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비평
Vol.123-1 (2025.11.5.) 발행
글_ 손현철(前 KBS 교양다큐 프로듀서, 시인)
사진_ BAKI

‘몸으로 그림 그리기’, 몸짓의 흔적, 궤적을 종이, 천, 영사 막 위에 표현하는 방식은 동서양을 걸쳐 많은 예술가가 시도했다. 유튜브 시대에는 미국 뉴올리언스에서 활동하는 예술가 헤더 한센(Heather Hansen)이 유명하다.
헤더는 자기 몸의 몇 배나 되는 커다란 종이 위에 엎드려 눕는다. 두 손에 목탄을 쥐고 날갯짓하며 인간 컴퍼스처럼 반원을 반복해서 그린다. 반경을 줄이며 점점 작은 원을 그리더니, 자세를 바꿔 무릎을 꿇고 몸 뒷공간에 좀 더 작은 두 팔의 궤적을 남긴다. 헤더는 처음에 누워서 그린 큰 원과 앉아서 그린 작은 원 사이를, 마룻바닥 걸레질하듯 몸을 앞으로 깊게 숙여 앞뒤로 오가며 두 원을 연결한다. 작품 제작 과정을 직(直) 부감 촬영한 영상을 보면, 작품의 제목 <덜어낸 몸짓(Emptied Gestures)>이 이해가 간다. 헤더의 몸이 빠져나간 종이 위에는 그 몸의 흔적이 뚜렷하고 아름답게 남는다.
미술의 신체 예술 (kinetic art) 작품이 다양한 매체 위에 이뤄진다면 무용은 어떠한가?
무용가는 몸으로 공간에 그림을 그리는 화가다. 화가가 캔버스 위에 붓에 물감을 묻혀 그림을 그린다면, 무용가는 자기 몸을 붓 삼아, 다양한 움직임을 물감처럼 사용해 공간에 몸의 궤적을 그린다. 안타깝게도 그 찰나의 흔적은 영상으로 기록하지 않는 한, 무용가의 몸과 관객의 기억 안에서만 존재한다. ‘99아트컴퍼니’의 <祭, 타오르는 삶>은 몸으로 그리기, 헤드랜턴 빛, 그리고 생생한 현장 음악을 통해 그 흔적을 의식 (儀式)의 퍼포먼스 만들어낸다.
여성 무용수 두 명이 무대 양편에서 등장해서 왼손을 맞잡고 앉는다. 오른손으로 목탄을 들고, 몸통을 컴퍼스의 중심 바늘 삼아 팔이 닿는 곳까지 검은 흔적을 만든다. 앞서 소개한 헤더 한센의 몸이 하나의 중심에서 궤적을 그린다면, 두 무용수는 서로 밀어내고 당기며 이동하는 이중의 중심을 활용해 다양한 궤적을 그려 나간다. 움직이는 몸의 무릎과 허벅지, 발바닥은 검댕으로 물든다. 곡선과 직선이 조합된 흔적은 때로는 태극 문양으로 때로는 방사성 대칭의 꽃잎처럼 보인다. 몸부림은 목탄의 파도가 되어 종이를 물들인다. 검은 목탄 자국은 몸과 마찰하면서 뭉개지고, 짙고 옅은 부분으로 나누어져 층이 생기며, 농담 濃淡을 가진 수묵화가 된다. 이 그림은 헤더 한센처럼 단순한 신체 움직임의 기록이 아니라, 두 무용수의 몸이 연리지처럼 연결되어 서로 교감하며 쏟아내는 느낌, 정서의 변주곡이다. 안무가 장혜림은 누군가 먼저 시도한 방식을 한 단계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린다.


그리고 두 번째로, 신체 정서의 교감도(圖)를 또 한 단계 고양하는 요소가 합쳐진다. 양손 안에 달걀을 쥔 두 연주자가 등장한다. 한 사람이 가야금 뜯으며, 물집 터지고 딱딱해진 손끝의 굳은살, 닳고 끊어지는 줄에 관해 말한다. 종이 위, 몸의 흔적처럼 연습의 시간이 자기 손과 악기에 남긴 흔적에 관해 읊조린다. 두 무용수는 바닥의 검은 흔적을 밟으며, 가야금 연주에 맞춰 몸의 리듬과 선율을 만들어 나간다. 두 사람이 종이 바닥에서 손을 맞잡고 그리던 2차원의 제약을 벗어던지고, 음악이라는 해방자와 함께 움직임의 자유를 만끽한다. 가야금 줄이 뜯긴 흔적이 소리로 바뀌어 울려 퍼지면서 몸의 흔적과 얽히고설킨다. 몸짓과 손짓이 어우러져 춤과 음의 격렬한 충돌, 절정의 화음을 만들어낸다. 연주자는 가야금을 뜯다가, ‘노동자여. 유언장을 내려놓게’, 구음(口音)을 한다. 두 무용수는 형체가 너무 뭉개진 숯검댕의 만다라 위에 무릎을 꿇고 앉는다. 가야금은 고음으로 쿵쿵대며 울리고, 반복되는 캐논 악곡 형식으로 멜로디를 고조시킨다. 두 사람은 하아, 하아 숨을 내쉬며 양반다리 앉은 자세로 가슴을 치며 전진한다. 몸뚱이에 자신을 태운 재를 묻히며,
무용의 앞 마디가 몸이 내뱉은 목탄의 흔적으로 이뤄졌다면, 뒷마디는 무용수들의 머리에서 나오는 빛으로 그려진다. 두 무용수가 무엇을 찾는 듯 손전등을 켜고 객석을 비추고, 무대 위에 놓인 헤드랜턴을 집어쓴다. 헤드랜턴의 빛줄기로 바닥에 뭉개진 몸의 흔적을 내려다보고 승무 춤사위를 선보인다. 탄광 갱도에서 일하는 광부들의 몸짓, 업무의 미로를 헤쳐 나가는 노동자들의 힘겨운 삶을 상징하는 춤이 어두운 허공을 가로지른다. 가야금 멜로디의 점층 반복하는 곡조에 맞춰 두 무용수는 서로 두 손 번갈아 바꿔가며 잡고 뒤로 당기며 손 휘젓는 2인무를 춘다. 안무가 장혜림은 2차원 몸 움직임의 궤적, 3차원 공간의 현장 음악에 이어 세 번째 요소인 헤드랜턴 빛을 통해 어둠 속의 시간을 채굴한다. 춤추는 두 사람 사이를 두 연주자가 향불, 놋 주발을 들고 천천히 걷는다. 연주용 귀얄로 놋 주발 주둥이를 문대며 은은한 소리를 향불처럼 춤추는 제단에 올린다. 두 무용수는 헤드랜턴을 벗고 향불이 놓인 제사상 앞에 앉는다.


음악은 종이 위에 그려진 몸의 잔향에 호흡과 리듬을 불어넣는 불씨다. 비물질적 에너지인 가야금 소리가 몸의 기억을 불러일으킨다. 무용수는 음파 속에서 종이의 경계를 벗어나, 공간이라는 삼차원의 무대 위로 솟아오른다. 무용수의 머리에서 뻗어 나온 빛줄기는 향로의 불씨처럼, 과거의 흔적과 현재의 움직임을 잇는다.
‘타오르는 삶’은 제목 그대로 삶의 잔해와 흔적을 공양하는 현대적 번제(燔祭; Burnt
Offering) 의식이다. 몸을 태운 흔적인 검은 목탄 자국이 가야금 소리와 빛으로 재생되면서, 무대는 하나의 제단이 되고, 춤은 하늘에 바치는 제의(祭儀)가 된다.
안무가 장혜림과 ‘99아트컴퍼니’는 현대적이고 혁신적인 방식으로 제의로서의 춤을 되살려냈다. 이들이 다음엔 무엇을 보여줄까, 한껏 기대된다.
                    웹진 댄스포스트코리아는 2025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공연예술창작주체지원사업'으로부터 제작비 일부를 지원받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