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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비평

<서울경기춤 100년>, 분명한 성과와 남겨진 과제

공연비평

Vol.123-1 (2025.11.5.) 발행


글_ 윤중강(공연평론가)

사진제공_ 서울경기춤연구회



서울경기춤의 역사는 극장춤의 역사! 낭창낭창홤과 거든가든함에 답이 있다


서울아트센터(종로구 평창문화로 70)는 2023년 5월 개관했다. 서울예술고등학교에 자리한 콘서트홀과 갤러리다. 2025년 10월 26일, <서울경기춤 100년>이 서울아트센터 도암홀에서 열렸다. 


명무전 (1979) vs. 서울경기춤100년 (2025) 


서울예술고등학교에 도착하는 순간, <명무전(名舞展)>이 떠올랐다. 1979년 12월 8일, 서울예술고등학교 강당에서 <명무전>이 열렸다. 무용학자 정병호(1927~2011)가 회장을 맡은 전통무용연구회가 주최한 공연이다. 서울에서 ‘명무전’이란 이름을 공연 타이틀로 내세운 최초의 공연이다. 


당시 <명무전>에 오른 8인은 누구며 무슨 춤을 췄을까. 임준동(서울 출신)의 법고, 이동안(충남 온양)의 태평무, 하보경(경남 밀양)의 북춤, 김숙자(경기 안성)의 도살풀이춤, 이용배(전남 해남)의 구음(口吟)허튼춤, 공옥진(전남 영광)의 허튼춤, 박관용(전남 진도)의 모방구춤이 펼쳐졌고, 이매방(전남 목포)의 승무가 대미를 장식했다. 


판소리명창 안항연(1944-1981)이 찬조 출연했고, 반주는 민속악회 시나위가 맡았다. 여기에 참여한 악사는 기록으로 꼭 남겨야 한다. 이종대, 이철주, 홍옥미, 심상남, 임숙자, 김방현, 김종선, 김재영, 송선원, 김종희, 백정순, 한선화, 김덕수, 김광복, 정회천, 김승희는 국악예술학교 출신이다. 이들은 1970년대부터 춤반주를 했고, 대한민국 국악 연주에서 큰 역할을 한 분이다. 


“1979년에 <명무전>이 있었다면, 2025년엔 <서울경기춤 100년>이 있다!” 이런 비교는 정당하다. 이치에 맞고 올바르다. 최고의 기량을 갖춘 예인이 무대에 올랐다는 점에서 그렇다. 음악 면에서도 그렇다. 유인상 음악감독을 중심으로 함께 한 이들은 훗날 앞의 인물처럼 명인으로 성장할 소지가 다분하다. 


<명무전>과 <서울경기춤 100년>은 둘 다 공연의 가치로서 최고이지만, 접근한 방식이 다르다. 1979년의 <명무전>이 지역 출신의 명무의 특성을 두루 보여주는 무대였다면, 2025년의 무대는 ‘서울경기춤’에 집중했다는 게 다르다. 1979년에는 그게 필요했다. 지나치게 무대화된 춤에 익숙한 이들에게 <명무전>은 전통춤의 지역성을 기반으로 해서, 우리 춤의 여러 모습을 알려주었다. 이 춤들은 마당춤이거나 방안춤이다. 불교의 사찰이나 무속의 굿판과 연관되는 춤이기도 하다. 이런 걸 확실하게 밝히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들의 춤은 태생적으로 극장이란 공간과는 직접 연관은 적다. 그러나 <서울경기춤 100년>의 춤은 다르다. 이 춤들은 모두 ‘극장’을 전제로 해서 성장, 발전한 춤이다.


<서울경기춤 100년>은 대한민국 ‘극장춤’의 역사! 


<서울경기춤 100년>의 뜻있는 무대에 오른 명무는 5인이다. 서영님 한혜경 이화숙 정주미 전은경. 이들의 춤을 보면서, 이들은 물론이요, 이들의 ‘스승’ 또 ‘스승의 스승’이 겹쳤다. 이 공연 주최 측의 중요한 의도다. ‘서울경기춤’의 계보를 살피면서, 서울경기춤의 실체를 보여주는 접근이었다. 


서울아트센터 도암홀 무대에 오른 이들에게 큰 영향을 끼친 스승이 있다. 나는 이들의 스승의 무대를 봐서 알고 있기도 하고, 또한 여러 자료를 통해서 상상해 왔다. 그러면서 굳혀진 생각이 하나가 있다. ‘명무는 공연장소와 함께 기억된다는 사실’이다. <서울경기춤 100년>에 오른 5인의 예인을 서울아트센터 무대와 함께 기억하게 되는 것처럼, 이들의 스승 또 스승의 스승도 어느 특정한 공연장을 통해서 기억하게 된다. 


서울경기춤은 공연장(극장)으로 성장, 발전했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지역 및 지방춤과의 확실한 변별성이다. 1979년의 <명무전>에서 그들이 춘 춤은 특정한 극장공간에서 성장한 춤이 아니다. 반면 2025년의 <서울경기춤 100년>에서 본 춤은 서울지역의 특정 공간과 매우 밀접하다. 따라서 서울경기춤을 연구한다는 건 서울 중심의 극장공연사를 모르고는 불가하다. 서울경기춤과 그 춤이 소통하면서 향유되었던 극장을 알아야 한다. 그래야만 서울경기춤의 성장과 발전이 분명해지면서, 서울경기춤의 성격이 정확히 자리매김할 수 있다.




서울지역의 명무와 극장: 부민관-시공관-국립극장-공간사랑 


<서울경기춤 100년> 무대에 오른 예인의 스승, 스승의 스승은 서울의 어느 극장을 통해서 자신의 춤을 알렸을까? 한성준과 한영숙은 부민관(태평로), 김문숙과 은방초는 시공관(명동), 강선영은 국립극장(장충동), 이동안은 공간사랑(원서동)과 밀접한 인물이다. 


김문숙과 은방초의 시공관 (명동) 


‘서영님 춤’에 크게 영향을 미친 김문숙과 은방초가 공연한 곳이 시공관이다. 현재 명동예술극장이고, 이 곳은 시공관과 함께 국립극장이란 명칭으로 불린 곳이기도 하다. 훗날 장충동에 국립극장에 세워졌기에, 이를 구별하기 위해 ‘명동국립극장’ 과 ‘장충동국립극장’이란 명칭으로 구분했던 시절도 있다. 1958년 시공관(명동 국립극장에서 김문숙고전무용발표회가 열렸다. (1958.9.1.-2.) 1966년 당시 덕성여고 무용교사이자 서라벌예대 강사였던 은방초는 <양산도> <야삼경>을 공연한 곳도 여기였다(1966.3.19.-20.). 


강선영과 국립극장 (장충동) 


‘이화숙 춤’의 스승인 강선영은 여러 무대를 누비었다. 거슬러 올라가면 부민관 무대이기도 하지만, 강선영의 존재감을 크게 알린 곳은 국립극장(장충동)이다. 강선영 안무의 대표작 중 하나인 <원효대사>(1976)가 국립극장에 열렸다(1976.6.24.-27.). 당시 강선영은 <원효대사>가 ‘내가 맡은 작품 중 제일 대작’이며, ‘자신의 예술인생을 판가름할 결정적인 작품’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그 외에도 강선영의 많은 작품과 의미 있는 공연이 국립극장에서 펼쳐졌으며, 무엇보다도 스승 강선영과 제자 이화숙이 국립극장을 통해서 사제의 연은 맺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한성준과 현영숙의 부민관 (태평로) 


‘전은경 춤’의 스승은 정재만이고, 정재만의 스승은 한영숙이다. 한영숙은 한성준의 춤을 이어받았다. 한성준과 한영숙이 공연했던 곳이 부민관(현, 서울시의회)이다. 부민관은 1935년 12월에 개관했다. 그 이전에도 극장은 있었고, 거기서 춤이 공연되었다. 


서울이라는 도시는 부민관이 생기면서, 본격적인 극장춤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그 이전의 춤은 ‘다른 공간에서 추었던 춤을 극장으로 옮겨온 형태’였지만, 한성준은 철저하게 극장이라는 공간을 매개로 해서 소통하는 춤을 만들었기에 그렇다. 조선음악무용연구회가 발기(1937.12.28. 종로 2가 천향원) 이후, 한성준의 춤은 부민관을 통해서 가치를 인정받았다. 1938년 5월의 부민관의 춤이 이강선, 장홍심의 주역이었다면, 1940년 2월 27일, 일본(도쿄) 공연을 앞둔 무대에서의 태평무는 한영숙과 강선영의 2인무였다.


‘서울경기춤’이란 무엇일까. 그 개념과 범주는 보는 시각에 따라서 다를 수 있다. 나는, ‘서울경기춤’은 ‘극장춤’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생각한다. ‘서울경기춤은 도시라는 공간 속에서 극장을 매개로 해서 성장한 춤’이다. ‘서울경기춤 100년’이란 명칭이 타당할 수 있는 건, 서울의 극장춤의 역사가 100년이란 말과도 통한다. 


한성준 (1874-1941)은 충청도 출신이다. 그러나 그는 일찍 서울에 왔고, 서울에 원각사(현, 새문안교회 자리)가 생길 때부터 공연에 가담했다. 1930년대 초 그는 춤에 매우 적극적이었다. 고수라는 입지를 발판으로 해서, 춤을 만들어 갔다. 소리에서 춤을 찾고, 놀이에서 춤을 찾았다. 더 나아가서 조선의 모든 직업은 그에 부합하는 춤이 있다고 생각했다. 이런 생각에서 구체화하여서 꽃을 피운 곳이 조선음악무용연구회(경운동)이다. 이렇게 갈고 닦는 춤은 ‘부민관’이라는 극장을 통해서 빛을 발했다. 한성준, 한영숙 계보를 잇는 춤의 역사적 맥락을 살피는 일은 부민관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이동안과 공간사랑 (원서동)


‘정주미 춤’의 스승은 이동안이다. 이동안이 서울에 진출해서 처음 공연했던 곳은 광무대(동대문)이다. 그 시절의 원각사는 일종의 왕립극장이요, 광무대는 철저한 민간극장이다. 따라서 거기서 올려진 음악과 춤의 성격은 다르다. 광무대는 놀이적 성격이 강하다. 광무대의 춤이란 건 곧 놀이 속 춤이라고 해도 크게 다르지 않다. 원각사는 궁중춤의 계보를 잇는 것이고, 광무대는 민간의 공연물이었다. 이동안은 멀리 보면 광무대와 연관이 있지만, 광무대는 딱히 춤의 무대는 아니었다. 여러 기예가 출중했던 그가 출연했던 건 사실이겠으나, 그가 거기서 ‘춤’이라는 종목에 해당하는 걸 전문적으로 보여준 건 아니다. 


이동안을 ‘춤의 명인’으로 예우하고, 그의 다양한 춤을 볼 수 있었던 공간은 ‘공간사랑’(원서동)이다. 이동안의 진쇠춤, 검무, 태평무를 제대로 공연한 곳이 공간사랑이다(1982.6.4.-5.). 김숙자 계열의 경기도 지역의 ‘무속춤’, 김석출 계열의 동해안 무속 의식과 거기에 동반하는 춤의 형태, 이동안 계열의 경기도 재인청 중심의 ‘재인춤’을 존중하면서 올곧게 선보인 곳은 공간사랑(강준혁 기획)이다. 공간사랑에서의 이러한 시도를 이어받아서, 무속 혹은 무속춤 관련 공연이 많았던 공간이 아르코예술극장 (당시 문예회관) 소극장이기도 하다.


 


서울경기춤을 활성화 시킨 그 많은 무용연구소


‘한혜경의 춤“의 스승은 오천향이다. 아쉽게도 오천향의 춤을 직접 본 일이 없고, 그의 공연기록을 아직 찾지내지 못했다. 그러나 오천향과 관련한 다른 기록이 보인다. 1968년 4월, 서울시교육위원회는 시내 사설강습소 폐쇄 조치했다. 안타깝게도 그 중 ’오천향 고전무용연구소‘가 있다. 내가 이 기록을 찾아내서 밝히는 걸 오해하지 말아야 한다. ’사설강습소에 관한 종합감사‘에서 ’시설의 미비‘로 폐쇄가 된 거다. 실제 학원에서의 교육 내용과는 무관하다. 이때 함께 폐쇄된 학원에는 ’박성옥 민속무용연구소‘도 있다. 1956년에도 비슷한 조치가 있었다. 당시 무허가 학원이라는 이유로 ’지영희고전무용연구소‘도 있고, ’김백초무용소연구소‘도 타격을 입었다. 


지영희, 김백초, 박성옥, 오천향은 한국무용사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이다. 서울경기춤의 역사로 볼 땐, 더욱 중요한 인물이다. 이들은 이러한 사설강습소(무용학원)은 통해서 ’서울경기춤‘ 실체를 이어가고, 그것을 극장 공간을 통해서 성장시켜서 널리 알린 주역이다. 


’서울경기춤은 극장공간에서 향유된 춤‘이다. 이건 아주 명백한 사실이다. 지역 중심으로 성장한 방안춤이나 마당춤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또 불교, 무속 등과 연관된 의식에 수반되는 춤과도 다르다. ’서울경기춤‘은 이런 불교와 무속에서 가져와서 그걸 ’극장춤‘으로 승화(昇華)한 춤이다. 


”1960년대엔 서울에 무용학원이 90개소였다“ 서울시 무형유산 ’한량무‘ 보유자 조흥동 명무의 얘기를 주목해야 한다. 지금의 강북에 해당하는 성북동에서 신촌까지의 서울 전역의 무용연구소를 살피는 건 서울경기춤의 또 다른 실체를 확인하는데 중요한 단서(端緖)가 된다. 내가 이 글을 쓰는 요지가 거기에 있다. ”서울경기춤은 극장의 씨줄이 되고 무용학원이 날줄이 되어서, 극장과 학원의 교직(交織)을 통해서 형성 발전되고, 향유 유통되었다“ 

 

<서울경기춤 100년>, 여기서 ‘명작무’와 ’무형유산춤‘을 만났다


<서울경기춤 100년>의 1부는 법고창신(法古創新), 2부는 명불허전(名不虛傳)이라는 부제를 붙일 만하다. 1부는 다섯 예인이 자신의 춤에 영향을 준 스승의 춤을 본보기로 삼아서 ’옛것을 법으로 삼아서,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춤으로서 가치가 있다. 2부는 스승의 춤의 특장(特長)을 유감없이 보여주면서 명성이란 것이 결코 헛된 게 아님을 증명했다.


이렇게 훌륭한 춤 열 편을 보면서, 한편으로는 뿌듯했지만, 한편은 씁쓸했다. 왜냐? 이런 춤에 관한 사회적 위상으로 인해서 그렇다. 예술의 최종적인 지향점은 물론 아니겠으나, 왜 이런 춤이 국가 무형유산 또는 서울시 무형유산으로 자랑스럽게 등재되어서 더 좋은 상황 속에서 전승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전은경과 정주미의 춤은 참 좋았다. 그런데 이들보다 연배가 위인 이화숙, 한혜경, 서영님의 춤을 통한 감동은 매우 컸다. 이 공연을 본 이들이라면 이 춤 중엔 대한무용협회가 지정하는 <명작무>의 레벨임을 확인했을 것이다. 또 국가와 시도에서 지정하는 무형유산과 비교할 때, 결코 손색이 없음을 알았을 거다. 지금까지 이미 지정된 춤과는 또 다른 특성이 분명했다. 예술적인 면에서도 비교우위(比較優位, comparative advantage)를 논할 수 있는 측면이 확실하다는 걸 확인했다. 서영님, 이화숙, 한혜경의 춤에서 확인했다. 


‘정의 춤’ 전은경 & ‘헌의 춤’ 정주미 


이 글은 독자가 느끼듯이, 무대 위의 다섯 예인의 춤에 대한 가치와 스승의 춤맥을 지켜온 지난 세월에 대한 한없는 존경심을 전제로 한다. 이제부터 다소 평론(評論)의 시각으로 접근하겠다. 그런 이유는 무엇일까. 이 공연의 제목은 <서울경기춤 100년>이다. 이런 제목 아래, 다섯 예인이 춘 열 편의 춤이 얼마만큼 ‘서울경기춤’에 근접하고, 또한 춤을 반주하는 음악이 얼마만큼 ‘서울경기음악’과 상통하느냐의 시각이 깔려 있다. 

 

전은경은 정(情)의 춤이다. 뜻 정(情)이다. 


<살풀이, 情>과 <한영숙제 정재만류 태평무>를 선보였다. 전은경의 춤은 ‘선(善)한 에너지’ 그 자체였다. 그의 춤에는 스승을 향한 존경심이 그대로 배어 있었다. 오직 정제만의 춤제(制)를 이어온 사람이었다. 만약 춤에도 춤법(舞法)이라는 말이 존재한다면, 전은경은 스승에게 배운 ‘법대로’ 추는 춤이었다. 성별(性別)이 다른 사제간에서는 스승과 제자의 느낌이 아무래도 동동성에 비해서 약한데, 전은경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정재만 춤의 여성 버전’이라고 해도 좋을까? 특히 ‘태평무’가 좋았다. 


요즘 일부 태평무를 보면, 너무 권위를 내세우는 느낌이 든다. 춤이라는 것이 동작을 통해서 ‘잘 흘러가는 것’이 제일 조건인데, 동작마다의 특성을 강조하니까 제식(制式), 곧 ‘정해진 양식’에만 충실하고, ‘훈련을 통해서 익숙해진 격식과 방식’으로만 추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말을 바꾸면 ‘춤의 생명력’이 덜 느껴지는 춤이라고 할 수 있다. 아울러 개성적인 측면에서도 그렇다. 군인의 제식동작처럼 동작(형태)의 연결이 너무 강하게 보인다고나 할까.



전은경은 달랐다. 일부 태평무를 추는 사람들에게서 느껴지는 과도한 권위적인 측면이 전혀 없었다. 춤의 흐름도 상당히 유연하면서도 품격이 있었다. 이런 게 바로 태평무가 아닐까? 


정주미는 헌(獻)의 춤이다. 바칠 헌(獻)이다.


정주미 춤의 장점은 무엇인가. “춤의 군더더기가 없고 깔끔하다” 이는 이동안 선생이 춤은 자연스러워야 한다는 지론(持論)을 잘 이어간다는 측면에서 매우 긍정적이며 존경스럽다. 그러나 정주미의 춤에는 ‘이동안 선생’ 자체가 보이진 않았다. 성별의 차이일까? 시대의 차이일까? 나이의 차이일까? 이동안 선생의 존경심과 춤의 숭고함은 무척 느껴지지만, 이동안 춤 혹은 서울경기춤‘이라는 측면에서도 좀 더 연구해 볼 게 많다. 


이동안의 춤은 매우 탈속(脫俗)적인 느낌이 강하다. 이건 이동안과 정주미와의 나이의 차이에서 어쩔 수 없는 간극이라고 이해되는 측면이 있다. 어떻게 하면 이동안의 춤과 정주미의 춤이 근접할 수 있을까. 내 생각에는 이동안의 지전춤에서는 지천(종이술)이 그렇게 많지 않았던 것 같다. 이동안의 지전춤에서는 그게 하나의 상징적 무구(舞具)처럼 느껴졌으나, 정주미의 춤에서는 그게 너무도 강한 존재로 보인다. 춤추는 사람의 얼굴도 관객과의 소통에서 매우 중요한데, 춤꾼의 얼굴이 무구에 의해서 가려지는 빈도가 너무 많은 것 같다.



이동안의 춤, 어떻게 볼 것인가 


이동안 춤의 특징은 무엇일까. 나는 아직 한마디로 단언할 수 있다. 이동안의 춤은 ’춤처럼 추지 않는 춤‘이다! 1970년대부터 1995년까지, 이동안 인생의 후반기 25년은 그 때 만났던 제자에 따라서 느끼고 받아들이는 것이 매우 달랐을 수 있다. 그러나 이동안의 모든 시기에서 공통점으로 보이는 특징은 ’춤처럼 추지 않는 춤‘이 이동안 춤이라는 사실이다. 이동안 선생의 말년을 잘 아는 정주미가 그 이전의 선생님의 예술적 행보를 더욱더 파고든다면, 정주미의 이동안 춤도 더욱 깊고 넓어질 것이라고 기대해 본다. 


여기서 질문을 해야 한다. 이동안의 춤은 ’서울경기춤‘인가? 물론 그렇다. 그러나 이것에 대한 존중과는 별도로, 이동안이라는 인물이 해방 이후의 활동에 대해서는 점도 다른 측면으로 살펴야 한다. 이동안의 생애사는 엄밀하게 구분할 필요가 있다. 그의 활동은 춤에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그가 활동했던 지역이 서울과 경기지역이 아니라는 점도 확실히 해두어야 한다. 이건 이동안 선생을 가볍게 보아서가 절대 아니다. 이동안이라는 인물을 정확히 보기 위해서 그렇다. 


오히려 이동안이라는 인물을 춤에 가두는 것이 아니라, 가무악희를 두루 익히 잘 알고 있는 인물로서 접근하자는 의도가 담겨 있다. 서울춤 백년의 역사에서 이동안 선생이 큰 역할을 했던 시기를 정확히 해 둬야 한다. 이동안 선생이 서울에 다시 와서, 무용연구소와 같은 형태로 제자를 양성하기 시작한 건 1973년경이다. 이때부터 여러 제자를 길러냈으나, 그 제자 중에는 춤 쪽에만 전념하는 제자는 현재로선 누구를 손꼽아야 할까. 


1980년대 도제식 ’구전심수‘: 스승 이동안과 제자 김명수 


내가 알고 있는 범위 내에서 1980년대 전후로 이동안의 춤을 잘 잇고자 정진했던 인물로는 김명수를 꼽을 수 있다. 그는 원래 서양무용으로 출발했고, 아방가르드적인 현대 창작춤에 관심이 많았으나, 이동안을 만남으로 해서 전통춤의 깊이를 터득했다. 생전 이동안과 관련한 사진 자료 중에는 김명수가 보이는 사진도 있다. 스승의 춤을 도제식으로 이어가는 모습이 거기에 담겨 있다. 


『이동안 태평무의 연구』(1983)라는 자료를 펴낸 이가 김명수이다. 이를 바탕으로 해서 『조선의 마지막 춤꾼 이동안』(2015)란 책을 펴냈다. ‘재인청 춤의 기억과 김명수식 춤 표기법’이라는 부제가 붙었다. 여기서 ‘김명수식 춤 표기법’이라 함은 장단마다 정간보(장단보), 구음, 서양악보, 춤사위 사진, 춤길 방향, 발디딤, 팔놀림으로 나눠 기록했음을 말한다. 김명수는 스승을 ‘미륵과 같은 존재’라고 얘기했다. 그러면서 스승의 춤에 관한 얘기를 이렇게 정리하고 있다. 


“어항 속의 금붕어가 노닐듯 자연스럽게 춤을 춰야 한다. 발디딤은 구름 위를 걷듯 출렁이면서도 살얼음을 깨트리지 않을 정도로 사뿐사뿐 걸어가며 들숨, 날숨, 호흡을 함께한다. 한국춤은 무릎에서 나온다. 오금을 죽이는 무릎은 몸의 악기이고 호흡이며 춤이 저절로 살아나오는 숨통이다.”


이동안이 직접 추면서 녹음한 KBS FM 음향자료 


이동안의 춤음악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지금도 KBS 음향자료실에 이동안춤반주음악이 있을 것으로 추측된다. 아시안게임(1986)과 서울올림픽(1988) 사이에 녹음된 것으로 기억한다. 이동안 선생님을 직접 모시고, KBS본관 5층 녹음 스튜디오에서 릴 음원으로 제작했다. 


당시 힌신평에 의해서 이 녹음작업이 이루어졌고, 채치성과 임주빈이 프로듀서로 참여했다. 이동안 선생께서 직접 자신의 춤을 추시고, 그것과 함께 녹음된 음악이다. 아쉽게도 KBS FM에서 녹음한 관계로 영상은 없으나, 생전 이동안 선생께서 매우 흡족해 한 음원이다. 이 음원은 한 때 방송을 통해서도 소개된 바 있다.


요즘 이동안류로 칭해지는 춤반주는 과거 춤반주음악을 참고로 할 필요가 있다. 아쉽게도 내 귀에는 과거의 분위기가 크게 느껴지진 않는다. 음악도 시대에 따라 점차 달라지는 것은 자연적이다. 시대가 다르고, 사람도 다르기에 어쩔 수 없다. 


만약 이동안 선생이 살아 계셨다면, 요즘 ‘이동안류’의 춤음악을 듣고 어떤 조언과 충고를 해주실까? 이동안류의 춤과 그 반주음악을 진정 사랑한다면, 주기적으로 과거의 음악과 과거의 춤과 관련한 영상자료나 음향자료를 되돌리면서 살펴보아야 한다. 지금의 춤과 지금의 음악이 이동안 명무가 생존했을 때와 어떻게 같고 어떻게 다른지를 면밀하게 조사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 본질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선생님의 춤은 미륵 같았습니다. 바위같이 튼실하게 무게중심을 잡았지만, 정형화가 되지 않게 자유롭게 췄습니다. 200년 전 우리 춤의 원형을 담고 있어요. 선생님은 조선시대에 태어나 조선시대의 정신을 갖고 돌아가신 분입니다. 100% 만족하지는 못하지만 후배들이 이 무보로 춤을 배우고 이어갔으면 합니다.” (김명수)


‘상의 춤’ 이화숙 & ‘흥의 춤’ 한혜경 


이화숙은 ‘상(像)의 춤’이다. 형상 상(像)이다. 


이화숙이 태평무를 추러 무대에 오르는 순간 깜짝 놀랐다. 너무도 강선영 명무와 흡사했다. 이미 강선영과 이화숙의 모습의 공통분모는 이미 알려진 바이다. 이번의 춤과 관련해서 SNS에서는 무용계의 중진으로서 큰 역할을 하는 두 분의 코멘트를 확인할 수 있었다. 국가무형유산 승무 전승교육사 김묘선(우봉이매방춤보존회 이사장)과 국가무형유산 처용무 전승교육사 인남순(한국전통문화연구원 원장)이다. 그들은 모두 강선영과 이화숙의 공통점을 얘기하고 있었다.



이화숙은 <애상(愛像)>은 그가 국립무용단으로부터 갈고 닦은 예술성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었다. 강선영류 태평무는 더 이상 말할 필요도 없이 강선영 명무가 살아있는 듯한 모습으로 관객에게 감동을 주었다. 현상 상(像)이란 한자에는 ‘가장 바람직한 모습’이란 뜻이 있는데, 화숙 명무가 무대에서 보여준 두 모습이 바로 그러했다. 


한혜경은 ‘흥(興)의 춤’이다. 일 흥(興)이다. 


‘일어난다’는 뜻을 담고 있고, ‘즐거움’을 뜻하는 말이기도 하다. 한혜경은 춤은 딱 그러했다. 한혜경의 스승은 오천향 (본명 오정자)이고, 오천향의 스승은 김취홍이다. 김취홍은 대정권번(大正券番)에서 이름을 날린 기생이다. 『조선미인보감』(1918)에 따르면, 대정권번 초기에는 182명의 기생이 있었는데, 평안도 출신 기생이 가장 많고, 그 외에 서울, 경상도, 전라도 순이라 했다. 평안도 출신의 기생 중에서도 특히 이름을 날린 기생이 김취홍으로 짐작된다. 대정권번의 기예의 근간은 하규일에서 만들어졌고, 김취홍도 그랬을 것으로 짐작이 된다. 그는 소리를 잘하는 기생으로 알려졌고, 또한 장구춤에도 출중했다. ‘조선미인보감’에선 “장구 메고 들락날락, 잡가(雜歌)할 적에 아무라도 입에 침이 다 마르겠네“라고 기록하고 있다. 


김취홍에서 오천향을 거쳐서 한혜경으로 이어지는 장구춤은 ‘신명과 우아함이 교차하는’ 장단이 살아있는 장구춤으로서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 교방춤을 바탕으로 해서 만든 부채입춤인 <흥지무(興之舞)>는 ‘섬세한 발디딤새와 절제된 동작 속에서 은근한 요염함’을 드러내는 춤이라는 것에 동의하게 된다. 한혜경의 춤은 ‘일어나는 흥’ 혹은 ‘일렁이는 흥’이라는 정서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춤이며, 그의 춤을 보면서 스승 오천향과 또 그 스승인 김취홍의 춤이 그러했을 것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20세기 춤유산의 아름다운 표본 이화숙과 서영님


이번 춤판의 다섯 예인 모두 비교 불가능한 저마다의 특징을 보유하고 있다. 명작무라는 시각에서도 그렇고, 국가 혹은 시도 지정 무형유산(춤)과 비교할 때도 월등한 측면과 비교 우위적인 측면이 두드러졌다. 


그런데 나와 같은 시각에서는 특별히 이화숙과 서영님의 춤을 본 감동은 더 컸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첫째는 20세기 춤의 특성을 간직하고 있었다. 그건 아쉽게도 21세기의 춤꾼에게서는 별반 발견되지 못하는 특징이다. 이런 20세기 춤의 확실하게 간직하고 있는 예인은 이화숙과 서영님이다. 21세기 ‘서울경기춤’의 방향성과 관련해서, 이화숙과 서영님의 춤이 얼마나 값진가를 확인한 것이 <서울경기춤 100년>이다. 그런데 두 사람의 스타일은 달랐다. 


이화숙의 스타일은 확실히 ‘국립극장 스타일’이고, 서영님의 스타일은 ‘시공관 스타일’이었다. 이화숙의 춤에서는 강선영의 느낌이 가장 많았지만, 송범의 느낌도 많았다. 더불어서 찾아보면 한영숙의 춤과도 맥이 통했다. 모두 지난 20세기의 춤유산을 이화숙이 잘 보유하고 있다는 말이 된다. 


20세기 춤유산을 가장 많이 간직하고 있는 것은 서영님이라는 것을 부인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화숙의 스타일에서 강선영, 한영숙, 송범이 느껴진다면, 서영님의 스타일에서는 김문숙, 정인방, 은방초가 많이 보였다. 같은 20세기 무용가일지라도 이들의 결은 좀 다르다. 앞의 3인이 당시의 무형유산(무형문화재)의 춤이고 뭔가 제도권의 느낌이 많다면, 뒤의 3인은 이것과는 좀 다른 예술적인 결을 간직하고 있는 춤꾼이다. ‘홀춤이 기본된 예술적 소품’에서 보고 나면 매우 인상적인 느낌이 남는 건 뒤의 3인이 만만치 않다는 게 내 생각이다. 강선영, 한영숙, 송범의 춤맥을 잇고 있는 이들은 참 많은데 반해서, 상대적으로 김문숙, 정인방, 은방초의 춤맥을 잇는 이는 상대적으로 적은데, 서영님이 앞선 세대의 춤의 특성을 이렇게 잘 간직하고 있다는 건 21세기의 춤계로서는 매우 큰 행운이 아닐 수 없다. 


서영님의 춤을 주목해야만 하는 까닭 


서영님은 ‘현(顯)의 춤’이다. 나타날 현(顯)이다. 


서영님의 춤을 보면서 깜짝 놀랐다. 거기서 조용자와 김문숙을 만났다. 지난 20세기에는 ‘예술적 구현(具顯)’이란 말을 즐겨 썼다. 어떤 대상에 대해서 매우 구체적으로 표현을 해서 누구에게나–특정 장르에 대해서 많이 알거나 적게 알거나 상관없이– 감동 또는 감흥을 주는 것을 말하는데, 서양님의 춤이 딱 그러했다. 앞의 장구춤에서는 조용자를 보았고, 구고무에서는 김문숙을 포함해서 그간 구고무를 췄던 여러 춤꾼이 겹쳤다. 


‘터는 장단’을 아시나요? 


서영님의 장구춤을 보면서 감동한 것 중의 하나는, 그의 장구가 요즘 일반적으로 장구를 치는 것과 다르다는 점이다. 매우 아쉽게도 요즘의 장구춤 중에선 ‘춤’이라고 할 수 있어도 ‘장구춤’이라고 부르기 어려운 춤이 꽤 있다. 이건 장구를 다루는 능력이다. 그런데 서영님의 장구는 ‘맺고 푸는’ 교체가 매우 능숙하고 분명했다. 그렇게 분명하기에 ‘서울깍쟁이’라는 말이 있는데, 매우 선명한 서영님의 장구가 그러했다. 국악인들 사이에서는 장단은 턴다‘ 또는 ’털 듯장구를 친다‘는 말이 있다. 이건 어떤 비유가 적당할까. 마치 총채로 벽에 붙은 먼저를 시원하고 깔끔하게 털어내듯이 하는 걸 말한다. 매우 깨끗하고 시원한 느낌을 주는 장단을 말한다. 서양님은 내가 본 몇 안 되는 ’터는 장단‘이 되는 무용가였다. 1950년대와 1960년대에 장구춤을 배운 사람이거나, 그 시절의 장구춤을 아는 사람이라면 무슨 뜻인지 이해가 쉬울 거다. 


서영님의 춤 안에 조용자가 있었다! 


조용자는 누군가. 그에 대해서는 보다 자세히 다뤄야 하나, 여기선 소략할 수밖에 없겠다. 조용자는 1950년대와 1960년대의 춤의 스타였다. 1950년대 미소 냉전체제 하에서, 남쪽의 무용가는 자유 진영에 북쪽의 무용가는 사회주의 국가 진영에서 많은 공연을 하면서, 우리의 전통춤을 알렸다. 1950년대 자유 진영에서는 대만을 비롯한 동남아시아에 춤 공연을 떠났는데, 당시 주역은 김백봉, 조용자, 권여성 등이었다. 그들은 모두 특징이 있고 우열을 가리기 힘들다는 것을 전제로서 얘기한다. 당시 대한뉴스에는 이런 동남아 춤 사절단의 소식을 전하는데, 거기선 ”조용자씨의 장구춤이 특히 박수갈채를 많이 받았습니다“라는 내용이 있다. 비록 아주 짧은 순간이지만, 지금도 대한뉴스에서 조용자의 장구춤을 확인할 수 있다.



1962년, 우리나라 문화공보부에서는 ‘국립극장’의 체제를 갖추기 시작한다. 국립무용단, 국립국극단(현 국립창극단), 국립오페라단의 체제를 가치고, 시공관이 ‘국립극장’이라는 이름으로 출범을 할 때, 춤계를 대표해서 독무를 한 사람도 조용자였고, 레퍼토리는 역시 조용자였다. 조용자의 모습은 1960년대와 1970년대에 만들어진 국악(민요)관련 음반 자켓에도 등장한다. 당시 그가 얼마나 전통춤의 대표격이라는 걸 증명하게 되는데, 그러나 그가 실제 무용가로서 알려진 건 1963년이다  


1963년, 한국과 일본은 서서히 교류를 시작한다. 아직 국교 정상화 이전인데, 여러 전통예술인이 일본에서 공연을 하면서, 거기에 정착도 하게 된다. 당시 한국과 일본의 경제력은 비교도 하기 어려울 만큼 일본이 월등히 앞섰는데, 그런 상태에서 예술가의 일본 진출은 매우 중요한 선택지였다. 이때 무용가 중에서는 강선영이 오사카(大阪)에서 무용연구소를 냈고, 조용자는 동경(東京)에서 무용연구소를 냈다. 그러나 아쉽게도 조용자의 공식적인 활동은 일본 진출 이후에는 자세히 알 수 없어서 아쉽다. 조용자는 개인적인 이력을 떠나서, 한국 전통춤의 한 스타일을 형성한 인물로서 이제 더욱 큰 관심을 가져야 한다. 


1952년 한국전쟁기에 부산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낙동강>(전창근 감독)이란 영화가 있다. 이 영화의 도입부에서 낙동강을 바라면서 춤을 추고 있는 이가 바로 조용자이기도 하다. 전체 작품은 이은상의 원작(시)을 바탕으로 만들어졌고, 이를 바탕으로 양성봉이 극본을 썼다. 이 작품의 배경음악이 윤이상이라는 건 매우 주목할만하다. 영화의 도입부에서 이런 음악을 바탕으로 낙동강을 바라보면서 춤은 추는 이가 조용자이다. 


1960년대는 구고무의 시대


1963년, 전통예술을 하는 국악인과 무용인이 일본에 진출했다. 당시는 한국과 일본은 비교할 수 없을 만큼의 경제력에 차이를 보였다. 예술적인 활동을 원활히 할 수 있는 일본에 진출을 했다. 국악에서는 박귀희와 안비취(안복식)가 대표적이고, 무용에는 강선영과 조용자가 그랬다. 강선영은 오사카(大阪)에 무용연구소를 했고, 조용자는 도쿄(東京)에 냈다. 이들은 일본을 기점으로 활동했다. 이들의 공연에는 공통점이 있었다. 모두 ‘한국춤’이 밑바탕에 깔렸다는 점이다. 박귀희는 가야금병창으로 알려졌지만, 그는 실제 설장구의 명인이기도 했다. 안비취 공연에서도 경기민요를 중심으로 이른바 지금 우리 시각으로 말할 수 있는 ‘서울경기춤’의 모습을 살필 수 있다. 강선영은 무당춤, 조용자는 장구춤으로 인기를 끌었다. 그런데 이런 공연에서 일본 관객들이 좋아하는 건 ‘구고무’였다. 박귀희가 이끄는 공연예술단에서는 강문자의 구고무가 인기를 끌었다. 


실로 오랜만에 구고무를 보았고, 그 감동은 대단했다. 서영님의 구고무는 9개의 북을 다루었으며, 아주 적절하게 중앙에 놓여있는 북위의 목탁과 또 북틀 옆에 있는 바라까지 건드리면서 1960년대의 ‘구고무’의 특성을 유감없이 보여주고 들려주었다.


구고무는 서울의 춤이고, 극장의 춤이다. 이 춤은 1950년대 이후에 정착하기 시작한 서울경기춤의 대표적인 레퍼토리인데, 나는 이 공연을 보면서 ‘구고무’가 서울시 무형유산으로 등재되어서 보다 널리 퍼지길 바라는 마음이 간절해졌다. 1950년대부터 시작해서 1960년대의 시공관 등에서의 춤공연을 본 사람이라면, 이 말에 적극 동의할 것이다.



서울경기춤은 남주북병(南酒北餠)의 ‘빚음’의 미학 


서울경기춤은 어떤 비유가 가능할까. 나는 다른 글에서 전라북도의 춤과 전라남도의 춤을 음식과 비유한 적이 있다. 전북의 춤이 ‘아삭한 절임’이라면, 전남의 춤은 ‘곰삭은 삭힘”이라고 했다. 전라도의 춤을 이렇게 배추 혹은 김치와 비교를 한다면, 서울은 그렇지 않다. 


서울지역의 음식과 관련해서 남주북병(南酒北餠)이란 말이 있다. 이 말은 서울 토박이에게 적용되는 말인데, 서울의 남촌(남산골)에서는 술을 잘 만들고, 북촌에서는 떡을 잘 만든다는 얘기다. 술은 마시고, 떡을 먹는 것이지만, 이것의 공통점이 있다. ’빚음‘이라는 것이다. 술도 잘 빚어야 하고, 떡도 잘 빚어야 한다.


경기춤의 매력과 가치는 이런 ’빚음‘에서 나오는 것이다. 송편과 같은 떡을 빚는 것이나, 누룩을 이용해서 술을 빚는 것을 모두 ’빚다‘라고 한다. 술과 떡의 공통점은 또한 향(香)이다. 거기엔 빚음의 미학이 있다. 앞으로 서울경기춤의 미학은 올바르게 정립해야 한다. 그 한 방법으로서 서울경기지역의 음식과 그 음식에 내재한 ’빚음의 미학‘은 매우 중요하다. 이것은 서울경기춤의 멋과 맛, 이것과 매우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누구의 춤이 서울경기춤인가? 어떠한 춤이 서울경기춤인가? 


이번 <서울경기춤 100년>은 우리에게 알고 있는 것을 확인 시켜줌과 동시에, 새로운 생각의 물꼬를 터 주었다. 서울경기춤은 누구의 어떤 춤일까? 첫째, 한성준에서 한영숙, 강선영으로 이어진 춤은 단연 서울경기춤이다. 둘째, 근대의 시작점에서 서울지역을 중심으로 전승된 춤이 서울경기춤이다. 셋째, 극장공간을 통해서 널리 알려져서 지난 세기 서울 사람이 항유했던 춤이 서울경기춤이다. 이와 같은 세 가지는 불변하는 서울경기춤이란 걸 이번 무대를 통해서 확인했다. 한성준, 한영숙, 강선영뿐 아니라, 김취홍, 이동안, 주만향, 조용자, 김문숙 등과 연결된 춤에서도 서울경기춤의 실체를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여기서 만족할 순 없겠다. 이런 춤을 더욱더 ’서울경기춤‘으로 정립(定立)해서 정립(正立)하는 게 서울경기춤연구회를 비롯해서, 이번 <서울경기춤 100년>에 동참한 모든 이들의 앞으로의 과제다.  


서울경기춤의 음악, 지금과는 달라져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서울경기춤 뿐 아니라, 서울경기춤의 반주음악도 달라질 필요가 있다. 이번에는 전반적으로 반주음악은 무거운 편이었다. 지역적으로 말한다면, 남도 스타일이 느껴졌다. 사실 지금 우리나라 춤의 반주음악 전반적으로 전라도 스타일의 음악이다. 


같은 굿거리라고 하더라도, 서울경기지역의 굿거리가 다르고, 남도의 굿거리가 다르다. 지금 무용 공연에서의 굿거리를 ’경기굿거리‘라고 하기는 어렵다. 오히려 굿거리는 경기지역에서 시작해서 ’경기굿거리‘가 원형이지만, 지금의 무용공연에서는 대부분 ’남도굿거리‘식으로 친다. 


가장 큰 문제는 소리를 길게 끄는 느낌이라는 거다. 남도소리와 서도소리가 다른 경기소리의 특징이 그것이다. 노래도 그렇지 않고, 추임새 또한 그렇지 않다. 예전 서울경기 음악의 추임새는 전라도 판소리의 추임새와 완전히 달랐다. 


경기굿거리와 남도굿거리, 다시 확연히 구별하게 될까 


원래 ‘굿거리’란 경기지역의 장단이 남도로 옮겨간 것이다. 지금의 굿거리는 ‘경기굿거리’라기 보다는 거의 ‘남도굿거리’로 되어 버렸다. 서울경기춤을 추더라도 그 반주는 ‘남도굿거리’ 분위기가 물씬하다. 매우 아쉽다. 현재 굿거리를 통해서 서울경기 지역의 정서가 표현하는 것이 다소 어렵게 된 게 현 실정이다. ‘양산도’로 대표되는 정서는 전라도 또는 경상도 지역에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경기지역 특유의 정서가 듬뿍한 곡조다. 서울경기춤을 생각하고, 제대로 된 서울경기춤의 반주음악을 정립하고자 한다면, 그 출발은 ‘양산도’라는 민요의 정서적 이해가 첫걸음이다. 


서울경기춤과 음악이 특징, 낭창낭창 그리고 거든거든 


서울경기춤과 음악의 특징은 무엇일까. ‘낭창낭창’이다. 이것은 ‘능청능청’한 충청도 정서와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다. 경기민요 중에 ‘는실타령’이 있는데, 이건 충청도적인 느낌이 강하다. 전라도 민요 중에 ‘휘어능청’이 있는데, 이건 전라도와 충청도의 정서가 동시에 느껴진다. 모두 서울경기지방의 노래와 춤의 정서와는 거리가 있다.   


낭창거리다에 해당하는 한자가 ‘褭’. 낭창거릴 뇨(요)인데, 이 글자는 말뱃대끈 뇨(요)라고도 한다. ‘낭창거리다’의 느낌은 무엇일까. 날씬하다는 느낌과 ‘허리가 가는 것과 통한다. 말뱃대끈은 ‘말의 배에 졸라매는 띠’을 말하며, 말 등에 짐을 싣고 그 짐과 배를 얼러서 매는 줄을 말한다. 낭창낭창한 음악과 춤은 바로 이런 분위기이다. 말에 올려진 짐이라거나 배를 탄 사람들이 느끼게 되는 적당한 흔들거림이다. 


우리말에서 ‘낭창낭창’은 ‘가늘고 긴 막대기나 줄 따위가 자꾸 조금 탄력 있게 흔들리는 모양.’으로 풀이한다. 서울경기춤의 특징은 바로 이런 ‘낭창낭창함’이다. 춤의 정서가 이러할진대, 반주음악도 낭창낭창해야 하지 않을까. 


부연 설명을 하면서 강조하건대, 낭창낭창은 ‘서울경기’의 정서이고, 능청능청은 ‘충청’의 정서이다. 탄력으로 말한다면, 서울경기춤이 탄력이 있고, 그에 비해서 충청은 탄력이 적다는 얘기다. 전라는 탄력과는 무관한 또 다른 정서와 매력이 있다. 그건 여기서 짧게 말하면 끌리면서 이어지는 정서다. 춘향가의 한 대목처럼 ‘끌리는 치맛자락’과 같은 느낌이라고 할까. 


서울경기 지역의 춤과 음악은 질질 끌리는 느낌이어선 곤란하다. 거든거든해야 한다. 가볍고 경쾌하고 상큼한 속도감이 느껴져야 한다. 우리말 사전에는 ‘거든거든하다’를 ‘거볍고 간편하거나 손쉽다’라는 뜻으로 풀이하고 있고, 이에서 더 나아가서 ‘여럿이 다 또는 매우 마음이 후련하고 상쾌’한 상태를 의미한다. 서울경기춤과 음악의 매력은 이런 막힘없이 느껴지는 상쾌한 속도감(걸음걸이)에서 나온다. 추임새 또한 남도음악과 서울경기음악은 다르다. 서울경기지역의 추임새는 가볍고 끝을 살짝 올리는 느낌이 살아있다. 서울경기는 뒷박을 가볍고 올리고, 남도는 뒷박을 길게 끌면서 이어진다. 


아쉽게도 이번 공연에서의 성악은 거의 ‘뒷박을 길게 이어가는’ 형태였다. 이건 남도소리의 느낌일 순 있고, 경기소리의 느낌이 아니라는 걸 매우 강조하고 싶다. 남도민요 또는 서도민요에 뿌리를 두고 있다손 치더라도, 서울경기춤에서 부르는 노래는 달라야 한다. 나는 이번 공연을 보면서 소리를 하지 않거나, 경기소리 전공자가 이 노래를 부르면 분위기가 매우 다를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누가 잘 부르고 누구 못 부른다는 이분법으로 오해가 없길 바란다. 서울경기지역의 음악적 특성을 이해하고 부르느냐, 타 지역의 정서로 부르느냐의 차이다. 


서울경기춤이 앞으로 춤동작 면에서 정리해 가고 레퍼토리 면에서도 바르게 정립해가는 과정에 있다면, 춤반주에 있어서의 서울경기음악도 이제 정리하면서 정립해 가야 한다. 그 첫 번째 행보는 모든 음악을 남도식으로 연주하거나 해석하는 관습에서 벗어나는 거다. 음악이 산뜻해야 한다. 낭창낭창하고 거든거든해야 한다. 이게 서울경기음악의 불변의 특징이다. 


서울경기춤 음악, ‘양산도’가 답이다. 


다소 무거워지고, 다소 질질 끌리는 듯 변화된 서울경기춤의 음악은 어떻게 다소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올 수 있을까? 서울경기춤이 바르게 정립되기 위해선, 서울경기음악이 우선 그 분위기를 잘 내주어야 한다. 서울경기지역의 춤과 음악의 기본은 <양산도>이다. 이 장단을 세마치 장단이라고 하는데, 예전에는 이 노래가 유명해서 양산도 장단이라 했다. 북한에서는 ‘양산도 장단’이라고 한다. 민요 ‘양산도’의 가사는 평양지역이다. 하지만 이 노래가 크게 사랑받은 지역은 서울경기지역이었다. 


<아리랑>이 일제강점기의 민족의식과 연결된 노래이고, <창부타령>이 무속(巫俗)에서 나온 노래이고, <노들강변>이 SP음반의 보급과 함께 유행한 신민요라면, <양산도>는 서울경기의 보편적인 대중들에게 더욱더 오래 각인된 근원적인 노래다. 1960년대 서울경기지역의 여인들은 봄놀이 가서 이 노래에 맞춰서 여인네들이 춤을 추었다. 경기민요 ‘양산도’는 이 곡조는 ‘길게 이어지는 장인음(長引音)과 굴곡이 심한 가락을 적절히 대조시켜 흥겹고 씩씩한 느낌을 준다’고 했는데, 이런 정서가 바로 서울경기춤이다. “조선의 ‘양산도’는 듣기만 해도 어깨가 으쓸, 춤이 저절로 나온다”는 말이 전해진다. 


서울경기춤연구회의 김미란, 윤종현 그리고 최해리

 

<서울경기춤 100년>은 서울경기춤연구회가 주최했다. 이번 공연은 단순한 무대 위의 공연을 넘어서, 서울경기춤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화두를 던졌고, 그 확실한 실체를 찾아가는 위대한 행보였다. 예술감독 김미란, 총연출 윤종현이었으며, 리서치(구술채록)는 무용인류학자 최해리가 참여했다. 그 시절 <명무전>을 성사시켰던 전통무용연구회가 정병호를 중심으로 했던 역할을, 지금은 서울경기춤연구회를 중심으로 이들이 나눠서 하고 있었다. 


2025년에 열린 <서울경기춤 100년>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오늘날 무대에서 여러 모습의 춤이 춰지지만, 정작 ‘서울경기춤’에 대한 실체는 아직은 모호하다. 과연 어떤 것이 ‘서울경기춤’일까? 누가 이에 대해서 분명하게 대답할 수 있을까. 앞으로 ‘서울경기춤’은 어떤 모습으로 이어질까? <서울경기춤 100년>은 ‘서울경기춤’이라는 명제 아래, 지난 100년간의 춤의 모습을 살피는데 뜻이 깊다. 이런 공연을 통해서 ‘서울경기춤’의 실체를 확인하고, 이를 바탕으로 서울경기춤은 또 다른 모습으로 성장 발전할 수 있을 것이다. ‘서울경기춤’의 정립을 위해 ‘서울경기춤연구회’가 존재한다는 게 얼마나 고맙고 반가운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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