱, symmetry)의 정도이다. 전통춤은 매우 대칭적이다. 궁중무용은 대단히 그러하거니와 민속춤에서도 대칭성은 강조한다. 홀춤이라 할지라도 대칭성은 강조된다.

 


한국춤을 지나친 대칭성으로 파악하는 건, 이 시대의 한국 춤꾼의 착각이며, 또한 극복해야 할 대상이다. 춤사위 안에 ‘대삼소삼’을 존재하더라도, 그곳이 꼭 도형적인 좌우대칭에서만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건 오산이다. 돌이켜 상상하면, 우리의 전통적 방안 춤은 그 공간의 특성상 대칭적인 사위가 불가하거나, 대칭적인 사위를 원치 않는 공간이었다. 춤을 출 수 있는 공간적 범위 내에서 춤꾼은 매우 자유롭게 사위를 만들어냈을 거다. 이게 오히려 무대화되면서 일정한 테두리가 정해지면서 한국의 전통춤(방안 춤, 교방춤)은 더욱 방위개념을 생각하게 되었는지 모른다. 


신전통춤으로 알려주는 ‘물같이 바람같이’ 


권영심의 〈담소풍〉을 가장 높이 평가하는 이유는 전통적 대칭성에서 자유로웠다는 점이다. 진정 제 흥에 따라서 무대의 공간을 매우 자유롭게 활용했다. 두 번째로 권영심을 높이 평가해야만 하는 이유는 남성 스승과 다른 느낌으로 여성 춤꾼의 역량이 십분 발휘된 점이다. 


권영심은 자신에게 영향을 준 스승을 답습하지 않았다. 이매방보다 더 자유로웠고, 임이조보다 무게감이 있다. 이 또한 곡해하지 말길 바란다. 이매방이 자유롭지 않고, 임이조가 무겁지 않다는 말이 아니다. 권영심이 상대적으로 춤이 자유로우면서도 무게감이 살아있다는 얘기다. 


권영심의 〈담소풍〉은 한국 전통춤의 정서를 흠씬 느끼게 해주면서도, 그간 한국춤에서 꽤 강력하게 힘을 발휘하고 있는 ‘방위개념’에서 매우 자유로웠다. 그러함에도 이 춤이 불균형하거나 불안한 느낌을 전혀 주지 않았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흐름’이 자연스럽기에 그렇다. 물의 흐름이 애초에 정해진 게 아니고, 바람의 흐름이 상황에 따라서 바뀌듯이, ‘물같이 바람같이’ 권영심의 〈담소풍〉은 이어졌다. 나는 그의 춤을 보면서 나옹선사의 게송을 떠올렸다. 자유롭지만 가볍지 않고, 한가롭지만 느슨하지 아니한 ‘신전통춤’의 미학을 발견했다. 나옹선사의 선시를 떠오르게 한다.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 하고 /  창공은 나를 보고 티없이 살라 하네

사랑도 벗어 놓고 미움도 벗어 놓고 /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 가라 하네.


김현아의 〈동발무〉: 관객을 열광하게 만드는 장단적 흐름 


김현아의 〈동발무〉는 흐름이 분명했다. 그러나 이런 흐름은 지난 20세기 중반에 정착되기 시작해서, 20세기 후반에 도착된 흐름이다. 이런 흐름을 지탱해 주는 기본은 한국의 장단이다. 이런 식의 장단 배열이 한국의 전통적인 흐름이라고는 할 순 없다. 일제강점기에 ‘신무용’이란 것이 정착되면서 생겨난 흐름이다. 1930년대 최승희 등이 한국의 전통춤을 무대화시키는 작업과 연관해서, 자연스럽게 ‘한국 무대무용의 흐름’으로 정착이 되었다. 



이러한 흐름은 한반도의 남쪽보다는 한반도의 북쪽에서 일찍이 선호했다. 한반도의 북쪽에서 1950년대에 연구를 거듭한 흐름이라고도 할 수 있고, 1960년대 북한이 사회주의 국가에서 공연을 거듭하면서 인기를 끌었던 형태의 ‘한국의 장단을 전제로 해서 만들어낸, 관객을 흥분하게 만들어내는 흐름이라 할 수 있다. 


김현아의 춤은 개인의 춤으로서 가치가 있는 것이지만, 보다 더 큰 맥락으로 살필 때 그간 서울예술단이 지향해 온 춤의 한 형태가 ’홀춤‘으로 안착했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해 보인다. 김현아는 이런 전통적인 리듬을 혼합하면서 만들어내는 흐름이 몸에 자연스럽게 배었고, 이를 관객 친화적인 춤으로 풀어냈다. 여기엔 고석진, 홍도기, 김다솜의 음악이 큰 몫을 했다. 


염복리의 〈揮(휘)〉: 전통춤을 매우 정직하게 흐르게 한 신전통춤 


염복리의 춤은 다수가 좋아할 수 있는 춤이었다. 염복리는 예술가 이전에 교육자로서 큰 역할을 하는 분이라고 짐작하게 한다. 그의 춤에는 전통춤의 가장 보편적인 동작이 매우 정직하고 깔끔하게 내재해 있다. 거문고(홍모윤)와 장구(김은영)가 이미 흐름의 틀을 완벽하게 유지하고 있고, 그 안에서 염복리의 춤은 안정적이며 때론 교과서적인 느낌마저 들게 했다. 


전통춤에 입각해서 교육하거나 창작을 할 때, 거기서 두 가지의 다른 길들임을 발견하게 된다. 교육에 전념하면서 만들어지는 길들임이 있고, 창작에 전념하면서 만들어지는 길들임이 있다. 내 눈에 비친 염복리는 후자였다. 소쉬르의 언어학에 비유한다면 랑그(Langue)적 측면이 파롤(Parole)적 측면보다 훨씬 우세했다. 



염복리의 〈휘〉는 오히려 한 시대적 결과물을 체계적으로 구성했다는 인상이 강했다. 개인적인 결과물을 통해서 구체적인 개성을 드러낸 작품으로 보긴 어렵다. 전통춤의 보편적인 미학이 염복리의 신전통춤에서 어떻게 차별적인 미학으로 승화될 수 있는지 앞으로가 더 궁금해진다. 


서정숙의 〈상춘도량〉: 존재하는 메테리얼, 부재하는 메소드


거기엔 뛰어난 2인이 있었다. 번득이는 아이디어가 있었다. 부분적으로는 크게 부족한 것이 없었다. 그러나 문제는 무엇인가. 하나의 작품으로서의 완결성을 느끼기 어려웠다. 서정숙의 〈상춘도량〉의 아쉬움과 안타까움은 딱 이 다섯 글자로 집약된다. ’흐름의 부재‘.



서정숙의 〈상춘도량〉은 매우 좋은 작품이 될 수 있으나, 현재로선 아니었다. 완성된 어떤 작품의 전단계(tryout)에 머문 느낌이다. ‘작가적 아이디어’는 흥미롭다. 여기엔 두 사람의 아이디어가 있었다. 춤을 추는 서정숙의 아이디어, 음악을 만드는 김보라의 아이디어. 두 사람이 만든 작품은 처음에는 신선했지만, 계속 그런 궁금증을 유발하다가 끝나버린 꼴이 되었다. 


작품의 한계는 ‘흐름의 부재’인데, 그 이유는 ‘에피소드의 집착’ 내지 ‘에피소드의 연결’에서 찾을 수 있다. 무대에서 아름답고 정갈한 예술적 혹은 종교적 편린을 펼쳐놓다 끝났다. 음악적인 아이디어와 춤적인 아이디어가 매우 귀한데, 어떻게 이렇게 끝나고 마는가 하는 허탈감마저 들게 한다. 메테리얼이 많으나 그게 메소드로 집약되지 못한 전형적인 케이스.


‘상춘’은 결코 그런 소리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건 아닐 거다. ‘도량’은 결코 그런 수련적인 동작으로 만들어지는 건 아닐 것이다. 무엇보다도 ‘상춘도량’이 되기 위해선 거기에 ‘플러스 알파’가 강력하게 작용하여야 하는데, 두 사람은 그걸 찾지 못하고 지금 단계에 만족하고 있는 듯 보인다. 


예술작품을 만듦에 있어서, 참여자들이 서로 사이좋게 공존한다고 해서 좋은 결과물이 만들어지는 건 아니다. 지금 좋은 춤꾼과 좋은 소리꾼이 있는데, 이를 냉정하게 바라보면서 과감하게 뺄 것은 빼고 넣을 것은 넣으면서 하나의 작품으로 완성해 가는 과단성 있는 연출은 없어 보인다. 

 

이희자의 〈마중〉: 동작과 표현에서 벗어났을 때, 깊게 완성되는 춤 


이희자의 〈마중〉은 매우 현명한 소재였다. 한국의 전통적인 여인상에 대한 고정관념을 벗어나게 하고 있다. 소재는 망부석(望夫石)에서 가져왔다. 멀리 떠난 남편을 기다리다가 돌이 되었다는 얘기다. 망부석은 슬픔과 한으로 연결되지만, 이희자는 작가로서 그런 접근과는 달랐다.



이 춤을 보면서 “기다리는 기쁨도 있다”란 노랫말이 합쳐졌다. 정미조가 부른 〈그리운 생각〉(1972)은 전우 작사, 김기웅 작곡. “그립다 생각나면 조용히 눈을 감자 / 잃었던 조각들이 가슴에 피어난다 / 아득히 가버린 그 사람 지금은 없어도 / 마음을 조이며 기다리는 기쁨도 있다/ 추억은 아프다고 그 누가 말했을까 / 그립다 생각나면 조용히 눈을 감자” 


전통적인 정서를 가져왔지만 고정된 시각에서 벗어났다는 점에서 매우 가치가 있다. 아쉬운 점은 음악이었다. 이런 유형의 음악이 요즘 세대와 얼마만큼 공감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생겼다. 마치 1980년대의 한국의 창작무용이 선호했던 음악을 듣는 기분이었다. 


춤 자체로도 매우 양가적으로 판단하게 된다. 〈마중〉은 전통춤에서 입춤 혹은 살풀이 계열의 춤으로 볼 수 있다. 이런 춤을 가져왔다는 자체는 매우 현명할 순 있으나, 이희자의 움직임이 입춤과 살풀이춤과 유사해질수록 〈마중〉이 담고자 하는 작가적 관점에서 벗어나는 기분이 들었다. 그런 동작을 할수록 1970년대 이후 살풀이춤에 대한 고정관념이라 할 슬픔과 한의 정서로 함몰 되어가는 안타까움이 느껴졌다. 


〈마중〉에선 도입부에서 일상성 또는 여성성이 느껴지는 움직임은 매우 흥미로웠다. ‘우리 시대의 전통춤’이 이래야 한다는 기대가 생겼다. 현실에서 누군가를 기다릴 때의 표정과 움직임이 전달되었고, 끝부분에서 상대를 보내는 듯한 의식으로 다가온 큰절하는 부분은 느껴지는 게 많았다. 마중은 이렇듯 ‘일상적인 동작을 춤의 구조 속에서 녹여낸 부분’에서는 느껴지는 정서가 많았으나, ‘입춤이나 살풀이춤의 동작을 가져온 부분’에서는 〈마중〉의 진의(眞意)가 전달되지 않았다. 


〈마중〉이란 신전통춤을 타 장르와 비교컨대, 단편영화와 같은 느낌이 살아있었다. 한편의 정갈하고 여운이 남는 단편영화를 보는 기분이었다. 이런 느낌을 더 살리기 위해서는 ‘춤과 같은 춤’은 거리 둘 필요가 있다. 비교컨대 어느 훌륭한 단편영화에선 배우가 ‘연기 같은 연기’를 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 외적으로 표현하려고 하면 할수록, 내적인 생각이 깊게 전달되는 게 방해가 된다. 


단편영화 중에는 ‘흐름이 없는 것 같은 흐름’이 있다. 단편영화를 아는 관객은 거기에 자기의 생각과 느낌을 대입하면서 감상자로서 역할에 집중하게 된다. 그러면서 작품의 가치와 감동하게 된다. 스타일과 이미지가 확실하게 잘 전달된다면, 보는 사람 저마다의 몫으로 이야기는 만들어진다. 


결국은 역시 ‘흐름’이다. 〈마중〉을 단편영화로 비교한다면 소재도 좋고 이미지도 좋다. 그러나 만듦새가 아쉽다. 편집 과정이 정교하지 못해서 시퀀스(sequence)를 단위로 해서 일괄된 흐름을 만들어내지 못했다고나 할까. 〈마중〉이 마치 단편영화와 같은 흐름이 만들어지기 위해선

또한 명심했으면 하는 점도 있다. 매우 역설적으로 들리겠지만, 춤적인 표현과 거리를 두어야 한다. 음악적인 한계를 극복하고, 동작적인 강박(?)에서 벗어난다면, 이희자의 〈마중〉은 기존의 한국 신전통춤과 차별화되는 작품으로서 커다란 위치를 점유할 수 있으리라고 본다. 

 

권명주의 〈질굿 소고〉: 마당춤과 무대춤 사이에서 갈등하다


권명주의 〈질굿 소고〉는 하나의 성취는 확실하다. 권명주가 연구자라는 점이다. 전통적인 마당춤의 가치를 분명히 인식하고 있다는 점은 크게 인정한다. 그럼 아쉬운 점은 무엇일까. 연구에 비해서 연행이 아쉽다. 누군가에는 ’마당춤과 무대춤의 결합‘이라는 긍정적인 평가를 받을 수 있다. 하지만 전혀 다른 평가도 감수해야 한다. 무대춤을 생각하고, 마당춤만을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무대춤도 아닌 것이, 마당춤도 아닌 것이‘ 라는 안타까운 평가가 내려질 수 있다.



권명주의 춤은 마치 ’렉처 퍼포먼스‘를 보는 것 같았다. 그의 춤을 3-4부분으로 나눠서 살필 수 있고, 그 부분마다 춤꾼 혹은 안무자로서 공들이면서 의도하는 바를 알 수 있었다. 그런 것들이 유감스럽게도 하나의 일관된 작품으로서의 자연스러운 연결이라고 보긴 어려웠다. 춤꾼 혹은 안무자로서의 권명주는 ’당산나무 아래에 놓인 고깔‘과 ’오채질굿장단의 블규칙한 혼소박‘은 각기 별개의 에피소드로서 저마다의 매력을 뽐내려 했다.

 

흐름: 일상성과 상징성을 연결하는 작가적 역량 

 

이번 공연에서 〈상춘도량〉, 〈마중〉, 〈질굿 소고〉에는 공통점이 있다. 음악으로 치면, 이 세 작품은 ‘절대음악’이 아니라 ‘표제음악’이 있다. 안무자 혹은 춤꾼으로서의 무대 위의 자아가 ‘동작을 통해서 이미지가 전달되고자 하는 작가적 의도’가 다분하다. 그 배경에 모두 스토리를 깔아 놓고 있다. 스토리에 대한 비중은 저마다 차이가 있으나, 그 스토리를 통해서 ‘우리 시대의 전통춤’ 혹은 ‘신전통춤’만의 특성을 교감하고자 하는 의도가 느껴진다. 


〈상춘도량〉은 봄날의 절에서 느껴지는 수련의 도장으로서의 경건한 신선함, 〈마중〉은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리는 힘겨움을 넘어선 희열, 〈질굿 소고〉는 농악판의 신명성을 전제로 하면서 그 안에서 느껴지는 고깔의 의미. 이 세 작품의 공통점은 모두 이렇게 ‘일상성’을 전제로 해서 ‘상징성’을 지향한다. 


이런 것들은 프로그램북(작품노트)을 보고 보았을 때는 전달되는 바가 있겠으나, 사전 지식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보았을 때도 그렇게 전달될 수 있는가는 미지수다. ‘작가의 생각’과 ‘관객의 감성’에는 거리감이 크다. 


세 사람이 모두 부분적인 표현에는 충실하고 아름다웠지만, 그것이 하나의 작품으로서의 논리와 감성으로 연결되지 못했다. 결국은 ‘흐름’이다. 이 세 작품이 매우 공들인 작품임은 인정하지만, 흐름을 만들어내지 못한 치명타가 있다는 걸 작가적인 관점에서 모두 인식했으면 한다. 


세 사람이 작가로서의 부족함을 인식하는 키워드는 ‘흐름’이다. 춤꾼이 작가적 입장으로서 부분적인 에피소드에 연연한다는 것이 과연 전체적인 작품의 흐름과 얼마만큼 유기적으로 연결되고 있는가를 객관적으로 판단해야 한다. 세 작품이 모두 더 좋은 작품이 되기 위해선, 하나의 작품으로서의 쭉 이어지는 일관적인 흐름을 만들어내야 한다. 


세실풍류: 한국전통춤, 그 홀춤의 과거 현재 미래 


“1년 농사가 잘 되면 3년 농사가 잘 되고, 3년 농사가 잘되면 면 10년 농사가 잘 된다.” 우리 조상님이 하신 말이다. 3이라는 숫자는 ‘완성’과 ‘고비’를 뜻한다. 3년은 언제나 고비가 되고, 3년이 잘 되면 그건 완성을 의미하면서, 또 하는 추진의 원동력이 된다. ‘세실풍류’의 3년은 아름답고 가치가 컸다. ‘세실풍류’는 이제 10년을 향해 가야 한다. 세실풍류를 지켜보면서 ‘너끈하다’란 단어가 떠올랐다. ‘무엇을 하는 데에 모자람이 없이 넉넉하다’는 뜻이다. 지금까지의 3년을 바탕으로, 앞으로 더욱 앞을 내다보는 기획으로 한국전통춤, 그 홀춤의 과거 현재 미래가 세실풍류를 통해서 더욱 구체화하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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