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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래 양반들의 풍류(風流)가 배인 김온경 일가의 춤



 부산민속예술보존협회의 김온경 이사장은 부산 출신인 필자에게 스승과 진배없는 분이다. 춤의 본(本)을 겨우 깨우치던 고등학교 시절부터 좌충우돌하며 춤연구자로 성장하기까지 선생을 이런 저런 자리에서 마주했고 그때마다 적지도, 과하지도 않게 격려를 해주셨다. 이런 분이 “마지막 무대가 될 것” 같다며 초청하시니 먹먹함 속에 ‘내일을 여는 춤: 김온경, 윤여숙’(2013년 12월 11일, 포스트극장)의 무대를 찾게 되었다.


 올해로 76세인 김온경은 그 연배의 여느 전통무용가들과는 달리 춤을 출 때 허리를 곧추세워 꼿꼿한 자세를 유지하며, 춤사위마다 문기(文氣)를 내뿜는다. 그도 그럴 것이 김온경의 춤이력은 참으로 특이하다. 김온경의 부친 김동민은 부산 지역의 유지였으며 이름 높은 한량이었다. 그는 한국전쟁을 전후하여 부산에 피난 온 국악과 춤의 명인들을 집으로 초청하여 밤새도록 공연 한판을 벌리는 것이 예사였다. 강태홍과 박성옥 등 명인들이 소리하고, 연주하고, 춤추며 신명나게 어울리는 판을 보고 자랐으니 김온경은 자연스레 전통예술의 풍류에 심취했고, 명인들의 소리와 춤만 듣고 보았으니 전통예술에 대한 심미안 또한 높아졌다. 가난한 명인들을 위해 김동민은 민속무용연구소까지 개설했고, 여기서 김온경은 아버지는 물론 여러 명인들로부터 음악과 춤을 차곡차곡 배워나갔다. 아버지의 선비 기질을 물려받은 탓인지 김온경은 춤의 길로 선뜻 들어서지 않았고 국문과로 진학했다. 국문과를 졸업하고 한동안 평범한 주부로, 또 지방의 대학교수로 평범하게 살던 김온경은 자신이 몸으로 익혔던 부산과 경남지역의 민속춤을 체계적으로 연구하겠다는 결심으로 뒤늦은 나이에 서울과 부산을 오가며 연배가 한창 어린 무용과 학생들과 어울려 대학원을 다니기도 했다. 이 결실로 1982년에 첫 저서 『한국민속무용연구』을 출간했으며, 이후 김온경은 민속춤 학자로 이름 높았다. 대학교수직에서 은퇴할 때까지 그는 부산과 경남 일대의 민속춤을 발굴하고 연구하는데 헌신했으며, 부산 지역의 민속춤을 토대로 한 한국창작춤 레퍼토리를 개발하는데도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한때 김온경은 여자가 문둥이춤을 춘다고 해서 유명했다. 부산지역의 <동래야류>, <수영야류>와 같은 민속가면극은 지역의 남성 유지들이 주도했으며, 이들 보존회는 여성의 입회조차도 허락하지 않았던 곳이다. 그런데 김온경은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동래야류>의 핵심 역할인 문둥이춤을 배웠고, 그의 집념에 보존회 회원들은 마침내 최초의 여성회원으로 받아들였다. 문둥이춤의 최고 경지에 이르렀으나 김온경은 예능보유자가 되지 못했다. 오랫동안 <동래야류>를 놀아 온 연희자들이 전통에 어긋난다고 고집하니 그 벽까지는 차마 넘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자신이 연구하여 가치를 발하게 된 <동래학춤>, 동래 기생들이 추던 <입춤>과 <동래고무>, 그리고 어린 시절에 가야금의 명인 강태홍으로부터 배운 <산조춤>을 발굴 및 복원하여 이들 종목을 자신의 류(流)로 만들어 전승하게 되었다. 김온경류 춤의 최고 전승자는 그의 딸 윤여숙과 조카 김율희이다. 김온경은 자신의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윤여숙과 김율희를 혹독하게 훈련시켰다. 그들이 춤의 의미를 알고 제대로 추도록 질책을 아끼지 않는 스승으로서 지도했다가, 그들이 춤의 끈을 놓지 않도록 세심한 선배로서 이끌기도 하였다. 이렇듯 김온경에게 장고의 세월이 있었기에 김동민 이하로 3대째로 춤의 맥이 전승될 수 있었고, 동래춤으로 일가(一家)를 이룰 수 있었던 것이다.


 

 ‘내일을 여는 춤’에서 김온경 일가가 보여준 춤은 <동래 입춤>, <동래야류>의 문둥이춤, <동래학춤>, <강태홍류 산조춤>이다. 이중 주목할 춤은 입춤, 학춤, 산조춤이다. 윤여숙이 춘 입춤은 동래기생들이 기방에서 추었던 것으로 다소곳이 앉은 자세로 시작해서 살포시 일어나서 웃음을 한껏 머금고 추다가, 끈으로 치마의 허리춤을 묶어 올리고 흥겹게 내달리는 소고춤으로 끝내는 것이 특징이다. 이렇게 입춤이나 살풀이춤과 소고춤을 엮는 기방춤은 광주 지역의 안채봉 명인이 유명했으나 그녀가 작고한 이래로 보기 어렵게 된 춤이다. 김온경 일가에서 류는 다르나 이 춤을 제대로 전승하고 있으니 앞으로 더 많은 무대에서 관객들과 만나게 되길 바란다.


 산조춤의 첫 머리에서 김온경은 미인도의 한 장면을 연출하고 있었다. 얼굴을 찌푸리고 팔을 비틀며 갖은 몸짓과 표정으로 문둥이를 흉내냈던 그 분이 맞나 싶을 정도로 곱게 화장을 하고 자그마한 부채를 손에 쥔 채 우아하게 앉아 있으니 분위기가 사뭇 달라졌다. 강태홍의 산조춤이니 반주음악은 당연히 강태홍류 가야금 산조이다. 튕기고 뜯는 가야금의 선율은 남성적이고 우렁차나 춤사위는 그 반대로 여성적이며 단출하다. 이 춤에서 김온경의 선비적 품성이 고스란히 묻어나는데, 춤 전체에 풍류를 머금되 춤사위는 담박하게 하는 것이 특징이었다.


 부산춤의 특성인 덧배기와 배김새를 절묘하게 품고 있는 것이 동래학춤이다. 덧배기나 배김새는 어깨로부터 위로 뻗었으나 곡선을 이룬 팔, 툭 떨어지는 손목, 그리고 뒤로 쭉 뻗는 다리의 동세(動勢)가 워낙 투박하고 무거워 여간해서는 여성 무용수들이 소화하기 어렵다. 동래학춤이 한량끼가 넘치는 남성무용가들의 전유물처럼 된 것도 이런 이유에서이다. 근래에 와서는 무용과 출신의 여성무용수들이 군무로 추면서 본래의 의미와 감각을 상실했다는 비판의 소리가 간혹 들려왔다. 그런데 이날 김율희는 동래학춤의 본맛이 무엇인지를 일깨워주었다. 아직 30대인 그녀가 덧배기와 배김새를 제대로 가눌 줄 아는 것도 놀라웠지만, 무엇보다도 사촌언니와 고모에 뒤지지 않는 위풍당당한 춤태로 무대를 장악하며 선율에 자연스럽게 몸을 맡기고 노는 모습에 관객들은 열광했다. 김율희는 고모의 책상물림으로 신진 춤연구자로 진입하고 있다. 그녀가 김온경이 못다 이룬 민속춤 연구를 계속해 나간다면 실기분야 못지않게 연구분야에서도 촉망받을 것으로 기대된다.


 ‘내일을 여는 춤’은 (사)창무예술원(이사장: 김매자)의 기획공연으로 1998년에 시작하여 올해로 13번째를 맞았다. 10년이 넘은 햇수만큼이나 이 공연의 인적, 내용적 폭은 매우 풍성해졌다. 이미 12월 2일에 개막한 첫무대는 “역사적인 무대였다”는 호평이 있다. 그날 무대에서 한국창작춤의 선구자들인 국수호, 배정혜, 김매자가 자신들의 대표 레퍼토리를 주고받으며 ‘화합의 무대’를 꾸몄고, 이 모습이 무용인 관객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기 때문이다. ‘내일을 여는 춤’은 전통춤 혹은 신무용류의 명작명무를 중심으로 열리는 공연이지만 공연의 목적은 “한국창작춤의 본태가 되는 전통춤의 본질을 탐색하고 창작춤의 방향을 제시”하는데 있다. 따라서 이 공연에는 한국창작춤으로 한가락 한다는 전국의 무용가들이 총 출동한다. 연배 순으로 참여무용가들의 이름 몇 자를 나열해보면 채상묵, 박재희, 채향순, 최은희, 강미리, 전은자, 이미영, 남수정, 최지연 등이고, 공연은 매일 무대의 주인공과 레퍼토리들이 바뀌면서 12월 21일까지 계속된다.



글_ 편집주간 최해리(무용인류학자, 한국춤문화자료원 공동대표)

사진_이현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