댄스포스트코리아
지난자료보기

로고

무용리뷰

공연비평

국수호춤을 바라보는 네 개의 시선_ 지역성, 역사성, 현장성, 사유성

공연비평

Vol.122-2 (2025.10.20.) 발행


글_ 윤중강(공연평론가)

사진제공_ 국가유산진흥원



전통예술은 왜 지역성이 중요할까? 전통예술을 더 깊게 보는 시각이자, 더 넓게 펼치는 방법이기에 그렇다. 우리의 민족예술은 오래도록 지역을 기반으로 성장해 왔다. 예술적 결과물 안에 풍토적 특성이 존재한다. 풍토적 특성과 지역민의 심성은 밀접하다. ‘지역-풍토-사람’은 삼위일체이다. 

 

국악에서도 전통춤에서도, 지역적인 분류를 통해서 한 지역의 예술적 특성을 말한다. 그런데 한 지역의 예술적 특성을 더 깊게 살피는 건 국악이 더 앞섰다. 앞으로는 전통춤도 더 세분할 필요가 있다. 전통악(傳統樂)은 ‘서도-경기-남도’의 3분법을 넘어서, ‘충청-영남-강원-함경’을 확연하게 구분한다. 산조의 경우 ‘전남–전북’의 다름도 찾아내어 구분한다. 전통악도 아직은 경기도와 충청도를 구분할 때 애매한 측면이 있는데, 앞으로 점차 분명해질 걸로 예상한다. 


전통악의 지역성, 전통춤의 지역성


이에 비해서 춤은 어떤가? 전통춤(傳統舞)은 일찍이 승무와 살풀이춤을 기반으로 해서, ‘경기류’와 ‘호남류’로 구분했다. 한영숙 계열과 이매방 계열을 중심으로 나눈 2분이 너무도 확고부동해설까? 중부류, 호남류, 경기류로 3분하기도 하지만, 이런 2분법이나 3분법이 한국춤의 지형도, 곧 지역적인 특성을 논하기엔 아쉬움이 있다. 영남춤의 지역적 특성도 춤쪽에서 일찍이 얘기했지만, 심도(深度)가 있고 광범위하게 영역을 넓힐 필요가 있음에 공감하리라고 생각된다. 다른 지역과의 객관적 비교를 전제로 해서, 한 지역의 특성을 논할 때 설득력을 얻는 건 자명하다.

 


춤과 음악이 크게 다를까? 전통악(傳統樂)과 전통춤(傳統舞)은 크게 다르지 않다. 국악계에서 지역마다의 민요의 특성을 확연하게 구분 짓고 있다. 이는 그 지역의 민속악에도 보편적으로 적용할 수 있다. 이러한 국악에서의 분류를 참고로 삼아서, 전통춤에서도 세분화할 필요가 있다. 이를 바탕으로 해서 전통춤에서 더욱 선명한 분류가 만들어진다면, 앞으로는 역으로 춤계의 분류법이 국악계에 영향을 끼칠 것이다. 이 글은 그렇길 바라는 마음으로 쓴 글이다. 


장안의 화제, ‘국수호춤 60주년 기념공연 무악 Ⅱ’


국가유산진흥원 주최 ‘국수호춤 60주년 기념공연 무악 Ⅱ’는 ‘장안의 화제’였다. (9/24, 9/25, 9/27, 한국문화의집 KOUS) 세 번의 공연이 각각 성격을 달리하면서도 높은 품격을 유지했다는 측면에서도 우선 그렇다. 각각의 춤마다 이미지와 메시지가 아주 정확했다. 춤과 음악이 아름답게 공존했다는 면에서 무악(舞樂)이란 타이틀에 꼭 맞았다. 근래 들어서 이런 공연이 있었던가. 실로 오랜만에 이런 독특한 매력이 넘치는 공연을 펼쳐졌기에, ‘장안의 화제’란 고풍스러운 표현을 가져왔다. ‘장안의 화제’란 ‘춤계의 화제’만이 아니었다는 의미도 포함된다. 서울이라는 도시에 살고 있는 문화인을 비롯해 전국 각지의 예술가들이 자리했다. 마지막 날에서는 대한민국 예술계의 각 분야의 주요한 인물이 객석에 가득했다. 이렇게 ‘장안의 화제’가 될 만한 공연이 앞으로 얼마나 더 있을까. 


글을 시작하면서 ‘춤의 지역성’을 강조했는데, 첫째 날 ‘무형유산춤’이 거기 부합했다. 이날의 

춤은 ‘전라도춤’ 혹은 ‘전라춤’이라고 넓게 볼 수도 있지만, 내 시각에 따르면 ‘전북춤’ 그 자체였다. 일찍이 이렇게 전라북도의 정서가 고스란히 느끼진 춤을 본 적이 있을까? 전라북도의 춤은 어떤 특징을 지니고 있을까? 지역-풍토-사람’이 어떻게 삼위일체를 이루고 있을까?



1. 국수호춤의 지역성 


전라북도의 중심인 전주를 중심으로 한 이 지역의 특성은 아전(衙前)적 사고관이다. 아전은 지역 공무원 혹은 토착 공무원이라고 풀이할 수 있겠다. 그들은 늘 중앙에서 내려오는 상급관리에 대해서 민감하고, 그들에게 맞춰주는 시각이 있다. 그러나 분명한 건, 그들은 결단코 바뀌지 않는다는 점이다. 전북 지역의 토착적 아전은 요지부동(搖之不動)이 특성이다. 중앙 서울이나 다른 지역에서 어떤 사람이 와서 어떻게 행동하듯 흔들리지 않는다. 최대한 수용하거나 수용하는 척을 하지만, 실제 자기들의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생각에는 변함없다. 


전북제(制): 흔들림 없는 굳건함 x 꾸준히 가는 외고집


전라북도의 문화를 지킨 힘은 무엇일까. ‘넉넉한 산세 아래서 비옥한 농토를 일구며 살아가는 그들’에게, 서울 혹은 외부의 변화는 그리 신경 쓸 게 못 되었다. 외부의 변화를 자연스레 걸러내는 자정능력(自淨能力)이 탁월하다. 농경 지역을 기반으로 성장을 했기에 엉덩이가 무겁고 좌고우면(左顧右眄)하는 일이 없다. 전라북도에서 오래도록 머물면서 춤과 음악을 만들어 낸 이들에게선 더욱 전북적인 특성이 생생히 살아있다. 


나는 ‘전북제’ 예술의 특징을 ‘흔들림 없는 굳건함’과 ‘꾸준히 가는 외고집’이라고 말로 설명해왔다. 이 지역의 ‘아전(衙前)적 토착성’이 그간 지속해서 생명력이 있게 이어져 온 것인데, 이번 첫째 날 ‘무형유산춤’에서 이것을 확실하게 확인할 수 있었다. 


전라북도의 특성은 그대로 전라남도에도 적용될 수 있을까? 아니다. 전혀 다르다. 전남에 대해서 여기서 구체적으로 거론하기 어렵겠지만, 전남은 감정적 편차를 심하게 드러내면서 이를 자신들의 행동에 즉흥적으로 반영하는 경향이 아주 강하다. 광주학생독립운동(1929)과 5·18민주화운동(1980)의 좋은 본보기다. 이러한 지역적 정서를 기반으로 말한다면, 전남의 문화예술에선 ‘임기응변(臨機應變)적 강인함’이 특징이고, 전북의 그것은 처변불경(處變不驚)의 신중함’이 존재한다. 


한진옥, 호남제 혹은 전남제의 골수(骨髓) 


‘호남류’ 혹은 ‘전남제’를 대표하는 예인은 누굴까? 한진옥(1910-1991)과 한애순(1924-2014)

이다. 남매간이다. 국악계에서 광주를 중심으로 한 서편제를 얘기할 때 한애순이 빠지지 않는다. 한진옥과 한애순의 공통점은 광주를 중심으로 한 지역성을 꾸준히 지켰다는 점이다. 전남춤을 얘기할 때 중심에 한진옥은 골수(骨髓)여야 한다. 앞으로 한진옥, 한애순, 한일섭, 한갑득 그리고 박동실. 이들에게 예술적 공통점 혹은 공약수를 찾는다면 전라남도의 민속예술의 진면목을 보다 확실히 알게 된다. 그러나 이 글에서는 한진옥에 대해서는 이 정도로 줄인다. 


전남제의 이매방 vs. 전북제의 국수호 


20세기 한국전통춤에 이매방이 있다면, 21세기 한국전통춤에 국수호가 있다. 일단 이매방의 춤과 국수호의 춤을 각각 ‘전남춤’과 ‘전북춤’을 대표한다고 볼 수 있다. 춤계에서는 이매방의 춤을 ‘호남류’의 근간으로 보고 있다. 이런 시각에 동조할 순 있으나, 완벽하게 긍정하긴 어렵다. 이매방은 조부 이대조의 춤맥을 이어받았고, 전라도의 여러 춤을 일찍이 습득했지만, 그는 일찍이 다른 지역으로 진출해서 다방면으로 활동했다. 따라서 국악계의 용어로 따진다면 이매방의 예술은 ‘호남제’적인 요소에다가 ‘전국구’적인 예술이 합쳐졌다고 볼 수 있다. 그러함에도 이 글에서는 이매방을 전남제의 대표적 예인이라는 시각에서 접근하려 한다.



“아리아리랑 쓰리쓰리랑”. 진도아리랑의 가사다. 보편적으로 아리랑의 가사는 ‘아리랑’에서 끝난다. 그러나 진도로 대표되는 전라남도에선 ‘쓰리랑’이 합쳐진다. ‘아리다’와 ‘쓰리다’는 어떻게 같고, 또 어찌 다를까. 모두 ‘아픔’과 관련된 공통된 용어다. 인생을 고해(苦海)라고 한다면, 고해(苦海)의 삶을 승화시키는 것이 예술이 아닌가. 


그 아픔의 정도는 지역에 따라 다르다. 전북제는 ‘아리다’라 하겠고, 전남제는 ‘쓰리다’라 해야한다. 아픈 정도와 그의 드러냄이 확연히 다른 거다. 전남이 전북에 비해서 더 직접적이고 더 강하다. 두 대가인 이매방의 춤과 국수호의 춤을 보면, 그 차이가 분명하다. 국수호는 ‘아린’ 춤으로 절제한다면, 이매방은 ‘쓰린’ 춤까지 돌진한다. 


곰삭은 삭힘 vs. 아삭한 절임 


전라북도의 춤 또는 먹거리에는 ‘절임’의 미학이요, 전라남도의 춤 또는 먹거리에는 ‘삭힘’의 미학이 있다. 한국의 미학을 논할 때 ‘삭힘’은 많이 얘기하지만, 상대적으로 ‘절임’에 대해선 얘기를 덜 한다. 앞으로 절임의 미학 혹은 ‘절임의 가치와 특성을 더 얘기하게 될 것이다. 김장의 미학은 절임일까? 삭힘일까? 김장은 절임이다. 김장배추 절이는 방법이 김치 맛의 핵심이듯, 한국춤의 핵심 혹은 한국춤의 멋과 맛도 역시 절임에 있다. 


그간 우리는 ‘곰삭은 삭힘’이 비해서 ‘아삭한 절임’을 덜 얘기했다. 이 말은 곧 우리가 그간 전라남도의 특성을 많이 얘기했어도, 상대적으로 전라북도의 특성은 덜 했다는 얘기다. ‘곰삭은 삭힘’에는 호불호가 분명하지만, ‘아삭한 절임’에는 호불호의 편차가 적다. 이매방의 춤이 ‘곰삭은 삭힘’이라면, 국수호의 춤은 ‘아삭한 절임’에 동의하는가?



전남의 박초월 vs. 전북의 김소희 


춤만을 생각하면 의아하거나, 설득력도 적을 수 있지만, 한국의 전통예술을 넓게 보면서, 이미 이런 시각은 존재했음을 확인할 거다. 판소리의 미학에서는 ‘곰삭힌 삭힘’과 ‘아삭한 절임’이 공존했다. 박초월(1917-1983, 전라남도 순천)의 소리가 전자이고, 김소희(1917-1995. 전라북도 고창)의 소리가 후자다. 박초월은 국악인이 좋아하는 소리라면, 김소희의 소리는 국민이 좋아하는 소리였다. 박초월의 소리는 제자(김수연 등)에게 이어졌고, 김소희의 소리는 제자(안숙선 등)에게 이어졌다. 


임춘앵과 이매방 vs. 김소희와 국수호 


“임춘앵의 춤이 멋이 있다면, 김소희의 춤은 맛이 있지요” 전라남도의 춤과 전라북도의 춤을 비교할 수 있는 결정적인 명언이다. 궁중춤의 대가 김보남(1912-1964)의 말이다. 이 얘기는 황병기의 글을 통해서 지금까지 전해진다. 한국전쟁기 부산에 설립한 국립국악원을 통해서 국악에 정식 입문한 황병기는 국립국악원 악사에게 두루 배우고 질문했다. 김보남은 황병기에게 춤을 전문으로 하지는 않지만, 춤의 대가가 둘을 일러 준 것인데, 임춘앵(1923-1975)은 전남 함평 출신이고, 김소희(1917-1995)는 전북 고창 출신이다. 이에 더해서 필자가 들은 말을 덧붙인다면, 20세기의 예인들은 임춘앵의 승무, 김소희의 살풀이춤을 특히 인정했다. 


김보남은 앞의 말과 연관하면, 전남의 승무는 ‘멋’으로 추는 춤이고, 전북의 살풀이는 ‘맛’으로 추는 춤이 된다. 황병기는 결국 연관관계가 있음을 얘기하면서, 멋은 맛을 지향하고, 맛을 멋을 지향함을 얘기했다. 멋은 동이지만 정을 향하고, 맛은 정이지만 동을 향한다는 것이다. 이것에 기인한 표현이 바로 ‘동중정’이요, ‘정중동’이다.


이 단계까지 얘기하는 건 다소 무리일 수 있으나, 이런 20세기 한국전통춤과 관련한 미학적 언급에 기인해서 의미를 확대하면 이렇다. ““승무는 ‘동중정’의 춤이요, 살풀이는 ‘정중동’의 춤”이다.“ 이는 각각 임춘앵과 김소희를 대입할 수 있고, 또 이매방과 국수호를 연결할 수 있다. 전라남도의 임춘앵과 이매방은 ‘곰삭힌 삭힘’의 멋이 있는 예술을 지향하고, 김소희와 국수호는 ‘아삭한 절임’의 맛이 있는 예술을 지향하고 있다! 


2. 국수호춤의 역사성 


누군가에겐 아직은 김소희와 국수호의 연결이 의아할 수 있겠다. 전북 태생이라는 공통점과 함께 정형인(鄭亨仁, 1896-1973)에게 춤을 사사한 공통점이 있다. 김소희 명창은 판소리에서 가야금산조, 서예에서 시조까지 다양한 예술을 접한 건 널리 알려져 있다. 그에게는 많은 스승이 있는데, 김소희 자신은 세 명의 은사(恩師)가 있다고 말했다. 송만갑, 정정열, 정형인이다. 자신의 판소리 ‘발림’은 정형인의 춤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했다.



정자선(鄭子善)과 정형인(鄭亨仁) 


김소희 명창과 관련된 많은 기록에서는 안타깝게도 ‘정형인’이란 이름은 찾아보기 힘들다. 정형인이 정성린(鄭成麟)으로 둔갑해 있다. 어디서부터 그렇게 됐을까. “전주의 정성린(鄭成麟)에게서는 고전무용을 전수받아 수준급의 정통성을 보여주고 있다” (음악동아, 1984년 4월호, 글 한명희). 대략 이 이후의 거의 모든 기록에는 정형인이 정성린으로 바뀌어졌다. 나는 그간 십수 년을 과거의 신문 자료 등을 통해서 여러 기록의 진위(眞僞)를 밝히고자 힘을 썼다. 그런 자료 중에는 그 어디에도 정성린이란 이름은 없다. 내가 여기서 정형인과 김소희를 연결하는 건, 두 사람에게만 국한되는 게 아니다. 결국 국수호로 대표되는 전라북도의 춤과 연관이 있기에 그렇다. 


정자선과 경성방송국(JODK)은 ‘군산의 밤’


전라북도의 춤맥은 정자선에서 정형인으로 이어졌다. 정자선은 정형인의 아버지이다. 장자선은 권번의 가무악(歌舞樂) 사범이었다. 전북 지역에서 춤의 사범으로 일찍 유명한 사람은 2인이 있는데, 정자선과 전계문(1872-1940, 전북 정읍)이다. 전계문의 당숙은 전도성(1864~ 0000?, 전북 임실)으로 이 지역에서 유명한 명창이었다. 이들은 모두 가무(歌舞)를 넘나드는 인물이다. 전도성과 전계문이 그렇듯이, 장자선과 정형인 부자도 마찬가지다. 정자선은 춤의 명인으로 알려졌지만, 실제 풍류의 명인이기도 하다. 따라서 가무악이라는 넓은 시각에서 볼 때, 전라북도의 춤과 음악의 연관성은 더 싶게 파고들 수 있다. 


1934년 5월 13일 (일) 경성방송국(JODK)은 ‘군산의 밤’이라는 제목으로 이 지역의 음악을 집중 방송했다. 군산공립보통학교 아동의 ‘어린이시간’을 시작으로 해서, 이 지역의 클래식과 조선악을 두루 소개했다. 여기서 9시 40분부터는 “군산으로부터” 해서 군산행진곡을 시작으로 군산의 예인의 음악이었다. 서양음악과 당시 조선악(朝鮮樂)을 망라했는데, 여기서 가곡(歌曲)이 연주되었다. 가곡은 이 시기에 가장 ‘클래식한’ 격조 있는 음악이었다. 이 날 가곡 중 농, 우락, 환계락, 계락 편으로 이어졌는데, 누가 연주했을까. 거문고는 최병제(崔秉濟), 장고는 정자선(鄭子善)이었다. 이후의 레퍼토리는 ‘군산타령’과 백구사 추월가 등인데, 이름으로 보아서 군산지역의 예기임을 알 수 있다. 정자선은 당시 이 지역 예술의 총수(總帥)였음을 알게 해준다. 

 

그 시절의 정자선과 지금의 국수호에게서 어떤 공통점이 발견된다. 국수호의 춤 공연에서 몇 해 전부터 정가의 비중이 높아지고 있다. 이게 그냥 지나칠 게 아니다. 이번 공연에서도 가곡(정가)에 뿌리를 둔 <이른 동쪽>이 춤에서나 음악에서나 큰 감동을 주며 화제가 되었다. 생전 김소희도 사설시조 <증경은 쌍쌍>을 즐겨 불렀다. 김월하와 함께 시조를 부른 공연은 <김소희 국악 50년 기념공연>이다. (1979. 03.10. 세종문화회관) 나는 김소희의 시조와 국수호의 정가(正歌)에 뿌리를 둔 춤이 매우 연관되어 있다고 본다. 거기엔 전남과는 다른 전북적 특징이 있다. 정가는 삭힘의 노래라기보다는, 절임의 노래다. 배추가 소금기가 스며들 듯이, 어떤 대상에 자신의 정서가 들어가면서 융합되는 음악이다. 


전라도의 시조는 지역적 특성을 가지고 있는데 완제(完制)가 있다. 완제(完制)는 전라도 지방에서 불리는 시조 스타일을 말하는데, 전주를 완산 (完山)이라 하는 데서 완제라 한다. 지금은 전라남도에까지 ‘완제 시조’가 퍼져 있으나, 원래 이 시조의 뿌리는 전주인 셈이다. 


정형인과 전주권번 가무수업증 


정자선의 아들 정형인(1896-1973)의 해방이후의 행적을 이미 널리 알려졌다. 전주농림고등학교를 중심으로 많은 제자를 길러냈는데, 금파 김조균(1940-1998)과 국수호 등이 대표적 인물이다. 정형인에 관해서 알려지지 않은 신문기사 하나를 소개하려 한다. “11명의 명기 선발 가무수업증 수여” 제목의 조선일보 [전북지사 발] 기사를 축약하면 이렇다. 

 

“전주권번에서는… 조선전래의 고전적 가무를 진작 시키기 위하여 가무에 대해서는 조선적으로 유명한 정형인 (鄭亨仁, 41)군을 초빙하여 50일동안 동권번에서 40여명의 기생을 모아놓고 승무(僧舞) 타령 등을 열심히 가르친 경과 성적이 가장 우량하여 전선(全鮮)에 어디에 보내든지 가무로서 이름을 날릴만한 명기 11명을 선발해서 5월 30일에 가무수업증을 수여하였다는데, 그 기명(妓名)은 다음가 같다. (후략) “ (1940. 6. 2, 조선일보) 


이번 춤판의 가장 큰 특징 혹은 성과는 정자선 정형인 국수호로 이어지는 전라북도의 춤의 맥을 직접 확인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사람들은 저마다 ‘전북춤’이 어떤 것인가를 나름대로 감지했다는 점이다. 무형유산춤으로 소개된 <입춤>, <전라삼현승무>, <호적구음살풀이>, <남무>,  명작무로 소개된 <장한가> <남도살풀이>가 대표적 작품이다. 


이런 춤이 국수호 자신과 국수호의 도반(제자)들에 의해서 무대에 올려졌다. 모두 대단한 춤꾼이라고 할 수 있으나, ‘전북제’ 혹은 ‘국수호 스타일’과 연관해서 도반마다의 편차는 분명했다. 국수호의 춤을 보는 나의 시각에 따라서, 그들의 춤을 분류할 수 있었다. 


3. 국수호춤의 현장성 


국수호의 춤이 현장에서 감상할 때 가장 끌리는 건 무엇일까. 어느 순간에 분출하는 ‘결기’다. 이것이야말로 전라북도의 아전적 사고 또는 행태와 뿌리를 두고 있다고 여겨진다. 아전은 모든 것을 양보하고 배려하려고 하지만, 결국 자신(아전)의 굳센 믿음과 관련해서는 한 치의 양보도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나 할까. 흔히 전통춤을 대략 비슷하다고 생각할지 모르나, 이런 ‘결기’라는 단어 혹은 개념으로 국수호의 춤의 변별성 혹은 탁월함은 분명히 보인다. 이러한 결기는 거슬러 올라가면 정자선 정형인으로부터 이어지는 전라북도의 춤이다. 


‘결기’라는 것에는 “못마땅한 것을 참지 못하고 성을 내거나 왈칵 행동하는 성미”를 결리고 하는데, 이런 결기는 결연하게 일어난다는 듯의 결기(決起), 자기 몸을 깨끗이 한다는 뜻의 결기(潔己)와도 통한다. 그러니까 국수호의 ‘결기’는 비슷한 듯 다른 ‘세 개의 뜻’이 담겨 있는 거다. 


국수호의 ‘결기’, 도반에게서도 발견되었는가 


‘결기’라는 걸 키워드 삼아서, 도반들의 춤을 크게 넷으로 나눌 수 있었다. 먼저 국수호 스타일이 매우 몸에 익은 두 부류가 있다. 한 부류는 황재섭, 신동엽, 노해진, 김윤주이고, 또 한 부류는 이정민, 정지욱, 유재성이다. 전자의 춤은 저마다 매력을 지니고 있고 우수했다. 그러나 나는 거기서 국수호춤과의 어떤 간극이 느껴졌다. 그게 바로 ‘결기’였다. 그들에게선 결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완성도가 높은 춤으로 든든하고 튼튼하게 춤집이 보였으나, 그건 어쩌면 승리자의 어떤 여유로움과도 통했다. 승리한 사람, 이미 이룬 사람에게선 결기가 느껴지지 않는다. 승리하려는 사람, 무언가 이루려는 사람에게서 결기가 느껴진다. 국수호는 분명 ‘이룬 사사람’이지만, 그에게서는 늘 ‘이루려는 결기’가 보인다. 이에 대해서는 국수호춤을 깊게 본 사람이라면 많이 공감할 것이다. 


10년전 국수호의 춤 50년을 본 사람은 그게 국수호의 끝이 아니라는 걸 예상했다. 국수호의 춤 60년을 기대했다. 이번에 국수호의 춤 60년을 본 사람들은 또한 10년 뒤 국수호의 춤 70주년은 어떨까 기대하게 된다. 이미 한 평론가는 보허자무에 이어서 앞으로 원효와 연관이 있는 무애(無碍舞)를 주문하고 있지 않은가. 


결기의 아쉬움 


결기라는 건, 스스로 예술적인 결핍을 생각하면서 그걸 채우려고 하는 안간힘이다. 황재섭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정답을 알고 있고 사람의 춤이었다. 그런 춤에는 결기가 들어갈 자리가 없었다. 신동엽의 춤은 성실한 춤이었으나, 뭔가의 치열함은 보이지 않았다. 굳이 일등을 하고 싶지 않은 이등의 춤이라고 해도 좋을까. 성실함은 곧곧에 배어있지만, 그걸 치열함이라곤 말할 수 없었다. 


노해진의 <아가>를 볼 때, 이건 이제 노해진의 춤이라고 확신했다. 그의 춤은 음악적으로 보면 ‘산조적 세계’에서는 매우 큰 힘을 발휘한다. 이번 ‘바라승무’와 같은 작품에서는 그렇지 못해서 아쉽다. ‘바라승무’가 보여야 하는데, 우리가 알고 있는 노해진이 보였다. 역시 결기였다. <아가>와 다르게, <바라승무>에선 결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이정민의 도화 (桃花), 유재성의 화개 (華蓋), 정지욱의 역마 (驛馬)


<전라 삼현 승무>의 이정민, <화랭이춤>의 유재성, <무동>의 정지욱에게선 결기가 분명했다. 세 사람의 자세가 보였다. 스스로 부족하다는 겸손의 미덕이 보였다. 국수호 스타일의 특성을 더 많이 찾아내려는 자세가 객석에 전달됐다. 


매우 흥미롭게도 이 세 사람 혹은 세 사람의 춤에서는 묘한 ‘젠더적 호기심’을 유발했다. 이정민에게선 중성성, 유재성에게선 양성성, 정지욱에게선 소년성이 강하게 풍겼다. 이러한 매력은 

더욱 흥미롭게도 명리학의 근거한 살(煞)과 연관됐다. 흔히 ‘살’이라고 하면 부정적인 생각을 하게 되지만, 그것은 지나칠 때 해가 된다는 의미다. 그것이 적당할 때는 그 사람의 큰 매력이 될 수 있다


<전라삼현승무>의 이정민은 시작할 때부터, 오래전 저러한 예기(藝妓), 곧 여령(女伶)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에게선 도화의 기운이 강하다. 그런데 그게 남자로서 여성을 향하는, 여성으로서 남성을 향하는 그런 일차적인 도화는 아니었다. 그러하기에 매우 묘한 매력이 전달되었다. 여성국극에서 남성 역할을 맡은 배우를 보는 느낌이랄까. 여성을 보호하는 여성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중성성 특유의 카리스마와 아우라가 느껴졌다. 과거 이정민의 <입춤>과 <화랭이춤>도 좋아지만, 이번 <전라삼현승무>가 가장 매력적으로 보였다. 북을 치는 모습도 꽤 좋았다. <전라삼현승무>는 국수호의 지도를 통해서, 앞으로 이정민의 춤으로 자리매김하게 되는 날을 기대한다. 

 

<화랭이춤>의 유재성은 남성성과 여성성을 동시에 갖춘 양성성의 그대로 전달되었다. 카리스마가 없는 듯한 게 오히려 카리스마라고나 할까. 섬세한 느낌에서 느껴지는 강인함이라고나 할까. 유재성의 모습을 보면서, 일본의 가부키배우 반도 타마사브로(坂東玉三郎)가 겹쳐졌다. 그야말로 매우 여리여리한 섬세한 인물인데, 거기서 매우 강인한 힘 같은 것을 느끼게 된다. 유재성을 반도 타마사브로라 생각하니, 국수호는 반도 쯔마사브로(阪東 妻三郎, 1901-1953)와 같다는 생각마저 들게 되었다. 어떤 독특한 문화에서의 이어지는 계보에는 일반인들이 생각하기 힘든 예술적 어쩌면 주술적인 에너지가 작용하고 있다고 생각되는데, <화랭이춤>과 관련해서 국수호와 유재성에게서 그런 느낌을 받게 된다. 유재성은 포항출신이다. 이 지역에선 남자무당을 화랭이라고 한다. 유재성은 화랭이의 환생처럼, 또한 그 옛날 화랑의 환생처럼 느껴졌다. 화랭이건, 화랑이건, 매우 세상의 큰 역할을 담당하지만, 삶에 있어서의 고독함은 누구보다도 더할진데, 이런 화개(華蓋)를 가진 이는 학문과 에술에 정진해서 큰 것을 이루는데, 유재성에게서 그런 기운 같은 것이 느껴졌다. 


<무악 Ⅱ>에서 ‘최고의 발견’은 <무동>의 정지욱이다. 그간의 <무동>을 춘 2명의 춤꾼도 대단했는데, <무동>의 3대째 주인공이 이런 매력을 지니고 있을지 몰랐다. 그는 정말 여러 면에서 무동(舞童)이었다. 타고난 역마살을 어찌할 수 없다는 듯이, 무대의 여기저기를 거침없이 오가는 모습이 딱 ‘무동의 원래 캐릭터’ 자체인 듯 보였다. 그의 춤을 계속 보고 되는 또 하는 바로 애살(愛煞)이다. 이 말은 국어사전에 있는 말도 아니나, 민간에서는 널리 쓰였다. 특히 무속이나 민속과 관련된 이들에게는 널리 통용되는 말이다. 애살(愛煞)을 쉽게 풀이하면, 다정다감하고  정이 많고, 누군가를 잘 챙기고 아끼는 성향이라 하겠는데, 이런 모습을 보면서 조상들은 ‘애살 떤다’고 했다. 그간의 2인의 춤꾼이 <무동>을 잘 소화해냈지만, 그들에게는 존재하지 않았던 ‘애살’이 정지욱에는 자연스럽게 배어 있었다. 


김조근으로부터 김애미, 박금슬으로부터 김평호 


이번 공연에 오른 국수호의 도반들은 다 대단했다. 그런데 나와 같은 사람을 눈시울을 붉히게 한 두 주인공이 있다. 내게 있어서 예술적인 감동은 무대 위에 ‘존재하는 사람’을 통해서 현재 이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는 사람’을 보는 순간이다. 김애미가 그랬고, 김평호가 그랬다. 김애미에게서 금파 김조균(1940-1998)이 보였다. 1998년 10월 30일, 덕진문화예술회관에서 열린 전라북도무형문화재 공개발표회는 금파의 마지막 무대였다고 한다. 금파의 춤맥이 김무철(아들)과 김애미(딸)에게 올곧게 이어져 있음을 확인하면서, 금파 김조균이란 인물에게 한없는 존경심이 절로 생겨났다. <호적구음살풀이>는 이름처럼 태평소와 구음(판소리)이 만나는 살풀이춤이다. 김애미의 춤은 매우 담담하면서도 당당했다. 요즘 살풀이춤을 보면서 가장 아쉬운 것은 매우 들 떠있는 느낌을 받는 것이다. 김애미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20세의 매력을 하나도 잃지 않은 춤꾼을 21세기에 만난다는 건 얼마나 감격스런 일인가. 


1984년 3월 18일, 문예회관 대극장 (현, 아르코예술극장)에선 박금슬 추모공연이 열렸다. 그 무대에 오른 한 사람이 김평호이다. 41년전 그 무대에 오른 김평호와 지금의 김평호를 생각했다. 정인삼 등과 함께 평생 가슴에 박금슬을 간직했던 그의 40여년을 짐작하니 눈물이 맺히지 않을 수가 없다. 이 날의 무대를 지켜보면서 당시 국수호(무감)와 함께 한 한보성(구성)과 한유성(음악)이 떠올랐다. <박금슬 살풀이춤>이라는 담백함이 생명인 정격(正格)의 춤을 추는 김평호의 모습을 보면서, “지금 저 춤꾼은 저 춤을 추면서 어떤 생각을 할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 땅의 박금슬춤을 올곧게 계승하고 있는 춤꾼이 있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가치로운 일인가. 


<농현>이란 작품을 통해서, 군무의 아름다움을 보여준 국수호디딤무용단의 5인에게 큰 박수를 보낸다. 앞으로 국수호의 ‘무형유산춤’과 ‘명작무’를 홀춤으로 능숙하게 화해낼 수 있는 춤꾼임을 확인한다. 그들은 어쩌면 ‘국수호스타일’을 내면과 외면에서 모두 다 장착하고 있을 것이다. 국수호춤 70년 공연에서 그들의 홀춤을 볼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이 생긴다. 


4. 국수호춤의 사유성 


2025년 9월 27일은 대한민국 춤공연사에서 오래 회자할 날이다. <국수호춤 60년 기념공연 무악 Ⅱ>의 마지막은 <보허자무>라는 큰 타이틀이다. 각각의 레퍼토리마다 춤철학이 확고했고, 또 한반도의 역사와 현실을 인식하면서 그 의미를 떠올리게 하는 춤이었다. 국수호의 <북극성>과 이정윤의 <이른동쪽>은 한국춤의 방향이 사유와 성찰이어야 함을 기품 있게 제시해주었다. 


두 개의 춤에 관해서 춤평론가 권경하가 쓴 리뷰를 그대로 옮기면 충분하다. 그 일부만을 소개하면 “들고나온 저 긴 대나무 작대기는 텅 빈 것(emptiness)이다. 직선과 곡선과 껍데기와 빈 것으로 구성된 것. 소우주다” “국수호는 우주이 방랑자가 된 것일까. 아니 이미 자신이 우주의 방랑자임을 깨달은 것일까”라는 질문을 통해서, 이 춤이 갖는 철학적이고 미학적인 혹은 우주적이면서도 인간적인 접근에 크게 주목하고 있다. “허공을 걷는 자가 지구별에 내려 태양의 빛을 맞고 생명이 약동하는 모습”을 그려낸 것이 이정윤의 <이른 동쪽>인데, “인간이 우주의 에너지가 집결된 우주임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했으니, 이외에도 또 무슨 중언부언이 필요하겠는데, “이정윤의 집중과 응축된 힘은 압권”이라고도 했다. 


국수호의 하늘과 별, 이정윤의 바람과 시 


난 두 춤을 어떻게 보았나? 나는 윤동주의 시집이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떠올랐다. 국수호의 <북극성>이 천상(天上)의 하늘과 별이라면, 이정윤의 <이른 동쪽>은 지상(地上)의 바람과 시였다. 국수호는 우주를 허(虛)였면, 이정윤은 소우주(인간)의 공(空)이었다. 국수호춤 이후로 이어지는 춤이 매우 철학적이고 성찰적이면서, 그 밑에 깔린 ‘원초적 아픔’이 전달되었다. 국수호가 들고 있는 막대기 봉(棒)은 여러 뜻을 지니며 변주되었다. 


본원적 아픔, 본원적 구원, 속지적 아픔, 속인적 아픔


<보허자무>에서 만난 춤은 모두 사유와 성찰의 의미가 있었지만, 그 저변에 깔려있는 건 ‘어쩔 수 없는 존재적 아픔’이었다. 이정윤의 춤에선 ‘본원적 아픔’이 느껴졌다. 이동하의 춤에선 ‘속지적 아픔’, 최태헌의 춤에선 ‘속인적 아픔’이 있었다. 이미숙의 <흰 ‘백’>에선 이런 모든 아픔을 ‘본원적 구원’으로 구원하는 위대한 모성(母性)이 전달되었다. 


<이른 동쪽>의 이정윤에게선 전지적(全知的) 아픔이 느껴졌다. 사물과 현상의 모든 걸 다 아는” 것이 오히려 동양적인 원죄(原罪)와 같다는 느낌 마저 들었다. 이후의 춤은 자연스럽게 한아


이동하의 <하슬라의 정백>은 속지적(屬地的) 아픔이었다. 척박한 땅을 일궈내야 하는 숙명같은 것이 전달되었다. 몸이 곧 마음일진대, 그가 여기저기 부딪히는 모습은 그대 부대기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이동하의 춤은 어떤 춤보다 강인했다. 몸과 마음을 세상에 부딪히는 과정은 어찌 보면 자신의 내부를 단단히 제련(製鍊)가는 것처럼 보여졌다. 강원도 지방의 토속민요 ‘아라리’는 이제 더 이상 서글픈 변방의 노래가 아니었다. 이동하는 몸짓을 통해서 그걸 처절하면서도 강인하게 보여주었다. 


윤이상의 음악 ‘가곡’으로 만들어진 <신무 Ⅲ>은 최태헌을 통해서 새롭게 빛났다. 과거 백향주를 통해서도 많은 인상을 남긴 춤이었다. 백향주의 춤이 디아스포라의 느낌을 강하게 품었다면, 이번 최태헌은 어쩌면 윤이상 자신인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들게 했다. 그의 춤에는 한국인이라는 속인적 아픔이 그대로 배어있었다. 그 춤의 공간은 베를린 장벽일 수도 있었고, 휴전선의 어디쯤일 수도 있었다. 어쩌면 이쪽도 저쪽도 선택하고 싶지 않은 사람의 절규와도 같았다. 거기엔 속인적(屬人的) 아픔이 있었다. 

 

문학작품을 떠올리게 한 세 편의 수작 

 

이 춤을 보면 내 시각이 좀 더 주관적임을 말할 수 있다면, 춤을 보는 순간 그것이 그대로 우리 시대의 문학작품이 겹쳐졌다. 그러면서 그 문학작품 속의 인물이 21세기에 새로운 모습으로 거듭나고 있다는 걸 동시에 경험했다. <하슬라 정백>은 문순태의 연작소설 <징소리>이 떠올랐다. 수몰지구로서 고향을 떠나야 했던 허칠복이 겹쳐졌다. 그는 자신의 땅을 잃고 미치광이처럼 되어 버렸지만 <하슬라 정백>에는 그와 다르게 세상을 향한 강한 외침이 느껴졌다. <흰 ‘백’>에선 토지의 서희가 연상되었다. 그러나 젊은 시절의 서희처럼 도도하기 보다는, 그런 세상을 지난 여성의 너그러움에 고개 숙여졌다. <신무 Ⅲ>는 최인훈의 소설 <광장>의 이명준이었다. 그 시절의 그는 어디론가 사라졌지만, 그의 혼백(魂魄)은 더 이상 구천을 떠도는 형상은 아니었다. 


국수호 춤, ‘결기’와 ‘성정’으로 만나 일여(一如)를 향하다! 

 

누가 국수호춤을 가장 잘 바라보는가? 누가 국수호춤을 가장 깊게 아는가? 마음 한편에 늘 이런 생각이 있다. 국수호 춤 50년 당시, 여러 시각 중에서도 박정기의 글에 눈이 머문다. 박정기는 국수호의 춤은 “단군의 홍익인간(弘益人間)으로 시작해서 고구려의 조의선인, 백제의 문무도, 신라의 화랑도 정신을 계승하고, 고려의 불교사상, 조선의 유교 사상, 조선 후기 동학(東學)의 시천주(侍天主), 인내천(人乃天) 사상을 이어온 우리의 고유의 몸짓과 율동”이라고 했다. 그간 국수호는 고구려, 백제, 신라뿐 아니라 가야까지 포함해서 문헌과 도상을 추척해서 우리의 고대춤의 존재적 가치를 발굴해냈다. 


이번 공연에서 우리는 ‘국수호와 박범훈’은 두명의 거장을 만났다. 그들은 진정한 도반이요.  우리시대 진정한 지음 자체였다. 둘의 만남에서 대해선 이 글의 주제와는 거리가 있음으로 크게 다루지 않는 걸 이해하리라고 본다. 


지난 국수호츰 50년 공연이 ‘동행’의 의미였다면, 국수호춤 60년은 수행(修行)이라는 의미로 다가온다. 이제 무대 위에는 재(才)가 점차 줄어들고, 덕(德)이 채워지고 있음을 확인한다. 박정기가 간파한 “일만여 년 전부터 이어온 기(氣)와 정(精), 신(神)과 혼(魂)이 하나가 된 춤꾼 국수호”에 공감한다. 


한국춤에서 신(神)과 혼(魂)을 다루는 성과는 많았다. 반면 기(氣)와 정(精)의 시각으로 접근하면 딱히 떠오르는 작품이나 안무는 많지 않다. 국수호의 춤 50년은 한국춤에서의 ‘기와 정’을 감지할 수 있는 값진 시간이었다. 그런데 박정기는 정(精)이라 했던 걸, 내 시각으로 정(情)이라고 하는 게 어떻게 조심스레 의문을 품는다. ‘느끼어 일어나는 마음의 행동’이 뜻 정(情)인데 국수호의 무악Ⅱ가 딱 그러했다. 


앞의 거대한 담론적 개념을 이젠 축소해 국수호춤에 구체적으로 적용하면, “국수호춤의 겉은 ‘결기’요, 국수호춤의 속은 ‘성정(性情)’이다” 국수호춤은 ‘몸의 기록, 시간의 미학’이라는 전제하에 과거에 구분했던 여럿을 이제 “수행(修行)을 통해서 일여(一如)”하고 있다는 가설(假說)을 세워본다. 이는 국수호춤 70년에 가서는 확실하게 풀릴 것 같다. 국수호는 한국춤에서 우리의 사상과 철학을 연결해서 논할 수 있는 매우 드문 인물이다. 이번 춤판은 그 사실을 역력히 증명해 주었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 공연예술창작산실 비평지원 안내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로고

웹진 댄스포스트코리아는 2025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공연예술창작주체지원사업'으로부터 제작비 일부를 지원받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