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비평
Vol.119-1 (2025.7.5.) 발행
글_ 윤중강(공연평론가)
사진_ 양동민 (포토비) Ⓒ인천시립무용단
인천시립무용단은 1981년 창단되었다. 1981년 7월 1일 인천시가 인천직할시로 승격해 경기도와 분리 독립했다. 인천 문화 발전의 변곡점이 되었고, 직할시의 위상에 맞게 인천시립무용단을 창단했다. 초대 예술감독 이영희는 일찍이 인천에서 무용학원을 운영하면서 여러 제자를 길러냈고, 인천의 춤 발전에 공헌한 인물이다. 제9대 윤성주 예술감독은 지난 8년간 인천시립무용단을 이끌어왔다. 역대감독 중 재임 기간이 가장 긴데, 윤 예술감독이 무용단을 잘 이끌어왔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일 듯하다.
비평은 준엄한 일갈
‘춤추는 도시 인천 2025‘ 폐막공연은 인천시립무용단과 인연을 맺은 윤성주 감독의 마지막 무대이기도 했다. 폐막공연은 크게 두 부분이었다. 하나는 그간 윤성주 예술감독이 이끌면서 만들어낸 대표작의 부분 감상이다. 또 하나는 현재 국공립무용단체를 이끄는 예술감독 6인의 홀줌이었다. 폐막공연 타이틀은 〈Iconic selection 獨步〉이었는데, 제목을 부친 배경은 이들 6인의 무대와 연관이 있어 보인다. 폐막공연에는 각지의 무용인의 관람과 시민의 환호로 성공적으로 끝났다. 나는 이렇게 폐막공연이 성공했다는 걸 축하하는 것과 동시에 평자(評者)로서는 다소 냉혹하게 이 공연을 되짚으려 한다.
비평(批評)에서 중요한 건 ‘준엄(峻嚴)한 일갈(一喝)’이다. 대한민국 문화계에서 20세기 평론가들은 거의 그랬다. 그러나 21세기가 사반세기가 지난 즈음, 각 분야에서 평론가가 진정 평론가의 역할을 하고 있는가에 대해 스스로 반성하게 된다. 준엄한 것은 무엇인가? ‘조금도 타협함이 없이 매우 엄격’한 것을 말한다. 내가 지금 쓰는 이 글이 195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이 땅의 평론을 이끌었던 분 만큼은 못 되더라도, ‘할 말은 꼭 하는 평’이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이 글을 쓰려한다.
여기에 먼저 인천시립무용단의 대표작 두 편의 갈라쇼 형식이었다. 먼저 인천시립무용단의 작품 〈Water Castle 토끼탈출기〉 中 상좌다툼부터 살펴보자. 판소리 수궁가를 가져와서, 현대사회의 생존경쟁을 풀어낸 작품이다. 윤성주 예술감독의 인천시립무용단 재임 중 대표작 중 하나라 할 수 있다. 그가 인천시립무용단과 함께 만들어낸 우수작이 몇 편 있는데, 나는 〈비가〉와 〈Water Castle 토끼탈출기〉 두 편을 가장 우선으로 꼽고 싶다. 다른 작품도 우수작이기 하나, 인천시립무용단의 독창성과는 다소 거리감이 있어 보인다. 〈만찬-진,오귀〉라는 작품이 있으나, 이는 국립무용단의 〈신들의 만찬〉(2013)의 ‘업그레이드 버전’ 혹은 ‘또 다른 접근’이라 하겠다. 소재적인 측면에서 새로운 느낌은 들지 않았다.
〈담청〉을 바라보는 두 개의 다른 접근: 안무적 개성 vs. 단원적 역량
인천시립무용단의 〈담청〉은 안무적인 측면과 단원(무용수)적인 측면으로 확연하게 나눠서 평이 가능하다. 안무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어떠한가. 국립무용단의 계보를 잇는 송범, 배정혜를 잇는 작품이다. 지난 20세기 국립무용단에서 한국의 춤의 여러 형태를 엮어서 ‘갈라쇼’로 공연한 노하우가 만만치 않다. 이런 작품은 국내외에서 큰 호평을 받았다. 1970년대와 1980년대의 국립무용단의 작품과 무용수의 숙련도는 지금도 높이 평가받아야 마땅하다. 이런 흐름을 이어 받아서, 국립무용단의 배정혜 예술감독은 〈코리아 판타지〉를 만들어냈다. 국립무용단의 20세기적 역량이 21세기에 빛을 발한 것이다.
국립무용단의 배정혜 예술감독의 〈코리아 판타지〉와 인천시립무용단의 윤성주 예술감독의 〈담청〉은 각기 독특한 매력을 가지고 있다. 윤성주 감독은 과거 송범이 이끌었던 국립무용단 시절의 경험을 바탕으로, 여기에 ‘최현 스타일’의 춤(독무, 소품)의 매력과 ‘전황 스타일’의 춤(군무, 농악)의 강점이 잘 용해되어서 인천시립무용단의 〈담청〉이 탄생하였다.
대한민국 국공립무용단, 정통과 전통을 포기한 것인가
돌이켜보면 이젠 〈담청〉과 같은 작품을 만들 수 있는 국공립 예술감독도 많지 않아 보인다. 국립무용단과 서울시립무용단에서도 새로운 시각으로 한국춤의 여러 레퍼토리를 응집해서 하나의 작품을 만들려고 하지만, 그런 작품에는 연출이 있고 음악이 있고 의상이 있고 조명이 있되, 과거 송범과 배정혜의 작품에서 느낄 수 있는 한국춤의 오소독스(orthodox)한 품격을 찾아볼 수가 없다.
국공립단체야말로 ‘정통적인 전통’을 보여주어야 하고, 시대와 연관한 ‘합리적인 보수’로서의 작품을 보여주어야 한다. 요즘의 국공립단체는 더도 덜도 말고 퍼포먼스와 이벤트라는 단어와 개념에 딱 맞는 작품이다. 그런 작품에선 ‘주류’에서만 느낄 수 있는 아우라가 없다. 주류가 주류가 아니며, 또한 이것을 통해서 새로운 주류를 만들어낼 가능성도 매우 희박하다.
춤이라는 이름이 붙은 춤이 주가 되는 공연임에도, 도저히 춤을 느끼고 즐길 수 없는 본말전도(本末顚倒)의 공연에 대해서 분명 바른 목소리를 내는 의견도 있다. 그러함에도 국공립단체에겐 우이독경(牛耳讀經)인가 보다. 인스타그램을 통해서 시각적이고 표피적인 만족을 하는 세대들의 호응을 과대평가하고 만원사례(滿員謝禮)를 즐기면서 좋아하기만 한다. 국공립단체의 단체장과 기획자가 스스로 잘했다고 착각하는 이 현실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과연 지금의 그들이 앞으로 한국춤의 새로운 팬층으로 공고하게 자리를 잡을 것이라고 믿는 것일까.
연출, 의상, 조명, 음악 등의 깊지 못한 조합이 난무하는 상태에서, 인천시립무용단의 〈담청〉은 지난 20세기가 만들어낸 한국춤의 진정한 계승으로서의 가치는 지니고 있다. 그러함에도 인천시립무용단만의 독창적 작품으로서 상찬(賞讚)할 순 없다.
〈담청〉의 초연을 보면서 감탄한 것은 인천시립무용단 단원들이다. 〈담청〉과 같은 작품에서 한국의 여러 춤의 갈래, 곧 궁중춤적 요소, 유교춤적 요소, 민속춤적 요소, 무속춤적 요소를 모두 한 무대에서 소화하기는 수월치 않으나, 인천시립무용단 단원은 속도감이 있는 변신을 통해서 〈담청〉이라는 변화무쌍한 작품을 성공시켰다. 이게 인천시립무용단의 역량이고, 앞으로도 인천시립무용단이 발전할 수 있는 기반이라고 확신한다.
토기, 민첩한가? 어수선한가?
〈Water Castle 토끼탈출기〉는 판소리 〈수궁가〉를 가져와서 춤극으로 전개하고 있다. 토끼 역은 유나외. 윤성주 예술감독이 그녀를 가리켜서 ‘캐릭터를 똑 따먹는 보배 같은 단원’이라고 했다. 예술감독의 칭찬에 동의하면서, 여기서 아쉬운 점을 얘기하겠다. 이건 작품 자체 문제인지, 개인 역량 문제인지, 좀 더 꼼꼼히 살펴야 할 사항이다. 앞으로도 이 작품을 더 공연하길 희망하기에, 이렇게 지적하는 것임을 이해하길 바란다.
유나외의 연기는 안타깝다. 처음에는 시선을 끌 수 있는 임팩트가 있다. 그러나 그걸 점차 현명하게 발전시키지 못한다. 한 마디로 ‘너무 정신 사납게 돌아다니다가 끝나는’ 형상이다. 슬랩스틱 코미디 같기도 하고, 쇼뮤지컬의 ‘바니걸’의 현란한 움직임에서 끝나 버린다.
관객은 토끼의 움직임을 통해서 뭔가가 느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 수궁가를 자유롭게 해석하더라도 토끼의 지략(智略)은 변함이 없다. 상좌다툼에서라면 더욱 그렇다. 무용수 유나외에게 이렇게 질문하고 싶다. “토끼의 춤동작이 매 순간 순발력 있게 관객에게 전달되고 있는가?” 어수선한 움직임과 민첩한 움직임은 상당히 다르다. 토끼는 어수선한 상황에서 매우 민첩하게 대처하는 거다. 유나외의 토끼에서 그런 모습을 보았으면 좋겠다.
〈상좌다툼〉의 군계일학, 김철진 홍수연 양수현
이 작품은 20022년에 초연했다. 3년 이상 공연한 작품이기에 군무는 매우 능숙했다. 그런데 여기서 더욱 빛나는 이들이 있었다. 군계일학(群鷄一鶴)이라는 말이 있듯이, 군무(群舞) 속에서 눈길이 가는 단원을 딱 찾아낼 수 있었다. 앞의 ‘들짐승 상좌다툼’에선 김철진이다. 성실한 에너지를 바탕으로 해서 독보적 존재감이 빛난다. 한국의 춤계는 이상스레 장신(長身)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춤은 큰 사람을 위한 장르인가. 아니다. 김철진은 안에 충만한 에너지가 있고, 그가 무대 뒤 테이블 위에서 도약할 때는 객석에서 충족감을 느낄 수 있었다.
여성 단원이 중심이 된 ‘날짐승 상좌다툼’으로 바뀌면, 홍수연에게 시선강탈을 하게 된다. 몸과 춤, 동작과 흐름, 한국춤과 현대춤을 다 아는 무용수이다. 또 다른 많은 여성 무용수도 괜찮았지만, 중간 부분에서 다크호스처럼 등장하는 양수현에게 눈길이 간다. 앞의 홍수연이 클래식한 서정성이 있다면, 양수현은 컨템퍼러리한 서사성이 있다.
인천시립무용단에는 이들 외에도 보배로운 존재가 보인다. 앞으로 작품의 안무, 작품의 연출이 좋을 때 이들 중에서 또 빛날 사람들이 보인다.
〈풍류가인〉, ‘동작’과 ‘흉내’ 사이
장구춤과 설장구를 기본으로 한 작품이다. 이 작품은 인천시립무용단의 〈담청〉이라는 작품, 곧 전통춤의 옴니버스적인 연결에선 그런대로 볼만한 부분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따로 떼놓고 보니 그 한계가 여실했다. 관객들의 박수, 외국인들의 환호에 만족해서는 곤란할 것 같다. 음원(연주) 선택이 ‘신의 한 수’였다.
실제 단원들의 설장구 기량은 아쉬웠다. 국악을 전공하고 농악을 아는 사람의 시각으로 보면, 무용수의 허점이 그대로 노출된다. 매우 유감스럽지만, 설장구를 너무 모른다. 대한민국 중심도시의 시립예술단 작품이라기보다는, 그라운드에서 펼쳐지는 매스게임의 한 부분을 무대에서 보는 것 같은 아쉬움이 크다.
앞의 장구춤에서 설장구와의 연결이 매끄럽지 않았다. 두 개의 다른 작품을 연결한 느낌이다. 앞의 장구춤은 그런대로 그간 무대화된 장구춤의 장점을 잘 연결하고 있다. 그런데 설장구 부분에서는 ‘동작과 흉내 사이’의 간극이 그대로 드러났다. 음원에서 들리는 설장구의 가락을 다 치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하는 게 아니다. 다 치지 않더라고 그 음원에서의 호흡을 바탕으로 해서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동작이 있다. 그러나 안무 자체도 어떤 부분도 그렇고 실제 단원들의 움직임에서 이질감이 보였다.
설장구를 배워서 익숙한 사람에게는 공통적인 호흡과 움직임 있다. 한국인이나 외국인이나 상관없이 몸에서 나오는 움직임이 있다. 그 움직임의 외형이 각각 다를지라도, 설장구에 익숙한 사람은 그런 몸짓에서 공감한다. 그런데 이번 〈풍류가인〉 속 몇몇 움직임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설장구에서 격정적으로 몰아가는 역동적 움직임은 그런대로 동작의 하나로 넘어갈 수 있다. 하지만 장구의 풀어지는 가락에서 무용수가 좌우로 몸을 움직이는 동작은 매우 어색하다. 설장구에 익숙한 사람은 그런 움직임이 나오지 않는다. 극단적으로 말한다면, 그건 오금의 원리를 통해서 상모를 돌리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그저 외형적으로 상모를 돌리는 흉내를 내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풍류가인〉의 설장구는 전체적인 구성도 약하다. 매스게임의 일부를 보는 것 같다. 극장 무대의 공간 활용적 측면에서도 그러하지만 농악에서 고유한 진법을 생각한다면 더욱더 초보적이다. 이건 두 개의 팀이 다른 색깔의 옷을 입고 운동장에서 매스게임할 때 대형이다. 한번 보는 관객은 이런 단순함에 시선을 강탈하고 박수를 보내겠지만, 〈풍류가인〉을 음원에 관심을 두고 보고 또 보게 된다면 이 춤이 갖는 허점이 그대로 드러난다. ‘순간적 황홀’에서 나온 탄성이나 박수를 ‘예술적 경지’에 대한 찬사로 오해해서는 곤란하다.
예술감독도 무대에선 ‘춤꾼’이어야 한다
“하루 연습을 안 하면 내가 알고, 이틀 연습을 안 하면 상대가 알고, 사흘 연습을 안 하면 관객이 안다” 예술감독 6인의 춤을 보면서, 음악 하는 사람들 사이에 전해지는 이 말이 생각났다. 이번 무대에 모인 6인은 독보적(獨步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이 예술감독으로서 안무한다거나 지도하는 측면에서 각자 독보적이라는 것에 동의한다. 그러나 이번 무대에서 실제 춤을 추는 모습을 보면서 6인 모두에게 “가히 독보적이다”고 말하긴 어렵다.
6인은 이번에 안무자로서 무대에 오른 게 아니다. ‘춤꾼’으로 등장을 한 것이 분명하지 않은가. 내 시각으로는 6인 중에서 무대에서 ‘춤꾼’은 앞의 3인이었다. 박기량 〈복개춤〉, 이정윤 〈판〉, 윤혜정 〈맨손살풀이–세월〉에선 각자의 춤의 ‘결’이 보였다. 그건 마치 한옥에서 대청마루와 같은 것이었다. 오래도록 한 방향으로 닦고 또 닦고 계속 닦아서 ‘자연스럽게 밴 윤이 흐르는 결’과 같았다. 춤의 흐름이 분명하게 관객에게 전달되었다.
김혜림의 〈심심 나례(深心 儺禮)〉, 김충한 〈소고춤〉, 윤성주 〈담청(淡靑)〉은 아쉽지만 그렇지 않았다. 이들은 누군가에게는 매우 뛰어난 안무가로 평가받고 있고, 한 단체를 이끄는 리더로서 역량을 충분히 갖추고 있고 존경받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무대에서 보는 건, 그런 것과는 상관이 없다. 얼마나 춤에 익숙하고 얼마나 몰입도가 높게 춤을 추어서 관객에게 감동을 주느냐가 관건이다. 내 시각으로는 이들은 무대에서 춤꾼으로 보이기보다는 ‘지금 자신이 추고 있는 작품을 만든 안무가’로 보였다. 지금 추고 있는 춤이 자기 몸에 꽉 배어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과거에는 그랬을지 몰라도 지금 순간에는 아니었다.
레슨 하듯 연주하고, 안무하듯 춤춘다?
음악 하는 사람들 사이에 이런 말이 있다. “레슨 하듯 연주한다.” 이런 말을 춤에 적용한다면 ‘안무하듯 춤춘다’란 말이 된다. 학생들을 많이 가르치는 대학교수는 훌륭한 교육자일 수는 있어도 훌륭한 연주가는 아니다. 마치 연주할 때, 그간 자신이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레슨 시 강조했던 것처럼 그렇게 연주를 한다. 그건 연주하기보다는 렉처와 같다고나 할까.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런 습관이 몸에 밴 것이다.
아주 중요한 연주를 앞두고는 대학교수 등이 레슨을 잠시 접고 오직 자신의 연마에 몰두하지 않는가. 춤이 몸에 착 배어서 춤과 사람이 하나 되어서 아름다운 에너지를 뿜을 때, 그게 바로 아우라요 우리는 거기서 감동하게 된다. 이번 무대를 지켜보면서 앞의 3인에게서 춤을 통해서 많은 걸 느끼고 감동했지만, 뒤의 3인에게서는 그렇지 못했다. 그들만의 생각과 느낌을 짐작하고 그것을 춤을 통해서 알 수는 있었지만, 매우 안타깝게도 그게 춤 자체로서의 감동으로는 연결되지 못했다.
박기량 〈복개춤〉, 복개는 무구(巫具)이자 무구(舞具)여야 한다
박기량의 〈복개춤〉은 다른 춤에서 느낄 수 없는 생사의 에너지가 있었다. 전체적으로 절제하면서도 끌고 가는 힘이 느껴졌다. 그러나 이 춤은 ‘의식적인 춤’으로 볼 때는 의미가 크지만, 상대적으로 ‘무대 위의 춤’으로 볼 때는 재미가 반감한다. 복개춤에서의 복개는 무구(巫具)이다.
그런데 이것이 굿이라는 의식을 떠나서 무대화 되었을 땐 무구(舞具)로 보여야 한다. 그런 측면에서 볼 때, 이 춤의 한계는 드러난다. 예를 들어서 부채춤을 추고 소고춤을 출 때, 손에 들려있는 부채와 소고가 여러 의미로서 관객에게 전달되어야 한다.
복개춤에서의 복개도 그런 차원에서 진화가 필요하다. 지금은 그저 무속에서의 중요한 도구를 가져와서 그 의미를 되살리면서 소중히 다스리고 있구나, 이 정도 뿐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이번 6인의 예술감독의 춤에서도 ‘음악과 춤의 상호연결’도 차이가 분명했는데,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박기량은 음악을 알고 추는 춤이었다.
이정윤 〈판〉, 관객을 따라가게 만드는 방향과 속도
이정윤의 〈판〉은 하나의 작품으로 완결성을 갖고 있었다. 이 작품이 왜 ‘판’인가를 알게 해주는 움직임의 연결이었다. 평범한 걸음으로 시작해서 점차 움직임을 만들어내는 리듬을 타는 과정을 관객들도 함께 할 수 있었다. 춤에서도 ‘방향과 속도’가 중요한데, 이정윤의 춤은 그것이 매우 분명하다. 따라서 그런 걸 바탕으로 관객들은 저마다의 감상법으로 춤에 빠져 들 수 있는 것이다.
그의 춤의 동작이 때론 전통적인 동작으로 안 보일 순 있어도, 그가 선택한 음악의 선율과 리듬 등의 요소에 적응한 사람이라면, 이정윤의 동작은 매우 자연스럽게 배태되는 움직임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이정윤의 춤의 강점 중의 하나는 이런 동작 속에 명상을 자연스럽게 집어넣는다는 점이다. 〈판〉에서 여러 매혹적인 움직임을 연결한 후에, 마치 구도자가 된 듯한 자세로 명상하는 듯한 모습이 보기 좋았다.
그런데 바로잡고 싶은 것, 혹은 정확히 알리고 싶은 게 있다. 이번 춤에는 ‘음악 사운드 디자인 김태근 이정윤’ 이렇게 이름을 올리고 있는데, 이 춤에서 중요하게 사용하고 있는 음원은 남도들노래의 보유자(인간문화재) 조공례 소리. 앞으로 이정윤의 〈판〉 공연에서 조공례의 소리임을 확실히 명기해 주길 바란다.
윤혜정의 〈맨손살풀이–세월〉, 관객을 숙연하게 만드는 연륜과 품격
윤혜정의 〈맨손살풀이–세월〉을 보면서 진정 ‘세월’을 부칠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몇 년간 본 살풀이춤에서 가장 ‘묵직한’ 양감이 전해졌다. 춤추는 사람의 나이, 춤을 추었던 연륜이 그대로 ‘세월’이라는 제목과 함께 관객에게도 뭔가 ‘숙연한 성찰’과 ‘진지한 감동’을 전해주었다. 윤혜정의 이 춤에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단 하나의 불필요한 동작이 없었다. 요즘 무대에서 보는 살풀이춤에는 괜히 손을 움직이거나 느닷없이 자리를 움직이는 경우가 많지 않은가. 윤혜정의 춤을 보면서 이런 비유가 생각났다. “말을 정말 잘하는 사람은 말을 많이 하지 않는다. 꼭 필요한 말만 한다.” 이런 것과 연관해 윤혜정의 춤을 말하면 이렇다. “춤을 정말 잘 추는 사람은 많이 움직이지 않는다. 딱 적당하게 움직인다.”
김충한의 〈소고춤〉, 일제강점기의 춤 올바로 잇고 바르게 잡자
김충한은 〈소고춤〉을 선보였다. 조택원에게서 시작된 춤이다. 중견 무용가이자 안무가인 그가 근대춤에 관심을 두고 정진하는 자체는 매우 고마운 일이다. 조택원의 〈가사호접〉도 훌륭하게 소화해냈던 그가 이번에는 〈소고춤〉으로 관객과 만났다. 김충한은 그간 국립국악원 무용단의 예술감독에 더욱 치중한 탓일까. 과거 그의 〈가사호접〉을 보았을 때와는 다르게 〈소고춤〉이 그의 몸에 딱 배어있다는 생각이 들진 않았다. 역동적인 춤사휘를 잘 표현하는 듯 싶으면서도 뭔가 잘하려고 애쓰는 느낌 또한 강했다. 이번 공연에서는 이러했으나, 앞으로 김충한에 의해서 조택원의 춤이 잘 전승되길 바란다.
이번 프로그램북의 〈소고춤〉에 관한 정보는 고쳐야 할 필요가 있다. 프로그램북에 소고춤은 “한국 근대무용의 선구자 조택원이 중고제 국악명인 심상건의 반주음악에 맞춰 1949년 뉴욕 자연사박물관에서 초연한 신무용 춤”으로 기록되어 있다.
뉴욕 자연사박물관에서 조택원의 춤 공연이 있고, 심상건 일행이 반주를 한 건 맞다. 심상건은 매우 출중한 가야금산조와 가야금병창의 명인으로 국악(조선악)에 두루 능통했으나, 그가 서양악기를 사용해서 음악을 작곡한 적이 전혀 없다.
일제 강점기인 1944년 〈병정님(兵隊さん)〉이란 영화가 만들어졌다. 여기에 조택원이 소고춤을 추는 장면이 있다. 이때의 반주음악은 김준영이다. 〈가사호접〉과 마찬가지로 〈소고춤〉도 김준영의 음악을 사용했다. 혹시 희박하지만 이러한 가능성은 있다. 김준영은 해방 이후 일본에서 많이 활동을 했다. 따라서 조택원의 무용음악을 만든 작곡가의 한 사람인 김성태가 김준영의 음악을 바탕으로 해서 개작을 했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그러한 가능성 또한 희박하다.
유감스럽게도 일제강점기의 친일과 관련해서, 무용계의 자료는 정확지 않은 경우가 있다. 조택원과 관련한 〈춤의 선구자 조택원〉 같은 사진집에서 조택원이 〈병정님〉에 출연한 기록은 전혀 없다. 〈소고춤〉의 반주음악은 김준영이다. 조택원의 〈가사호접〉과 같이 김준영이 작곡했다. 만에 하나, 약간의 이런 가능성은 있긴 하다. 조택원과 김준영은 매우 돈독한 사이였으나, 해방 이후 김준영은 일본 쪽에서 더 많이 활동했다. 조택원의 춤음악을 맡은 서양음악을 아는 작곡가로 김성태가 있다. 만약 조택원의 〈소고춤〉 음악의 개작이 필요했다면, 김준영의 음악을 바탕으로 해서 김성태에게 의뢰했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그럴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 조택원의 춤과 김준영의 음악은 앞으로 더 많이 연구해서 밝혀낼 필요가 있다.
김혜림 〈심심 나례(深心 儺禮)〉, 위로, 내가 하는 것? 상대가 받아들이는 것!
김혜림의 춤을 이번 공연에 한정해서 평한다면, 나는 이렇게 말하겠다. “무대에서의 ‘춤꾼’으로서는 잘 살지 못했다.” 안무자로서의 김혜림은 보였지만, 춤꾼으로서의 김혜림은 보이지 않거나 약했다. 춤의 표현하는 방식도 다소 한쪽으로 치우쳐 있는 것 같았다. 동양의 예술에서는 강유농담(剛柔濃淡)의 조화를 중시한다. 이에 준해서 김혜림의 이번 작품을 논한다면, 강(剛)과 농(濃)이 강(强)하다. 나례(儺禮)라는 의식을 가져와서 그런 것일까 싶었다. 그런데 작품 노트를 보니 ‘안녕과 위로로 전하는 나만의 나례’라고 적혀 있어서 한 번 더 흠칫 놀랐다.
본인의 춤을 본인이 좀 더 객관적으로 살펴보면 어떨까. 만약 이 춤이 안녕과 위로를 전하는 춤이라면, 보다 춤이 살가워질 필요가 있지 않을까. 그의 춤에서 부드럽고 엷은 느낌을 경험한 사람은 얼마나 될까. 추측건대 그가 거대한 그라운드나 커다란 극장에서 춤을 안무하고 지도하면서 자신도 모르게 움직임이 크고 거칠어진 건 아닐까.
아나운서의 예를 들어보자. 스튜디오에서 음악방송을 진행하는 아나운서가 운동장에서 경기를 중계하고 오게 되면, 자신도 모르게 소리가 높고 커지고 거칠어진다. 이럴 때 유능한 프로듀서는 진행자에게 조심스럽게 이렇게 주문한다. “목소리, 한 옥타브만 내려주세요.” 그라운드에서 경기 중계할 때의 목소리 혹은 마음가짐으로는 음악방송처럼 살갑게 위로의 멘트를 하긴 어렵다. 설령 한다 치더라도 그게 청취자에게 그렇게 전달되지 않는다. 홀춤은 태생적으로 외롭고 적적하면서도 따뜻하고 다감해야 한다. 특히 위로를 전하고 싶다면 말이다.
〈담청〉의 초연을 기억하며
이번 무대의 마지막은 윤성주의 〈담청〉이었다. 〈담청〉을 처음 보았던 것이 언제였을까. 그때 내 기억 속의 담청은 진정 ‘담청’이었다. 짙지 않은 청색이었다. 최현의 춤 계보가 윤성주에게 이어져서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이번 공연을 바라보는 내 시각 탓이었을까. 나는 이번의 〈담청〉보다는 그때의 〈담청〉을 마음에 더 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인천시립무용단을 8년간 이끌었던 윤성주 예술감독에게 박수를 보내고, 그 8년 동안 좋은 작품을 만들면서 인천시립무용단의 위상을 높인 단원 여러분께 또한 큰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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