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비평
Vol.121-2 (2025.9.20.) 발행
글_ 윤단우(공연칼럼니스트)
사진제공_ 국립극장
국립창극단의 〈심청〉이 9월 3일부터 6일까지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 올려지며 드디어 서울 관객들과 만났다. 국립극장과 전주세계소리축제가 합작해 역대 창극 사상 최대 예산인 10억 원을 들여 제작한 작품으로, 지난달 전주세계소리축제 개막 무대에서 선보인 뒤 빠르게 입소문을 타며 4회차의 서울 공연이 모두 매진되었다. 오페라 연출가 요나 김이 연출을 맡아 ‘판소리 시어터’라고 새롭게 장르를 명명하며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는 효녀 심청 이야기를 전혀 다른 이야기로 만들었다.
국립극장이 레퍼토리시즌으로 시즌제 운영을 시작한 뒤 창극단은 그 선두에서 극장의 혁신을 이끌어 왔다. 판소리와 썩 어울릴 것 같지 않았던 해외 작품들을 번듯한 창극으로 만들어 올리고 전통판소리 바탕을 현대적인 이야기로 새롭게 재창작해 선보였다. 오페라 연출가와의 협업도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2011년에는 독일 연출가 아힘 프라이어의 손을 거친 ‘판소리 오페라’ 〈수궁가〉를 독일과 한국에서 선보였고(독일 공연은 2011년, 한국 공연은 2012년), 2014년에는 루마니아 출신 미국 연출가 안드레이 서반이 연출한 〈다른 춘향〉을 올렸다. 2016년에는 오페라 연출가 이소영의 연출로 ‘오페라 창극’을 표방한 〈오르페오전〉과 국립극장과 싱가포르예술축제가 공동제작한 〈트로이의 여인들〉을 싱가포르 연출가 옹켕센의 연출로 올린 바 있다.
‘전통의 현대화’는 단순히 현대적인 미감을 반영하는 것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하지만 매우 안타깝게도 아직까지 많은 전통예술인들은 현대의 의상을 입고 세련되고 미니멀한 미장센을 도입하는 것으로 ‘현대화’를 말하며 낡고 고루한 전통의 ‘이미지’를 벗어 던지는 데에만 급급한 것이 현실이다. 국립창극단의 이번 〈심청〉에서도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현대적인 복식과 무대 미술, 카메라의 라이브 중계 등으로 구현된 ‘시각적인’ 현대성이다. 그러나 이 작품의 현대성은 그러한 무대 연출이 아니라 심청이라는 인물의 재해석에 있다. 연출 노트에서 이 작품의 방향성을 ‘동화의 죽음’이라고 말한 연출가 요나 김은 심청이 왕비가 되는 신분 상승 로맨스의 결말을 아예 삭제하고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었다.
‘남성사회의 폭력’이 감추는 것
고전소설 가운데 『심청전』과 『춘향전』은 한국적 소재에 천착하는 후대의 창작자들에게 영감의 보고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지금까지 끊임없이 리메이크되며 사랑받고 있는 작품이다. 그동안 고전 속에서 효도 이데올로기를 의인화한 상징으로만 이해되는 심청을 억압적인 전통사회의 피해자로 재조명하거나 그에게 씌워진 상징을 걷어내고 살아남기 위해 투쟁하는 인간으로 그려내는 시도는 꾸준히 있어 왔다.
최인훈은 희곡 〈달아 달아 밝은 달아〉에서, 황석영은 소설 『심청, 연꽃의 길』에서 심청이 매춘업소에 팔려가 남성들에게 착취당하는 것으로 각색하며 『심청전』에서 읽어내야 할 것은 효도 이데올로기가 아닌 가부장제하에서 이루어지는 남성에 의한 여성 착취임을 설파한 바 있다. 그러나 이들 작품은 심청을 남성사회의 피해자로 재해석함으로써 가정 내 착취와 피착취 구도에서 심학규가 가해자 위치에 있음을 감추고 여성이 남성사회로부터 당하는 폭력을 자연재해처럼 여기는 기존의 인식을 답습하고 있다.
이 같은 인식은 자연재해를 막을 수 없는 것처럼 남성사회의 폭력 역시 막을 수 없는 것이기에 이에 대해 비판하고 변화를 촉구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를 폭력의 방조자이자 공범으로 만들어 누구를 특정해 비판하는 것이 무의미해지는 무기력에 빠트린다. 가해자의 특정성이 지워진 자리에 남은 것은 피해와 피해자의 구체성으로 이들 작품은 폭력에 희생되는 여성의 고통을 관음적으로 묘사함으로써 이 같은 여성의 고통을 하나의 ‘장르’로 만든다.
지난 2020년 서울연극제에서 공연된 극단 공연제작센터의 〈달아 달아 밝은 달아〉는 심청에게 가해지는 폭력을 포르노적으로 묘사했다는 비판을 받으면서 폭력을 고발하고자 하는 예술의 ‘방식’에 대한 또 다른 질문을 남긴 바 있다. 이 같은 접근 방식은 여성의 고통이 어떻게 창작자에 의해 볼거리나 즐길거리로 전락하는지 보여주는 살아 있는 증거이며, 이러한 증거가 차고 넘치다 못해 정전(正傳)의 지위를 획득하는 데까지 이르는 것이 예술계의 살아 있는 불행이다.
뿐만 아니라 〈달아 달아 밝은 달아〉에서는 조선인 남성 김 서방을 등장시켜 매춘업소에 끌려간 심청을 학대와 유린의 현장에서 구해냄으로써 남성을 폭력의 주체로 두지 않고 구원자 남성과 학대자 남성으로 구분한다. 폭력은 ‘남성’에 의해 저질러지는 것이 아니라 ‘나쁜 남성’에 의해 저질러지는 것이기에 ‘나쁜 남성’의 대립항으로 ‘좋은 남성’을 세워 남성의 일반화를 저지하는 것이다. 이러한 구분은 남성사회의 오랜 통치 전략인 ‘굿 캅 배드 캅’ 모델이 적용된 것으로, 폭력을 저지른 것은 ‘나쁜 남성’이기에 작품의 대전제인 ‘남성사회로부터의 폭력’에 대한 고발이 무의미해지는 지점이다.
딸, 억압의 가장 작은 단위
요나 김은 그동안의 〈심청〉 재해석에서 ‘폭력’ 혹은 ‘인간’을 조명하느라 놓친 ‘딸’의 가족 내, 그리고 사회 내 위치성을 작품의 중심에 놓고 이야기를 전개해간다. 공연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별도로 출간한 작품 해설집을 펼치면 가장 먼저 “딸은 억압의 가장 작은 단위이다”라고 쓴 엘프리데 옐리네크의 문장이 나오고, 요나 김의 연출 노트는 “아빠, 아빠, 이 개자식아, 이젠 지긋지긋해”라는 실비아 플라스의 시어로부터 출발한다.
이처럼 심청의 정체성을 ‘딸’로 분명히 못박아두고 있는 것은 그동안 원전을 비롯해 그 수많은 해석본이 시각장애인이라는 약자성을 면죄부 삼아 꽁꽁 숨겨놓았던 심학규의 가해자성을 드러내는 매우 드문 시도다. 오입질과 노름에 빠져 아내와 자식을 돌보지 않은 무책임한 아버지를 증오하는 간난의 이야기로 전개되는 이강백의 희곡 〈심청〉이나 심청과 장승상 부인, 뺑덕어멈을 중심으로 여성 간 연대와 사랑을 그려낸 웹툰 〈그녀의 심청〉 정도를 제외하면 심학규는 언제나 가난과 장애, 그리고 홀아비의 몸으로 어린 심청을 젖동냥해 키워낸 부성으로 인해 쉽게 동정과 연민을 얻는 존재였다.
그러나 요나 김이 아비에게 효도하는 유교 윤리의 수행자로서의 ‘딸’이 아니라 옐리네크가 말했듯 ‘억압의 가장 작은 단위’로서 가족 내에서 착취당하는 피해자로서의 ‘딸’이라는 심청의 정체성을 드러내자 아비로서 자식을 지켜내지 못한 심학규의 가부장으로서의 실패, 즉 창작자들이 여태까지 쉬쉬해 왔던 심학규의 식민지 남성성이 함께 드러나게 된다.
이 같은 드러냄은 앞서 언급한 최인훈과 황석영의 작품으로 돌아가 그들이 감추고 말하지 않았던 ‘포주’라는 심학규의 또 다른 정체성을 다시 읽어내는 계기가 된다. 두 작품 모두에서 심학규는 금전을 받고 딸을 팔아넘기는 인신매매에는 가담하였으나 이후 심청이 매춘업소에서 성적 착취를 당하는 신세가 된 데에는 책임이 없다. 이후의 모든 불행은 이미 그의 손을 떠난 다음 벌어진 일이기 때문이다. 요나 김 역시 심학규를 실패한 가부장으로서 그의 무능을 드러내는 선에서 멈출 뿐 그를 포주로 몰아세우지는 않는다. 이 공연에서도 심청이 당하는 성적 학대가 묘사되어 있지만 이는 장승상 부인과 뺑덕어멈, 두 여성 간의 거래를 통해 이루어진다.
‘딸’을 위한 공동체는 없다
공연은 70여 명의 아역 배우들이 객석에서부터 무대 앞까지 일제히 뛰어가는 스펙터클한 연출로 시작된다. 해오름극장의 기다란 객석 통로를 달려가는 어린 소녀들은 모두 흰 블라우스와 검정 스커트의 교복을 입고 있다. 뭔가 즐거운 일이 있는지 얼굴에는 채 감추지 못한 미소가 떠올라 있고 함성 소리에도 아이들 특유의 생기가 묻어 있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아역 배우들이 달리는 장면을 유심히 본 적 있는 독자라면 이들 장면에서 아이들이 거의 항상 웃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낼 수 있을 텐데, ‘달리는 아이들’이라는 코드는 아이들의 순수함과 생기를 드러내는 효과적인 장치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들은 모두 눈에 검은 칠을 하고 있어 달리는 아이들의 즐거운 생동감은 도리어 공포스럽고 그로테스크한 인상을 전달한다. 이들은 모두 언젠가, 그리고 지금도, 죽었고 또 죽고 있는 심청‘들’이다. 이 작품의 심청은 아버지의 눈을 띄우기 위해 자신을 희생한 특수한 개인이 아니라 가부장제의 폭력에 의해 희생된 모든 딸‘들’이다.
공연은 곧 곽씨 부인의 장례식 장면으로 전환되며 본격적인 이야기 속으로 들어간다. 엄숙한 분위기로 치러지는 장례식에서 망자를 위해 가슴을 치며 울어주고 뜨거운 국밥을 나누며 안부를 묻는 한국식 의례의 온기는 전혀 느낄 수 없다. 대사 한마디 없이 무언가를 탐색하듯 장례식장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마을 이웃 뺑덕어멈의 모습은 이 장면을 더욱 느와르적으로 보이게 만든다. 요나 김은 죽은 어린 심청‘들’을 보여주는 강렬한 도입부로부터 이 차갑고 음울한 분위기의 장례식에 이르기까지, ‘딸’을 위한 공동체는 없다고 선언하며 심청의 이야기를 다시 쓰기 시작한다.
공연의 러닝타임 대부분에서 심학규는 의자에 기대어 앉아 있거나 침대에 누운 무기력하고 무책임한 모습으로 그려진다. 그가 조금이나마 활기를 보이는 장면은 몽은사 화주승에게서 눈을 뜰 수 있는 방법에 대해 들었을 때, 그리고 뺑덕어멈과 재혼했을 때와 맹인잔치에 가는 길에 낯선 여자들을 만났을 때다. 그에게는 스스로가 아비이고 가부장이라는 인식이 아예 없다.
갓난아기 심청은 아버지의 손을 거치지 않고 컨베이어 벨트 위의 물건처럼 마을의 이웃 부인들의 품에서 품으로 옮겨지며 근근이 젖을 얻는다. 젖 먹던 아기에서 자라 소녀가 된 심청은 이제 아버지의 보호자 역할을 해야 한다. 스크린에는 심학규를 힘겹게 업고 가는 심청의 모습이 비친다. 연출 노트에 적혀 있던 실비아 플라스의 시구를 떠올릴 수밖에 없는 장면이다.
그렇게 아버지는 딸을 돌보기는커녕 도리어 딸의 돌봄을 받으며 자기연민에 젖어 있고, 유사 어머니들이라 할 수 있는 뺑덕어멈과 장승상 부인은 남의 집 딸의 젊은 몸을 두고 거래하며 각자의 이익을 취하려 한다. 보호해 주는 사람 아무도 없는 심청은 아버지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고아나 다를 바 없는 신세다.
요나 김은 원전에는 드러나 있지 않은 장승상 부인의 세 아들을 등장시켜 가부장제의 구조적 폭력을 좀 더 입체적으로 그리고 있다. 원전에서 심청을 수양딸로 삼으려던 장승상 부인의 자애로움은 아들에게 성적 노리개를 쥐어주려는 잔혹함으로 바뀌고, 장승상 부인이 심청의 효심을 기리고자 그리게 한 초상화는 부인의 아들이 찍은 불법촬영물로 바뀐다.
죽은 듯 누워 있는 불법촬영물 속 심청은 곧 2막에 등장하는 영정사진 속 심청으로 연결되며, 카메라의 라이브 중계를 통해 무대 뒤에 비춰지는 ‘SHE GOT LOVE’라는 붉은 페인트로 쓰인 문구는 소라넷의 ‘초대남’, ‘버닝썬 게이트’, 정준영과 그 친구들의 단톡방 대화로 폭로된 불법촬영과 약물강간 사건들과 하나의 선으로 이어진다. 인당수에 빠지기 직전 심청은 선인들의 손에 녹의홍상으로 옷을 갈아입는데, 이때 그의 얼굴과 몸에는 폭력의 흔적이 역력하다. 최인훈과 황석영이 생략한, ‘딸’이 ‘여성’이 되는 과정에서 폭력이 어떻게 사회적으로 확장되고 순치되는지를 보여주는 장면이다.
아버지 여태 눈을 못 뜨셨소?
판소리 바탕 대부분은 선인은 보상을 받고 악인은 징벌을 당하는 권선징악의 이야기 구조를 따르고 있다. 주인공인 선인이 당하는 수난이 악인의 탐욕에서 비롯되는 만큼 결말에서 악인이 징벌을 당하고 몰락하는 것은 선인이 받는 보상 못지않게, 아니 어쩌면 더 중요하다. 수난의 원인을 완벽히 제거한다는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저잣거리에서 전기수의 이야기에 몰두하던 청자들도 악인이 몰락해 다시는 선인을 괴롭힐 수 없게 되었음을 확인하고서야 안도감을 느끼며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주인공은 수난을 겪지만 그 수난의 원인을 제공하는 뚜렷한 악인이 없는 〈심청가〉는 판소리 바탕 가운데 주인공이 가장 화려하고 스펙터클한 보상을 받는 작품이다. 아버지의 눈을 띄우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친 심청은 되살아나 왕에게 간택되어 왕비가 된다. 왕비가 되고 나서도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심청을 위해 왕은 맹인잔치를 열어주고, 맹인잔치에서 죽은 줄 알았던 딸과 재회한 심학규는 마침내 눈을 뜬다. 심학규의 개안은 심청의 영웅적 행보에 대한 보상이지만 동시에 심청을 왕비로 맞아들인 왕이 만인지상 애민군주로서 베푸는 시혜의 일환이다.
요나 김은 이러한 환생과 왕비 간택의 판타지 로맨스 결말을 폐기하는 대신 제4의 벽을 허물어 이야기 속에 갇혀 있던 심청을 현실로 나오게 한다. 원전의 부녀상봉 장면에서 심청이 “아이고 아버지 여태 눈을 못 뜨셨소?”하고 노래하는 눈대목은 작품의 하이라이트를 이루는 가장 극적인 장면이지만 이 작품에서는 무능하고 무책임한 아비를 질타하는 새로운 맥락을 구성한다. 그리고 이 질타는 심학규만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눈 먼 자들에게로 향한다. 그렇기에 심청의 노래는 언제까지 눈을 감고 못 본 척할 거냐는 노호로 들리며, 이 장면은 공연 도입부 어린 심청들의 등장과 다시 겹쳐진다. 이는 심청이 맹목적이었던 자기희생을 돌아보는 뼈 아픈 깨달음이기도 하다.
결말에서 심청은 이야기 세계와 마침내 결별하기 직전, 마지막 의식처럼 담배 한 대를 피우고는 일어나 극장 밖으로 걸어 나간다. 관객들은 무대에서 사라진 심청이 해오름극장 로비를 지나 어둠이 깔린 국립극장 광장으로 걸어가는 모습을 스크린으로 지켜본다.
퇴장하는 심청에게서 영화 〈트루먼 쇼〉의 주인공 트루먼 버 뱅크가 겹쳐 보인다. 그러나 지켜보는 자의 입장에서 트루먼의 퇴장은 관음의 대상 하나를 잃은 것뿐이지만 심청의 퇴장은 그를 성녀로 타자화함으로써 그에게 다 부려놓을 수 있었던 죄책감을 도로 짊어져야 한다는 맹점이 있다. 심청은 떠났지만 심청이 사라진 그 자리에 우리는 심청을 죽이고 그 죽음을 방조한 공모자로 남는다. 심학규의 무능과 장승상 부인과 뺑덕어멈의 공모, 장승상 부인의 세 아들과 선인들에 의한 폭력……. 심청이 떠나고 없어도 실패한 공동체가 감당해야 하는 죄책감은 사라지지 않는다. 왕비가 된 심청과 눈을 뜬 심학규를 보고 나서 가볍게 돌아갈 수 있었던 발걸음은 천근만근 무겁기만 하다.
〈심청〉이라는 묵직한 첫 걸음
요나 김은 어린 심청, 젊은 심청, 노파 심청을 각각 등장시켜 심청을 심학규의 딸이라는 특정한 개인에서 세상 모든 딸로, 다시 버림받고 학대당한 모든 사회적 약자들로 확장한다. 젊은 심청을 맡은 김율희(김우정과 더블 캐스팅)는 곡진한 노래와 연기로 배역의 무게를 충실히 감당해냈고, 노파 심청 역의 김미진은 진중하면서도 시원한 소리로 심청이라는 인물과 작품에 입체감을 더했다. 두 소리꾼이 소리를 나눠 부름으로써 심청의 노래가 흩어진 것은 다소 아쉬운 점이나 이렇게 흩어진 노래가 세상 밖으로 나아가는 심청의 걸음을 의미하는 것일 테니 아쉬움조차 삼켜진다.
장승상 부인 역의 김금미와 뺑덕어멈 역의 이소연은 길지 않은 장면과 많지 않은 노래에도 불구하고 확실한 존재감으로 공연의 무게를 떠받쳤고, 심학규 역의 유태평양(김준수와 더블 캐스팅) 역시 깊이감 있는 연기와 노래로 평면적인 고전 속 인물을 살아 있게 만들었다. 심청이 아버지를 업고 가는 장면에서 움직임을 맡았던 두 무용수 이선진과 조수빈은 극의 대미를 이루는 맹인들의 개안 장면에 다시 등장해 무대 한쪽에 설치된 사다리에 올라가 불을 켜는 것으로 순간적이지만 번뜩이는 순간을 만들어낸다.
전주세계소리축제 측과 진행한 인터뷰에 따르면 요나 김은 이번 〈심청〉을 시작으로 판소리 다섯 바탕의 완주를 꿈꾸기 시작했다. 바이로이트 축제에서는 바그너의 4부작 오페라 〈니벨룽겐의 반지〉(라인의 황금, 발퀴레, 지크프리트, 신들의 황혼)를 순환 공연하는 ‘링 사이클’을 올리고 있는데, 요나 김의 판소리 다섯 바탕이 ‘판소리 시어터’의 새로운 사이클을 이루어낼 수 있을지 그의 다음 무대를 기다려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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